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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세력과 이승만 중 누가 민주주주의 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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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4-19 16:00 조회17,2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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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세력과 이승만 중 누가 민주주주의 세웠나?


                                            역사 모르는 4.19세력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에서 악전고투할 때 소련은 미국의 끈질긴 요청에도 참전하지 않고 오직 세계공산화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자 지금이 챙길 때다 싶어 8월 8일 대일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만주와 북한으로 진격하여 8월 24일 북한을 점령하고 35세에 불과한 김일성을 내세워 1946년 2월 8일 북한임시정부를 수립하고 8개 부처로 구성된 사실상의 소련내각을 만들어 토지국유화와 산업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로써 북한은 러시아의 괴뢰가 되어 오늘날의 공산 전체주의 왕조의 기초를 닦았다. 여기까지의 사실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겨우 데모한 주제에 민주주의 터를 닦아준 국부를 발밑에 깔고 뭉개다니!


반면 이승만은 무엇을 했는가? 어수룩한 미국을 움직여가면서 남한사회를 사실상 통제했던 공산주자들을 숙청-청소하고, 이 나라에 3권이 분립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터전을 닦았다. 김구와 김규식의 끈질긴 반대와 태클을 이겨내면서 민주주의 헌법을 기초하고 미국의 도움을 얻어 현대식 국가기관들을 설치하고 행정인력과 과학인력을 양성했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다부지게 시국을 다잡으면서 이런 민주주의의 틀을 설치하지 않고 우왕좌왕했더라면 4.19세력은 시위할 공간을 갖기는커녕 김일성 집단에 의해 총 맞아 죽고 아오지탄광으로 끌려가 죽었을 것이다. 이를 안다면 지금처럼 천방지축으로 교만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한 시기는 1945년 10월 16일, 당시 나이 71세였다. 그리고 그는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1848년 국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이 됐다.


1960년에 그는 86세 고령이었다. 3.15부정선거를 명령하지도 않았고,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라는 명령도 하지 않았다. 유혈사태가 발생하고서야 비로소 이기붕과 최인규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았고, 그래서 그는 그 책임을 지고 학생들의 기개를 칭찬하면서 순순히 물러났다.


만일 그가 빨갱이들이 말하는 대로 독재자였다면 그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고 김일성처럼 시위학생들을 처형하거나 탄광으로 보냈을 것이다. 대통령직에서 선뜻 물러난 그에 대해 우리는 수족들을 잘못 기용했고, 잘못 관리했다는 원망은 할 수 있어도 그를 독재자로 매도하고 그를 분단의 원흉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시위는 혈기만 있으면 누구나 다 한다, 그게 무슨 큰 자랑인가? 이 나라에는 시위보다 더 엄청난 기여를 하고도 말없이 국가의 장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다. 시위 한번 한 것 가지고 무얼 그리 나대는가? 제일 하기 쉬운 게 혈기를 가지고 시위장에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젊은 혈기에 시위에 나서서 돌을 던지고 고함을 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4.19 시위대처럼 젊은 혈기와 의협심을 발산했던가? 그런 시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던 해방시절, 이 나라에 민주주의 시스템을 건설하고 이 나라를 적화통일로부터 지켜내는 일은 4.19세력이 수만 개 있어도 해낼 수 없다.


당시 이승만은 세계 지도자 가운데 학력이 가장 눈부신 최고의 엘리트였고, 그래서 어수룩한 미국의 힘을 눈부시게 활용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기름진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4.19학생들 수천만을 모아놓는다 해도 엄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다. 4.19세력은 이를 냉철히 알아야 할 것이다.


부정선거도 시대의 산물이다. 부정선거는 지금도 있을 수 있다. 이기붕과 최인규와 정치깡패들이 저지른 사소한 일을 침소봉대하여, ‘김일성 왕조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민주주의 국가 체제를 구축해 준 국부’를 시위대 학생들의 발밑에 깔고 뭉개서야 어찌 그 사람들이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솔직히 4.19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발산할 수 있었던 혈기로 밖에 보지 않는다. 당시 필자는 고3이어서 알 건 다 안다. 4.19는 부정선거에 저항하여 파괴하고 돌을 던진 시위였지. 이승만이 했던 것처럼 민주주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건설행위는 아니었다. 시위를 가지고는 건설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오늘 4.19 51주기를 맞아 이인수 박사와 이승만기념사업회 측이 4.19 묘지에 가서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하여 사과를 하려했지만 제지당했다. 한마디로 속도 좁고 인사성도 없고, 교만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그들의 업적(?)이 이승만의 업적보다 더 훌륭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4.19세력이 제대로 된 사고방식과 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세워준 민주주의 토대에 대해 감사해 하고, 이 나라를 김일성의 야욕으로부터 지켜낸 위대한 업적에 대해 존경을 표한 후에 86세의 노령으로 수족들을 잘 못 통제한 데 대한 서운함과 안타까움 정도를 표하는 것이 도리에 맞고 사리에 맞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남한 학생운동의 순수성에 대하여            


1977년 평양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전후 남조선청년학생운동”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이 책의 235-270쪽에 수록돼 있는 이 책의 부록인 '전후 남조선청년학생들의 주요투쟁일지’가 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부터 1974년까지 20년에 걸쳐 무려 344건의 학생운동이 수록돼 있다. 북한이 이렇게 자세한 역사기록을 만들었다는 것은 남한 학생운동을 북한이 지휘했고 북한이 그 기록을 정리한 ‘북한의 역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특히 이 책의 229쪽 하단-230쪽 상단에는 남조선청년학생들의 투쟁 전략과 전술이 요약돼 있다. 우리가 남한 사회에서 산발적으로 보았던 것들이 북한 자료들을 보니까 모두 북한이 만들어준 전략과 전술에 기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남조선 청년학생들은 지난 투쟁 행정을 통하여 위대한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남조선의 진보적 청년학생들은 우선 각종 형태의 합법 또는 비합법적 써클들과 연구회들을 수많이 결성하고 수령님의 위대한 주체사상과 혁명이론 그리고 전력 전술을 연구 체득하기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의 선진적 학생들은 진보적인 중학교 교원들과 지식인들을 망라하여 1955년부터 ‘독서회’를 결성하고 위대한수령 김일성동지의 로작과 수령님의 혁명력사를 학습하였으며 공산주의 교양강좌까지 조직하였다.(120쪽)


예를 들어 1960년에 발생한 학생시위 사건은 38개나 된다. 4.19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2월 28일에는 경북고, 대구고 등 1,000여명이 시청광장과 도지사집 앞에서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했다. 3월 5일에는 서울의 고교와 대학들이 민주주의수호를 내걸고 시위했다. 3월8일에는 대전고등학교를 비롯한 대전의 고교생 1,000여명이 학생에게 자유를 달라며 시위했다.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25,000여 학생-시민들이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했고 이 시위는 계속되어 4월 인민봉기로 이어졌다. 


3월 24일, 부산 고교생 1,000여명이 학원자유화를 외치며 시위했다. 이어서 . . 4월 11일에는 마산에서 35,000여 시민들이 이승만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했다. 4월 18일, 고대 3만명이 정권타도를 외치며 시위했다. 4월 19일, 서울에서 10만, 부산에서 7만, 광주에서 3만의 시민들이 정권타도 시위를 했다. 4월 20일, 서울의 학생 시민들이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하고 군경과 충동했고, 전주, 수원, 이리, 청주 등을 통해 남조선 전체에 확대됐다.


4월 21, 22, 23일에는 인천에서 확산, 4월 23일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4월 25일에는 서울의 1만여 학생들이 중앙청으로 진격하면서 경찰과 육박전을 폈고, 진보적 학생들이 “4.19청년학생동맹”을 결성했다. 4월 26일, 서울 50만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경무대를 완전포위하고 경찰기관들을 습격했다. 4월 인민봉기의 절정을 이뤘고,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있었다. 이 이후로도 학생시위는 연말까지 24회나 지속되었다.


이상이 북한 노동당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1977년에 발간한 ”전후 남조선청년학생운동‘에 수록된 남조선학생운동사에서 뽑은 4.19주변의 학생운동 역사다.    

 

당시 시위대들은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통일을 외쳤다. 구순한 거물간첩 김용규는 이렇게 증언한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 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 그래서 1964년 3월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서클을 두었고, 당 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의 6.3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년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년 7월의 3선개헌반대-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8월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4.19데모의 색깔이 이상한 이유 

대한민국 역사 전체는 차치하고라도 1960년 한 해 동안에 발생한 학생 시위사건을 보면 4.19 이전에도 학생데모가 있었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경무대를 비워준 이후에도 학생데모는 연속해서 발생했다. 그렇다면 4월 전체의 학생데모는 3.15부정선거 때문만이 아니었다. 3.15부정선거는 순간적이고고 극히 한시적인 구실에 불과했다. 1960년에 발생한 38개의 학생데모들은 모두가 붉은 데모였다.

4.19 이전의 데모도 붉은 데모였고, 4.19 이후 즉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후의 데모도 붉은 색깔의 데모였다. 그렇다면 4월 전체의 데모가 붉은 데모였던 것이다. 이 땅에서 민주주의를 즐기고, 그 가치를 김일성과 비교해서 음미하는 인간이라면 이승만에 대해 하루에도 열차례씩은 절을 해야 할 것이다.
 
반면 이승만을 독자자로 모는 인간들은 남한의 민주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이 나라의 공산화를 위해 몸 바치는 열등 인간들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승만을 깔고 앉아 자기들을 이승만 위에 세우려고 하는 좀비인간들을 곱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 잘난 데모 하나 한 것을 가지고 얼마동안이나 울궈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는지 그게 알고 싶다. 나는 이런 인간들을 거리의 건달 이상으로 보아주지 않는다.

   
     3.15부정선거에 대한 불만을 4.19폭력시위로 점화시킨 자들은 간첩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논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46년 대구폭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간첩 이석(李錫)이었다. 1972년 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해방 후의 대구는 남한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세력이 들끓었다. 이명영에 의하면 간첩 이석(李錫)은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로 1946년 10월, 대구 폭동사건에 간여했고, 중앙당 간부로 자리를 옮긴 후 체포, 투옥됐다가 6.25 전쟁 때 구출되어 인민군을 따라 평양으로 월북했다.


1955년 4월, 이석은 다시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쪽으로 상륙하여, 경남 마산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2개의 친목계 모임을 통해 40명을 조직하여 의식화 작업을 벌였다. 3.15부정선거에 규탄하는 움직임이 일자 그는 이 40명으로 하여금 마산사태에 적극 개입하여 사태를 격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대구폭동을 주도한 간첩 이석이 1955년부터 다시 경남에 본부를 차리고 국가전복을 위한 또 다른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 4월 11일, MBC는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 부위에 박혀 있는 김주열(마산상고)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방송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4.19가 촉발됐다. 최루탄은 곡사포처럼 공중으로 쏘지 사람의 얼굴을 조준하여 직사포처럼 쏘지 않는다. 그런데 김주열군의 눈퉁이에는 최루탄이 아주 깊이 박혀 바다 속에서 오랜 동안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빠져 나오지 않았다. 이는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대규모 시위의 불쏘시개는 언제나 시체가 담당했고, 따라서 간첩들은 시위를 촉발시키기 위해 언제나 시체를 만들어 냈다. 이명영에 의하면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대규모 시위로 점화시킨 존재가 바로 간첩 이석이 이끄는 간첩부대였다는 것이다.


1980년 4월 17일, 김대중은 서울대 학생회 초청 연설에서 이런 선동을 했다,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신이었다.” 김상진은 서울농대 학생으로 1975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며 분신자살을 했고, 이로 인해 수그러들던 1970년대의 학생 시위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 김대중은 바로 이런 희생자들이 또 다시 등장하여 혁명의 불을 지펴야 한다고 선동했고, 그런 선동은 1980년 5월의 무법천지를 이끌어 냈다.   



2011.4.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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