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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을 통해 보는 대구폭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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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10-18 17:31 조회21,9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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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길을 통해 보는 대구폭동의 역사

이 글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민노동 권영길이 골수 빨갱이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46년 10월 1일에 발생한 대구 폭동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한보다 북한이 더 자세하게 남겼다는 사실, 그리고 대구폭동 사건의 폭동 내용이 1980년의 5.18 폭동 내용과 빼닮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물론 북한의 역사책은 피해자들의 수를 부풀리는 등 선동적인 목적에서 쓰였지만 1946년 9월의 노동자 파업 사태 및 10.1 대구폭동 사건의 성격과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남한 자료를 볼 때보다 북한 자료를 볼 때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는 결론은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폭동과 시위들이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였다”는 것이다. 남한의 시위와 폭동을 지휘하고 결과분석을 주도하지 않은 존재는 절대로 이와 같은 현장의 역사를 쓸 수 없는 것이다.     

                                           권영길의 품위와 사상

매일신문에 따르면 10월 14일 오전 대구시-경북도교육청 국정감사장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창원 을)은 아래와 같은 발언을 했다.

“질의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 대구경북은 보수 세력의 총본산이라고 하는데, 두 분 교육감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대구경북은 보수꼴통 도시 아니냐””

 “1946년 10월 항쟁만 해도 대구경북에선 폭동으로 가르치고 있다. 광주나 부산은 민주도시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대구경북도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니냐”

                                      민주당 김상희의 품위와 사상

민주당 김상희 의원(비례, 환경운동가 출신)도 시국선언 교사 중징계 방침을 비판하면서 '대구는 보수꼴통'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썼다고 매일신문은 전했다. 보도에 의하면 김상희의 발언은 아래와 같다.

“대구에 올 때마다 슬프고 안타깝다. 과거 대구경북은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였는데 발전이 안 되고 낙후돼 있다. 보수꼴통적 사고 때문에 대구가 이지경이 됐다"

                                            권영길의 해명

권영길의 홈페이지에는 위 발언에 대한 권영길의 해명이 올라있다.

“마산 3.15 의거의 도화선은 1960년 2월28일 일어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시위입니다. 2월28일 시위가 4.19 학생혁명의 불을 당긴 것입니다. 또 1946년 10월1일의 대구 경북 지역의 민중항쟁은 대구 폭동으로 불리고 있는데, 바로 잡아져야 합니다. 이처럼 대구경북은 민주화의 요람이며 더불어 사는 사회의 샘터입니다. . .
대구경북이 수구 꼴통으로 폄하 되고 있는데 자랑스런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대구경북 청소년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어깨를 펴도록 해야 합니다.“

                                   필자가 종합한 10.1대구폭동 사건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일어난 파업 폭동은 경상북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1946년 대구폭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간첩 이석(李錫)이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본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72년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간첩 이석(李錫)의 활동은 북한 지하조직의 활동을 대변할 만하다. 그는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로 1946년 10월, 대구 폭동사건에 간여했고, 중앙당 간부로 자리를 옮긴 후 체포, 투옥됐다가 6.25 전쟁 때 구출되어 인민군을 따라 평양으로 월북했다.

1955년4월, 그는 다시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쪽으로 상륙, 경남 마산에 아지트를 구축하여 2개의 친목계 모임을 통해 40명을 조직, 의식화 작업을 했다. 3.15부정선거에 규탄하는 움직임이 일자 그는 이 40명으로 하여금 마산사태에 적극 개입하여 사태를 격화시키는 데 앞장서게 했다.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은 이를 확대한 것이었다. 대구 폭동사건은 위와 같은 역사를 가진 간첩 이석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조병옥 박사가 본 대구사태

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역시 공산당이 배후 조종하는 시민들이 경찰관서를 습격함으로써 폭동화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신문에 발표된 군정청 경무부장 조 병옥(趙炳玉)의 대구사태 개요는 다음과 같다.

“10월 1일 오후 1시 대구역전에서 동맹파업단의 무질서한 군중이 집합하여 치안을 교란할 염려가 있으므로...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역전에 있는 전평(전국노동조합평의회) 본부에서는 ‘남조선파업 공동투쟁위원회’ 간판을 걸고 군중의 위세를 보였다.

오후 2시경 수사과장 이하 30명의 경찰관을 파견하여 해산명령을 다시 발하고...전평 간부와 해산에 관한 절충을 하는 동안에 포위를 당했으므로 권청장은 무장경찰관 60명을 인솔하고 현장에 임하여 동위원장과 직접 교섭하여 다시금 해산을 명령했다.

이때 집합한 군중은 파업자, 공장직공, 일반시민 약 1만5천명이었는데, 무장경관을 철퇴시키지 않으면 해산 안한다며 명령에 불복했다... 군중은 명령복종은 고사하고 도리어 경찰관을 타살(打殺)하라고 고함을 치면서 혼란상태를 이루어 사태는 극히 험악... 청장은 발사를 명령, 군중은 해산... 그중 사망자 1명 발생... 그날밤 대구의과대학에서는 공산당 대구책임자 손 기채(孫基采)지휘하에... 학생폭도 일부는 40정의 무기 탈취와 유치장 파괴의 폭거에 이르렀다... 각 경찰서 파출소를 파괴하고 파출소 경찰관 또는 노상에 있는 경찰관을 살해하고 경찰관의 가족을 납치, 가옥, 가구등의 파괴, 약탈을 자행 하였다 (이하생략)
 
                                   
     영남일보가 밝힌 대구폭동
 
아래는 영남일보 50년사가 밝힌 10.1 대구폭동 사건이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경북 전역으로 확산된 소위 10.1폭동은 해방
후에 일어난 가장 큰 소요사건이었다. 폭동이 어느 정도 진정된 10월 12일 경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경찰의 피해는 사망사 31명, 행방불명자 36명, 부상자 30명, 피해 경찰서는 대구를 비롯한 도내 10곳, 전소된 경찰서는 영천서와 예천서장 관사 두 곳이었으며, 동으로 그때까지 검거된 자가 7백여 명에 이르렀다(10.13)

이는 폭동의 정도를 짐작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이 폭동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시비가 분분하다. 그것은 이 폭동을 피해자의 측에서 보느냐, 아니면 주동자의 측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비를 가리기 위해서는 당시의 기록들이 있어야 하는데, 영남일보 10월 17일자 1면의 사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폭동이 일어난 10월 1일부터 10일간 모든 출판물의 간행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폭동 직후 발효된 계엄령이 10월 22일 0시에 해제되어 이때부터 비로소 신문의 검열이 철폐되었다(10.22). 이로 보아 당시의 신문도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10.1폭동을 비교적 객관적이면서 가까운 시기에 기록된 자료로서는 영남일보가 1947년에 간행한 <경북총감>을 들 수 있다. <경북총감>은 10.1폭동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용서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단서를 달면서 그날의 사태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경북총감>이 기록하고 있는 10.1폭동의 진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0.1폭동은 남조선 총파업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9월 23일 부산에서 철도 파업이 시작되었고, 대구에서도 9월 23일 오후부터 기관구의 간부를 제외한 종업원 1천여 명이 출근하지 않으면서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곧 대구철도쟁의단을 조직하고, 24일에는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의 파업성명서를 발표했다.

1. 일급제 반대
2. 임금 인상
3. 쌀 4홉 배급
4. 해고 반대
5. 급식제 부활

대구에 이어 24일 오전 9시에 4만여 명의 서울 철도 총사원도 파업을 단행하면서, 이의 여파가 남한 전역의 철도에 파급되었다. 25일에 이 파업에 대해 "관리는 파업을 할 수 없으며, 또한 진정기간 없이 바로 파업에 대해 들어갔으므로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운송국의 입장을 대구역에 전달해 왔다.

이에 대해 대구역장은 "6개월 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말했으며, 같은 날 서울 철도쟁의 본부단에서는 교섭이 결렬되었으니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맹세와 격려문을 보내왔다. 한편 당시의 군정 장관도 이번 파업이 "정당한 절차나 사전의 교섭도 없이 일어난 불법적인 파업"이라고 견해를 피력했다.

당국으로부터 파업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오히려 이 파업이 불법으로 규정되자 사태는 수습 될 리 없었다. 게다가 철도원들과 비슷한 조건을 내걸고 동정 파업에 들어가는 사업장들이 늘어나 30일에는 대구의 거의 모든 산업체가 쟁의에 휘말리게 되었다. 파업업체가 늘어나자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약칭 勞評)에서는 南朝鮮總罷業大邱市鬪爭委員會(약칭 市鬪)를 결성하고, 각 파업단체는 勞評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사태가 이렇게 확산되자 제5관구 경찰청에서는 市鬪에 회견을 요청했다. 이 회견에서 경찰청은 이 쟁의가 시위와 선동이 아닌 옥내에서의 합법적 투쟁이 되기를 부탁했고, 市鬪는 경찰청의 요구를 수락하는 한편 파업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그래서 市鬪에서는 자위대를 구성하여 악질적인 모략대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방화나 약탈에 대비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위문단을 구성해 市鬪를 방문하고 위문품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행정을 담당했던 군정청이 어떤 해결책을 강구했는지는 모르지만 파업은 시작된 지 1주일이나 계속되어도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1일, 市鬪와 경찰청은 市鬪의 간판을 떼느냐 않느냐의 문제로 오후 6시경까지 실랑이를 벌이다 경찰이 일단 돌아갔다. 돌아갔던 경찰은 조금 지나 무장경관을 대동하고 市鬪의 간판을 떼려다 노동자들과 다툼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오후 7시경 경찰이 발포하여 수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10.1폭동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날은 무장경관과 기마경관이 역전에서부터 錦町路 勞評會館까지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어 더 이상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튿날 10월 2일, 역전 일대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교통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내의 3개 대학에서는 학생회가 열리고, 전날 경찰의 총탄에 희생된 학생의 시체(뒷날 경찰은 학생의 시체가 아니라고 발표)를 메고 경찰서 앞으로 모여들었고, 이에 남녀 중학교까지 가세했다.

학생 대표와 경찰 간부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어, 학생측의 요구조건이었던 경찰의 무장 해제 등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이에 역전에서는 노동자를 위시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여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가 벌어져 많은 희생자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경찰의 무장 해제 승인으로 일단 총성은 그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학생 대표와 경찰 간부 사이의 교섭이 완전히 타결되기 전에, 그동안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던 미 주둔군이 갑자기 장갑차 3대를 출동시켜 경찰서 앞의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자 사태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시내 각 금융기관.회사.행정관서 등은 모두 파업했고, 상점은 모조리 철시했다. 시위대는 무장 해제로 방어력을 상실한 경관을 비롯해 관청 수뇌급 인사들을 마구 죽이기 시작했다. 사태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자, 경찰은 다시 무장을 하고 응원대를 얻어 파업단과 좌익 지도자 검거에 나섰다.

이날 10월 2일 오후 4시경, 대구지구 미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계엄령이 포고되어 비상 사태로 들어갔다.

이상이 <慶北總鑑>에서 밝히고 있는 10.1폭동의 대체적인 윤곽이다. 그리고 이의 말미에 이 폭동이 일어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식량 사정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 증거로 10월 15일 군정 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사태의 근본적 해결책은 충분한 식량공급"이라고 말한 것과, 민통본부(民統本部)가 21일 발표에서 사태의 원인은 "일부분 선동에 있으나 그 근본 원인은 양곡문제에 있는 것"이라고 발표한 것을 들고 있다. 사실 당시 대구를 비롯한 경북 전역에는 콜레라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교통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에서도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경북총감(慶北總鑑)>은 10.1폭동을 '폭동'이라는 용어 대신에 '사건'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이는 당시의 사태가 단순히 좌익의 선동에 의해 일어난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그런 사태가 일어날 조건이 주어져 발생된 불가피한 행동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이 밝힌 대구폭동

<1982년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다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 밝힌 대구폭동>

아래에 일부 발췌 요약을 했지만 이 요약분만 보아도 북한의 자료가 우리나라 자료들보다 훨씬 더 자세하다. 북한이 일으킨 대남전복 역사였기 때문이다.

                                               “9월 총파업” 

이 책의 66-73쪽에는 “남조선로동자들의 9월 총파업”이라는 중간제목이 있도, 74-83쪽에는 “1946년 10월 인민항쟁”이라는 중간 제목이 있다.

“1946년 9월 총파업에서 시작하여 10월 인민 항쟁에 이어지는 대중적 항쟁은 미준정의 철폐와 인민정권수립이라는 정권투쟁의 요구를 내세우고 진행된 전인민적투쟁이었다.”

“로동계급은 절박한 생활문제의 해결은 정치적 해결 없이는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조선화물자동차회사 로동자들의 투쟁, 화순탄광로동자들의 투쟁, 하의도(김대중 고향) 농민폭동 등이 보여준 지난 경험을 통해 통일적이며 조직적인 투쟁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나머지 1946년 9월 초순 전평과 16개 산별동자조합대표자회의에서 ‘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 조직되었다. 이어서 각 공장 기업소 단위로 파업투쟁위원회들이 설치되었다. 이어서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전주 삼척 마산 군산 등 지역별 총파업투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9월 15일, ‘ 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 는 아래 요구사상을 민군정 들이대고 9월 23일가지 화답할 것을 요구하였다.(주: 이는 김대중이 1980년 5월 16일, 최규하 정부에 대고 5.19일까지 요구사항을 수락하지 않으면 5월 22일 전민봉기를 일으키겠다고 협박한 것과 같은 것)

쌀을 달라! 노동자 사무원 모든 시민들에게 하루 3홉 이상 배급하라. 물가 등귀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전 재민과 실업자들에게 일과 집과 쌍을 주라! 공장 폐쇄 하고 절대 반대! 로동욵동의 절대자유! 일제 반동 테러 배격!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적 로동법령을 즉각 실시하라! 검거 투옥중인 민주주의운동자들을 즉시 석방하라! 언론 출반 집회 결사 사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대안’(주:'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즉시 철회하라! 해방일보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된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들을 석방하라! 무상몰수 무살분재의 토지개혁을 실시하라! 미군정을 즉시 철폐라고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sajrl라! 미소공동위원회를 속개하고 즉시 민주조선독립을 실현시키자!

남조선 로동자들의 이 정당한 요구가 거부되자 남조선로동계급은 철도로동자들을 선두로 하여 총파업단계로 넘어 갔다. 9월 24일 0시에 발표한 호소문의 요지는 아래와 같았다.

“ . . . 우리는 참을대로 참아왔다. 팔을 끼고 아사를 기다리느냐 그렇지 않으면 생존을 위하여 싸우느냐를 택할 때가 왔다.  . .전근로인민대중은 기아 테러 전율의 구랑텅이에서 전 민족을 구출하고  .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남조선 4만 철도로동자를 선두로 민족적 투쟁을 시작한다.”

제일 먼저 부산지구철도로돈자 7,000여명이 열차운행을 중지했다,. 서울 용산기관구 13,000 로동자들이 이에 동참했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목포 안동 로동자들이 기세했다. 모든 철로 운행이 완전히 멎었다. 

철도로동자들의 뒤를 이어체신 전기 금속 광산 해운 교통 운수 화학 식료 tkjadb 토건 출판 일반봉급자 모두가 파업에 동참하여 모든 산업이 마비되었다. 

서울시 안의 중앙전신국, 중앙전화국, 중앙우편국을 비롯한 25개 체신기관 로동자 4,000여명을 비롯하여 전국의 체신기관 로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해운로동자들 263,974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경인지방과 영남지역이 총파업로동자 수의 85%를 차지했다. 

9월 30일, 악에 바친 미제 야수놈 4,000여명은 이른 새벽에 탱크를 앞세우고 용산기관구를 습격하였다. 격분한 로동자들은 ‘이 놈들아 쏠테면 쏘아보라’고 부르짖으며 맞받아 싸웠다. 망치 삽자루 돌멩이 장작개비로 원쑤놈들의 골통을 갈기고 갈비뼈를 꺾었다. 싸움은 4-5시간이나 지속되었다. 미제침략군은 이날 40여명의 로동자를 살상하고 1,700여명의 로동자들을 검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0월 인민 항쟁”

대구에서는 9월25일부터 40여개 공장 기업소 로동자들이 총파업을 계속하고 있었고 10월1일에는 1,000여명의 시민들이 배고파 못살겠다, 쌀을 내노라 하고 부르짖으며 쌀 투쟁에 나섰다. 대구시 총파업투쟁위원회가 자리잡고 있는 대구 역전광장은 10월1일 저녁때부터 수천명의 파업로동자들과 청년학생들, 실업자들,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놈들이 해산하지 않으면 쏜다 하고 넘벼들었을때 애어린 한 제사공장 녀성로동자가 앞가슴을 헤치며 ‘이놈들아 쏘아 보아라’ 고 맞받아 나섰다. 경찰놈들은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고 영웅적인 제사공은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군중들 속에서 뛰어나온 또 한사람이 연단에 올라 ‘살인 경찰을 처단하라’ 외쳤을 때 놈들은 그의 가슴에도 총탄을 박았다. 또 한사람이 연단에 올라가 ‘저 야수들을 잡아라’ 호소 하였을 때 그도 총탄에 쓰러졌다. 연이어 6명의 영웅적인 인민의 아들딸들이 고귀한 선혈로 광장을 물들이며 쓰러졌다. 이 참경 앞에서 대구시민들의 분노는 극한점에 이르게 되었다.

10월2일 아침 ‘살인경찰을 처단하라’ ‘감금된 애국자들을 석방하라’ 외치며 파업로동자 대열이 파업단 본부 앞으로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대구의과대학 학생들을 비롯한 대학, 전문, 중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구시의 중심부를 뒤덮었다. 관공서, 금융기관, 회사들은 문을 닫고 상인들은 영업을 거두었다. 전달 희생된 동무들의 영구를 앞세우고 수만 군중들은 시내를 누비며 시위하였다. 대구경찰서를 포위하고 13,000명의 군중의 기세에 질겁한 반동경찰은 서장놈 이하 군중 앞에 전면 투항하고 무장을 바쳤다. 감방의 애국자들은 모두 구출되었다.

기세충천한 봉기군중은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북조선에서와 같은 민주개혁을 실시하라!’ ‘쏘미공동위원회를 속개하라!’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대구시는 완전히 인민들 손에 장악되었다. 로동자와 학생들이 치안을 담당하였다. 서울을 비롯한 외부와의 일체 전신, 전화 연락은 끊어졌다. 대구 인민봉기는 민주화 통일을 지향하고 인민정권 수립을 요구하는 높은 정치적 목적을 내세운 애국적 항쟁이었다.

봉기의 확대를 두려워한 미제는 야수적 탄압을 강행하여 나섰다. 미제 침략군은 10월 2일 오후6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어서 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야수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봉기의 불길은 경상남북도의 대다수 시, 군 을 휩쓸었는데 10.2-5일 사이에 달성, 성주, 칠곡, 영천, 의성, 고령, 경산, 군위, 예천을 비롯한 경상북도 19개 군을 휩쓸었고 뒤 이어 10월10일까지에는 부산, 마산, 통영, 창녕 등 경상남도 18개 군을 휩쓸었다.

군중들은 쇠망치, 괭이, 도끼, 날창, 참대, 장총 등을 가지고 괴뢰경찰서, 지서, 군청, 면사무소, 신한공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본부 등을 들이쳐서 경찰관과 테러분자, 악질관리, 지주들을 처단한 것은 남조선 인민들의 빛나는 업적이었다.

이런 항쟁은 강릉, 삼척, 광주, 연백, 개풍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민중항쟁에 참여한 남조선 인민 수는 2,273,438명이었다.(도별 인원수가 이 책 81쪽에 도표로 작성되어 있으나 생략함)

항쟁대오가 가는 곳에는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 울려 퍼졌고 김일성장군 만세의 위대한 구호가 장엄한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10월 항쟁에서 무려 25,000여명의 애국적 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15,000여명을 검거 투옥하였다. 어떤 지방에서는 애국적 인민들을 산채로 손발을 잘라 죽이기도 하고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기도 했다.

항쟁기간 적통치기관이 파괴되고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어 행정권이 일시적이나마 인민들의 손에 장악 되었고, 미제의 앞잡이인 악질경찰과 반동분자들이 인민들의 손에 의하여 처단되었다. 이는 남조선인민 투쟁의 역사적인 쾌거였다.

2010.10.1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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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5 대통령과 경찰청장은 해외여행 나갔나? 지만원 2011-08-20 17942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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