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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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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18 17:26 조회2,4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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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탐험 [21]

 

문화(Culture)란 무엇인가?

 

인터넷 공간을 많이 뒤져봐도 문화에 대해 딱 부러진 정의를 내린 곳이 없다. 하지만 필자가 피부로 느끼는 대로 문화를 정의하자면 의식의 표현물이 문화이고, ‘창조의 표현물이 문화라고 생각한다. 열 조각의 돌을 공무원에게 주면 일렬로 나열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정원사에게 주면 아름다운 정원이 생길 것이다. 나열하는 것은 문화의 산물이 아니지만 정원은 문화의 산물이다. 창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창조력과 의식의 수준에 따라 고급문화도 형성되고 저급문화도 형성된다. 저자는 1993년에 저술한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에서 싱가포르 문화의 단면들을 소개한 적 있다. 쇼핑몰에 가면 코너에마다 묵은 먼지 대신에 앙증맞은 분수가 있고 조각이 있고 꽃이 있다. 저자는 이를 코너 문화라고 표현한 적 있다. 1982년의 싱가포르 육교는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돼 있었고, 육교의 생김새가 아취형에다 예술적 향을 내뿜고 있었다. 저자는 이를 육교 문화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거리문화하커센터 문화도 있었다. 캘리포니아 남쪽 지역에는 고층건물에 지붕문화가 돋보였다. 발코니 문화도 돋보였다. 중세에는 바로크 건축문화’ ‘로코코 건축 문화도 있었다. 이처럼 문화가 곧 국가사회의 특징이요 신분일 것이다.

 

문화는 또한 경영의 수단이기도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계급을 가지고 아랫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을 경영으로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정당의 경우 당대표가 되면 자기 생각을 당의 생각이라며 밀어붙인다.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수렴하여 대안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당을 움직인다. 이것이 한국식 정당문화다. 저급 문화인 것이다.

 

반면 선진국들에서는 국가기관이나 기업체나 다 같이 문화에 의한 경영을 한다. 최고경영자가 무엇을 핵심 가치로 여기는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아랫사람들이 그 가치를 공유하면, 아랫사람들은 일일이 통제를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창의력을 발휘하여 최고경영자의 입장에 서서 일을 추진한다. 문화가 수많은 사원들을 하나로 뭉치는 콘크리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단합을 생명으로 여기는 공산주의 사회가 문화를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를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좌익에는 학습 문화와 선동 문화가 있지만 우익에는 없다.

 

가두리 문화로부터 해방 문화로

 

전두환이 박정희 대통령의 바로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것은 나라의 홍복이다. 두 시대의 특징을 대조시켜 본다면 아마도 박정희는 문명(Civilization)을 도약시킨 지도자였고, 전두환은 문화(Culture)를 도약시킨 지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배고픔과 질병으로 얼룩졌던 시대에 가장 간절했던 것은 물질문명이었다. 물질적 삶을 개선시킨 지도자가 바로 박정희였다. 박정희가 세워놓고 깔아놓은 물질적 인프라 위에 문화적 인프라를 깔아놓은 지도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가두리 문화권을 개방 문화권으로 전환시킨 리더가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제일의 가치는 삶의 질’(Quality of Life)이다. 그런데 우리는 북괴라는 존재로 인해 오랫동안 이데올로기가 드리워진 가두리 장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삶의 질은 물질적 만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만족에 의해서도 증진된다. 물질민족이냐 문화민족이냐? 어느 민족이나 다 같이 문화민족이기를 갈구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로 통제된 가두리 사회에서는 창의력이 위축되고, 사고의 다양성과 개성화가 위축된다. 문화가 창달될 수 없는 것이다. 전두환은 이 위축된 공간을 해방시켰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국민 제1의 가치로 자리매김해왔던 이데올로기를 2의 가치로 내리게 했고, 그 일등 자리에 삶의 질이라는, 당시의 국민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를 올려놓았다. 삶의 질? 당시로서는 배부른 잠꼬대처럼 들렸다. 사고가 갇혀있던 국민들에게 전두환은 돈키호테였다. 이는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의식 혁명이었다. 화통하고 대범하고 선이 굵은 지도자가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의식 혁명이 아니던가.

 

세계의 지도를 바꾼 고르바초프는 1985년부터 개방(글라스노스트)과 개혁(페레스트로이카)을 위한 신사고를 주도하여 의식 혁명을 주도했다. 창의력을 가두어놓고서는 서방과의 대결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88127, 그는 UN에서 253자의 짧은 연설을 했다. 일방적으로 군축과 냉전 종식을 선언한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동서냉전 당사국 국민들에 채워졌던 이데올로기라는 족쇄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이제부터 인류 최고의 가치가 삶의 질로 옮겨갔다. 그런데 전두환은 냉전의 벽이 아니라 열전의 벽이 존재하는 위험한 상태에서 고르바초프보다 8년 먼저 개혁개방을 실천했다.

 

1990년을 전후해 우리나라 모든 언론들은 고르바초프의 개방과 신사고에 대해서는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라는 낯선 단어들로 뉴스를 도배했다. 그런데 1981년부터 시작된 전두환의 개방과 신사고 아니 의식혁명에 대해서는 그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전자는 외국 기자들을 따라서 보도한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외국 기자가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 언론인들의 관찰력이 안목(眼目)이 아니라 견목(犬目)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심하게도 역사는 이런 견목들에 의해 기록돼 온 것이다.

 

헌법을 통해 문화국가 만들기

 

전두환은 역사상 처음으로 청와대에 교육문화수석실을 따로 신설했다. 선진국이 되려면 경제의 선진국지위와 문화의 선진국지위를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계(史界)의 전문가 40명으로 문화 창달 위원회를 구성하여 문화 창달에 대한 지혜를 개발케 했다. ‘창의적인 전통문화의 계승과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자율, 창의, 다양성을 촉진시키기 위한 시책들을 폈다. 공무원이 맡아왔던 문화예술 관련 기관장을 각 분야의 전문가 중에서 선정하도록 했다. 예산이 없었다. 문화공보부 예산이 전체 예산의 0.4%에 불과했다. 재원을 조달하는 방법은 기부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기업이 문예진흥기금을 지원하면 손비처리를 하도록 문화예술진흥법도 수정했다. 개인들도 기부할 수 있도록 했다. 방송광고비의 일정액을 문화예술로 돌리기도 했다.

 

문화 공간 건설

 

1967년 국립중앙극장이 개관되었다. 이어서 1970년대에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문예회관이 건립되었지만,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초라했다. 음악, 연극, 무용 등 여러 분야의 공연이 같은 무대를 사용해야 했고, 음악만 하더라도 교향악, 오페라, 실내악, 독창, 독주회가 같은 공간에서 열리는 데다 예술과 무관한 대중 집회들을 여는 장소로 악용되는 등 질서가 없었다.

 

전두환이 문화 공간 확충에 박차를 가하게 된 계기는 역시 88올림픽이었다. 한 세기에 한 번 찾아올까말까 한 올림픽을 기회로 삼지 않으면 어떻게 한국이 문화국가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겠는가? 인구 1천만이 넘는 서울에 전용음악당도 없고, 현대적인 미술관이 없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의 전당’, 1984년에 착공하여 1988215일 개관했다. 전두환은 예술의 전당을 프랑스 퐁피두 센터나 영국의 바비칸 센터수준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국립국악원은 국립극장에 더부살이를 해왔다. 독립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예술의 전당 이웃 공간에 국립국악원을 건립했다.

 

 

  

이어서 과천에 국립현대미술관을 건립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경복궁 내 민속박물관 자리에 개관했지만, 공간이 비좁아 늘 아쉬운 소리들이 이어졌다. 1973년에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겼지만 곁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미술관은 단지 미술품을 수집, 전시, 보존하는 곳만이 아니라 교육장 기능과 국제교류 기능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외조각장까지를 갖춘 건물을 지으려면 2만평이 필요했다. 1986825일 과천의 서울대공원 옆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준공되었다. 곁방살이로 지내오던 국사편찬위원회의 건물도 짓고, 학술원도 새로 지었다. 정부가 문화 공간 확충에 나서자 대기업들도 따라 나섰다. 호암아트홀, 리틀엔젤스예술회관, 각종 사립박물관, 소극장, 개인미술관, 조각공원 등 문화공간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났다. 문화 중흥의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각 지방마다 문화 공간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