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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상놈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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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5-01 22:51 조회16,8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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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은 상놈의 나라


건국 대통령을 지렁이 보듯 하고 발밑에 뭉개는 국민은 월남국민들처럼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고, 살았다 해도 전 세계를 떠돌면서 천대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승만을 발로 밟고 짓뭉개는 빨갱이 족속들도 이렇게 죽고, 멸시를 받아야 하겠지만, 이런 이승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같은 대우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필자는 오늘 미국인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하는 조지 워싱턴과, 대한민국을 건국했으면서도 건국대통령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이승만을 비교하고자 한다. 이승만은 당시 90%의 문맹사회에는 어울리지 않고, 지금의 적화사회 속에서도 어울리지 않는 초인테리요, 당시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보다도 더 화려한 학력, 즉 하버드 석사와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 학위를 소지한 세계적인 울트라 초 엘리트였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정치인들 중에 하버드와 프린스턴의 트리이드마크를 둘 다 부착한 인물이 있었던가? 이 두 사람들의 프로필을 똑같이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네이버 사전을 요약한 것이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버지니아주 출생.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토지측량관이 되었다. 1752년 이복형이 죽자 광대한 마운트버넌의 토지와 버지니아 민병대의 부대장직을 이어받고 1754년 7년 전쟁, 즉 프렌치인디언전쟁에 참가하였다. 애팔래치아산맥 서쪽의 땅이 프랑스인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을 반대한 때문이었다. 그후 본국과 식민지와의 항쟁이 일어나자 서부의 토지문제를 놓고 본국의 정책에 크게 반발하였다.

버지니아의회 의원으로서 1765년 P.헨리를 지지, 인지조례(印紙條例)의 반대를 관철시켰으며, 1769년 타운센드법을 반대하다 의회가 해산 당하게 되자 영국상품 불매동맹을 결성하였다. 1774년 제1회 대륙회의에, 1775년 제2회 대륙회의에 버지니아의 대표로 참석하고, 이 회의에서 무력항쟁이 결의되자 그는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피로에 지친 식민지군을 격려, 역경을 극복해나갔다. 1781년 10월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 요크타운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1783년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군대를 해산시킨 뒤 연합회의에 군의 통수권을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연합회의가 무력하여 미국의 독립이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자 1787년 헌법제정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의장직을 맡아 새로운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 헌법에 의하여 1789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같은 해 4월 30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국내 여러 세력의 단합에 노력하고, 헌법을 실제 정치에 반영시키는 한편, 여러 나라와의 국교를 조정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정견을 달리한 A.해밀턴과 T.제퍼슨을 각각 재무장관과 국무장관으로 기용하여 국내 재정정책의 수립과 외교정책의 정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해밀턴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중립을 선언하고, 유럽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수립하였다. 1796년 3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민주주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끝내 사양하였다. 신생(新生) 미국의 기반을 굳게 다진 데 대한 그의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자료는 조지 워싱턴 자서전을 기초로 한 것이다.


                                 한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역시 같은 네이버 사전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우남(雩南), 초명은 승룡(承龍)이다. 1875년(조선 고종 12) 3월 26일(양력 4월 18일)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가난한 선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倍材學堂)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하였다.

일본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대한 복수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위기를 모면,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서재필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독립협회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왕정)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귀국,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지만,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14년 박용만(朴容萬)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를 분열시키고 따로 좌파세력을 규합, 동지회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1917년 안창호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와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내부의 무단파로부터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가 있었다.

그 후 워싱턴군비축소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정부 및 국제연맹 등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의 대립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노선에 분열이 나타났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내가 아는 이승만

이승만이 살던 시대는 조선왕조였다. 왕조에서 민주주의와 개혁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그런 운동을 하는 것은 극도로 의협심이 있는 개화주의자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감옥을 갔고 사형선고를 받은 후 그 험한 원시적 감방에서 감옥생활을 하다가 장장 7년의 형을 마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떠났다. 출옥 시기는 1904년, 1912년생인 김일성dl 태어나기 8년 전이었다. 김일성은 이승만보다 37년 후에 태어났다. 

이승만은 1904년부터 1948년까지 무려 45년 동안이나 미국의 민주주의 생활에 젖었다. 미국의 민주주의 생활양식이 이승만의 몸에 젖었을 것이고, 그는 미국에서나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을 다니면서 빵과 우유를 마셨다. 그리고 어느 음식점에서 애국자의 모습으로 비쳐져 프란체스카라는 여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나이 70세, 그녀의 나이 45세라는 어린 나이에 조선의 해방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1934년 즉 그녀의 나이 35세, 이승만의 나이 60세에 제네바에서 이승만을 처음 만났고 같은 해 10월 8일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미국에서 10년 동안 이승만의 60대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30대에 결혼 생활을 했다. 이승만이 조선독립을 위해 외지로 다니면서 싸우는 동안 프란체스카 여사는 30대의 발랄한 황금기를 오직 이승만의 애국활동에 바쳤다.

그런데도 우리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독재자가 데리고 살던 외국 여인이라는 이유로 이제까지 무시해왔다, 이는 문명인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수치다. 그리고 앞으로 국모였던 프란체스카의 일생은 반드시 조명되고 음미돼야 할 것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에 형식적으로 참전한 대가로 15개국을 합병했고, 20개국을 위성국가로 만들었으며 일본으로부터는 북방 4개 섬인 쿠릴 열도를 빼앗아 버렸다. 이어서 1946년 2월 8일,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든 후, 그 다음 날인 2월 9일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공표했다.

반면 미국은 신탁통치을 기본으로 하고, 한민당을 지지하면서 해방 후 줄곧 여운형과 김규식 등과 협력하는 반면 이승만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한반도 자체가 미국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조선을 포기했고, 이어서 애치슨라인을 발표했다. 

소련과는 달리 미국은 영토의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남한에서의 조기철수를 감행했고, 이로 인해 6.25 전쟁을 야기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미국이 애치슨라인을 공표할 만큼 남한을 버렸는데도 불구하고 6.25가 발발하자 미국이 16개국을 이끌면서 한국전에 전광속화의 속도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군 대표는 신탁통치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남북이 같은 숫자로 대표자를 구성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남북한이 같은 숫자의 대표를 뽑아야 하며, 남한 대표는 좌우익을 동수로 뽑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는 공산화를 의미했다. 이승만은 이를 간파했지만 김구, 김규식 등은 달랐다.

김구는 4월 22일 김일성이 주최한 연석회의에 가서 이렇게 연설했다. “위대한 회합에 참석하여 기쁘게 생각한다. 조국이 없으면 국가가 없으며 국가가 없으면 정당이나 사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공동목표는 단선(남조선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남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을 막론하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선일보 1948.4.24).

김구에 이은 김규식의 연설이다.

“조선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련의 제의가 불가하다고 말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 유엔소총회는 남조선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자는 비법적 결정을 채택하였다 . .나는 오늘 남북협상지지 축하 평양시민을 보고 눈물이 났다 . .남조선의 지위를 오늘날의 북조선 지위와 비교한다면 천양지차가 있다. 북조선으로 오니 북조선은 살 토대가 있다. 남쪽은 공장이 없고, 미국차관만 가져오고, 여기 공장은 일하고 있으며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

이어서 홍명희(민족자주연맹 부위원장)의 연설이다.

“황해제철소를 시찰하고 우리가 하고 있는 건설사업이 세계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명예를 전조선에서 나눠 갖고 싶었다. . . 나는 25일 평양시민들을 보았는데 남조선의 군중 대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굉장했다. 이것은 잘 되어가는 집안과 못되어가는 집안을 비교하면 족할 것이다.”
 
소련은 김일성을 자유자재로 통제-조종했지만, 이승만은 달랐다. 1912년생, 당시 33세의 근본 없는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김일성은 1924년생인 김달삼과 12년 차이의 띠 동갑이었다. 김일성이 나이 33세에 북한에서 소련의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키고 있을 때. 이승만은 70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미국의 실력자들로부터 온갖 견제를 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소련의 적극적인 보호에 의해 남한보다 2년 반 이전에 국가 건설을 했다. 공산당은 1당 독재이기 때문에 반대가 없이 일사분란했다.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자원과 일제가 남긴 풍부한 시설들이 있었다. 반면 남한에는 이런 게 전혀 없었다. 사회는 가난에 들끓었고, 잡다한 정당들이 난무했다. 하다못해 제헌국회 의원의 절반이 무소속이었다. 인구는 북한의 2배로 많았지만, 1인당 GNP는 북한의 반도 안 되었다. 4월 연석회의 참석 차 북한에 갔던 김구나 김규식 등의 눈에 북한은 선진국처럼 보였을 것이고, 남한은 후진국처럼 보였을 것이다. 

전력의 96%, 석탄의 95%가 북한의 소유였다. 정부 수립 이후인 첫해인 1949년, 신생국가의 세금은 불과 목표의 5%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승만이 미군정으로부터 인계받은 군병력은 불과 5만, 그것도 기율이 전혀 없는 민병대였다. 이승만은 북한에 비해 1인당 GNP가 반도 안 되는 경제력을 가지고 먹고 살기 위해 싸웠다. 1949년 조병옥 박사가 대통령 특사로 미국을 방문했지만 미국관리들은 ‘민주주의만 잘하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원론만 들려주고 돌려보냈다.

한국사회, 연료와 식량이 부족했고, 사회혼란과 축첩, 양주, 양담배로 표현되는 사회악이 난무-범람했다. 이는 깨끗함과 풍요를 내세우는 공산세력의 선동 대상이 되었다. 당시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이승만은 두 가지 싸움을 해야 했다. 치안과 대공이었다.

제주 4.3사태때 제주도로 가서 공산당을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7연대는 제주도로 가는 척하다가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은 1948년 12월 1일부터 국보법을 시행하여 6.25일 직전까지 4회에 걸쳐 숙군작업을 실시했다.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 수사과를 설치하여 1949년 7월말까지 4,749 명에 대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 등을 단행하면서 군내의 좌익들을 청소했지만, 6.25가 발발하자 한국군은 간첩이 지휘했다는 흔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다.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군인들이 산 속으로 도망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받았던 토벌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전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소련 및 북한은 이를 선전용으로 악용하였고, 이로 인해 세계는 이승만을 독재자로 매도했다.

반면 맥아더를 위시한 미군정 장군들은 “이승만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며, 그를 대체할만한 인물은 없다”고 했다. 사실 월남에서 미국은 엄청난 전비를 들이고 수많은 생명을 바치게 했지만 패했다, 그 이유는 월남에 이승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세계적으로 칭찬 받는 처칠보다 더 훌륭한 인재였다. 단지 영국은 잘 알려진 나라이고 한국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와 싸워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휴전을 놓고 이승만과 대립했던 로버트손 미국무부 차관보는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전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 지도자들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뼈아픈 6.25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완전 박멸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수많은 생명을 잃은 미국은 북진통일을 주창한 이승만을 ‘귀찮은 존재’ ‘고집 센 늙은이’ ‘독재자’로 비난하며 그를 제거하려 했다. 이승만은 한국을 버리려 하는 미국의 바지가랑이를 붙잡았다. 개인적 자존심으로 말하자면 미국을 당장 떠나라 하고 싶었겠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계산있는 오기를 부렸다. 

이승만은 참으로 고도의 전략을 썼다.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이는 이승만이 미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세기적인 대결이었다. 반공포로! 이는 무엇인가? 한국이 미국의 뜻과 다르게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세계적 인식을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었다. 미국의 세계적인 자존심을 꺾는 것이이었다.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이 근 2년간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중, 1953년 6월에 접어들었다. 미국의 뜻대로 휴전이 이루어지면 앞으로의 방위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문제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정부는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시에 한국에서 철퇴하되, 이를 실시하기 전에 한·미 양국 간에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한다" 이승만이 요구한 한미방위조약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월 8일, 미국과 북-중 사이에 휴전 회담의 핵심적인 쟁점이었던 포로교환문제가 타결되고 양측 대표가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휴전협정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에 강력한 제동을 걸었다. 한국민의 의사에 반한 휴전회담은 있을 수 없는 미국의 횡포라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 전역에 걸쳐 거센 휴전반대 운동을 유발시켰다.

6월 8일,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북한 사이에 체결된 ‘포로송환협정’에는 귀향을 원하는 포로를 휴전 성립 후 60일 내에 송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 ·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휴전할 수 없다고 반대하던 이승만은 반공 ·애국 동포를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그 협정을 묵살했다.

마침내 이승만은 포로석방을 단행시켜, 영천 ·대구 ·상무대 ·논산 ·마산 ·부산 ·부평 등 7개 수용소에 있던 37,000명 중 27,092명의 반공포로 석방을 1953년 6월 21일까지 완료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휴전교섭 파기를 위한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미군 감시원을 내쫓으면서 강행된 이 사건은 온 세계에 큰 충격을 주어 국제연합군 긴급회의, 영국의 긴급내각회의, 한국전참전국회의 등을 열게 하였고 휴전을 낙관시하던 미국으로 하여금 이승만의 동의 없이는 휴전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미방위조약을 이끌어 낸 것이었다. 휴전을 간절히 원하는 미국으로서는 이승만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단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기로 결심하고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에게 밀명을 내렸다. 원 장군은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비밀리에 작전을 전개, 유엔군이 관리하는 부산, 마산, 대구, 영천, 논산, 광주, 부평 등지의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2만 7천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케 함으로써 그들에게 자유를 안겨 주어,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활약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조치에 경찰 및 민간인들 또한 반공 탈출 포로들을 숨겨 주고, 의복 및 음식을 내 주는 등 일치된 민족적 의식을 보여 주었다.

이 엄청난 반공포로의 석방은 일시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키게 하였다. 미국은 “한국이 유엔의 권한을 침범한 것이 아니냐”는 항의를 제기하였고, 북한과 중공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모하여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고 비난하여 전원을 재수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휴전회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런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미국은 한국에서의 조속한 휴전 타결 문제가 주요 정치 과제로 대두되어 있던 만큼, 대통령의 특사를 6월 25일 파한하여 “이 대통령의 독단은 매우 무익한 일이며, 만약 사리에 맞는 태도를 취한다면, 미국의 힘을 빌려 줄 것을 보증한다.” 고 확약하였다. 

이승만의 이런 조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은 미국의 의사에 반해 북침을 할 수 있다는 뜻을 미국에 경고한 것이다. 미국은 이승만을 미국이 통제할 수 없는 늙은이라고 치부했다. 저 늙은이가 북침을 감행하면? 미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전쟁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북침을 했는데도 미국이 발을 빼면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지도국가가 아니라 참으로 비겁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미국의 생리를 잘 아는 것이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승만에 항복했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미국은 한국에 발이 묶여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미국이 한국을 북으로 넘겨주면서 발을 뺀다면 미국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한다. 미국은 경제적 이익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다. 이승만은 이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과연 그 시기에 이승만의 이런 깊은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다만 그의 밑에 있으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에 연세 드신 그를 악질적으로 악용했을 뿐 그의 전략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국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휴전 후의 긴밀한 협조 관계의 확대, 포로의 자유의사 보장,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정치·경제·방위 문제의 협력 증진, 통일 한국의 실현을 위한 상호 협력”을 보장받게 되었으며, 7월 12일 한·미 양국은 휴전 성립을 위한 합의에 도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최초 반공포로 석방을 구상한 것은 그들을 공산군에 넘겨줄 수 없다는 인식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 그리고 휴전협상에서 한국의 주장이 고려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한 것이었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제네바협정 전문을 검토하여 설사 국군의 지휘권이 유엔군총사령관에게 이양되어 있다하더라도 한국은 교전 당사국으로서 영토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휴전회담장에서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된 날인 1953년 6월 8일 이 대통령은 원 장군의 보고를 받고 즉시 “오늘부터 모든 헌병은 헌병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고 또 그 자리에서 반공포로 석방 명령서도 하달하였다.

휴전회담의 진척이 가시화 되자 한국 곳곳에서는 휴전반대 궐기대회가 가열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입장으로 인해 상당히 곤혹스러워 했지만, 그렇다고 회담의 진전을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시점에 한국정부는 전국적으로 준 비상계엄령을 하달하였고, 도미 중인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대장 이하 전 장병을 귀국시키고 회담대표단에서 한국대표를 소환하였다.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1953년 6월 9일 육군헌병사령관 석주암 준장, 부사령관 송효순 대령 등을 호출하여, 반공포로 석방계획을 설명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결정하였다. 그는 거사 일을 ‘6.18.24;00시’로 결정하고 광주· 마산· 부산· 영천· 논산 각 지구별로 밀사를 선발하여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3만에 이르는 반공 포로들이 일순간에 석방되자 각 지역의 경찰과 주민들이 그들을 돌보며 지원해 주었다. 이 대통령은 대부분의 반공 포로들이 탈출에 성공한 사실을 보고받은 후 이날 오전 사전에 준비된 성명을 발표하였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이 대통령이 어떠한 일이라도 단독으로 단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모든 국군과 군사시설이 유엔군사령관의 지휘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한국 대통령이 휴전회담을 결렬시키기로 결심만 한다면 그것을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시사해 준 것이었다. 비록 한국국민의 뜻과는 달리 휴전회담이 추진되었지만, 반공포로 석방은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로서는 상상하기 매우 어려운 강력한 조치였다.

한미방위조약으로 인해 미국은 발이 묶였고, 60만 대군을 양병하기 위한 국방 및 경제원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역대의 그 어느 정치인에서 발견할 수 없는 카리스마요 전략가인 것이다. 이 방위조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1975년 월남패전이 가장 잘 말해준다.

이승만은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진보요 개혁적인 초 엘리트였다. 수 많은 정치인들을 지켜본 국민에게는 너무나 뛰어난 슈퍼 울트라 엘리트였다. 이런 걸 몰라보고 좌파들에 놀아나는 무식하고 게으른 인간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 그들이 지금 여기에서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그들에게 과분한 것인지를 가장 잘 알게 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들을 북송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박지원, 손학규 등 . . . .


2011.5.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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