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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은 왜 이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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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10-03 09:14 조회19,5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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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은 무슨 이유로 진실을 숨기고 허위를 조작해 냈을까?


군은 어째서 이 용서받을 수 없는 조작행위를 저질렀을까? 그 동기에 대해서도 유가족들은 많은 생각을 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이 폭침됐고, 이 폭침 사실은 합참 실무진에서 합참의장과 국방장관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청와대에 직보됐다.  청와대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가장 먼저 북한을 감싸면서 북한을 옹호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북한이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적을 향해 분출돼야 할 분노에 대통령이 초장에서부터 앞장서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천안함 사고 시점 전후를 통해 북한의 특이동향이 없었다. 북한의 소형잠수정이 우리의 감시망을 뚫고 NLL 5km 남쪽에 까지 침투하기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북한의 개입 가능성은 일체 없다”


이러한 청와대의 기류를 감지한 국방장관은 청와대가 바라는 말들만 했다.


“북한은 과거 6ㆍ25 전쟁 당시 4,000여기의 기뢰를 구소련으로부터 수입해 3,000여기는 동해와 서해에 설치했다. 기뢰가 흘러들어와 우리 지역에 있을 수 있다”


60년 된 기뢰가 바닷물과 조류를 견디면서 폭발가능 상태로 기능을 유지했다는 국방장관의 말에 전문가들은 경악했지만 일반국민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수긍해 버렸다. 그 후 청와대는 ‘암초’다, ‘피로 파괴’다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는 분위기를 만들려 노력했다. 드디어는 VIP메모라는 전대미문의 쪽지사건까지 발생했다. 4월 4일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에 나선 국방장관이 어뢰의 가능성을 내비치자 청와대가 갑자기 VIP 지시라며 ‘어뢰 쪽으로 기울지 말라’ 지시하는 메모 쪽지를 설명에 나섰던 국방장관에 전달했다. 있을 수 없는 파행이었다.


사고가 나자마자 진실규명에 가장 먼저 앞장 선 사람은 미국의 오바마였다. 오바마가 이명박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이 전문가를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즉답을 피한 이명박은 생각 끝에 그 다음 날에야 오바마에게 전화를 걸어 전문가를 보내달라고 수락했다. 오바마는 미국 전문가 15명을 포함하여 영국, 호주, 핀란드 등에서 총 24명이나 되는 잠수함 기술자들을 파견해 주었다. 오바마가 이렇게 발 빠르게 앞장 서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천안함 사건의 진실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왜 이랬을까? 그 역시 김대중 및 노무현이나 마찬가지로 남북정상회담에 목을 매고 북한에 가서 김정일을 만난다는 꿈에 들떠 있었기 때문에 북한과 각을 세우는 국면을 회피하려 했다. 2010년 1월 29일, 그는 스위스 다보스 포럼으로 날아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강한 욕구를 드러냈다. 발표했다. 단순한  희망표시가 아니라 구체적인 시기까지 발표했다. 조건 없이 금년 내로 김정일을 북한으로 찾아가 만나겠다는 발언이었다.


“양측 간 화해와 협력을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사전에 만나는 데 조건이 없어야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BBC)


“나는 김 위원장을 만날 준비가 항상 돼 있다. 북한은 마지막으로 핵을 포기할 것인지 아닌지를 답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CNN)


"정상회담을 위한 대가는 있을 수 없다는 대전제 하에 남북 정상이 만나야 한다"


“원칙에 맞고 북한 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때까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고 개방에 나서지 않는 한 만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이는 미국의 원칙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북 양측이 열린 마음으로 만나는 데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오히려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섰다. 보도들은 일제히 남북정상 회담이 곧 열리는 것처럼 분위기를 띄웠고 날짜까지 점을 찍었다. 6자회담은 간 데 없고, 그 자리에 남북정상회담이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 됐다.


이때가 어느 때였는가? 북한이 2010년 1월 25일부터 3월 29일까지 2개월 이상에 걸쳐 백령도와 대청도 동부지역 NLL 인근 해상을 해상사격구역으로 설정한다고 공표했을 때였다. 1월 31일부터 2월 2일까지는 서해상 4곳과 동해상 1곳을 항행금지구역으로 추가 선포했다. 이에 이어 북한은 또 서해상 백령도와 대청도 동부지역 NLL 인근 해상의 2개소를  `해상사격구역'으로 설정했다. 2월 5일부터 8일까지 나흘간이었다. 1월 27∼29일 서해 NLL 해상에 해안포 및 방사포 사격을 한 데 이어 여러 차례 위협사격을 가했다. 그 결과 어선들이 이 지역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기분 나쁜 도전을 받고 있을 때 이 나라의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북한에 대해 엄중 경고하고 군에는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지 철저히 연구시키고 준비태세를 강화하라 지시했어야 했다. 그리고 거의 매일 같이 안보회의를 통해 북이 도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지혜를 짜내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어떻게 했는가? 역으로 미국과 의논 한마디 없이 참모는 물론 유관 장관들과 는 회의 한번 없이 돌출적으로 김정일을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나자 했다.


너무나 놀란 미국이 당장 동아태 차관보를 급파하여 ‘정상회담을 하려거든 반드시 김정일을 6자 회담으로 끌고 오라. 그럴 자신이 없으면 공연히 대북 봉쇄와 압박 분위기에 재 뿌리지 말라’는 취지의 단호한 경고를 했다. 이에 당황한 청와대는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을 미국으로 급파했다. 2월 3일-5일에 걸쳐 제프리 베이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 등을 만났지만 허사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이명박의 느닷없는 돌출행동은 순간의 착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의도된 해프닝이었을까?    


북한이 일방적으로 정했던 사격기간 만료일은 3월 29일, 천안함 폭침은 만료일 3일 전인 3월 26일에 발생했다. 북한이 2개월 이상 이 지역에 어선을 다니지 못하게 한 이유는 그 동안에 잠수함 작전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지역 물밑을 정찰하고 매복지점을 잡기 위해서였다. 북한 잠수정을 가장 잘 찾아내는 것은 수많은 어선들이다. 어선들을 이 지역에 접근금지 시키지 못하면 잠수함 작전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군인들의 상식이다.


이처럼 군은 천안함 폭침을 충분히 예측했는데도 불구하고 당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이 천안함 폭침 작전을 한창 진행하고 있을 바로 그 시기에,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나라 대통령이 안보로 집중됐던 국민들의 관심을 느닷없이 돌출적으로 다른 데로 돌려 천안함 폭침을 당하게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북이 짜고 친 게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곧 할 것처럼 분위기를 잡았을 때 그는 청와대의 그 누구와도 국무위원의 그 누구와도 사전에 의논 한 적이 없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그 때에 그 혼자 돌출 식으로 급조해낸 화해분위기였던 것이다.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도 남북정상회담에 이처럼 맹목적이었다면 지금부터 5년 전인 2005년에는 어떠했는가? 2005년은 노무현과 좌익들이 정권을 잡고 노골적인 친북 반역을 자행했던 음산한 시대였다. 노무현은 스스로를 좌익리라 했고, 미국을 적대시 했고, 한미연합사를 해체시키기로 결정했고, 군대를 썩으러 가는 곳이라며 병역의무를 경시했다. 사고 당시 지휘라인은 아래와 같이 구성돼 있었다. 권력의 핵심들이 모두 좌익 일색이었던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 국무총리 이해찬, 안보회의 사무처: 이종석, 이재정

국방장관 윤광웅, 합참의장 이상희, 육군총장 김장수, 3군사령관 김관진,

28사단장 김은상, 81연대장 오주석, 1대대장 배상주, 3대대장(수색대대장) 이지형

수색중대장 전판영  (국가보훈심사위원장 한명숙)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사무처장 이종석은 노무현 정부의 실세였다. 그는 당시 육군사관학교에서 개최된 ‘2004년 무궁화회의’ 초청강연에서 각군 장성 70∼80명을 상대로 안보 관련 현안을 설명하면서 “병사들이 적개심을 갖고 철책선 근무에 임하는 것보다는 조국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 높은 시민의식을 갖고 근무에 임하는 것이 보다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발언을 해서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다. 병사들에게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지 말고 민주화 의식을 심어주라는 요구였다.


530GP사건이 발생했을 때, 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남북정상회담을 구걸하기 위해 전기 200만 KW와 50만 톤의 쌀을 공여한다는 등의 지원 패키지를 마련해 정동영을 북한에 보냈다. 정동영은 6.15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다는 명분으로 6월 15일 평양으로 날아갔다. 2박 3일 동안 김정일의 부름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17일 아침에 막 출발할 참이었다. 바로 그때  극적으로 김정일의 부름을 받았다. 일단 김정일을 만나고 나자 정동영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희색이 만면해 가지고 그날 오후 8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처럼 2005년 6월은 노무현이 김정일을 만나지 못해 애를 태웠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미국과 북한 사이에 설전이 점입가경이었고, 미국이 작계 5030을 수행하면서 북한을 공격할 태세를 보이고 있던 긴장의 시기였다. 부시는 김정일을 향해 ‘폭군’, ‘위험한 인물’, ‘징그러운 정권’, ‘수용소 운영자’, ‘인육을 먹이는 자’라며 멸시의 감정을 표현했고, 김정일은 부시를 향해 ‘불망난이’, ‘텍사스 말몰이꾼’, ‘도덕적 미숙아’, ‘상대하지 못할 인간’, 라이스를 향해서는 ‘암탉’이라 했다. “선제공격은 미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북한도 할 수 있다, 누가 뭐라 해도 핵무기 제조에 박차를 가할 것이며, 이미 핵 강국이 되었으니 미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핵군축을 열자” “미국이 까불면 핵무기를 테러의 손에 넘겨줄 수 있다”는 등의 막말을 서슴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이에 분노한 미국이 3척의 항공모함을 이 지역에 비치하고 F-22를 북한 상공에 날리면서 금방이라고 전쟁을 벌일 것처럼 협박을 했고, 이에 놀란 북한은 9월 19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었다.


이렇게 되자 스스로를 좌익이라 공언한 노무현은 해외로 들락거리면서 “북한이 달라는 대로 다 주어도 남는 장사”라며 퍼주기에 몰두한 반면 미국으로부터는 “노무현이 우국인 미국의 눈을 막대기로 찌르고 있다” “노무현이 시간증 환자다”는 분노를 샀다. 노무현은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더러운 정권”이라고 했던 사람이다. 이런 정권 하에서 530GP 사건을 진실대로 처리했다면 이는 사하라사막에 비가 내릴 이변일 것이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김대중에 대해 잠시만 알아보자. 2002.6.29일 서해 도발에 대해 그는 북한을 옹호했다. 국군 장병들이 북괴의 테러에 의해 6명씩이나 죽고 21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대통령이란 사람이 빨간 넥타이를 매고 일본으로 공놀이 구경을 나갔다. 그리고 북한을 이렇게 감쌌다.


"이번 사태는 우발적인 것이다, 김정일은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지시를 내릴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대북지원과 금강산 사업은 계속돼야 한다".


김대중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자 당시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등은  장병들의 빈소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2002년6월 그의 핵심참모인 임동원은 남북협상이 잘 되어가고 있는데 미국이 방해를 놓고 있다고 말했다. 대북지원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무조건적이어야 하며 이를 반대하는 자들은 비인도적인 자들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우리 군은 북한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갖고 있으니 염려할 것 없다 했다.


북한과 내통해 있던 이런 자들이 군에 대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잠시만 알아보자. 6.29의 참상, 6명의 장병을 죽이고 21명의 중상자들을 내고, 비싼 참수리호를 수장시킨 존재가 바로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은 50여 년간 유지돼온 UN사 교전규칙을 없애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했다. "해군은 북 함정을 절대로 먼저 쏘지 말라", "쏘려면 청와대에 보고부터 하라"


출세라면 적과도 내통할 사람들은 군에도 있었다. 당시 군수뇌는 우리 해군을 북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이적 적인 "교전규칙"을 만들었다. 그 교전규칙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해보면 당시의 군수뇌는 한국군 군복을 입은 간첩이었다. 한마디로 적의 포구에 가슴을 정면으로 대주고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제정됐던 교전규칙을 보자.   


첫 번 째, 소총 유효사거린인 450m에서 경고방송을 하라는 것이다. 6.29에서 북한이 발사한 85 미리 포의 명중 사거리는 8km나 된다, 450m 앞에까지 다가가서 경고방송을 하라는 것은 아예 얼굴을 갖다 대주라는 것이다.


두 번 째 규칙은 200m에서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이다. 아예 맞아 죽으라는 것이다.


세 번째 규칙은 450m에서 차단기동을 하라는 것이다. 적함은 선수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 함정은 기다랗게 늘어진 옆구리를 보이며 적의 앞을 가로질러 가라는 것이다. 심장을 적의 총부리에 내주고 한동안 옆걸음을 해서 통과하라는 것이다. 북한의 처분만 바라라는 명령이다.


6.29당시에는 바로 이 제3단계 수칙을 수행하다가 비참하게 테러를 당했다. 교전규칙은 처음부터 맞아죽으라고 만든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교전규칙을 만든 사람을 찾아서 응징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북을 위해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군의 수뇌는 언제나 대통령 심복들로 임명됐다. 북과 내통하는 정도의 대통령이 임명한 군의 심복이라면 그 사람들도 북을 위해 군수뇌 행세를 했던 사람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에이, 그래도 군이 설마~”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필자의 경험을 한 가지만 보태고자 한다. 필자는 육사를 나와 월남전에 44개월 동안 전투요원으로 참전했다. 귀국하여 육군본부, 주월한국군사령부, 합참, 국방부에 근무하면서 군에 실로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군의 꿈을 접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미해군대학원에 가서 소령 때 경영학 석사를 땄고, 귀국했다가 1년 반 만에 다시 도미하여 미해군대학원에서 응용수학박사 즉 시스템공학 박사를 땄다. 그리고 국정원에서 1년간 복무하다가 국방연구원으로 가서 8년동안 국방문제를 진단했다. 당시 필자는 장군세계에서 국보로 불리기도 하고 문제를 지적당한 장군들로부터는 건방지다는 소리도 들었다.


1987년 2월, 44세에 육군대령이라는 옷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미국으로 가서 3년간 국방성에 취직했다. 거기에서 얻은 국제 자료들, 한국 국방연구원에서 경험한 지식들을 총 집대성하여 처녀작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 하나?"를 냈다. 1991년은 노태우 시절, 1993년 2월부터 김영삼 시대였다. 1991년에 책을 내자 사회적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기무사는 필자를 적으로 여겼다. 책을 내자마자 미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미국의 랜드연구소에 갔더니, 오공단 박사 등이 보안사에서 필자를 잡아 가두려고 하다가 인기가 너무 좋아 버거운 상대라서 잡아넣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해 준 일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니 당시 보안사 하사관쯤으로 보이는 허스키 보이스의 나이 든 사람이 전화를 자주 걸어 ‘미국에 가 살라, 아니 하면 집안을 몰살시키겠다.“는 험한 말로 협박을 했다. 도청도 했다. 누군가가 12평짜리 허술한 빌라에 밤마다 올라와 문고리를 잡아 흔들며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온 가족에 심리적 압박을 가한 것이다.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깎은 젊은이 4명이 1개조를 이루어 빌아 앞 의자에 앉기도 하면서 집 주위를 배회했습. 동네 파출소에 신고를 하니까 ”휴가나온 공군사병들“이라며 놓아 주었다. 중고 프레스토를 타고 먼 길을 다녀오다가 고속도로에서 시동이 꺼졌다. 동네 서비스 공장에 가져가서 고치려 하니 연료 통로가 꽉 막혀 있었다. 입으로 빨아들이고 또 빨아들여도 연로 공급 파이프가 뚫리지 않았다. 정비사는 아무래도 이상하니 연료탱크를 절개해보자 했다. 절개해 보니 연료 탱크에는 죽은 쥐 한 마리와 끈적끈적한 설탕이 3분의1 정도 채워져 있었다. 고속도로에 차량이 많았더라면 갑자기 시동이 꺼진 조그만 중고차는 뒷 차들에 받혀 끝장이 났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차를 끌고 좁은 주차공간을 벗어나려 하자 주위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앞바퀴가 제 멋대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앞바퀴를 검사해보니 나사를 거의 다 풀어놓았다. 달리다가 앞바퀴가 빠지면 차는 곤두발질을 하게되고, 뒤에 오는 차들에 받혔을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분이 솟고 아찔해 진다. 1990년 정도로 기억된다. 중앙일보 모 기자가 군에 대해 좋지 않은 글을 썼다는 이유로 육군정보사령부 장군 간부들이 시켜서 골목에 들어서는 중앙일보 기자의 다리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사회가 시끄러워 졌다. 이로 인해 장군들이 옷을 벗었던 일이 있었다. 이것이 속 좁은 군사문화였고, 정보를 한다는 군인들의 무대포 식 행동 유형이었다. 군 집단을 칭찬해주면 어린 아이들처럼 좋아하고, 서운한 소리 하면 칼로 찌르고, 사고 나서 죽으라는 식으로 악행을 저지른 집단이 바로 필자가 몸담고 있었던 군대 집단이었다. 야전군인, 일반 행정부대의 군인들은 그런 생각 감히 하지 않는다. 조그만 권력이라도 권력을 가지면 이렇게 망가지는 것이다.


 2010.10.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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