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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재단의 왜곡날조 역사기록을 고발한다(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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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6-03-03 11:30 조회4,4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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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재단의 왜곡날조 역사기록을 고발한다

 

 

대한민국이 북한 김일성 집단에게 再侵을 당해 그 운명을 다 할 뻔 한 1980 5월의 위기에 처했던 끔찍한 역사의 기록은 350년 전이 아닌 겨우 35년 전의 동시대에 발생했고, 결론은 북한 김일성 집단과 남한의 빨치산 세력이 합작으로 일으킨 대한민국 정부전복 범죄행위였는데, 그 범죄행각을 대한민국 국군에게 뒤집어 씌웠던 처참한 역사다.

 

 

그런 동시대에 발생한 5.18폭동반란의 역사를 대한민국 대법원이 인민재판을 저질러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켜 놓으니, 5.18기념재단과 국가는 그 재판결과에 힘 입어 오늘도 끊임없이 거짓과 왜곡날조의 역사를 합리화 시키려 하고, 더욱 악랄한 범죄행위는 그런 역사를 국내외 청소년들에게 세뇌시키는데 사생결단으로 광분하는 짓이다.

 

필자는 5.18기념재단이 과연 어떻게 35년 전 동시대의 역사를 거짓과 왜곡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비과학적으로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감추고 미화하는지 그들이 스스로 내건 그들만의 역사를,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역사기록과 대조해 봄으로써 5.18세력과 국가가 저지르고 있는 역사왜곡 날조 행위를 고발 한다.

 

 

광주를 일시적으로 해방시켰다고 자랑하는 5.18기념재단의 1980 517일부터 27일까지 10일 간의 역사기록을 요약하여 나열하고 비교해 보겠다.

 

1. 1980 517

5.18기념재단: 5 13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거리시위를 시작했다. 5 15일 서울역 앞 집회는 그 정점을 이뤘고, 그날 밤 신현확 국무총리는 시위를 그만두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에 반발한 시위대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고,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 측에 ‘19일까지 시국수습대책에 대한 답변을 하라’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5 17 24시를 기해 전국 계엄령 확대를 시행했다.


임낙평,1988
: 17일 오전, 대학의 캠퍼스는 연3일 동안의 함성의 뒤끝이고 토요일이라 한산하기만 했다. 나는 오전에 복적생 문승훈 선배와 제1학생회관 옥상에 올라가 한 참 동안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토의했다. 문 선배는 쉐도우케비닛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학생대중들의 민주화 열기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중략- 이미 지난 14일 가두투쟁 때부터 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정문 앞에서 오전 10시에 집회를 하기로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도청 앞에서 12시에 집결한다고 약속했다. (경찰을 인질로 붙잡아 라는 제목의 증언록, 임낙평 1988)


비교분석
: 5.18기념재단은 김대중이 예비내각명단을 준비해 둔 상태에서 19일로 예고한 전국적 시위계획과 정부전복 음모를 감추고, 민주화를 요구한 자신들의 요구를 무시한 정부의 전국계엄선포를 폭동반란의 명분으로 내 세우는 역사 왜곡날조의 교활함을 드러낸 것을 알 수 있다.

 


2.  518

5.18기념재단: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 둘,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시민은 소극적이었고, 조직화되지 않았다.

 

윤재걸 동아일보 기자: 시위대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곳은 동명파출소였다. 파출소는 이내 폐허로 변해버렸다. 정부 주요인사의 사진을 비롯 집기 대부분이 밖으로 내던져 지고 불길에 휩싸였다. –중략- 시위대가 40여 명의 경찰을 포로로 잡아 동명로 입구 청산학원 부근에 이르렀을 때, 300여 명의 경찰 저지병력과 부딪쳤다. 시위대와 경찰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윤재걸, 1985, 236-237)


비교분석
: 5.18기념재단은 자신들이 입맛에 맞는 일만 기록한다. 파출소를 불사르고 경찰들을 인질로 붙잡았던 폭도들의 반란행위는 일언 반구도 기록하지 않았다. 완전한 왜곡날조다.

 


3.  519

5.18기념재단: 5 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시민의 저항은 극심해졌고, 도심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결국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19일 오후 4 30분경,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도 19일에 사망했다.

 

황석영, 1985: 군과 경찰은 전력을 다해 최루탄을 쏘아 대었다.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불붙은 차가 경찰 바리케이드에 부딪혀 폭발하자 군중들은 황호성을 올렸다. 몇 명의 청년들이 드럼통에 불을 붙여서 군경 저지선 쪽으로 굴려 버렸다. 이 중 하나의 드럼통이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폭발하였고 화염이 공중 높이 치솟아 올랐다. (황석영, 1985,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62-63)


윤재걸 기자
: 공원 다리에서도 몇 명의 공수대원들이 시민들에 밀려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일이 있었으며, 양동시장에서도 한 젊은 청년을 추격하던 공수부대원이 시장 상인들로부터 몰매를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밖에도 시민을 얕보고 단신으로 젊은 학생시위대를 추격했던 공수대원들 상당 수가 분노한 시민들의 희생물이 된 예가 적지 않았다. (윤재걸, 1985, 240)


비교분석
: 5.18기념재단의 계엄군 발포는 거짓말이다. 화공을 동원한 폭도들의 경찰과 계엄군을 향한 공격, 시민군에게 맞아 죽었던 공수부대 군인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모두 거짓이요 선동에 불과한 기록이다.

 


4.  520
5.18기념재단: 20일 오전 8시경,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다. 오후 6 40분경,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대의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었으며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전경 곽형렬: 시골에서 올라온 경찰병력과 서에서 올라온 직원들이 남도예솔회관 앞에서 전면에는 전경들이 서 있고 뒤쪽에는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대 버스가 들어 온 것이다. 결국 앞에 서 있던 전경들은 양옆으로 피해 버리고 앉아 있던 경찰들이 차에 깔려 버렸다. 나는 뒤쪽에 앉아 있어서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2구의 시체를 보았다. 그 시체는 밤 늦은 시각까지 상무관 앞에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3기동대 병력이 몇 명인가 남아 있어서 그들에게 동료들이 죽었는데 이대로 놔둘 수 있느냐, 모포라도 가져다 덮어 주어야 되지 않느냐?” 고 이야기 했다. (목격자, 전경 곽형렬, 1989)

김영택 기자: 그런데 이날 밤에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위군중들이 차량을 동원해 나주경찰서 금성파출서를 습격해서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한 것이다. 20일밤 시위의 열기가 고조되어 가고 있을 때, 당시 경찰국 통신과장 무정기에 이 사실이 보고되어 나는 처음부터 시위군중의 무장을 알고 있었다. (김영택 기자, 1988, 82)

비교분석: 5.18기념재단이 표현한 정부의 잔혹한 진압은 거짓말이다. 시민군 폭도들의 군과 경찰에 대한 잔인한 살인 폭동반란 행위만 난무했던 기록은 한 구절도 없다. 또한 시민군의 무기고 탈취 행각은 싹 감추고 있다. 

 

5.  521
5.18기념재단: 5 21일 오전 2, 이윽고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차단되었다.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었고, 도심 여기저기 화재로 말미암은 불꽃과 연기가 피어 올랐다. 오전 8시경, 계엄군 사이에서 오인에 의한 교전이 발생하여 군인 다수가 사망하기도 했다. 오후 1시경,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계엄군은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민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저격수는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고, 총탄에 맞은 시민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신을 대열에서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시민에게도 향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점차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편제되었고 이후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계엄군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었다. 결국, 오후 5 30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도심에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의 외곽을 둘러싸고서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통행을 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한 5 21일부터 26일까지의 7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되었다. 사람들은 계엄군과 치열하게 부딪혔던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한국일보 528: 이날 아침 일찍부터 상당수는 밤 사이 빼앗은 군 지프와 트럭, 고속버스 등 각종 차량을 타고 시가를 질주하며 시위, 차량을 타고 다니는 상당수는 낫, 도끼, 몽둥이, 곡괭이 등으로 무장하고 일부는 M16, 카빈 소총 등을 휴대해 시가엔 공포의 그림자가 휩싸이면서 유혈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국일보 528일 자 신문기사)

한국일보 528: 12 50분 갓 지나 난동청년, 탈취한 장갑차로 군 저지선으로 돌진, 계엄군 2명 깔려 사망하고 장갑차 위 청년 총 맞아 숨짐 (한국일보, 광주사태일지, 528일자 기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5시경 시민군 특공대 11명이 LMG 기관총 2정을 메고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으로 올라감. 이곳은 계엄군 임시 본부인 전남도청의 4층이 정확한 사정거리 안에 포착. 시민군은 전술적으로 유리한 고지와 우수한 화기를 갖추고 사격 시작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90)

김일옥 7공수 35대대장: 대대는 일단 조선대에서 철수할 것을 결정하고 차량 제대와 육로철수 제대로 구분하여 준비한 후 19시부터 1차 차량 제대가 정문을 출발하여 화순방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 중 2km 지점 건물 지역에 무장폭도가 집중 점거하여 차량 대열에 무참히 사격을 가해 대대는 5명이 관통상을 입는 등 부상자가 발생했다. 폭도의 사격으로 차량 2대 및 운전병이 낙오되어 보급품을 포함해 큰 손실을 입었다. 결국 낙오된 차량과 보급품은 폭도들에 의해 방화되었으며, 실종되었던 운전병은 폭도들에게 잡혀 광주 사직공원에서 온몸이 찢겨진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육로철수 제대는 야음을 이용해 야산을 따라 주답 마을로 철수하는 도중 폭도들이 사격을 하며 조직적인 철수를 방해하기도 했다 (2006 5월 월간조선 기고, “김일옥 7공수 35대대장의 체험기에서)

비교분석: 5.18기념재단의 시민군 살해 기록은 거짓말이다. 사망자 시신들은 전 날 시위대 차량에 깔려 죽은 4명의 경찰과 시민군 통제 구역에서 발견된 2구의 신원 미상 자였으며, 모두 시민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인데, 마치 계엄군이 시민들을 죽였다는 듯이 기록한다. 시민군의 총질을 계엄군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다. 자신들이 죽인 시신들을 끌고 광주시내와 전라도를 순회하면서 선동했던 흉악한 범죄행각을 계엄군에게 뒤집어 씌운다. 용서 받지 못한 범죄집단의 만행이다. 철수하는 계엄군을 향해 총격을 가하고 방해한 폭도들의 만행은 국군을 적군으로 여기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폭동반란군의 모습이다. 북한특수군의 군사작전이 보인다.
 

6.  522 ~ 526

5.18기념재단: 이후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궐기대회에서는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등을 대가 없이 나눴고, 부상자를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등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천했다. 신군부는 타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인 곳이라 전했다.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린 광주 시민은 계엄군 대표와 만나 협의를 도출해내려 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진 못했다. 5 26,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했다.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진입을 저지했고, 간신히 하루를 버텨냈다.

 

명노근 전남대 교수522: 지금 공수단을 몰아 내기는 했으나, 지도부가 없어 시민 군은 갈팡질팡합니다. 이미 시민수습위원회가 결성이 되어 수습조건을 가지고 상무대에 갔습니다 마는, 그들이 시민군을 통솔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은 학생들이 촉발시켰으니, 학생들이 앞장을 서서 수습을 해야 합니다. 도청으로 들어 가서 학생수습위원회를 결성합시다 (송기숙 교수, 1990, 62)


김수영, 고교생 시민군
: 도청집회 참석을 위해 각 동마다 50-200명 정도가 나왔다. 무슨 동이라고 쓰인 깃발을 가지고 있으면 차가 와서 태워 도청 앞으로 갔다. 분수대 위에서는 아무라도 발언할 수 있는 자유토론회가 열렸다 (김수영, 고등학생 시민 군, 1988)


김종배, 학생수습위 부위원장 525
: 강경파는 빨갱이로 몰렸다. 나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이대로 그냥 있다가는 온건파에 밀려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YWCA에 있던 학생 100명을 밤 10시에 도청으로 진입시켰다. 우리는 도청 상황실에서 이들을 무장시켜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 10여 명을 쫓아냈다. 이들을 쫓아 내는 데는 상황실장 박남선이 앞장섰다 (월간조선특별취재반, 1985, 460-461)


김성용 신부, 526
: 새벽5 30분경으로 기억하고 있다. 돌연 초비상사태를 맞이했다. 전차가 진입해 온다. 순간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총을 가진 시민군, 학생 전원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왔으며 혼란은 극에 달했다. 어떻게 할 것이냐. 전원 자폭하자. 상황실에 정보를 확인하기 위하여 차가 출동하였으며, 여기저기 다이얼을 돌리면서 주변의 동태를 물었다 (김성용, 1989)


비교분석
: 5.18기념재단은 시민들을 각 동으로부터 끌어 모아 차량으로 강제 동원한 사실은 말하지 못한다. 천주고 신부라는 김성용이 점령된 도청 안에서 버티다가 계엄군의 작전에 따라 잠시 광주에 진입한 전차를 보고 혼비백산했던 모습은 일언반구도 없고 맨몸으로 탱크 진입을 막아 냈다고 써 놓은 기록을 보면 웃음만 나온다. 신부라는 자가 도청에서 떨고 있는 폭도들에게 자폭하자는 말을 꺼냈으니, 양의 탈을 쓴 늑대 즉 빨치산임을 스스로 폭로한 셈이다.
  

 

7.  527

5.18기념재단: 5 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오래도록 광주 시민의 뇌리에 남아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잇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갖게 만들었다. 도청을 사수해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 남아 있었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 군이 시신으로 남겨졌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이 지금, 망월동 시립묘지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임낙평, 527: 80 527일 새벽 230, 학생, 시민들이 7일째 점거하고 있던 도청에 비상이 떨어졌다. 상황실에서 외곽지역 경비원들과 무전교신이 몇 차례 계속된 뒤, 급히 모인 도청 시민학생투장위원회집행부 지도부는 상황실에 집결했다. 그 사이 투쟁위원장 김종배(당시 조선대생)는 중앙청으로 연결되어 있던 핫라인으로 계엄군 진압시, 도청 지하실의 다이너마이트로 자폭하겠다는 최후 항전 결의를 거듭 전했다. 무장시민군의 대표격인 상황실장 박남선은 작전계획을 상황실 참모들과 급히 수립하기 시작했다. 외곽지역으로부터 총성이 간헐적으로 울리며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임낙평, 1989, 97)


이양현, 527일 새벽 도청 안에서
: 그 때 내 눈에 계엄군이 보였는데, 총이 쏴 지질 않았다. 그 계엄군도 나를 봤는데 총을 못 쏘는 것 같았다. 그저 보지 않고 방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갈기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총을 들어 그를 쏘려고 했다 (월간조선특별취재반, 1985, 464-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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