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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총파업과 10월대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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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4-16 15:52 조회17,3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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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9월 총파업


1982년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의 66-73쪽에는 “남조선로동운동자들의 9월총파업”이라는 소제목으로 9월 총파업의 실상이 소개돼 있다. 9월 총파업은 소련이 일화 200만엔을 내려 보내 일으킨 계획적인 폭동이었기에 북한은 이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 소개한 파업실상을 아래에 요약한다.


1946년 9월 총파업에서 시작하여 10월 인민 항쟁에 이어지는 대중적 항쟁은 미군정의 철폐와 인민정권수립이라는 정권투쟁의 요구를 내세우고 진행된 전인민적투쟁이었다. 로동계급은 절박한 생활문제 해결은 ‘정치적인 해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강력한 정치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9월 초순에는 전평 및 16개 산별 노동조합 대표자 회의에서 ‘남조선 총파업 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이어서 남조선 전역의 기업소, 공장들에서는 종업원회의를 열고 파업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파업투쟁위원회'는 정치 선동 및 선전 사업으로 사상적 준비를 진행했다. 총파업에 대한 통일적 지휘를 위해 16개 산업별 파업투쟁위원회들이 결성되었고,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전주, 삼척, 마산, 군산 등 산업 중심지역에 지역별 총파업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가 경성됐다.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는 9월 15일에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미군정청에 들이대고 9월 23일까지 화답할 것을 요구했다. 1)노동자, 사무원, 모든 시민들에게 하루 3홉 이상의 쌀을 배급하라 2) 물가 등귀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3) 모든 실업자들에게 집과 일과 쌀을 달라 4) 공장폐쇄 및 해고 절대 반대, 노동운동의 절대자유 보장, 일체 반동테러를 배격한다 5)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로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6)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자들을 즉시 석방하라 7) 언론, 출판, 시위, 집회, 결사,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8)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대안’(주: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즉시 철회하라 9) 해방일보, 조선인민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된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들을 석방하라 10)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라 11) 미군정을 즉시 철폐하고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 12) 소미공동위원회를 속개하고 즉시 민주조선독립을 실현시켜라.

이런 요구가 미군정에 의해 거부되자 총파업투쟁이 철도노동자들을 선두로 시작됐다.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는 9월 24일 0시를 기해 ”전민족을 구출하고 생존과 자유의 길을 열고 자주독립을 위하여
4만 철도로동자들을 선두로 사생존망의 민족적 투쟁을 시작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7,000여명의 부산지구철도로동자들이 열차운행을 중지시키고, 부산에서 사상역에 이르는 30리 구간에는 운행을 중지한 열차가 쌍줄로 꽉 들어찼다. 서울에서는 경성철도공장 3,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오전 9시를 기해 직장별로 종업원회의를 열고 파업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울역 노동자들과 함께 용산기관구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용산기관구 농성자 수는 1만 3,000명이 넘었다. 서울, 부산, 광주, 목포, 대구, 안동 등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경부선, 호남선, 전라선, 중앙선 등 모든 철도가 마비되었다.

철도 노동자들의 뒤를 이어 체신, 전기, 금속, 광산, 해운, 교통, 운수, 화학, 식료, 섬유, 토건, 출판, 일반봉급자들이 모두 동참했다. 서울의 중앙전신국, 중앙전화국, 중앙우편국을 비롯한 25개 체신기관 4,000여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지방의 체신노동자들도 동참했다. 이로써 남조선의 우편, 전신 전화 망이 일체 마비되었다.


경성전기회사 노동자 3,000여명도 파업에 돌입했다. 각 항구의 해운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전국적으로 26만 3,974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9월 30일 이른 새벽, 미제침략군의 지휘 밑에 탱크를 앞세운 무장경찰 4,000여명과 테러단이 용산기관구로 들이닥쳤다. 육박전이 4-5시간 동안 계속됐다. 미제는 40여명의 노동자들을 살상하고, 1,700여명의 노동자들을 대량 검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상의 북한 자료는 네이버백과가 정리한 내용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결국 9월총파업은 전평의 패배로 마감되었지만 대구에서는 파업의 불씨가 살아나 10월 1일 대구폭동으로 연결되었다.

                                      10.1대구폭동 사건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본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46년 대구폭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간첩 이석(李錫)이었다. 1972년 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해방 후의 대구는 남한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세력이 들끓었다. 이명영에 의하면 간첩 이석(李錫)은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로 1946년 10월, 대구 폭동사건에 간여했고, 중앙당 간부로 자리를 옮긴 후 체포, 투옥됐다가 6.25 전쟁 때 구출되어 인민군을 따라 평양으로 월북했다.


1955년 4월, 이석은 다시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쪽으로 상륙하여, 경남 마산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2개의 친목계 모임을 통해 40명을 조직하여 의식화 작업을 벌였다. 3.15부정선거에 규탄하는 움직임이 일자 그는 이 40명으로 하여금 마산사태에 적극 개입하여 사태를 격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대구폭동을 주도한 간첩 이석이 1955년부터 다시 경남에 본부를 차리고 국가전복을 위한 또 다른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 4월 11일, MBC는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 부위에 박혀 있는 김주열(마산상고)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방송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4.19가 촉발됐다. 최루탄은 곡사포처럼 공중으로 쏘지 사람의 얼굴을 조준하여 직사포처럼 쏘지 않는다. 그런데 김주열군의 눈퉁이에는 최루탄이 아주 깊이 박혀 바다 속에서 오랜 동안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빠져 나오지 않았다. 이는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대규모 시위의 불쏘시개는 언제나 시체가 담당했고, 따라서 간첩들은 시위를 촉발시키기 위해 언제나 시체를 만들어 냈다.

이명영에 의하면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대규모 시위로 점화시킨 존재가 바로 간첩 이석이 이끄는 간첩부대였다는 것이다.


1980년 4월 17일, 김대중은 서울대 학생회 초청 연설에서는 이런 연설을 했다,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신이었다.” 김상진은 서울농대 학생으로 1975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며 분신자살을 했고, 이로 인해 수그러들던 1970년대의 학생 시위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 김대중은 바로 이런 희생자들이 또 다시 등장하여 혁명의 불을 지펴야 한다고 선동했고, 그런 선동은 1980년 5월의 무법천지를 이끌어 냈다.   

 

10월 대구폭동에 대한 기록이, '영남일보가 1947년에 간행한' <경북총감>에 수록돼 있지만 이 내용은 대구사태를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네이버백과가 균형감 있는 정리를 해놓았다. 아래는 네이버백과가 정리한 내용이다.  


당시 미군정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념 때문인지,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치활동을 허용하여 왔다. 공산분자들은 이러한 미군정의 관용성을 자기들의 세력 확장에 이용하였으며, 갖가지 파괴활동과 파업 등을 유발하면서 사회교란을 일삼았다. 때문에 사회는 항상 불안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좌우익의 투쟁으로 소란스러웠다. 이에 미군정은 더 이상 공산당의 활동을 방치할 수 없었으므로 공산당을 불법화하였다. 그리고 지하에서 암약하는 공산당의 불법활동을 근절하기 위하여 1946년 9월 7일 박헌영·이강국·이주하 등 조선공산당 간부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이를 눈치 챈 박헌영과 이강국은 북으로 넘어갔고, 이주하는 체포되었다. 공산당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반발로 여러 가지 파업과 폭력사건 등을 유발하려고 책동하여 9월 24일 전국적인 규모의 철도파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각계각층에는 공산당 프락치가 많이 침투해 있었으므로 공산당의 파업조종은 비교적 용이하였다. 이 철도파업은 서울의 용산철도국 기관구 내에 본거지를 둔 공산분자의 조종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식량난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당시의 철도파업은 서민생활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공산당은 이와 같은 사회불안을 더욱 조장하고, 철도 파업을 다른 분야에까지 파급시키기 위해 배후 조종과 선동을 격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구에서는 좌익단체의 하나인 대구노동평의회가 주동이 되어 철도파업에 대한 동정파업을 일으키려고, ‘남조선 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의 간판을 내걸고 각 직장의 파업을 조종·선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찰은 그 단체가 불법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동 투쟁위원회의 간판을 떼어버리고, 파업조종자의 색출과 파업의 금지에 나섰다. 이로 인해 경찰과의 충돌이 벌어졌으며, 이 사태가 대구의 10·1폭동사건을 유발한 직접적 원인과 동기가 되었다. 


대구폭동사건은 대구노동평의회측과 경찰의 충돌이 폭력사태로 발전되면서 격화되었다. 10월 1일 오후에 수천 명의 공장 근로자들이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면서 시위를 시작, 금정로에 있는 노동평의회 본부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이 불법시위자들을 해산시키려고 공포를 쏘며 제지하였다. 이날의 데모는 밤늦게 진압되었지만, 군중은 2일 아침 일찍부터 다시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군중은 경찰서를 습격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였고, 경찰관이나 고급관리 및 사회 주요인사들의 집을 습격하는 등 완전히 폭도화 하였다. 폭도의 일부는 이웃 달성으로 달려가 그곳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청을 불사르는 등의 폭동을 일으켰다. 이 난동으로 경찰관 여러 명이 살해되었고, 달성 군수 등 여러 명이 불에 타 죽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당국은 2일 오후 늦게 대구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근 각지의 경찰병력을 집결시키는 한편, 미군부대의 응원을 받아 데모 진압과 치안 회복을 서둘렀다. 이 폭동의 완전 진압은 다음날 3일 충청남북도의 경찰병력 700여 명이 증파됨으로써 가능하였다.


당국은 이 폭동사건으로 희생된 자가 사망자 20명, 중상자 50명, 행방불명자 30명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실상은 그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간인이나 경찰관 측 사망자가 각각 40명이 넘었으며, 부상자는 몇 백 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폭동혐의로 검거된 자는 5,000여 명에 달하였다.  대구폭동사건을 계기로 삼남지방(三南地方)은 거의 무법천지로 변하였고, 경상도·전라도·충청도, 그리고 제주도에서까지 연쇄적으로 크고 작은 소요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한 여파는 서울·경기 지방에까지 파급되어 산발적인 소요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주·개성·연백·홍성 등지에서도 소요사건이 벌어졌으며, 1946년 10월 22일에는 미군정청·서울역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 등을 습격할 계획이 있었음이 21일 밤 좌익단체 요원인 민청원(民靑員) 18명을 검거함으로써 밝혀졌다. 이 소요사건들은 모두 공산당의 지령과 공작에 의하여 일어난 것으로, 단순한 시위나 파업 등의 온건한 것이 아니었다. 살상·방화·습격 등은 대구의 10·1폭동사건의 연장이며 재판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소요는 대구폭동사건의 영향을 직접 많이 받은 경상도 일원(一圓)이 가장 심하여, 경찰관서·면사무소 등이 불타고 습격된 일이 비일비재하며 공무원들의 인적 피해도 많았다. 대구에 인접한 영천에서는 경찰서와 군청이 모두 불에 탔으며, 경찰관이 습격을 받는 등 소요의 양상이 대구사건과 방불하였다. 이 사건은 그 여파가 거의 전국에 미쳤고, 1개월 이상 계속되었다. 당국은 이를 계기로 공산분자의 색출과 검거에 박차를 가하여 폭동사건 주모자들의 다수를 월북 직전에 체포하여 극형에 처하였다.

역사를 좌경적 시각으로 기록하는 위키백과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은 '공산당 활동 불법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다. 박헌영계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정면 대항하겠다"며 더욱 급진적 성향을 띄었다. 이에 대한 첫 반응이 공산당과 전평이 벌인 9월 총파업이었다. 미군정은 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을 진압했지만 꺼진 불 속에서 대구라는 불씨가 새로운 화재를 유발했다.

대구는 9월 23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하여 10월 1일까지 파업 및 시위가 지속됐다. 그런데 10월 1일 저녁, 대구시청(현 경상감영공원)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황말용, 김종태 라는 노동자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시체는 늘 선동의 불쏘시개감이 되었다. 10월 2일 아침, 노동자들이 대거 시내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시민들과 학생들도 합세했다. 만여 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케 했다. 경찰이 항복을 한 것이다.

시위대가 경찰권을 인수하려 하는 순간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경찰관들이 자위권을 발동해 순식간에 17명의 시위대를 사살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군중들이 삽시에 폭도로 변했다. 군중들은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고,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폭도로 변한 군중들은 부잣집과 과거 친일파들의 가옥을 털어 생필품이나 식량등을 약탈했다.

미군정은 이튿날인 10월 2일에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하지만 시위는 대구 인근인 경산군, 성주군, 영천군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민중들과 미군정간의 충돌이 이어졌다. 시위대는 달성으로 달려가 그곳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청을 불살랐다. 여러 명의 경찰관이 살해됐고, 군수 등 여러 명이 불에 타 죽었다.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사망자가 공무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역시 경북 지역에서만 관청 건물 4동과 일반 건물 6동이 불에 타 전소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10.1 사건 참가자의 시각에서 이 사건은 전국적인 규모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대중 운동이다.


                                           북한이 밝힌 대구폭동


1982년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의 74-83쪽에는 “1946년 10월 인민항쟁”이라는 중간 제목이 있다. 이를 아래에 요약한다.


대구에서의 10월 1일 사태는 인민들의 봉기가 남조선 전역에로 확대되는 전인민적 항쟁의 시초였다. 대구에서는 9월 25일부터 40여개 공장 기업소 로동자들이 총파업을 계속하고 있었고 10월 1일에는 1,000여명의 시민들이 배고파 못살겠다, 쌀을 내노라 하고 부르짖으며 쌀 투쟁에 나섰다. 대구시 총파업투쟁위원회가 자리 잡고 있는 대구 역전광장은 10월 1일 저녁때부터 수천 명의 파업로동자들과 청년학생들, 실업자들,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놈들이 해산하지 않으면 쏜다 하고 넘벼들었을 때 애어린 한 제사공장 녀성로동자가 앞가슴을 헤치며 ‘이놈들아 쏘아 보아라’ 고 맞받아 나섰다. 경찰놈들은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고 영웅적인 제사공은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군중들 속에서 뛰어나온 또 한사람이 연단에 올라 ‘살인 경찰을 처단하라’ 외쳤을 때 놈들은 그의 가슴에도 총탄을 박았다. 또 한사람이 연단에 올라가 ‘저 야수들을 잡아라’ 호소하였을 때 그도 총탄에 쓰러졌다. 연이어 6명의 영웅적인 인민의 아들딸들이 고귀한 선혈로 광장을 물들이며 쓰러졌다. 이 참경 앞에서 대구시민들의 분노는 극한점에 이르게 되었다.


10월 2일 아침 ‘살인경찰을 처단하라’ ‘감금된 애국자들을 석방하라’ 외치며 파업로동자 대열이 파업단 본부 앞으로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대구의과대학 학생들을 비롯한 대학, 전문, 중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구시의 중심부를 뒤덮었다. 관공서, 금융기관, 회사들은 문을 닫고 상인들은 영업을 거두었다. 전날 희생된 동무들의 영구를 앞세우고 수만 군중들은 시내를 누비며 시위하였다. 대구경찰서를 포위하고 13,000명의 군중의 기세에 질겁한 반동경찰은 서장 놈 이하 군중 앞에 전면 투항하고 무장을 바쳤다. 감방의 애국자들은 모두 구출되었다.


기세충천한 봉기군중은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북조선에서와 같은 민주개혁을 실시하라!’ ‘쏘미공동위원회를 속개하라!’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대구시는 완전히 인민들 손에 장악되었다. 로동자와 학생들이 치안을 담당하였다. 서울을 비롯한 외부와의 일체 전신, 전화 연락은 끊어졌다. 대구 인민봉기는 민주화 통일을 지향하고 인민정권 수립을 요구하는 높은 정치적 목적을 내세운 애국적 항쟁이었다.


봉기의 확대를 두려워한 미제는 야수적 탄압을 강행하여 나섰다. 미제 침략군은 10월 2일 오후6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어서 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야수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봉기의 불길은 경상남북도의 대다수 시, 군 을 휩쓸었는데 10.2-5일 사이에 달성, 성주, 칠곡, 영천, 의성, 고령, 경산, 군위, 예천을 비롯한 경상북도 19개 군을 휩쓸었고 뒤 이어 10월 10일까지에는 부산, 마산, 통영, 창녕 등 경상남도 18개 군을 휩쓸었다.


군중들은 쇠망치, 괭이, 도끼, 날창, 참대, 장총 등을 가지고 괴뢰경찰서, 지서, 군청, 면사무소, 신한공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본부 등을 들이쳐서 경찰관과 테러분자, 악질관리, 지주들을 처단한 것은 남조선 인민들의 빛나는 업적이었다.

이런 항쟁은 강원도의 강릉, 삼척, 광주, 연백, 개풍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말부터 11월 중순에 이르는 기간에는 전남지방에서 항쟁이 세차게 벌어졌다. 광주화순탄광노동자들의 10월 30일 폭동에 이어 목포, 부안, 광주, 광산, 나주, 함평, 담양, 보성, 해남, 영광, 장성, 장흥, 영암, 광양 등 15개 시군으로 확대되었다."
 
11월 중순까지 약 2개월 간이나 계속된 10월민중항쟁은 73개 시군을 휩쓸었다. 10월 항쟁은 8.15이후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여 진행한 가장 대규모적인 남조선인민들의 혁명적 진출이었다. 10월 민중항쟁에 참여한 남조선 인민 수는 2,273,438명이었다.(도별 인원수가 이 책 81쪽에 도표로 작성되어 있으나 생략함)
. .항쟁대오가 가는 곳에는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 울려 퍼졌고 김일성장군 만세의 위대한 구호가 장엄한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미제는 1만여 명의 노동자와 1만2천여 명의 농민을 위시하여 10월 항쟁에서 무려 25,000여명의 애국적 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15,000여명을 검거 투옥하였다. 어떤 지방에서는 애국적 인민들을 산채로 손발을 잘라 죽이기도 하고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기도 했다. 항쟁기간 적통치기관이 파괴되고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어 행정권이 일시적이나마 인민들의 손에 장악 되었고, 미제의 앞잡이인 악질경찰과 반동분자들이 인민들의 손에 의하여 처단되었다. 이는 남조선인민 투쟁의 역사적인 쾌거였다.


대구폭동은 9월 총파업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10월 1일 대구에서 지펴진 폭동은 그 후 2개월 동안 경상남북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남도, 충청도, 서울 등 전국적인 반미폭동으로 발전하였다. 소련이 남로당을 통해 300만엔이라는 자금을 지원해주고 투쟁방법을 알려주고 배후 조종한 가장 큰 반미폭동 공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47년 2월 초 남로당 중앙당이 전국 조직에 보낸 “3.1기념투쟁에 관한 지령”에 나타나 있듯이 제주4.3사건은 전국총파업과 10월 폭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2011.4.1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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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6 광주지검 잘했다! 지만원 2011-07-22 25265 448
2165 입을 닫고 침묵하는 동안 박근혜는 계속 침몰한다 지만원 2011-07-22 20070 314
2164 이명박, 조현오 이렇게 할 거면 자리 내놔라! 지만원 2011-07-22 15187 277
2163 김백일 장군을 지키자! 지만원 2011-07-22 18169 228
2162 의약분업, 이대로 둘 것인가?(證人) 댓글(3) 證人 2011-07-22 11806 123
2161 병영문화 개선에 대하여 지만원 2011-07-21 14054 203
2160 가슴이 머리보다 앞서면, 애국하려다 매국한다! 지만원 2011-07-20 16648 292
2159 우리 사회에 ‘통 큰 기부자’가 없는 이유 지만원 2011-07-20 15187 277
2158 크레인 불법 점거한 김진숙 뗑깡의 본질 지만원 2011-07-19 22617 284
2157 부동산 관련 세금, 노무현 이전으로 환원해야 지만원 2011-07-19 16869 243
2156 통일세, 민주당이 집권할 때 북에 넘겨줄 돈! 지만원 2011-07-19 13922 252
2155 제2용산참사 선동하는손학규 망언 규탄(서석구) 지만원 2011-07-17 18330 219
2154 그래도 1년중 11개월은 휴가상태가 아니냐(팔광) 댓글(6) 팔광 2011-07-16 13477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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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 군 내부 사고는 순전히 지휘관들 탓! 지만원 2011-07-15 15971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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