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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들춰보는 추억의 한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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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2-19 18:24 조회16,3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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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에 들춰보는 추억의 한 편린


푸시킨의 시가 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설움의 날들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이 오리니” 푸시킨은 현재를 어렵다 했고, 미래를 넓다 했다. 푸시킨의 시각을 존중하면서 필자는 또 다른 시각을 보태고 싶다.  인생의 역사는 맥주병과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현실은 병목처럼 좁아 보이고, 지나간 과거는 맥주병의 몸통처럼 넓고 넉넉하게 보이는 것이다. 현실은 괴로워도 일단 과거의 세계로 넘어가면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한다.


월남전이 한창 시작된 1967년의 소위, 월남에 가면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된다는 말이 유행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달픈 만류를 뿌리치고, 필자는 지원서를 냈다. 강원도 오음리 분지! 파월 장병들에게 월남의 기후, 지형, 작전요령에 이르기까지의 기본지식을 알려주고 새로운 환경에 대비하기 위한 전투훈련을 시켜준다는 "파월장병교육대"가 설치돼 있던 곳이다.


설치 목적으로 보아서는 한없이 고마워해야 할 곳이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기억하기조차 싫을 만큼 기분 나쁜 곳이었다. 춘천에서 오음리 행 버스를 탔다. 험준한 산을 여러 구비 넘었다. 달팽이처럼 꼬불꼬불한 비포장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릴 때마다 천야만야 새카맣게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가 그야말로 아찔했다. 두 시간 정도 마음을 졸이고 나니 깊은 분지가 나타났다.


항아리처럼 푹 파여진 분지는 완전 찜통이었다. 바람 한 점 없고, 땅이 뿜어내는 열기에 숨이 콱콱 막혔다. 악질적인 기후가 월남을 쏙 빼 닮았다. 이 찜통 속에서 6월 무더위를 견뎌낸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말이 교육대이지 교육과 훈련은 시간 때우기였다. 솔잎마저 축축 늘어지는 땡볕 더위에 새롭게 배우는 것도 없이 하루 종일 철모를 쓰고 뜨거운 직사관선에 노출된다는 건 고마운 훈련이 아니라 일부러 주는 고통으로 보였다.


대위나 소령 급의 피교육자들이 나서서 돈을 걷었다. 기간요원들에게 잘 봐달라는 뜻으로 전달되는 돈이었다. 약효는 곧바로 나타났다. 많은 훈련이 생략되고 축소됐다. 막상 월남에 가보니 오음리 교육대는 전혀 불필요한 곳이었다. 월남에 필요한 지식은 월남 현지에 가서 야 비로소 흡수할 수 있었다. 오음리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교육관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지어낸 소설에 불과했다. 파월장병교육대는 군의 자리를 늘리기 위해 이용한 그럴듯한 명분을 악용한 부정한 곳으로 보였다. 몇몇 장군들의 빗나간 발상으로 인해 국가예산이 낭비되고 32만 명의 파월 장병이 불필요하게 생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는 마당이라 누구나 가족을 그리워했다. 살아서 돌아올지 죽어서 돌아올지 모른다며 풀들이 죽어 있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전우들의 심리적 약점을 악용하여 적은 돈이나마 착취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야비한 행위들이었다.


출국하는 날 아침, 파월장병들은 춘천까지 다섯 시간에 걸쳐 뙤약볕 아래 도보 행군을 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발목이 아파 거의가 절뚝거렸다. 더위를 먹고 쓰러지는 장병도 많았다. 군대 상식대로라면 이들은 차량으로 수송됐어야 했다. 수송 예산도 이미 반영됐을 것이다. 아마도 문서상에는 차량으로 수송한 것으로 꾸며 놓고 그 휘발유를 내다 팔았을 것이라는 불평들도 있었다.


고통의 오음리에서 나와 같이 훈련을 받고 파월한 하사관들 중 여러 사람들이 전사했다. 전사한 전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주머니에서 코 묻은 돈을 받아낸 교육대 간부들의 모습들이 오버랩 되어 대조되기도 했다.  


1951년 1.4 후퇴 때 충청도 음성으로 피난을 나갔다 돌아오니 온 마을이 불타 있었다. 구둘 밑에 파묻은 쌀과 김치가 불에 그을려 매연 맛이 배어 버렸다. 주민들에 먹을 게 없었다. 20대 후반의 젊은 여인이 머리에 꽃을 달고 히죽 히죽 웃고 다녔다. 어쩌다 제 정신이 돌면 4살 난 여아를 부둥켜안았고, 정신이 나가면 팽개쳤다.


어느 날 그 여인은 마을 밖 신작로 배수로에 하늘을 보고 잠들었다. 여아는 엄마의 젖에 입술을 대고 이따금씩 눈만 깜박였다. 파리 떼가 여아의 눈에 몰려들었다. 쫓을 힘도 없었다. 어쩌다 눈을 감았다 뜨면 조금 날아올랐다 다시 내려앉았다. 눈 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습기를 빨기 위해!


우리 사회에는 위의 여아의 처지로 상징될 수 있는 불쌍한 인구가 있고, 파리 떼로 상징될 수 있는 냉혈의 인구들이 있다. 위의 교육대 이야기는 일반 사회와 비교해보면 애교 급에 불과하겠지만 순수해야 할 군에서 더군다나 목숨을 걸고 이역만리로 떠나가는 전우들을 상대로 이런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액수에 관계없이 성격 자체로 일단은 서글픈 일이었다.  


춘천역이었다. 부산행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고국을 등지고 전쟁터를 향해 떠난다는 기막힌 절박감보다는 우선 지긋지긋한 악마의 소굴을 빠져 나왔다는 안도감이 앞섰다. 여기저기서 콧노래가 들렸다. 웅성웅성 이야기 소리도 들렸다. 기차가 춘천역에서 점점 멀어지자 차츰 이별의 아픔과 전쟁의 공포감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부산에 이르기까지, 기차는 무거운 침묵만 싣고 달렸다. 부산항! 군악대가 경쾌한 군가와 유행가를 쉴 새 없이 연주했지만 배웅 나온 가족이나 떠나는 병사들의 무거운 마음에 별로 기별을 주지 못했다. 여학생들이 단체로 나와서 쉴 새 없이 노래를 불러줬지만, 장병들의 눈망울은 가족을 찾는 데만 분주했다.


"'사랑해", "몸조심해", "무사히 돌아와야 해, 꼭, 알았지?"; 이리 저리 가족을 찾아내서 몇 마디 나누기도 바쁘게 환송행사는 끝이 나고 말았다. 생전 처음 보는 2만 톤짜리 군함에 승선했다. 고층 아파트 몇 개를 포개놓은 것만큼 거대했다.


투박한 뱃고동 소리가 무겁게 깔리면서 배는 부두로부터 한 뼘씩 멀어져 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점점 작아져 갔다. 손바닥을 펴서 수도 없이 흔들었지만 냉엄한 운명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고야 말았다.


몇몇 병사가 가지고 있던 라디오에서 "당신과 나 사이에"라는 애조 띈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몇 번씩 울려 퍼지는 뱃고동 소리는 터질 듯한 이별의 아픔을 더욱 아프게 했고, 파월장병과 그 가족들 모두의 가슴에 일생 내내 지워지지 않는 긴 여운을 남겨놓았을 것이다.


살아서 돌아온 용사들에게는 추억의 연주곡으로, 전사한 용사들의 가족에게는 가슴을 에이는 진혼곡으로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 부산항 전체가 손바닥만 하게 멀어져 가더니 이내 수평선 밖으로 사라졌다. 가슴을 에이던 이별의 애절함도 몽롱한 과거 속으로 희미하고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서서히 배 멀미가 찾아들었다. 청소구역이 할당됐다. 함상 생활이라는 또 하나의 군대 생활이 강요되었다. 상냥하고 통통하게 생긴 대위가 오음리에서부터 나를 친근하게 대했다. 그는 나를 보좌관이라고도 불렀고 때로는 애인이라고도 불렀다. 그런 그가 또 함상에서 나를 보좌관이라며 살살 꼬여 이용했다. 그가 맡은 일은 모조리 내 차지가 됐다.


나는 그를 대신해서 동료들에게 청소구역을 할당하고 청소상태를 검사하고 다녔다. 원래 나는 위가 약해서 배 멀미가 남보다 더 심했다. 나도 남들처럼 주어진 구역만 청소하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4년 선배인 대위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더러는 청소를 하지 않고 꾸물대며 짜증을 내는 장교들도 있었다. 나보다 훨씬 튼튼한데도.


3일이 지나니까 배 멀미가 가시고 차츰 얼굴들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갑판 위로 올라와 항해를 즐겼다. 망망대해를 마치 내 몸으로 직접 가르고 가는 것 같은 쾌감도 들었다. 시커먼 바다 물을 내려다보면서 깊고 험한 물살에 공포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르는 물고기,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에 한동안 정신을 빼앗기기도 했다. 망망대해의 밤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손을 길게 뻗으면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별들이 내려와 있었다. 수없이 많은 별똥별이 ‘늘어진 연줄’처럼 기다란 곡선을 그리며 쉴 새 없이 떨어져 먼 바다 위에 내렸다.


흰 가운을 입은 필리핀 종업원이 딸랑이 종을 흔들고 다니면서 식사시간을 알렸다. 함정의 장교식당은 넓고 깨끗했으며 피아노도 한 대 놓여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피아노에 앉아 재즈곡을 치고 나가는 미국인 종업원이 멋있어 보였다. 식탁에는 영어로 쓰인 메뉴판이 놓여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내가 앉은 식탁 사람들은 나에게 메뉴를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라고 해서 영문 메뉴판에 익숙한 건 아니었지만 단지 필리핀 종업원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은 나의 영어 실력을 신뢰했다. 내가 메뉴를 정해 종업원에게 알려주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화롯가에 둘러앉은 꼬마들처럼 "미투 미투"(me too)를 반복했다. 미투 식 주문 때문에 주방에는 며칠 안 가서 닭고기와 쇠고기가 동이 났다.


반면 다소 낯선 양고기와 칠면조 고기 같은 것들은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하여튼 식탁에 앉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주문하고 서비스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옛날 옛적의 황금시절(good old days)을 상징하는 풍요가 아닐 수 없었다.


일주일 만에 나트랑이라는 유명한 항구에 도착했다. 누구도 그 항구가 무슨 항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내리라고 해서 배에서 내렸고, 타라고 해서 트럭에 탔다. 트럭은 나트랑 시의 후미진 골목길을 통과하여 태양열에 검게 타버린 대지 사이를 뚫고 달렸다. 억세게 생긴 검은 색 가시나무 관목들이 열대 태양에 검게 탄 도로변에 듬성듬성 늘어서 있었다.


그 후 3년이 지나 나는 나트랑 항구를 휴양 차 들렸다. 이때 다시 본 나트랑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끝없이 길게 뻗어간 백사장을 따라 야자수가 줄을 이어 늘어섰고, 길고 긴 실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와 한가롭게 부서지고 있었다. 밤이면 또 다른 정취가 무대의 제2막을 장식했다. 낮게 드리워진 십자성, 교교히 비치는 달빛, 화려한 전등불이 어우러져 일궈내는 앙상블이 남국의 정취를 한껏 북돋아주었다. 야자수 밑에 모여 앉은 선남선녀들은 조개구이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술잔을 기울여가며 밤 가는 줄 몰랐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그 곳에 지금은 무엇이 있을까? 40년 전에 내가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 윤기 흐르는 분위기 그리고 내가 느꼈던 시적인 환상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공산화된 땅은 사람 사는 땅이 아닌 것이다.






2011.2.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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