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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의 제주도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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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4-30 17:40 조회15,2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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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의 제주도 상황


                         UN임시위원단 추방을 위한 ‘2.7구국투쟁’


1948년의 한국사회는 1월 8일 UN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련의 통치하에 있는 북한은 그야말로 벌집을 건드린 듯 들끓기 시작했다. 전 지역에 걸쳐 항의집회와 시위를 열었고, 이와 동시에 남한사회 전체에  노동계급을 전사로 하는 시위와 파업과 경찰서 습격 등 파괴활동이 이어졌다. 마치 9월 파업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이런 파업과 파괴활동은 2월 7일에 절정에 이르렀다. 북한 자료에 의하면 이날 하루 동안에 전국적으로 26개 파출소가 습격당해 피해를 입고 무기 등을 피탈 당했다.


“투쟁에 나선 남조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원수들의 피비린 탄압을 불굴의 투지로 싸웠다. 2월 7일 이후 26일까지, 수많은 경찰지서가 녹아나고 악질경찰관, 악질관리, 반동분자 수십명이 처단되었다. 26자루의 총과 481발의 탄약을 빼앗고, 61대의 기관차, 27개의 통신기구, 수많은 다리, 도로를 파괴하고, 83개소의 전신전화선을 끊어버렸다”(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105쪽)


제주도 남로당 역시 중앙남로당의 지령 하에 2.7구국투쟁을 벌였다. 호별방문, 담화, 연설 등을 통해 UN 임시위원단의 침략성과 단선단정의 불법성을 선동하고 경찰서들을 습격했다. 25세의 인민군 사령관 김달삼은 신창, 고산, 저지, 세화, 김녕 등의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폭행과 파괴를 자행했고, 특히 안덕면 사계리에서는 순찰중인 경찰관 2명을 수십 명의 남로당원이 집단 폭행한 후 결박하여 생매장 하려는 순간 기적적으로 구출된 사건이 발생했다.    


‘2.7구국투쟁’ 이후 제주도에는 남로당 중앙당 간부들 즉 선전부장 강문석, 군사부장 이중업, 군사프락치 이재복(주:박정희 포섭한 인물)과 전남도당 조창구, 이창욱 등 이른바 올구(ORG)들이 래도하여 남로당 제주도당을 ‘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했다.  위원장에 강규찬, 군사위원장에 김달삼이 지명되었다. 북한 박설영의 논문에는 이때부터 고농, 빈농, 어민들로 구, 면, 리 단위 무장자위대가 형성되었고, 4월 3일 이전에 8개 지구에 35개 유격근거지를 설치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4월 3일의 기습적 무장 반란 사건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150여정의 총기와 전탄통,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그리고 죽창과 일본도 등으로 무장한 320여명의 훈련된 무장병들과 각 부락에 심어놓은 민애청과 남로당원 수천 명을 동원하여 산과 각지에서 봉화불을 올리고 총성을 울리고 인항가와 적기가를 부르고 단선단정을 반대하자는 취지의 격문을 뿌리고, 12개 경찰지서와 애국인사 우익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해 가지고 일시에 습격하여 살인, 방화, 납치를 자행했다. 북한 논문 박설영은 그의 논문 139쪽에 1948년 8월 20일자 로동신문을 인용하여 4월 3일, 하루에 경찰지서 2개 소각, 경관 11명, 테러단원 11명, 악질반동 10여명을 처단하고 5명의 반동분자에게 중상을 입히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고 기록했다.    

  

4.3을 전후하여 무장유격대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이덕구가 사망했을 때 노획한 극비 상황일지인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일 것이다. 이 극비 보고서는 1948년 3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 무려 4개월 10일간에 이르는 투쟁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을 보면 제주도 적화를 위한 일반적으로 벌이는 무장 기습테러 행위가 3월 18일부터 시작되어 4월 3일에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 5월 10일의 선거를 무력화시킬 때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 인민군이 벌이는 일반적인 테러 행위에 대해 미군정이 토벌을 결심한 시점은 5.10선거가 파탄 난 시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주도만이 유일하게 선거를 치루지 못한 곳이었다. 이에 미군정의 관심을 끈 제주도에는 5월 15일로부터 국방경비대가 전격 투입되고, 내륙으로부터 대규모 지원 경찰 및 청년단이 투입됨으로써 본격적인 토벌적전이 전개되면서 제주도는 쌍방 간의 전투장으로 변하게 되었다. 피해상황을 숫자로만 표현하는 것으로는 4.3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은 공비 사령관이 직접 꼼꼼하게 기록해 놓은 상황일지다. 지면관계상 8개 지역에 설치된 유격대 조직들이 벌인 일방적인 습격상황을 모두 소개할 수 없기에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유격대의 상황일지만 소개하도록 한다. 아래에서 '개'는 경찰관을, 테러단원은 서북청년회 회원들을 의미한다.           


                                
제주읍의 4월 3일(유격대 일지)

   
4월 3일 오전 2시를 기하여 삼양, 화북, 외도의 3개 지서를 일제 습격했다. 삼양지서에서는 경관 6명을 상대로 우군 16명이 99식 소총 1정, 다이너마이트 2발, 휘발유탄 4발을 보유하고 상호 접전 하에 지서 정문까지 육박하여 유리창을 죽창으로 파괴했지만, 적의 발포가 극심한데다가 응원대가 올 것을 염려하여 퇴각했다. 상호간 피해는 없었다.


화북 지서에서는 경관 5명을 상대로 아부대 14명이 99식 소총 1정, 다이너마이트 4발, 휘발유탄 4발 나머지는 창을 가지고 4개 부대로 편성하여 습격했다. 처음에 전선 2개소를 절단하고 수류탄 1발 투척한 결과, 지서 내의 램프에 불이 붙어 지서가 전소했다. 경관 1명이 도주하고, 급사(주: 심부름하는 급사) 1명이 즉사했다. 1개 분대는 경관 사택을 습격하여 경관 부부를 살해하고 카빈소총 1정을 압수했고, 1개 분대는 경관 사택을 습격하여 수류탄을 투척한 결과 경관 1명이 부상했다.


외도 지서에서는 경관 6명을 상대로 아부대 14명이 99식 소총 1정, 다이너마이트 3발, 휘발유탄 3발. 나머지는 창으로 습격하여 경관 1명을 숙청하고 즉시 퇴각했다. 돌아오던 중 노형리 부근에서 적 기동대와 부딪쳤으나 약 5분간 접전한 후 이를 격퇴시켰다.


                             애월면의 4월 3일(유격대 일지)


4월 3일 오전 2시, 구엄, 애월 양개 지서를 습격했다. 구엄지서에서는 개(경관) 9명을 상대로 아 부대 120명이 99식 소총 4정 다이너마이트 5발, 나머지는 죽창으로 습격했다. 숙청 대상 반동 1명당 아부대원 5명씩 배치했고, 지서에는 약 40명을 배치했다. 처음에 지서를 향하여 다이너마이트를 투척하고 그 폭발음을 신호로 일제 습격하기로 하였으나, 애월지서 습격 부대가 약속돼 있던 시각보다 약 30분 전에 습격한데다 구엄과 애월 간의 전선 절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월지서에서 구엄지서에 지원을 요청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사전 발각됐다. 지서 내부에는 개(경관) 3명과 향보단원 2-3명이 있었고 나머지 개(경관) 6명은 집에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를 투척하자 적은 지서 내에서 발사하기 시작했고, 우리 부대도 이에 응전하면서 일보 일보 육박해나갔다. 이 때 악질 개 송원화 집에 배치한 분대는 송원화를 붙잡아 단창으로 찔렀으나 단창을 빼자마자 송은 도주했다.


다른 분대는 반동 2명과 반동 가족 3명을 숙청하고 가옥 2호를 소각한 후 소학교에 집합하여 지서에서 울리는 사이렌을 들으면서 인항가(人抗歌)와 적기가(赤旗歌)를 고창하면서 지서 습격대를 지원하러 갔다. 지서 습격부대와 합류하여 새 공격으로 들어갔으나 약 30분 후 외도(外都) 지서의 기동대가 출동함에 퇴각했다. 우리 유격대 2명 희생됐다.


애월지서를 향해서는 아 부대 약 80명이 습격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고 지서장 송달호에게 경상을 입히고 퇴각했다.


                               한림원의 4월 3일(유격대 일지)


4월 3일 오전2시를 기하여 한림지서, 저지지서, 한림여관, 신창여관, 매립지여관 및 기타 반동 집을 향해 일제히 습격을 단행했다. 한림지서의 개(경관) 7명에 대하여 아 부대 15명 (99식 총 1정, 다이너마이트 12발, 가소린탄 12발)을 배치했고, 한림여관의 개(경관) 7명에 대하여 아 부대 6명(99식총 3정, 군도 1본, 나머지 창)을, 신창여관의 서청(서북청년단) 7명에 대하여는 아 부대 15명 (99식 총 1정, 군도 1본, 나머지는 창)을, 각 경관급 반동 가택에는 나머지 31명 배치했다.


매립지여관에서는 개 1명 및 대청 1명을 숙청했고, 신창여관에서는 서청 7명을 숙청했다. 한림여관에 숙박했든 기동대와도 접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이어 각지에서 투쟁을 전개한 결과 1명은 사택에서 숙청하고, 면장 1명과 독촉(獨促, 독립촉성회) 최고간부 1명에게 각각 부상을 입혔고, 한림지서 습격부대 동무들은 다른 부대들이 적 기동대와 접전하는 총성에 놀라 전부 도피하는 바람에 소총수 1명만 남은 상태였기에 투쟁이 불가능했다.


저지지서 습격은 직전의 누설(푸로파카-트의 발생)로 사전 중지됐고, 전선절단 4개소, 도로파괴 2개소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전에 지정된 집합장소인 ‘미마루 동산’에 전원 집합한 후,  금악(今岳)에 이르기까지 무장 시위를  단행했다. 금악에서 반동이 소지한 일본도 1정을 압수하고 오전 9시 아지트에  귀환하자, 저지지서원 6명과 경찰 후원회원 25명이 금악을 습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수하고 즉시 출동하여 적을 격퇴시키고 후원회원 3명을 포로로 잡아 개전시킨 후에 석방했다


아래는 제주읍 유격대가 제주읍을 상대로 한 일자별 상황일지다.       


3월 18일: 도련리의 악질 향보단을 습격하고 이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반동 가옥 3호를 완전 파괴하고, 반동 7명을 부상시켰다. 향보단이란 55세 이하의 청장년으로 조직된 경찰 보조단체를 말한다.


4월 1일: 영림서원(營林署員) 2명을 포로로 잡고, 3일 후인 4일에 개전시킨 후 석방했다.


4월 3일: 생략

             

4월 4일 밤에는 아군 30명으로 영평리 상동 대청 사무소를 습격하여 사무소를 완전 파괴하고, 문서 일체를 압수했다. 대청 동원 부장 1명을 숙청하고, 반동 2명에게 중상을 주고 돌아오는 도중 월평리 거주 경관의 집을 습격하였으나 경관이 부재중임으로 가옥을 파괴한 후 가옥 약 4분지 1을 소각한 후 의류 다수 약탈했다.


4월 8일에는 4인 1조로 이호리 대청 거두 1명을 숙청하고, 8인 1조로 삼양지서를 제2차 습격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퇴각했다.


4월 12일에는 4인 1조로서 오라리에 거주하는 악질경관 송원화 부친을 숙청한 후 동 가옥을 소각했다.


4월 14일에는 외도지서를 제2차 습격했다. 송칠 동무가 유도작전을 지도하다가 희생당했다.


4월 16일에는 화북에서 우군 5명이 경관과 대청원에게 포위당했으나 권총으로 경관 1명을 즉사케 한 후 전원 무사히 탈출했다.


4월 18일에는 삼양지서를 제3차 습격했다. 경관 16명을 상대로 아부대 22명이 총 6정을 가지고 습격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아부대원 1명이 희생당했다.


4월 19일에는 외도지서를 제3차 습격하여 수류탄을 투척한 결과 경관 1명이 부상되고 지서가 반파되었다.


4월 20일에는 월평리에서 엿장사로 가장한 스파이 2명을 숙청했다.


4월 27일에는 리구장 집에서 경관이 식사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아부대 16명이 이를 포위하였으나 개(경관)은 도주해 버리고 반동 구장 1명을 잡아다가 숙청했다.


4월 28일에는 노형리 2구에서 적 기동부대 22명과 아부대 20명이 약 6시간 접전 한후 이를 격퇴시켰다. 개(경관) 3명이 부상당했고, 경관 모자 1개, 문서 다수, 카빈 탄창 2개, 카빈 탄환 9발, 백미 1두(斗)를 노획했다.


5월 1일에는 경관 7명, 반동 2명이 화북리 3구에 침입한 상태에서 아부대원 20명이 포위하고 도주하는 개들을 추격했지만 반동 1명만 숙청했다.


5월 3일~7일까지에는 동, 서 각 지구에 아부대 각각 1대대씩 주둔하면서 1개 대대는 본부 근무했다. 노형리에서 엿장사로 가장한 스파이 2명 숙청하고, 오라리 2구에서 반동 3명을 숙청하고, 오라리 2구에서 적 기동부대 약 30명과 20분간 접전 후 적의 다른 부대에 포위당해서 퇴각했다. 상호간 희생은 없었다. 월평리에서 4월 4일 소각하다가 남은 개집을 완전 소각했다.

5월 6일에는 서대대가 산으로 가던 도중 적 기동대 약 30명과 조우하여 약 8시간 동안 접전 후 이를 격퇴했고, 이 과정에서 개 2명이 즉사했고, 우리대원도 2명이 희생됐다. 5월 7일에는 화북리의 반동분자 4명, 삼양리 2구의 반동분자 2명, 삼양리 3구의 반동분자 2명, 도련리 1구의 반동분자 2명 계 15명의 반동분자를 숙청했다. 죽성리에서 반동분자 3명을 숙청했다.


5월 8일에는 삼양리로부터 화북에 이르기까지의 전선을 완전 절단했다. 아침에는 죽성의 반동 거두의 가옥 4호를 소각하고, 반동분자 11명을 숙청했다. '고다시' 반동의 집 2호를 소각하고, 반동의 가족 2명을 숙청했다. 오라리 1구의 반동 가옥 2호를 소각하고, 반동 가족 2명을 숙청했다.


5월 9일에는 농교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에게 위협을 주었다.


5월 10일에는 도두리의 반동 4명을 숙청했다. 읍사무소(투표장소)에 수류탄 2발을 투척하여 투표를 방해했다.


5월 15일에는 오현중학교에 수류탄 1발을 투척했다.


5월 18일에는 화북리의 반동 1명을 숙청했다.


5월 25일 2시, 특무대원3명이 단선 을지구 당선자(주: 당시 북제주군 갑․을선거구 선거는 유효투표수 미달로 무효가 되고 1949년에 재선거가 실시되었음) 한림면 출신 양병직의 아지트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대원 1명이 검거됐다.


6월 14일에는 표선의 반동 1명을 회천에서 숙청했다.


7월 9일에는 월평리에서 엿장수로 가장한 스파이 2명을 숙청했고, 반동분자 31명을 숙청했다.


이상의 제주읍 합계는 다음과 같다.

지서 습격 수 7회, 지서 소각수 1, 지서 파괴수 1, 경관 사망 5명, 경관 부상 5명, 경관(개)가족 사망 3명, 반동분자 숙청 66명, 반동분자 가족 숙청 4명, 반동 부상 9명, 경관가옥 소각 2호, 반동가옥 소각9호, 반동 가옥 파괴 3호.


무기노획에 대해서는 카빈소총 1정. 탄창 2개, 탄환 9발


전선 절단 349개소, 도로파괴 140개소, 교량파괴 1개소


아군피해로는 대원 3명이 전사했다. 

                                  4.3의 성격에 대하여
 
이상의 한라산 유격대 활동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짚고 가야 할 것들이 있다. 

1) 전 제주도에 걸쳐 본격적으로 그리고 동시 다발적으로 무장기습 테러를 자행한 것은 4월 3일이었지만 산발적인 테러행위는 4월 3일 이전인 3월 18일부터 이미 시작됐고 선거일인 5월 10일까지 지속되었다. 선거 수일전부터는 마을 사람들을 산으로 끌고가 투표를 할 수 없게 했고, 선거관리 요원으로 지명된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가고, 투표소와 투표함을 파괴함으로써 제주도에 할당된 3명의 국회의원 중 북제주 2개 선거구를 완전 파괴함으로써 전국 200명의 국회의원 중 198명만 선출되었다. 

1개월 이후 재 선거를 하려 했지만 제주 유격대의 적극적인 방해행위로 제주도 국회의원 2명은 그 다음 해에야 선출될 수 있었다. 제주도 반란행위는 북한당국이나 남한의 좌파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남한의 단선과 단정을 반대하고, 이미 소련의 장악 하에 소련의 위성국 자격으로 1946년 2월 8일에 설립된 북조선인민공화국에 남한을 통합시키려는 신념을 가지고 벌인 반란이었다. 

2) 4월 3일에 동원된 빨치산 무장병력은 320명, 이들이 보유한 총기는 불과 150정 내외였다. 그리고 당시 제주도 내의 경찰은 500명, 청년단원 500명 정도였다. 숫적으로는 인민군 수가 적지만 기습을 개시한 그 시점에서 보면 경찰들은 숙직하는 인원들을 제외하고 무두 집에서 취침하고 있었다. 청년단원들 역시 각기의 숙소에서 자고 있었다.

유격대는 경찰감찰청(도경찰청)과 제주경찰서 및 12개 파출소를 공격하려고 계획을 세웠고, 가장 규모가 큰 감찰청과 경찰서에 대해서는 9연대에 임무를 배당하였다. 그러나 소통의 부족으로 인해 9연대는 움직이지 않았고, 무장유격대만 계획대로 12개 지서를 기습했던 것이다. 이후 9년에 이르는 공비활동은 각지에 알알이 박혀 있는 자위대와 80%를 차지한다는 좌파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80%의 좌파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제주민들이 전라도의 행정통제와 교류의 영향을 받아 반골의식을 함께 해 온 데다가 1921년부터 공산주의에 물든 지식인들에 의한 의식화와 조직화가 끊임 없이 진행돼 왔기 때문일 것이다.     

3) 4월 3일 이전까지 경찰에는 토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단지 유격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자위적 조건반사적 대응이 있었을 뿐이다. 이 세상에 가만히 착살하게 살아가는 주민을 시스템적으로 괴롭하고 탄압하는 경찰은 없다. 대한민국 전체에도 이런 경찰은 없었다. 그런데 좌파들은 유독 제주도에서만은 경찰과 미군정이 얌전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제주 주민들을 이유없이 탄압해 왔다고 주장한다. 1차적으로 경찰의 탄압이 있었기에 2차적으로 제주도 주민이 항거했다는 것이다. 사실을 뒤집는 억지요, 거짓말도 100번 하면 참말이 된다는 식의  공산주의식 선동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주도를 학살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측은 제주도 빨갱이들이다. 가만히 있는 제주도 내의 경찰을 모두 싹쓸이 하여 제거하려 했던 것이 4월 3일 새벽 2시에 일어난 기습테러 행위였다. 제주도의 비극은 경찰이 유도한 것이 아니라 소련-김일성-반헌영과 연결된 제조도 빨치산들이 일으킨 것이며, 이들이 9년 동안의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두 민간들에 빨갱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4) 제주도의 비극은 김달삼(당시 25세)과 이덕구(당시 29세) 같은 물불 안 가리고 영웅심에서 날뛰던 근본 없는 인간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4.3유족회를 포함한 '4.3역사'를 지킨다는 사람들은 4.3을 반란이라 하지 않고 통일운동이요 민주화운동이요 민중항쟁이라 부른다.

그리고 4.3의 영웅 김달삼을 욕하지 않는다. 이들은 북한도 욕하지 않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욕하지 않는다. 반면 이승만을 저주하고 미국을 증오하고 군과 경찰을 증오한다. 4.19역사를 지킨다는 '4.3혁명회'는 새빨간 빨갱이들이다. 5.18의 역사를 지킨다는 사람들도 새빨간 빨갱이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5) 제주도 인민군은 오각별이 그려진 인공기를 흔들고 김일성 만세를 부르고 인항가 적기가 빨치산가(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말아라)를 불렀으며 김달삼은 1948년 8월 25일 “해주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연살을 하고 연설 끝에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쓰탈린 대원수 만세!” 를 불렀다. 한림읍 옹포리 통조림공장 굴뚝에 인민공화국 국기가 꽃혔던 사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제주도 사람들에게 상식이라 한다.   

그리고 이보다 7개월 앞선 1948년 2월 8일 김일성은 소련무기로 무장한 15만 인민군에 대한 창군식을 하면서 남조선을 해방시키자는 연설을 했고, 그 연설 말미에 "조선민족의 해방자이며 은인인 쏘련군대와 쏘련 인민과 그의 위대한 령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불렀다. 북한이 스탈린의 위성국인 된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을 향해 이런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김일성은 스티코프가 선택한 33세의 강아지에 불과했고, 김구는 그런 강아지 앞에 설설 기었지만,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해 어수록했던 미군정과 충돌하면서 자주정신으로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다.   

이렇게 명백한 4.3반란사건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하고 그 유족들에게 우리의 세금을 많이 퍼준다고 하는데도 우리는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2011.4.3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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