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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또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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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5-29 23:38 조회15,6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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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의 또 거짓말

5.18org-5.18민중항쟁-전개과정 중상부에는 아래 내용이 있다. 거의 100% 거짓말이다. 얼른 눈에 뜨이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계엄군의 최초 발포가 5월 20일 11시 광주신역 앞에서 있었다고 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5월 21일 오후 1시에 계엄군이 무차별(발포)을 감행한데 자극되어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때부터 무장을 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시위대가 화순, 나주, 해남, 영암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광주의 참상을 알렸고, 전남의 여러 지역에서 응원 시위부대가 나타나 텅 빈 지서,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M1소총, 카빈소총, 기관총과 탄약, 화순광업소의 TNT까지도 날라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다 거짓말이다. 5.18측은 한마디로 다 거짓말쟁이다. 5.18측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는 5.18측 자료와 검찰 자료를 비교해보면 즉시 나타난다.

첫 번째 발포는 5.18측이 주장하는 5월 20일 밤 11시가 아니라 5월 19일 시위대가 고립된 장갑차를 에워싸고 불타는 짚단을 집어넣아 승무원을 불태워 죽이려 한 데 대해 소대장이 살기 위해 소총을 발사한 것이다. 이를 5.18패들은 숨기고 싶은 것이다. 5월 21일 광주역에서 발생한 발포는 3.4번째 발포였다. 이 역시 수만의 시위대에 둘러싸인 3공수 4개 대대가 살 길을 트기 위해 쏜 공포탄이었다, 이때 3공수는 이른바 지랄탄을 쏘아서 집단학살을 면했다.

그리고 시위대가 무기고를 턴 것은 5월 21일 09:00경, 아세아자동차에 모인 정예 600명이 장갑차 4대와 374대의 군용트럭을 빼앗아 전남 각지 17개 시군에 숨어있는 44개 무기고로 달려가면서 12시로부터 오후 4시까지 5,400여 정의 무기 및 폭약들을 털었다. 5.18사람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들을 한다. 518을 지키는 핵심홈페이지인 518기념재단이 이렇게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아래 지료들을 대조해 보자.


                                   5.18기념재단에 게시된 자료

                                        항쟁의 확대와 첫 발포

5월 20일 항쟁 3일째, 오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오후가 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 명이 넘었다. 윤상원 등 사회운동 진영에서 계엄당국의 거짓된 선무방송에 맞서기 위해 만든『투사회보』가 시내도처에 수천 매씩 뿌려지면서 항쟁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시위를 감행함으로써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의 전의에 불을 질렀다. 시내 곳곳에서는 자발적인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일제히 발포를 하였다. 이것이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였다. 비슷한 시각에 세무서 앞과 조선대 부근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발포에도 아랑곳 않는 항쟁의 불길은 그 승리의 절정을 향하여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신군부의 잔학한 만행

공수부대에 의해 최초로 희생된 김경철은 공용터미널에 다녀오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들려 무수하게 구타를 당한 채 트럭에 실려 후송되었으나 다음날 사망했다. 김경철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농아였다. 이는 수백 명의 사망자, 부상자 중의 한 예에 불과하다. 여성들에 대한 성추행도 무수히 저질러졌다.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만행을 보고 격분한 장노년층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사적 항쟁의지로 발전했다. 신군부의 만행은 전남대 교내에서도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내에서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계엄군의 만행은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집단 발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광주시민들은 어제의 참상을 뒤돌아보고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아침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오후 1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다.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 수십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고 서둘러 무장하기 시작했다.

거센 항쟁에 밀린 계엄군은 퇴각하면서 무차별 발포하여 사상자를 내고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했다.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LMG)의 위력은 계엄군의 퇴각을 서두르게 하였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교도소로 퇴각했다.

시 외곽지역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27일 충정작전에 투입될 때까지 광주 외곽도로를 차단, 봉쇄하고 인근을 지나는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송암동으로 이동하던 계엄군과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전교사 병력간의 오인사격으로 군인들이 희생되자 그에 대한 화풀이로 원재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중학생에게 총질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무장시민군의 등장

5월 21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총격에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자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일부 시위대는 화순, 나주, 해남, 영암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전남의 여러 지역에서 응원 시위부대가 왔다. 광주시위의 진압에 동원되어 텅 빈 지서,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M1소총, 카빈소총, 기관총과 탄약, 화순광업소의 TNT까지도 날라져왔다.

검찰보고서에 나타난 5.18 발포 역사

1번째 발포는 5.19일 오후 5시, 계엄군 장교가 타고 있던 장갑차가 고립되자 시위대가 장갑차 뚜껑을 열고 불타는 짚단을 넣으려 했을 때 소대장이 자위용으로 발사한 사격이었고,

2번째 발포는 20일 밤, 공수부대 대오를 향해 고속으로 돌진하는 대형차량 바퀴에 대대장들이 권총을 쏜 것이고,

3번째 발포는 같은 날 광주역에 중과부적 형상으로 완전 포위돼 있던 3여단이 포위망을 뚫기 위해 실탄을 배급하러 갈 때 길을 뚫기 위해 공포를 쏜 것이었고,

4번째 발포는 광주역 앞에서 3공수 4개 대대가 포위망을 뚫고 전남대로 철수할 때 발생했고,

5번째 발포는 5월21일 새벽 5시 경에 전남대에서 시위대가 하늘을 향해 카빈총을 가지고 공포를 쏜 것이고,

6번째 발포는 같은 날 12시경에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면서 발생한 쌍방의 총격전이었고,

7번째 발포는 전남대를 지키던 3공수 여단의 최후저지선이 돌파 당함으로써 공수대와 시위대 사이에 주고받았던 사격이었다. 가장 문제를 삼아왔던 5월 21일 13시의 전남도청 발포는 8번째 발포였다.

                                         수사기록의 검찰기록

                                            5월 19일의 상황개요

31사단장 정웅은 이날 새벽 광주역에 도착한 11공수 3개 대대를 즉각 시내로 출동시켰다. 오전 8시, 전라남도 지사가 시민들에게 냉정을 찾자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전남 교육위원회는 모든 고등학교에 귀가령을 내리고 5월20일부터 휴교한다는 휴교명령을 내렸지만 사태는 극렬 쪽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 낫, 곡괭이, 도끼, 휘발유통 등 폭력의 무기도 다양해졌지만 경유를 길에 붓고 불을 지른다거나 차량과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의 행태에도 온갖 지혜가 다양하게 동원되었다. 5월 19일부터의 광주시위는 그냥 시위가 아니라 폭력 백화점이었다. 3-4명, 7-8명 단위로 쪼개진 공수대원들은 수백-수천 명에 둘러 싸여 매타작을 당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혈투를 벌였다. 이날부터 공수대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전세는 완전히 시위대에 의해 압도됐다.

유언비어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고, 시위대는 시체를 끌고 다니면서 시민들을 선동했다. 계엄군이 포위되어 매타작을 당해 빈사상태에 이르고,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 무기들이 피탈됐다. 다급한 상황에 몰리게 된 계엄군 장교들은 누구의 명령도 없이 단지 살기 위해 공포탄을 발사했고, 발포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모란봉의 꽃으로 불린 전옥주라는 여인 등 몇 명의 여인들이 확성기를 들고 시내를 누비고 다니면서 애끓는 목소리로 시민들을 선동하고 동원하는 방송을 했다. 이날의 유언비어는 전날보다 더 다양하고 자극적이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공수대원이 이화여대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3명의 팬티와 브라자까지 모두 찢어내고 구두 발로 엉덩이를 찬 후 대검으로 등을 찔러 죽였다.

공수대원이 광주 수창초등학교 앞 전봇대에 산사람을 거꾸로 매달았다.

5월 18일에 40명의 시위학생이 죽어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공수대원들이 젊은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개 몇 마리 잡았느냐고 농담을 한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몰살한단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실으려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부녀자가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이러한 유언비어들에 현혹된 시민들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소규모 단위로 쪼개져서 수많은 길목들을 가로 막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위대와 시민들이 야유를 퍼붓고 인격적 모독을 해도 눈망울 하나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들을 던지면 이리저리 피하기에 바빴고, 피를 본 병사들은 이성을 잃고 돌을 던진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타격하는 등 광주시위는 군복을 입은 젊은이와 민간복을 입은 젊은이들 사이의 무자비한 폭력 싸움으로 변질됐다.

                                61대대장 안부웅 대대장의 증언

군중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한 뒤, 칼과 도끼 등을 든 사람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병력 바로 앞에까지 와서 도끼로 병사들의 철모를 툭툭 치면서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 버려?", 그리고 가위, 칼 등을 눈앞에 대고 "이걸로 눈을 쑤셔버려?" 등의 위협을 해 우리 병사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병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습니다. 공수대원들은 경계만 하며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하고 있는데 시위대가 먼저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니까 병사들이 흥분하여 때린 격입니다.

공수대원들도 시위대들이 던져대는 돌과 화염병에 무수히 많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5월 19일이면 진압초기로서 초기부터 착검하고 진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한 군에서 사용하는 대검은 날이 서 있지 않고 무딘 상태입니다. 대검으로 물건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광주사태 유언비어 중에 공수대원들이 대검으로 여자 유방을 잘랐다고 하는데, 물리적으로 군의 대검으로 사람 살을 자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6시경 대치중인 계엄군(61대대) 배치선 1미터 전방까지 40대 남자가 접근하여 협박했습니다. ‘네놈들이 있던 강원도 오음리 지역의 군인가족을 몰살키 위해 시민을 현지로 보냈다.’ 이렇게 한 후 군중 속으로 뛰어 들며 선동하였고, 시위대로 전진하면서 돌을 던졌습니다.

대원들은 주동자를 체포하려다 오히려 3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당시 노동청 앞 쪽에서 경찰병력이 돌진하는 시위대 차량에 의해 4명이 압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21시 경이 지나자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상을 돌아다니며 최초로 시위대의 선무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애끓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하는 방송을 했습니다. 목소리와 억양이 마치 이북에서 대남 방송하는 여자들의 억양과 똑같아 계엄군 입장에서 보면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시민들이 들으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내용은 ‘지금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왔다.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야 되겠느냐, 금남로로 전부 모여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있은 다음부터 시위양상이 격해졌습니다. 그 당시 시위대들은 몽둥이, 쇠파이프, 쇠갈고리, 도끼 등 흉기가 될 만한 것은 전부 다 들고 있었으며 시위상태도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5월19일의 상세상황

5월 19일은 월요일,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00:50분에 광주역에 도착한 11공수의 61대대 잔여병력, 62대대, 63대대가 도착즉시 31사 96연대의 작전통제 하에 들어가면서 02:10분에 조선대로 이동했다. 06:30분, 11공수여단장(최웅)은 7공수의 35대대를 작전배속 받아 자체 소속의 61대대와 함께 광주 동구권 지역을 담당케 하기로 했다. 그리고 7공수의 33대대는 31사단 예비대로 전환됐다. 여기까지를 보면 7공수여단장 신우식 장군의 휘하에 있던 2개 대대(33,35) 중, 제33대대는 96연대에 작전배속 된 상태였고, 제35대대는 11여단장에게 작전배속 된 상태에 있었다. 이로써 신우식 장군은 자기가 양성해 오던 부대를 다른 작전 부대장들에게 모두 시집을 보내고 그 자신은 지휘권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자기 부하들이 시위 진압에서 피해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잘 하라”는 당부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최웅 11여단장은 자기 예하부대 3개 대대 중에서 2개 대대(62,63)는 31사 96연대에 내주고, 나머지 61대대와 7공수의 35대대를 가지고 광주의 동부지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전남도청 및 남부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고, 광주 서부 및 북부 지역은 31사단 96연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31사단 병력 중 광주 시위진압에 가용했던 병력은 96연대 하나뿐이었다. 결국 정웅 31사단장은 자체가 보유한 96연대와 11공수 3개 대대 및 7공수 2개 대대 모두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아침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정웅 31사단장은 그날 아침에 광주에 도착한 11공수여단 3개 대대에 ‘광주시내로 출동하여 경계임무에 임하라’고 지시했다. 오전 8시, 전라남도 도지사는 시민들에게 공공질서를 지키고 냉정을 찾아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협조해 달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으나 광주일고, 대동고, 중앙여고 등 고등학교 학생 6천여 명은 등교를 하자마자 수업을 거부하고 교내 시위를 벌이는 상황이 벌어짐으로서 전남 교육위원회는 모든 고등학교에 귀가령을 내리고 5월20일부터 휴교령을 내렸다. 08:2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호남지역은 김대중을 우상화하는 지역이다.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광주소요 뒤에는 배후조종세력이 있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들을 날조 유포시키고 있다. 전단지를 공중에 살포, 선무작전을 실시하라”

09:30분, 광주사태가 확대일로로 치닫자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중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1개 공수여단의 추가 증원을 요청했다. 전날 공수부대원들의 강경진압과 유언비어들에 자극된 학생 및 시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시내에 속속 모이기 시작했고, 상가는 문을 닫고, 관공서, 기업체, 학교 모두가 정상업무를 포기했다. 이중 대동고, 중앙여고 등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공수부대 철수, 전두환 퇴진을 구호로 외치며 시위를 했다. 금남로는 교통이 차단됐고, 전남도청 앞에는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11공수의 61대대는 조선대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09:00시부터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의 시위예상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열을 지어 늘어서서 시위대의 집결을 차단하고 있었고, 11공수의 62 및 63대대는 10:00시부터 장갑차를 선도로 차량 30대에 부대원을 태워 시내를 돌면서 위력시위를 했다. 위력시위라는 것은 무장한 계엄군을 차량에 태우고 헤드라이트를 밝히면서 대로를 질주함으로써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 정도의 위력시위만 보여도 시위를 저지시키는 효과를 냈지만 광주에서만은 사정이 달랐다. 10:00시, 학생 시위대 등 200여명이, 충장로 파출소를 경계하고 있던 11공수여단 61대대 1지역대를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고, 이 때 일반 시민 60여명이 각목, 쇠파이프 등을 휘두르며 학생시위에 가담했다. 오전 10시부터 대학생들은 3,000여명 단위로 늘어났다. 행동도 전날보다 훨씬 과격해져,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를 가지고 계엄군과 경찰을 공격했다.

10:30분, 가톨릭센터 앞에 시위대 2,000여 명이, 충장로 일대에도 또 다른 2,000여 명이 화염병, 돌, 각목, 보도블록을 던지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위력시위를 벌이고 있던 62 및 63대대가 급거 금남로로 달려가 61대대 및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 4천명에 대한 해산을 시도했지만 이들은 금남로 사거리, 광주은행본점, 관광호텔, 수미다방, 충장로 1가, 충금지하상가 등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도청방향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에 진압군은 다방, 여관, 민가 등에까지 쫓아가 극렬 공격자들을 검거하여 시민과 구별을 짓는다는 방법으로 옷을 벗겨 연행했다. 가톨릭대 앞의 3,000명 중 200여명을, 관광호텔 앞에서는 107명을 체포, 동부 및 서부 경찰서에 인계했다. 이 광경을 외신기자 5-6명이 취재했다.

전남도청 주변에서 시위하던 극렬학생들이 공수부대원에 쫓겨 YWCA 건물로 들어가자 부대원들은 학생은 물론 학생들을 보호하던 직원들까지 도로에 끌어내 무릎을 꿇리고 때렸다. 건너편 무등고시학원에서 이를 목격한 학원생들이 때리지 말라 고함을 치자 부대원들은 학원으로 몰려가 학원생들을 구타하고 트럭에 실어 연행했다. 오전 11시경에는 4천여 명의 학생들이 금남로에 모여 경상도 출신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죽이려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관에게 화염병을 투척하고 각목과 쇠파이프로 경찰관을 폭행하였으며 차량 10여대를 빼앗아 불을 질렀다. 정웅 사단장의 지시로 시위진압을 위해, 금남로에 출동했던 7공수여단 35대대 병력 280명(30/250)은 갑자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공사장 자재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휘발유통에 불을 붙여 계엄군 병사를 향해 굴리는 등 격렬한 공격을 가해오자 35대대 병력은 시위진압에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최루탄을 쏘면서 자체 방어에만 급급해 했다.

충장로 파출소에 출동한 11공수여단 61대대 1지역대 10여 명도 오전 11시경에 200여명의 시위대로부터 투석과 화염병의 공격을 받아 대원 중 최상규 하사의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 등 6명이 부상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제1지대장으로부터 긴급 구조요청을 받은 안부웅 61 대대장은 거점을 경비하던 61대대 병력에게 거점경비를 포기하고 안전한 인근 건물 안에 피신하라고 지시를 한 후에 11공수여단 본부에 구조를 요청했다. 안부웅 대대장의 구조 요청을 받은 최웅 11공수여단장은 당시 광주 시내에서 무력시위 중이던 62대대와 63대대를 금남로에 긴급 출동시켰다. 62대대와 63대대가 충장로에 출동하였을 때 3-4,000명의 시위대가 61대대 병력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도로에는 5-6대의 차량이 불타고 있었다. 62대대와 63대대가 증원 출동하자 시위대는 물러났다. 61, 62, 63대대는 충장로에 집결하여 경계임무에 임하다가 시위군중이 해산하여 소강상태를 이루자 14시경 숙영지인 조선대로 복귀하여 병사들에게 식사를 시키고 부상자를 후송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강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날 오후 광주 일원에는 갑자기 악성 유언비어들이 난무하면서 시민들을 흥분시켰고, 흥분한 시민들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3:30분, 공수부대원들이 조선대로 철수하여 점심을 하는 사이 학생 및 시민 4-5,000명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던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고, 기름이 든 드럼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케 했고, 도로변 화분과 공중전화 부스를 부수어 바리케이드를 치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공수대원을 위협하고 돌을 던지는 등 전문적이고도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무섭게 불어나고 행동이 점점 더 격렬해지자 정웅 사단장과 최웅 11공수 여단장은 병력을 중대 또는 지대 단위의 소규모 단위로 분산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대대단위로 집단 운용할 것을 결심했다. 이에 따라 61대대는 공용터미널, 62대대는 한일은행, 63대대는 광주고교, 35대대는 광주소방서를 거점으로 하여 시위를 진압하도록 조치했다.

윤흥정 사령관의 계엄군 증파 요청을 받은 계엄사령부는 5월 19일 14시경에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0-80호로 특전사 3공수여단에 대한 출동명령을 내렸다. 14:00시,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지사, 교육감, 검사장, 광주시장, 중앙정보부 분실장, 지방노동청장, 우체국장, 31사단장, 11공수여단장 등이 참석한 기관장회의를 개최했다. 기관장들은 “군의 진압행동이 너무 과격하다. 어느 나라 군대인지 의심이 간다. 고교생까지 동요한다며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고 석방자 명단을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윤흥정 사령관은 정웅 사단장과 최웅 여단장에게 가혹한 방법을 자제할 것과 주동자가 아닌 사람은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회의가 끝날 무렵 진종채 2군사령관이 현지 작전지도 차 광주를 방문했다가 17:00경에 복귀했다. 이후 광주 작전에서 2군 사령관 진종채가 보여준 열의는 참으로 돋보였다.

광주시내의 시위가 격화되자 정웅 31사단장은 14시 40분경 11공수여단 61, 62, 63 대대와 7공수여단 33, 35 대대 전 병력에 대하여 도청과 금남로에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11공수여단 3개 대대 와 7공수여단 2개 대대는 15시 40분경 출동을 개시하여 11공수여단은 금남로에서 도청 쪽으로, 7공수여단 35대대는 도청 앞 광장에서 금남로 쪽으로 진출하면서 시위진압에 나섰다. 계엄군이 금남로 한일은행 앞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에는 각목, 쇠파이프, 농기구 등을 손에 든 2,000여 명의 시위대가 인근 공사장에서 경유를 가져와 노상에 붓고 불을 지른 후 경남과 부산의 번호판이 붙은 일반 차량을 불길 속에 밀어 넣어 바리케이드처럼 도로를 차단해 놓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계엄군은 계속 선무방송을 통하여 해산을 종용했지만 시위대의 태도는 5월 18일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물러서기는커녕 더욱 극렬하게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궁지에 몰린 계엄군이 마지막으로 쓸 수 있었던 무기는 최루탄뿐이었다. 대규모의 시위대는 돌,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를 가지고 공격하는 공격자가 됐고, 규모가 시위대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했던 공수부대원들은 몇 개씩의 최루탄으로 시간을 버는 힘겨운 방어자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극렬 시위자 7명이 체포되었다. 계림동 계림극장 앞에 출동한 7공수여단 33대대의 사정은 더욱 험악했다. 권승만 중령이 이끄는 33대대 병력 330명은 계림극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5,000여명의 시위대에 포위되어 공격을 받아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부득이 시위진압을 포기한 채 도청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4:30분, 한일은행 1,000여명, 관광호텔 앞 2,000여 명, 가톨릭센터에 3,000여 명의 시위대가 공사장 자재를 이용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CBS 건물을 향해 돌을 던지며 거기에 있던 승용차 10대에 불을 질렀다. 이때에 계엄군 2명이 중상과 경상을 입었다. 학생들은 “학생들의 희생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시민이여 학생이여 나오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15:15분, 시위대는 가톨릭센터에 도착하여 가톨릭센터 7층, 기독교방송을 경계하기 위해 배치된 31사 96연대 소속 9명을 공수부대 요원이라고 주장하면서 가톨릭센터 직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분말소화기를 뿜어대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면서 7층으로 올라가 경계병으로부터 M-16 소총 1정을 빼앗아 건물 아래로 던지고 일부는 차고에 있는 승용차 4대를 불태웠다. 검찰 보고서에는 난폭한 폭도들에 의해 7층 건물 계단에 갇혀버린 31사 96연대 소속 병력 9명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탈출했는지에 대한 조사가 없다.

하지만 전투경험이 있는 필자는 오직 소대장의 위협사격에 의해서만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소대장은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정당방위를 위한 첫 번째 발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안전을 위해 검찰 수사보고서에 기록돼 있는 내용들만을 취급할 것이다. 수명의 청년들이 시체 1구를 싣고 시위군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계엄군이 무고한 시민을 죽였다. 학생과 시민이 더 이상 희생되기 전에 계엄군과 싸우자”고 선동했다. 이에 시민들이 흥분하여 부녀자까지 가담함으로써 시위대의 규모는 갑자기 1만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이들 1만여 명의 시위대는 한일은행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관광호텔 쪽으로 이동하여 공사장 자재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휘발유통에 방화를 하여 경찰을 공격하고, CBS 사옥에 몰려가 기물을 파괴했다.

오후 3:30분, 가톨릭 센터 앞에 모인 3,000여명의 군중이 계엄군을 포위하고 폭행을 가했다. 계엄군 1명이 빈사상태에 빠지고 그가 가지고 있던 M-16 소총도 피탈되었다. 과격한 청년들이 경유를 가져와 길에다 붓고 불을 지른 후, 승용차 8대를 불길 속에 밀어 넣어 계엄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쳤다. 악성 유언비어에 격분한 시민들이 경남 및 부산 번호판이 붙은 차량들에 불을 지르고 각목, 쇠파이프 등을 들고 계엄군을 공격했다. 역전파출소, 도문동파출소, 양동파출소, 일동파출소 등이 습격을 받아 전소되었고, 17,000여명의 시위군중은 광주은행, 중앙여고, 광주역, 공용터미널, 도청 등 시가지에서 밤 11시까지 시위를 벌였다.

또한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시위군중 3천여 명은 승용차 8대를 탈취하여 방화를 하고 MBC 사옥에 난입한 후 MBC 방송국 경비병을 습격하며 M-16소총 1정과 실탄 15발을 탈취했다. 그리고 역전 파출소, 도문동 파출소, 양동 파출소, 일동 파출소 등이 극렬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파괴, 방화됐다. 이 상황에 당황한 정웅 사단장은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무기가 탈취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다가 핀잔을 들었다. “당신이 현장 지휘관인데 멀리 있는 내게 어찌 하오리까 하면 낸 들 무슨 수가 있겠소.” 참으로 한심한 지휘관이었다.

15:27분, 문화방송국 앞에 집결한 3,000여 명은 문화방송이 광주상황을 자세히 보도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송국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차량 1대를 불태우고, 사장이 직접 운영한다는 전자제품점(문화상사)을 불태웠다. 15:55분, 예비 병력으로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 33대대가 착검한 상태에서 차량을 타고 광주역-공용터미널-광주공원 등을 돌며 무력시위를 했다. 이 때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시위대가 돌을 던지자 그중 9명을 체포하여 18:30분에 다시 전남대로 복귀했다. 16:00시, 중앙여고 앞에서는 학생 박찬숙 등 600여명이, 대동고 앞에서는 고3학생 등 1,000여명이, 광주일고 앞에서도 고교생 2,000여 명이 시내진출을 기도하다가 군과 경찰에 밀려 분산됐지만 분산되기 직전까지 이들은 돌을 던지며 대항했다. 16:15분, 광주터미널에서 학생 1,000여 명이 몰려 가드레일과 공중전화기 부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수부대에 돌을 던졌다. 이 때 광주소방서 쪽에서 시민들의 시위참가를 호소하는 가두방송이 시작됐다. 북동사무소 앞에서는 성난 공수대원 300여명이 돌을 던지다 쫓겨 간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가택수색을 했고, 체포된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가격했다.

17:00시, 공수부대에 ‘공수부대원의 사체가 있다’는 허위제보가 들어왔다.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돌아가던 63대대 일부 병력이 광주고등학교 부근 동원예식장 건너편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강력한 포위망을 형성하고 공격을 가하자 공수부대 장갑차가 방향을 잃고 보도 턱을 받고 정지했다. 시위대는 장갑차 뚜껑을 열고 불붙은 짚단을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다급해지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장교가 문을 열고 나와 M-16으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 때 19세의 조대부고 3학년 김영찬(19)이 대퇴부에 총상을 입었다. 공식적으로는 이것이 진압군에 의한 첫 번째 발포였다. 여기에서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교의 발포는 그를 죽이기 위해 장갑차 속으로 불붙은 짚단을 집어넣으려 했던 살인적 공격행위에 대한 순간적인 정당방위였다.

이제까지 세상에 무수히 유포되고 있는 5.18자료들에는 19일 오후 5시 불붙은 짚단을 피하기 위한 발포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그리고 5월 20일과 21일에 있었던 10여 차례의 자위적 발포 사실들도 들어 있지 않다. 오직 5월 21일 오후 1시에 전남도청에서 발생했던 소규모의 집단 발포만을 문제 삼아 왔다. 하지만 5월 21일 13:00시 도청 앞 발포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발포들이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진 발포인지를 이해한다면 5월 21일 13;00시의 발포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쪽의 말만 들어온 사람들은 5월 21일의 집단발포에는 반드시 발포명령자가 있으며, 그 발포명령자가 바로 전두환이라고 믿고 있다.

17:30분,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 시위대 200여 명이 집결하자 공수부대는 장갑차 2대를 앞세워 해산시켰고, 공용터미널에 1,000여 명, 금남로에 2,000여 명이 집결했지만 계엄군의 강력한 진압으로 해산됐다. 이 때 1,000여 매의 유인물이 살포되어 시민을 자극했다.

경상도 군인이 와서 광주를 쑥밭으로 만든다.

경상도 차를 보면 불을 질러라.

17시 30분경에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1,000여명의 시위 군중이 계엄군의 장갑차를 포위하고 투석과 폭행을 하여 장갑차에 타고 있던 병사가 겁에 질려 도망을 갔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M-16 소총 및 장갑차가 피탈 되었다. 5월 19일에 벌써 3정의 M-16소총이 피탈당한 것이다. 19:45분, 시위대는 유동에 세워진 석탄절 봉축 대형 아치에 불을 질렀고, 중흥동 광주터미널 부근 청과물 시장에서 경남번호판을 단 화물차 1대에 불을 붙여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시켰고, 이어서 북구청에 돌을 던지고, 누문파출소, 역전파출소, 임동파출소, 양동파출소를 공격한 후 방화했다. 21:00시, 시위대가 역전파출소를 다시 점령하고, KBS 광주방송국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했다.

이때 33대대가 광주역에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경찰과 함께 북구청 주변에 위치한 빌딩, 여관, 다방, 주택가를 뒤져 방화용의자 13명을 검거했다. 23:00시, 경찰과 96연대가 누문파출소와 양동파출소에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이 때 서방주유소 근방에 있던 시위대 2,000여 명이 군-경의 저지로 해산하면서 주유소 휘발유 9,500리터를 탈취해 갔다. 이날 밤 35대대와 61대대는 공용터미널에서 숙영했고, 61대대는 이튿날 새벽 05:20분에 전남도청 앞으로 이동했다. 19일 오후 내내 지속된 시위는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밤 11시에 접어들면서 점차 조용해갔다.

계엄사는 시위가 불길처럼 확산되고 시위양상이 격화일로를 치닫자 1개 공수여단을 더 증파하기로 하고, 정호용 특전사 사령관과 의논하여 최세창 장군이 이끄는 3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후, 18:00시에 2군사령부에 3공수 5개 대대를 작전통제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23:08분에는 3공수여단에 광주투입 명령을 하달했다. 같은 23:00시, 정웅 사단장은 기밀실에서 예비군훈련단장, 최웅 11여단장, 96연대장, 경찰국장 등과 작전회의를 했다. 익일인 5월 20일 오전에 증파되는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전남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서쪽을 담당하고, 11공수여단 3개 대대는 조선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동쪽을 담당하되 과잉진압을 자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3:40분, 2군사령관은 도시게릴라식 난동 행태에 대비하여 대대단위 기동타격대를 보유하여 과감하게 강타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충정작전지침을 하달하고 이적행위자는 단호하게 조치하고 선량한 학생과 시민은 보호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건물의 셔터를 내리게 하여 시위대가 도시게릴라식으로 건물을 이용하여 공격하지 못하게 할 것, 바둑판식으로 분할점령 할 것, 시위대 10명 이상이 모이지 못하도록 할 것, 총기 피탈자에 대해서는 엄중 처벌할 것 등의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수천수만의 시위대가 순식간에 운집하는 상황 하에서 10명 이상의 시위대가 모이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는 참으로 어이없는 탁상 지시였다.

5월 19일 시위진압 과정에서 시위대 김안부(36)가 전두부 열상으로 사망했고, 24명의 군경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십 명의 학생 및 시민이 부상을 당했다. 광주 시내가 다소간의 평온을 되찾자 11공수여단 3개 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는 광주 종합버스터미널에 집결하여 철야 경비에 임하였고, 7공수여단 33대대는 숙영지인 전남대로 복귀하였다. 5월 19일에 갑자기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양상은 1,800명에 불과한 5개 공수대대의 주먹과 진압봉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산되었고, 계엄군은 시위진압은커녕 자체방어에 정신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날 태평양지구 미공군사령관 휴즈 중장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전술공군기가 매우 빠른 시간 안에 한국전선으로 출동 할 것이며, 어떠한 북한의 공중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 고 경고했다. 또 한미 공군은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으며 전술 공군기를 24시간 출동대기 상태에 두고 있다고 경고했다.(조선일보,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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