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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쓴 제주4.3사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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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3-07 17:54 조회1,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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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5․10단선후 통일적중중앙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 
                                                                 유격투쟁 계속전개


1) 5․10단선후 제주도인민들의 반미애국투쟁


제주도인민들은 5․10단선반대투쟁을 통하여 단결된 투쟁력량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가 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로부터 그들은 앞으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을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해서는 애국력량을 튼튼히 결속하여 투쟁을 더욱 세차게 벌려야 한다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다. 미제는 애국적 인민들의 거세찬 투쟁에 의하여 단독선거가 파탄된 것을 계기로 항쟁세력을 탄압하기위한 책동을 더욱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놈들은 군경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무장대를 포함한 대중적인 반미애국투쟁세력을 말살하기 위하여 악랄한 토벌작전을 시도 하였다.

항쟁대오는 장기전을 예견하고 무장대와 지방자위대를 정비하고 식량, 무기 등 모든 전투비품을 준비하는 사업을 급속히 전개하여 놈들의 대 토벌전에 대응하였다. 전투 지휘부는 혁명력량을 보존하기위하여 1선에는 련락원을 남겨두고 2선으로 옮겨 지하투쟁을 강화하면서 대중을 묶어세우는 한편 일군들을 불굴의 투쟁정신, 참다운 애국주의사상으로 무장시키는 사업을 한층 강화하였다.

또한 ‘혈하’와 ‘인민통신’등 출판물을 통하여 북반부에서 민주건설의 성과와 국내외정치정세, 윈쑤들의 탄압만행을 폭로하는 선전사업을 적들의 ‘전략촌’에 이르기까지 깊이 침투하여 진행함으로써 인민들을 애국적 혁명투쟁에로 고무하고 그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었다.

악랄하게 감행되는 놈들의 테로학살만행은 인민들을 다시 궐기시키고 무장대들에게 무장활동을 또다시 전개 하였다. 무장대렬은 각지 인민들과의 련계를 강화하면서 유격전선에서 맹렬한 전투활동을 진행하였다. 유격대의 한 련대는 1948년 5월 초순에 안덕면 창천리에 침입한 국경 토벌대를 습격하여 완전히 소탕하고 부락을 해방시켰다. 그들은 또한 무릉지서를 습격하여 경관 3놈을 살상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계속하여 유격대는 동명리를 습격하고 고산 , 저지 지서의 토벌대원으로 동족살해에 미쳐 날뛰던 경관놈 둘을 처단하였다.

이어 무장대는 한림에 있는 토벌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무장대는 한림면자위대, 애국적 인민들과 협동하여 200여명의 투쟁대오를 편성하였다. 그들은 한림시가를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동, 서, 남 세면으로 경찰지서를 공격하여 저주로운 서북청년회 살인마들을 모조리 생포하고 토벌대의 준동을 봉쇄하였다. 한편 원호부대와 애국적 인민들은 기동로를 차단하고 교량과 전주들을 파괴, 절단하여 적들의 교통, 통신망을 끊어버렸다. 그들은 이날 대낮에 3시간에 걸치는 전투 끝에 토벌대를 남김없이 축출하고 이 고장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지방반동통치기구가 여지없이 마비된데 당황망조한 놈들은 미군까지 출동시켜 한림으로 침공해왔다. 이 정보를 입수한 한림지구 무장대는 놈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시장터 일대에 매복대기하고 있다가 기여든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기였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어 심대한 타격을 줌으로써 해방된 한림지구를 지켜냈다.

해방된 한림면 수천 명 인민들은 선전공작원들의 적극적 활동으로 군중대회를 열었다. 군중대회에서는 악질적인 서청 반동깡패들의 죄행을 인민의 이름으로 폭로 규탄하였다. 이어 그들은 군중시위에 들어갔다. 수천 명의 군중은 씩씩한 ‘적기가’와 장엄한 ‘추도가’를 부르며 희생된 동지들의 관을 메고 엄숙히 시위를 진행하였다. 이날의 승리는 놈들의 토벌작전계획을 전면적으로 파탄시켰고 인민들의 반미애국투쟁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일으키게 하였다. 무장대의 공격전은 그밖에 제주도의 여러 지역에서 과감히 진행 되었다.

당시 로동신문 보도에 의하면 “5월 19일 오전 8시경 무장한 군중 40명과 참대창을 든 400여명의 군중이 관내 협지지서를 습격하고 부근일대에 방화하였으므로 현장은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협지지서 건물은 여러 차례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다 타버렸고 림시거처로 사용하고 있던 공회당도 전부 타버렸다. 경찰 5명은 항쟁군중들의 공격에 당황하여 두모지서를 경유하여 본청으로 퇴각하였다.”(1948.5.16.)

전투원들은 이날 위미리 경찰지서를 기습 공격하여 경찰관 전원을 숙청하고 감금된 인민들을 구원하여 부락인민들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 5월 14일 경찰 기동부대는 각 지서를 순시한 후 한림방면에 진출하던 중 지서부근에서 항쟁군중들의 습격을 받아 약 2시간에 걸쳐 격렬한 전투 끝에 악질경관 한 놈은 즉사하고 한 놈은 중상을 입었다.


당시 로동신문은 계속되고 있는 제주도인민항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무장한 인민무장부대들은 계속적으로 경찰서를 습격하고 있다. 15일에는 제주도 김영경찰지서가 습격 되였으며 부근 덕천리 부락이 습격되었다. 덕천리 습격에서는 동리에 거주하는 대동청년단원을 사살하고 향보단에 가입하였던 동리청년 9명을 설복한 후 이들을 데리고 갔다.“(1948.5.18)

그 후 제주경찰서 관할 밑의 토벌대놈들이 하귀리를 기습하여 일곱 살 난 어린이를 기관총으로 살해한 것을 계기로 격분한 지방자위대와 유격대가 놈들을 공격하여 30여명의 원쑤들을 살상하였으며 수많은 무기를 로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무장한 인민들은 련달아 5월 하순에는 제주읍 오동리 경찰관출장소, 표선면 성읍, 표선 경찰지서, 대정과 모슬포 무릉 등 경찰지서 둘을 불의에 습격하여 경찰관들을 살상하는 등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면, 리 자위대 와 별동대들은 서로 긴밀히 련계를 맺고 유격대들의 활동을 힘껏 도와주면서 적들의 준동을 도처에서 봉쇄하고 악질반동들을 원한 많은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였다. 또한 교통 통신망을 부단히 절단하고 적들의 주요기관과 시설들을 파괴 소각하는 등 줄기찬 항쟁으로 놈들의 통치 기능을 밑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무장대의 공격전은 제주도의 각지에서 계속되었다. 5월말 구좌면 조직을 복구확대하기 위한 하도, 금녕 일대에서의 전투, 저지와 린접부락 인민들을 구원하기 인한 기습작전, 명리동 인민들을 구출하기위한 과감한 전투 등 수많은 공격전을 벌려 악질반동들을 처단하고 애국적 인민들을 놈들의 마수에서 해방하였다.

유격대와 제주도인민들은 적들의 2중3중의 포위 토벌작전에도 불구하고 령활한 기동과 파괴기습전투로서 원쑤들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으며 적들의 통치 질서를 완전히 마비시키었다. 제주도경비사령부가 대폭 축소하여 발표한 피해통계에 의하더라도 “3월부터 5월25일까지 사이에 경찰관서 35개, 선거사무소 18개를 습격소탕하였으며 경찰지서 4개, 경찰관사 9개를 비롯하여 괴뢰공공기관 및 반동들의 가옥 수십 개를 불살랐다. 이 기간에 수백 명의 괴뢰경찰과 악질주구를 처단하였고 대소149개의 교량을 폭파하였다“(조선중앙년감 국내편, 1949년, 219페지).

제주도인민들은 간고한 항쟁을 통하여 검열되고 훈련 되였으며 투쟁대렬은 계속 확대되였고 대렬 내 통일단결이 강화되였다. 인민유격대의 전투력은 재정비되었고 근거지는 점차 튼튼한 방위체제와 후방공급기지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보다 광활한 지역으로 기동하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력량으로 장성하게 되었다.제주도인민들의 반미애국투쟁은 그해 6월에 들어와서도 계속 전개되였다.

6월의 전투소식에 대하여 제주합동통신 특파원은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이달에 들어선 후에도 매일같이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데 지난 2일 에는 안덕면 화순리를 비롯하여 한림면 대림리, 애월면 외도리, 와도평리, 내도리, 로평리 등 각처에서 충돌이 있었다. 또 조천면 에서는 다수 군중이 면사무소 앞까지 습격하여 철도관구경비대와 교전하였다. 3일에는 한림면 청수리와 귀덕리에서 교전이 있었고, 6일에는 애월면 수산리에서, 7일 에는 애월면 신암리에서 전투가 있었다. 그리하여 1읍 12면에 있는 경찰지서가 전부 습격을 받았음은 물론 악질 경관과 반동반역자에 대한 습격도 그대로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 구름 속에 솟아있는 한나산 속의 무수한 동굴은 항쟁인민들이 근거하고 있으며 그들 가운데는 60이 넘은 로인으로부터 12~13살 되는 소년도 있을 뿐 아니라 녀자들도 참가하고 있다. 때로는 전투에, 때로는 농경에 참가하면서 항쟁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한 언제나 항쟁에 참가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미군정과 반동경찰은 량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난하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로동신문 1948. 6.15)

도처에서 유격전이 힘 있게 벌어지는 가운데 6월초부터 서귀지구에서는 면, 리 단위로 자위대가 재편성되었다. 대중투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자 조천, 북촌, 신촌, 함덕, 신흥 등 조천면 지역에서는 대동청년 원, 민보단 원들까지 놈들의 포악성을 배격하고 유격대활동을 적극 원호하는 데로 나가게 되였다.

6월 10일을 전후하여 토벌군이 한나산에 대한 포위공격전을 4일간이나 감행하였으나 무장대는 후방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원 밑에 주변산악과 한나산 깊은 밀림 속에서 기동적으로 투쟁대오를 보존하였고 적들의 대토벌작전을 저지파탄 시키었다.

무장대는 놈들의 토벌공세로 투쟁이 장기화된 조건에서 자기들의 대오를 정비강화하고 투쟁의 렬매를 수호 발전시키면서 대소무력전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여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6.10 대토벌의 어려운 고비를 이겨낸 제주도인민들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8.25총선거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반미애국항쟁을 더욱 치렬하게 조직 전개하였다.


                             2)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지체 없이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전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세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을 실시하여야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독정부를 세울 것이 아니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써 전조선 정부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김일성저작집 4권. 356페지)

1948년 6월 소집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에서는 남북총선거를 실시한데 기초하여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전조선립법기관인 조선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고 남북조선대표들로 전조선중앙정부를 수립할 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협의회는 또한 조선최고인민회의와 중앙정부의 중요과업은 조선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동시에 철거시키는데 있다고 결정하였다.

협의회가 있은 이후 제주도인민들은 전조선중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섰다. 제주도인민들은 놈들의 그 어떠한 파쑈적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7월초부터 최고인민회의대의원선거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위한 투쟁을 힘 있게 전개하였다. 제주도인민들은 “모두다 8.25선거에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의 표어를 내걸고 일제히 선거 투쟁에 궐기 하였다. 무장대와 자위대, 별동대들은 각지에서 맹렬한 기동작전을 전개하여 놈들의 파쑈적 테로와 학살만행을 분쇄하면서 절차대로 선거를 보장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무장대의 엄호 하에 군, 읍, 면, 리 선거위원들은 곳곳에서 과감한 집회운동, 선거사업, 비밀해설, 삐라운동, 시위투쟁 등을 통해서 유권자자신들 이 서명하게 하였다.

7월 말경 한림 토벌대놈들이 옹포, 협재 린접 부락민들의 선거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불의에 기어들었으나 한림지구무장대는 석은개-사근포 골짜기에 매복대기 하였다가 토벌대장 이하 수많은 경찰을 사살하는 등 적들에게 큰 타격을 줌으로써 인민들의 선거투쟁을 전적으로 보장하였다. 금역납읍지대에도 30여명의 토벌대놈들이 기어들었으나 애월지구무장대가 적의 기도를, 제때에 분쇄하고 선거운동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였다.

무장대와 인민들은 호상련계를 강화하여 선거를 보장함으로써 제주도에서는 한줌도 못되는 반동분자들을 제외하고는 총유권자의 85%이상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 참가하는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주도에서는 안세훈, 김달삼, 고진희, 문등용, 강규찬, 리정숙 등 6명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 되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은 제주도인민들에게 커다란 광명을 안겨주었다. 제주도인민은 한나산 창공에 람흥색 공화국 기발을 휘날리며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어 조국통일을 위한 반미애국항쟁을 더욱 힘차게 벌렸다.

이와 관련하여 로동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지난 10월1일 새벽을 기하여 남제주군 남원지서와 중문지서는 인민들의 무장 항쟁에 의하여 습격당하였다. 북제주군 제주읍 오동리에서도 경찰과 인민항쟁부대와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다. 경관 2명과 반동분자 1명이 살해당하였다.“(1948.10.8)
 

                  3) 제주도인민들의 반미애국투쟁에 괴뢰군병사들이 합세

제주도에서의 거세찬 반미애국투쟁은 애국적 인민들 속에서 뿐 아니라 괴뢰군 내부에서까지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인민들의 반미애국투쟁은 국방경비대 대원들을 크게 동요시켰으며 결국은 그들이 인민의 편에 서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게하였다. 이에 대하여 로동신문(1948.5.18)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각지에서 경찰보다 민중측이 우세한 중이며 향보단원과 소위 국방경비대원들 중에서 많은 가담자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경찰과 국방경비대 사이는 자못 험악한 공기를 조성하고 있다. 14일에는 량자간에 충돌이 있었는데 그 리유는 인민항쟁부패에 대하여 경찰은 무조건 발사하였고 국방경비대는 애국항쟁을 수행하는 동포에 대하여 발사를 거부한 것에 기인한다. 경찰은 국방경비대가 민중을 사살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였고 국방경비대는 경찰의 간악함을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14일 제주읍으로 집결하던 국방경비대가 애월면 신암지서 앞을 통행도중 트럭 우에서 지서를 향하여 수십 명 대원이 집중사격을 하여 청사를 파괴시키고 순경에게 부상을 입히었다.”

국방경비대 9련대는 4.3봉기를 전후하여 무장대의 활동을 침묵으로 바라보면서 토벌대들의 동족살상을 증오 배격하였다. 5, 6련대는 방관적인 태도로 무장대와 대치하였다. 11련대 군인들도 악질장교를 제외하고는 국방경비대와 무장대와 무력충돌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일부 애국적 병사들은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외세의존, 망국로선을 결정적으로 반대하고 계속 집단적으로나 단독적으로 탈출 의거하였다. 그들은 대낮에 공개적으로 적기가를 부르면서 인민들의 투쟁을 고무 격려하여 주었다.

제주도인민들의 혁명적 영향 밑에 괴뢰군 애국병사들의 의로운 행동이 날로 확대되었다. 애국병사들은 반일 6.10만세 기념일을 계기로 하여 무장대와의 공동작전 계획하고 군기고에 들어있는 무기를 헤쳐 3대의 트럭에 싣고 동쪽과 서쪽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적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소기의 목적은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무장대는 100여명의 전투원과 현대적 무기를 확보함으로써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6월 18일 정의의 항쟁에 합세한 9련대 문상길 등 4명의 애국병사들은 30만 도민의 이름으로 련대장놈을 총살하였다. 이에 대하여 로동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국방경비대 제11련대장 박진경대령은 18일 오전 3시 15분 제주련대 본부 숙소에 서 암살되여 반동진영에서는 대경실색하여 군정장관 딘 소장이 직접 제주도로 날아가는 등 소란을 연출하고 있다.”(1948. 6. 23)

미제와 리승만 괴뢰도당은 제주도인민들의 항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3,000여명의 괴뢰군과 수천 명의 무장경관, 서북청년단 등 반동테로단을 내몰았으나 유격대와 인민들의 영웅적 항쟁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10월 16일 괴뢰군 14련대장에게 제주도인민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떨구었다.

극비에 붙였던 이 사실이 군인들에게 알려지자 애국적 군인들은 미제와 리승만 역도에 대한 증오와 격분을 금치 못해하였다. 괴뢰군 14련대장이 실토한 것치럼 이때 병사들 중 대부분은 제주도에 가는 것을 희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주도에 가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는 제주도 인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리는 것은 민족과 인민에 대한 반역적 죄악으로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괴뢰군 14련대의 애국적 병사들은 투쟁에 앞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내놓았다.

“동포여러분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로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들은 조국의 방위와 인민의 권리와 복리보호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인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명령에 대해서 조선인민의 아들로서 이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동포를 위하여 일어섰다.”(려수인민보 1948. 10. 24, 동아일보 1948.11.30)

애국적 군인들은 1948년 10월 19일 밤 비상소집 나팔소리와 함께 집결하였다. 한 지휘관은 대렬 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로 병사들의 기세를 돋구었다.

“때는 왔습니다. 치욕스러운 국방군 살이에서 벗어나 민족의 군대, 인민의 군대가 될 때는 왔습니다.” “동족학살에로 내모는 양키들과 리승만 역도를 반대하여 궐기하자”,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제주도 애국적 인민학살을 반대하자”, “미군은 남조선에서 즉시 철수하라”, “리승만 단독정부를 타도하자”(동아일보 1948. 10. 29)

애국병사들 3,000여명은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기와 탄알을 공급받고 악질장교들을 처단한 후 새벽2시에 병영을 출발하여 려수시내로 진격하였다. 려수시가를 완전히 장악한 폭동군은 순천에 돌입하여 그 지방도 해방하였다. 그들은 순천재판소 앞 광장에서 무력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에는 해방된 시민들도 합류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남조선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아침(21일)부터 반란군은 시가지시위행진을 하는 것이었다. 행렬을 보면 선두에는 트럭을 탄 무장반란군, 다음으로는 머리에 흰 수건을 맨 남녀중학생과 일반청년, 끝으로 트럭을 탄 무장반란군으로 그들은 전부 약 1천 명가량 되는데 어디서 나온 것인지 손에는 모두 인민공화국기를 들고 적기가를 부르는 것이었다.”(경향신문 1948. 10. 28) 괴뢰군 14련대 군인들과 해방지역인민들의 투쟁은 제주도인민들의 투쟁에, 커다란 고무적 영향을 주었다.
 

                                     4) 제주도인민들의 유격투쟁 계속 전개
 
제주도인민들은 괴뢰군 14련대 반란에서 고무받으면서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고 투쟁에서 새로운 유리한 정세를 조성해나갔다. 놈들의 가혹한 탄압만행으로 유격투쟁이 장기화된 조건하에서 적극적인 방위전을 전개하면서 무장 대오를 정비강화하고 전투정치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광범한 인민대중을 투쟁대오에 묶어세우는 사업을 적극 진행하였다.

전투 지휘부는 투쟁대오를 일층강화하기 위하여 종래의 련대를 소부대로 재편성하고 유격투쟁을 계속해나가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제주도인민무장대는 1948년 말부터 다음해 초에 이르는 놈들의 동기 토벌의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면서 무장투쟁을 계속 전개하여 놈들의 기도를 도처에서 격파하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천망에오름에서 벌어진 토벌대와의 조우전에서 세련된 유격술로 괴뢰군 토벌대 30여명을 살상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인민들과 전투적 련계를 강화하면서 계속 용감히 투쟁하였다. 발이옥 부근에 잠복중인 인민무장대원들 15명은 한나산 기슭에서 작전행동 중이던 반동 경찰부대와 교전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미제는 로버트 놈을 시켜 토벌대와 공동작전으로 제주도항쟁을 진압하려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이번에는 제주도를 무인의 섬, 불모의 섬으로 전변시키려는 제2작전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하였다. 당시 로동신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는 도내각처에서 군경의 제2작전을 분쇄하면서 더한층 치렬한 진공을 계속하고 있는바 ‘로력자’ 지의 보도에 의하면 최근의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다.

“지난달(10월) 24일 오후 3시경 남제주군 안덕면일대에 돌입한 인민유격부대는 괴뢰군경합동부대 약 70명을 급습하여 격전 30분 만에 적의 지휘관 6명을 비롯하여 그의 대부분을 괴멸시키고 아울러 권총 1정 , 동 실탄 12발, 99식 장총 5정을 로획하였다. 또한 지난달 23에 중문면 속칭 ‘령실암’ 동쪽방향 약 1킬로 지점에서 인민유격부대는 ‘한청원’ 6명을 생포하고 뢰경찰 10여명을 소탕하였다. 한편 지난달 21일 한림면과 안덕면의 경계점인 속칭 ‘군한길’에서도 유격부대와 괴뢰군경 간에 격전이 있었으며 이날 한림면 금악리의 속칭 ‘돌오름’에서 인민유격부대는 모슬포지서의 괴뢰군경 약 50명을 공격하여 그의 대 부분을 괴멸시켰다.”(1948. 11. 12)

10월 28일 제주인민유격대는 남원, 위미 등 토벌대지휘소를 기습하여 그것을 점령하고 파괴 소각하였으며 감금된 수많은 애국자들을 구출하여 적의 지휘체계를 마비혼란시켰다. 련이어 의귀, 한남, 수망, 봉홍 일대를 습격하여 인민의 원쑤를 족쳐버렸다. 이러한 투쟁은 11월 7일을 전후하여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인민유격대는 구좌면 평대, 세화, 상도, 한동, 금녕 등지에 기습하여 악질주구들과 반동들을 숙청 처단함으로써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유격대의 한 부대는 11월초순 중문 토벌대지휘소와 야외에서 침식하던 국군토벌대를 모조리 쓸어버리고 달려 나온 인민들에게 대중정치치사업을 진행하여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다른 한 부대는 애월지서를 공격하여 적의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이를 원호해 나선 유격대 특공대 60여명은 적 응원대와 조우하자 맹렬한 공격으로 수십 명을 살상하고 보총 17정을 탈취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특공대는 유격대 본대와의 긴밀한 련계밑에 적후방보급로, 통신, 교통망을 파괴 절단하여 쩍의 기도를 파탄시키고 체포 구금된 애국자들 을 구출하였다.

4.3봉기이래 인민유격대가 발간한 기관지 ‘혈하’가 광범히 발간 배포되어 인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로력자’지의 보도에 의하면 10월 12일 하루에만도 제주읍내 각처에 수 백매가 붙어 있었고 읍 인민들의 집에도 배달 되였으며 또한 같은 날에는 그림 있는 선전화 35매가 읍내 각처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11월 중순 모슬포 일대를 공격한 인민유격대는 미제의 간첩 허목사 등 극반동들을 처단하고 시내에 격문을 눈보라처럼 뿌려 인민들과 괴뢰군병사들을 투쟁에로 불러 일으켰다. 그 영향 하에 애국병사 18명은 완전무장 한 채 의거하여 무장대에 합류함으로써 인민무장력을 더한층 강화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1948년 11월 20일 괴뢰국회에서 미군 장기주둔안을 통과시킨 후 제주도인민항쟁을 완전진압하기 위한 또 하나의 책동으로 성벽을 구축하고 전략촌을 만드는 등으로 제주도를 악마의 수라장으로 전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인민무장대는 인민들과 긴밀한 련계 밑에 놈들에게 맹렬한 군사 정치적 타격을 가하였다. 12월에 들어서면서 무장대는 전투태세를 정비 강화하여 서광리, 건온동, 그리고 안덕, 지순, 덕수 일대의 토벌대를 기습하여 놈들의 준동을 물리치면서 봉쇄의 성을 쌓기 전에 저장해두었던 식량을 구해내온 전과를 거두었다.

제주도인민들의 무장 항쟁은 1949년에 이르러서도 정초부터 온갖 난관을 박차고 치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눈 녹인 물에 우려먹으면서도 놈들의 가혹한 살륙만행이 계속되고 있는 속에서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혁명의 수위에 모실 그날을 그리며 ‘김일성 장군의 노래’, ‘제주도 빨찌산의 노래’, ‘유격대행진곡’, ‘적기가’, ‘인터나쇼날’ 등 혁명의 노래, 투쟁의 노래들을 힘 있게 부르면서 항쟁 의 격랑을 세차게 일으켰다.

한나산기슭 밀림지대에서 련일 벌어진 치렬한 전투에서 많은 경찰들이 소멸되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는 놈들의 유격대진멸을 위한 ‘3월공세’에 대처하여 놈들의 대토벌로부처 인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하여 무장력을 정예부대로 강화하며 부양가족들과 비전투원들을 대담하게 부락으로 돌려보내는 한편 부락민과 련계를 강화 발전시키는 등 새 체제를 확립하고 투쟁을 계속해나갔다.

무장대는 놈들의 계속되는 폭압 만행속에서도 영웅적인 애국투쟁을 전개하여 적들을 전률케 하였다. 3월 9일 놈들이 ‘빨지산근절’을 위해 대병력을 동원하여 노리오름(애월면)에 기어들자 유격대는 적들을 유리한 지점에 유인하여 맹렬한 공격으로 30명을 살상하고 40여정의 총과 적지 않은 식량, 담배 등을 로획하여 전투원들에게 새 힘을 주었다.

4.3항쟁 1돌을 맞이한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원 밑에 무장 항쟁 을 더욱 치렬히 전개하였다. 극히 부분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여더라도 4월 3, 4일 이틀 동안에 모슬포 고산지대와 성산포, 세화, 표선, 서귀포, 무릉 등지에서 치렬한 전투가 있었고 4월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도처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전개되었다.

제주도인민들은 항쟁의 무기를 높이 추켜들고 과감한 투쟁을 벌려 봉기한지 1년 만에 한나산을 중심으로 한 부락들에 해방지구를 만들었다. 이지역들에서는 인민위원회가 회복되였고 민주개혁이 실시 되였으며 정당, 사회단체가 활동하였다. 1949년 6월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이 결성되고 새로운 조국의 평화적통일 방책이 제시된 데서 고무를 받은 제주도의 애국적 인민들은 국토완성을 위한 피어린 투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6월 어느 날 유격대는 2대의 군용트럭에 갈아탄 수많은 적의 무장력과 반공 선전대 놈들을 화순경찰 지서앞 ‘개뽁다기’에서 멸살시키였다. 이 참패를 만회하기위해 백롬담밑 큰 ‘장월이’까지 기어든 미군과 괴뢰군 놈들에게도 무리죽음을 주었다. 놈들의 그 어떠한 발악적 책동도 공화국의 기치를 영예롭게 휘날리며 새 승리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고 있는 제주도인민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제주도인민유격대의 투쟁은 날을 따라 계속되였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유격대에 대한 ‘진멸정책’은 전고미문의 야만적 방법으로 감행되었으나 애국적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인민유격대는 자기 대오를 더욱 정비하면서 새로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로동신문에 매일같이 소개된 전투보도는 그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 5월 조국전선중앙위원회 호소문에 호응하여 제주도인민들은 헤아릴 수 없는 난관과 적들의 모진 탄압 속에서도 악전고투하면서 ‘5.30망국단선’분쇄와 조국통일의 급속한 실현을 위해서 과감하게 싸웠다.

이와 같이 미제침략자들과 리승만 괴뢰역도의 류례 없이 가혹한 학정 밑에서 제주도인 민들이 벌린 4.3인민봉기, 대중적인 무장 항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치렬하게 전개되었다. 제주도의 온 섬 땅은 어디라 할 것 없이 빨찌산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들의 애국의 넋이 깃들지 않은 지역이 없다. 4.3봉기의 규모와 관련하여 괴뢰정부와 제주도 행정당국이 축소하여 발표한 통계수자를 보더라도 다음과 같다.

“공비(유격대와 입산한 인민) 출몰 수 73,576명, 인명피해 80,065명, 관공서 피습 및 소실 228동, 학교소실 224개, 피해부락수 160부락, 피해호수 15,228호, 리재호수 35,921동(제주도 19663. 8호,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 262페지)

이 통계자료는 괴뢰도당들의 립장이 반영된 것으로서 항쟁의 규모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도 놈들이 당한 손실과 함께 제주도인민들이 봉기에서 얼마나 많은 전과를 거두었는가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2011.3.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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