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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리 사건의 진실과 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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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4-05 17:33 조회14,9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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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촌리 사건의 진실과 허위


4.3왜곡에 앞장 선 정부보고서와 추미애 등 좌익들은 군경에 의한 무차별 대량살상론을 전개하기 위해 북촌리 사건을 내건다. 이 사건은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1949.1.17 아침, 일부 군병력이 이동 중 북촌마을 어귀에서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군인 2명이 사망했는데 2연대가 이에 대한 무분별한 보복으로 마을을 불태우고 무장대와 내통한 빨갱이 가족을 찾아낸다며 주민 약 400명을 처형" 했는데 이 사건이 바로 토벌대가 저지른 대표적인 대량살상 사건이라는 것이다.


정부보고서가 얼마나 왜곡됐는지에 대한 자료적 접근은 본 홈페이지 최근글 “북촌리 사건의 진실(4.3 정부보고서의 왜곡)”에 집약돼 있다. 여기에서는 3인의 증언을 요약하여 정부보고서가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증언자 한수섭(1931)은 당시 오현중학 2년생으로 1949년 1월 17일 이른바 북촌리 학살이 이루어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살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고, 훗날 제주 경찰서장을 한 분이다.


전정택(1925)은 당시 함덕지서 순경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1월 17일, 2연대 예하부대로 ‘북촌리에서 공비로부터 습격을 받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집단학살을 주도한 제3대대와 한 곳에 있었던 사람이다.


김덕선(1926)은 당시 제주 농업학교 4학년이었고, 1049년 5월 3일부터 제주경찰에 투신한 분으로 당시 제주도 동쪽에 있는 작은 섬 ‘우도’ 포구에서 돗대가 3개 달린 큰 범선에 경찰과 함께 타고 제주항으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북촌항에 대피하였다가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분이다.


이 세 분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북촌리 사건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49.1.17 북촌리 집단총살 사건의 뿌리는 1948.6.15 사건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북초등학교 사건의 뿌리는 1948년 6월 1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덕선은 제주농업학교 4학년으로 임시 휴교기간을 맞아 제주도 동쪽에 동떨어진 ‘우도’에 소재한 본가에 왔다가 개학한다는 연락을 받고 1948년 6월 15일, ‘오도’포구에서 돛대가 3개나 달린 큰 범선에 승선했다.


배는 우도지서장(경사 양태수), 인천출신 진순경, 이장 김용석, 순경 백하룡과 그의 처 김선심 및 그의 장남, 등으로 구성된 일행 16명을 태우고 제주항으로 가기 위해 오전 10시 경에 출항했다.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리 앞 해상에 이르자 풍랑을 만나 도저히 항해를 할 수 없었다.


이때에 잠수기선 2척이 북촌항으로 입항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탄 배도 일기가 호전될 때까지 대피할 요량으로 포구에 배를 댔다. 배를 대자마자 건장한 청년 3명(편의상 갑,을,병으로 칭함)이 접근하여 이것저것 물었다. 배가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누가 탔느냐?


우리는 그들이 민보단인줄 착각하고 우도에서 왔고 제주로 가는 중이며, 이 배에는 우도지서장도 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들이 즉시 배를 좀 보아야 하겠다며 즉시 승선했다. 을과 병이 배 멀미로 누워있는 지서장 양태수와 진순경에게 순간적으로 접근했다. ‘을’은 지서장 옆에 놓아둔 카빈총 총구를 잡고, ‘병’은 진순경 옆에 놓아두었던 44식 총을 잡아 빼려고 격투를 했다. 바로 이 순간 ‘갑’이 달려들어 권총으로 양경사와 진순경을 쏘았다. 양경사는 즉사하여 바다에 버렸고, 진순경은 옆구리에 총을 맞고 몽둥이로 머리를 맞아 뇌가 노출될 상태에 이르렀다.         


포구에는 청장년층 남녀 30여 명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은 우리 모두와 진순경을 하선하게 하여 밧줄로 결박하고, 3-4전의 총과 철창 등으로 무장한 청년 7-8명의 감시를 받으면서 2시간 정도 끌려갔다. 끌려간 곳은 밀림 지대인 ‘선흘곶’이고 도착된 시각은 일몰 시각이었다. 북촌리에 공비 및 동조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공비 연대와 연결돼 있었다. 


                              북촌리는 1.17집단학살 이전에도 공비촌


산에 도착하자마자 진순경은 몽둥이로 맞아 숨졌고, 김덕선을 포함한 14명은 결박된 상태로 3-4일간 감금되었다가 공비 연대본부가 있는 것으로 1시간 정도 이동했다. 매복해 있던 보초가 ‘석’하고 암호를 묻자 연행하는 자가 ‘탄’이라 확인하는 절차가 끝나자 우리는 곧 그자에게 인계됐다. 일행은 2시간 정도 그를 따라갔고, 도착한 곳은 그들의 연대본부였다. 그들의 병력은 5-60명 정도였으며 그 중에는 국경출신이 있었는지 ‘국경동무’하고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우리들이 도망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결박을 풀어주었지만 감시는 삼엄했다. 1박을 하고 그 다음 날 저녁에 우리를 처단하여 북촌포구에서 발생한 사건을 완전 범죄로 은닉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인근에서 토벌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경찰이 사찰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공비 1명을 생포했다. 그 공비는 우리를 연행했던 바로 그 공비였다. 취조한 결과 ‘우도에 사는 사람들이 북촌포구로부터 많이 잡혀왔는데 오늘 밤에 처단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강노반 중위가 토벌대를 인솔하고 긴급 출동하여 우리 일행 14명이 구사일생으로 구출됐다. 이 부대는 생포한 공비를 추궁하여 공비들의 은신처를 찾아냈다. 생포된 공비를 따라가 보니 북촌리 마을 안에 있는 한 가옥의 마당구석에서 돌로 교묘하게 위장된 굴의 입구를 찾아냈고, 그 곳에 은신해 있는 공비 7명을 생포했다.


그중의 1명인 김진태는 배에서 내릴 때 김덕선의 우측 눈을 발로 차 바다에 떨어지게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2003년 6월 당시 “4.3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으로 신고 돼 있었다. 김덕선은 그 굴을 지금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증언한다.


북촌리 사건은 좌익 및 정부보고서가 주장하듯이 단지 군인 수송차량이 북촌리를 지나다가 매복한 공비들의 기습을 받아 2명이 전사한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라 당시 권총을 휴대할 만큼 지휘자급 공비들이 북촌마을에 있었을 정도로 북촌 마을은 공비의 마을이라는 인식이 토벌대와 주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좌익의 뿌리가 깊은 곳이었다는 뜻이고, 그 뿌리가 1월 17일 집단총살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을 안았던 그 범선은 후에 4.3주동자들이 해외로 도피하는데 이용되었다고 한다.  


                                     49.1.17 북촌리 집단 총살 사건


당시 함덕지서는 백주에 공비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전소되었다. 함덕지서는 부득이 함덕초등학교 교장관사로 이전했다. 그리고 총살사건을 주도한 2연대 소속의 제3대대는 바로 함덕초등학교에 주둔하였다. 당시 3대대 본부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대대장 정대위, 부관 이중위, 김 소위 등 소위 2명 등 장교는 불과 5명이었다. 


제3대대장은 북촌마을을 지나다가 공비들로부터 기습을 당해 2명의 부하를 잃자, 평소부터 가져왔던 북촌리에 대한 불신이 폭발하여 북촌리에 대한 적개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3대대는 즉시 북촌리 사람들을 북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한 군인이 나서서 마을 사람들이에 이렇게 말했다.


“폭도가 군을 습격하고 북촌마을로 도망쳤다. 교전 현장에 폭도가 버리고 간 것들에는 돼지고기 반찬이 있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폭도는 이 동네 사람이다. 부락을 포위하고 폭도를 색출한 것이다. 폭도는 자진해서 나와라”


이렇게 여러 차례 말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에 군인은 “군인 가족 나와라” “경찰가족 나와라” 명령하여 군인가족과 경찰 가족을 일단 추려냈다. 그리고 나중에는 “민보단 가족 나와라” 이렇게 소리쳤다. ‘민보단’은 경찰을 돕는 청장년조직이었다. 이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우하고 몰려나갔다. 화가 난 군인은 여기에서 발포를 하여 3명이 사망했다. 


군은 나머지 사람들을 1열에 10명씩 4열종대로 세웠다. 이렇게 1차로 40명, 2차로 40명을 운동장 서쪽 밭으로 데려가서 사살했다. 그리고 또 다른 40명을 밭으로 데려가 막 사살하려는 순간 대대부관 이 중위가 차량을 타고 달려와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3대대 부관 이중위가 제주시에 있는 2연대 본부에서 열린 참모회의에 가 회의를 하는 도중 함병선 연대장이 집단총살 소식을 듣고 이 중위에게 “당장 가서 중지시켜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북촌리 희생자는 400명이 아니라 잘 해야 120명


별도로 분리된 군,경, 민보단 가족은 현장에서 방면되지 않고, 몇 차례 나누어 함덕 대대본부로 이송되었다. 증언자 한수섭도 여기에 포함되어 대대본부로 이송되었다. 일부는 방면되었지만 30여 명은 여러 날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당시 군에 협조했던 북촌사람이 앞에 나서서 평소 자기와 감정이 안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수사관에게 “저것들 전부 빨갱이들이다”라고 무고하여 그 다음날 30명 정도가 총살되었다. 또한 군은 부락경비를 서는 과정에서 공비와 내통하여 경비를 제대로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3-4명을 더 사살했다.


따라서 한수섭이 그날(1.17) 처음부터 북국민학교에서부터 죽 지켜본 바에 의하면 당시 제3대대에 의해 사살된 사람은 120명선을 넘지 않는다. 북국민학교에서 40명씩 두 차례 80명, 주민집결과정에서 초소근무를 태만히 했거나 내통한 혐의가 있다는 사람들, 민보단장을 포함하여 4-5명, 민보단 가족 분리과정에서 3명, 함덕 대대분부에서 무고된 사람 30여 명이 전부였다.


                              북촌리는 1.17 사건 직후에도 공비촌


이 엄청난 사건을 치른 북촌리는 그 후 깨끗하게 정리되었는가? 당시 경찰출신 전정택에 의하면 그렇지가 않다. 북촌리 사건 발생 18일 후인 2월 4일, 제2연대 병력이 무기를 싣고 북촌리 동쪽 일주로에서 또 공비들의 기습을 받아 전멸 당했다. 함덕지서에 근무하는 부원하 순경이 전사했고, 민간인 운전수 1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비들은 총을 모두 가져갔고, 전사한 군인들 및 부원화 순경의 옷을 모두 벗겨 갔고 시신은 불태워 버렸다. 북촌리에서는 1월 17일 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또 후에도 공비들의 소굴이었다는 생각을 굳히게 하는 사건들이 이어진 것이다.


                         함병선 대령이 집단 총살사건의 원흉이다?


정부보고서는 1.17 북촌리 대향학살 사건을 함병선과 이승만과 미군정이 주도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들이 북촌리 사건의 원흉이라고 지목하며 책임을 묻고 있지만 이는 허구다.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선-선무 후-토벌’ 전략으로 한라산 공비를 사실상 전멸시킨 주인공이었다. 제주주민들은 2연대의 공적을 높이 찬양했고 기리기 위해 서귀포에 ‘함병선 대령의 공덕비’를 건립했고, 1949년 7월 7일에는 도민 전체의 이름으로 한라산에 ‘평정비’를 건립했다. 그런데 정부보고서와 좌파들은 함병선 대령을 무차별한 양민학살자로 매도했다.



2011.4.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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