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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의 고향 통영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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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6-24 18:17 조회17,5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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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널리 전파해주십시오. 특히 통영사람들에게!
 


                     
                 윤이상의 고향 통영의 반란

          

윤이상을 영웅시하는 통영에서 윤이상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윤이상이 1985년에 북으로 유인 해다가 요덕수용소에 집어넣은 희생자 신숙자(1942년 12월 생)가 바로 통영의 딸인 사실이 아주 최근에 극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은 한 장의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의 배경이 요덕 수용소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어느 한 의협심 있는  목사가 신숙자가 통영초등학교 45회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아래는 주간조선 기사를 읽고 중요한 줄거리만 추린 것이다. 


오길남 박사(67)는 30대에 독일에서 공부하던 중 간호사로 일했던 신숙자를 만나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그리고 1985년 윤이상의 꼬임에 빠져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북한으로 갔고, 오길남만이 1년 후 탈출하여 한국에 왔다. 오길남 박사는 아내와 두 딸을 구해달라면 탄원서를 쓰며 지금까지 애를 태워 왔지만 메아리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 그의 부인 신숙자가 통영의 딸이며, 요덕수용소에 있다는 내용이 공개돼 통영사람들에 일대 충격을 주고 있다. 윤이상이 통영의 영웅이라며 ‘윤이상음악당’까지 세우고 한국 조각가가 만든 윤이상 동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북한으로부터 동상을 들여다 세울 정도로 윤이상에 몰입해 있던 통영사람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일 것이다.    


통영시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도서관 1층에서는 5월 25일~6월 19일까지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가 열렸다. 그 전시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남녀노소 없이 충격과 비통에 빠졌다. “이 전시회를 보고 나서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전시회를 주관하는 곳은 통영기독교연합회와 통영현대교회(담임목사 방수열)다. 이 전시회는 세이지코리아와 한동대 북한인권학회가 지난해 10월 한동대에서 시작했다. 지난 2월에는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전시되었고, 김윤옥 여사가 관람하기도 했다.


이 전시회에는 흑백 가족사진 한 장이 인쇄되어 있고 그 밑에는 이런 글이 있다.


 ▲ 신숙자 씨와 딸 혜원, 규원양. 위 사진은 북한이 독일로 탈출한 오길남 씨를 재입북시키기 위해 요덕수용소에 있는 가족사진을 회유용으로 찍은 사진이다.(세이지코리아 사진제공)
ⓒkonas.net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 그런데 통영의 딸이 그곳에 있습니다. 사진은 1991년 작곡가 윤이상이 다시 월북하라고 회유하기 위해, 육성이 담긴 테이프와 함께 건네준 가족사진이다.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이 사진의 배경이 수용소 내부라는 것이 확인됐다. 신숙자. 1942년 12월 10일 통영 서호동 출생. 통영초등학교 45회 졸업. 통영여중 9회 졸업.”


전시장에는 오길남씨가 쓴 저서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도서출판 세이지)도 전시되어 있다. 오길남씨는 1993년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라는 책을 냈다.


전시회 주최 측이 만든 전시 팸플릿에는 사연이 간략하게 소개돼 있다.


“오길남 박사는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아내 신숙자씨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1985년 겨울 오길남 박사는 북한에서 좋은 교수직과 아픈 아내에게 최상의 진료를 보장하겠다는 북한 요원의 말을 믿고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월북한다. 그러나 북한에 도착하자 오씨의 가족은 외부와 차단 된 채 세뇌교육을 받았다. 1년 후, 그는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는 남한 부부를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로 가던 중 탈출했다. 그리고 혜원·규원 자매와 아내 신숙자씨는 1987년 말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갇히는데 이때 혜원 11세, 규원 9세였다.”


“오길남 박사가 북한을 떠나기 전, 아내 신숙자씨는 탈출에 성공하면 석 달 안에 빼내 달라.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우리 모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으라며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러운 범죄 공모자의 딸들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지 말고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 달라.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다. 그 범죄 공모에 절대 가담하지 말라! 도망쳐라!’고 말했다.”


신숙자가 통영의 딸이라는 사실은 방 목사가 밝혀냈다. 그는 신숙자의 모교에 전화를 걸었고, 5월 21일에 그녀가 통영초등학교 45회 졸업생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수많은 초등학생들이 이곳으로 인솔됐다. 아이들은 이를 보고  대한민국에서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고 있다고 한다. 정치범수용소가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옆집에 있어야 할 통영 사람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메모장에는 이런 글들이 남겨져 있다.


“신숙자씨 모녀뿐 아니라 수용소에 갇혀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출해야 합니다. 읽고 있으려니 화가 나네요. 빨리 정부가 나서서 이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파이팅!”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지만 만약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제발 도와주세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참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하루빨리 돌아오세요. 기도할게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이 통영 땅에 북한 사진전을 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사진전을 통해 통영의 딸들이 저 북한 땅에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다는 것이, 믿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사진전을 통해 알게 하심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루빨리 통영의 딸들이 구출되고 북한 정치범 수용소가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통영에는 윤이상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공존한다. 윤이상의 간첩 활동을 아는 보수우파 진영은 “윤이상이 뛰어난 음악가인 것은 틀림없지만 명백하게 반국가활동을 해왔으므로 통영의 대표인물로 추앙하는 것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반면 통영시와 윤이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술과 행적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이한 입장 때문에 ‘윤이상 기념관’이 지어지고도 이름을 ‘도천기념관’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조진규 두룡초등학교 교장은 “전시회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통영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 행적에 대해 확실하게 밝혔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헷갈려 합니다. 유족들은 그 당시 있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혔으면 합니다. 음악은 음악이니까요. 진실이 밝혀져야만 그 다음에 화합이 이뤄질 수 있다고 봅니다.


통영은 인구 13만의 도시다. 통영시는 혹시나 윤이상과 관련해서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에 대해 꺼려하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통영에는 윤이상의 딸 윤정씨가 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통영을 찾는 관광객 수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것이다. 방수열 목사는 “처음 이 전시회를 시작했을 때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는 비난도 들었다. 통영 사회 일각에서는 윤이상이 과거 독재정권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방 목사는 이런 말을 거부한다.


“윤이상이 김일성 부자에게는 일등공신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악한 정권을 찬양한 것도 옳지 않은데, 더군다나 같은 동향 사람을 북한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수용소에 갇히게 해서 한 가정을 완전히 파탄시킨 것은 매우 악한 일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통영의 대표음악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통영의 딸을 파멸시킨 자가 통영의 대표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통영의 딸인 신숙자 모녀 구출운동은 단지 통영의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숙자 모녀는 곧 한국의 딸들입니다. 그 지옥 같은 곳에 20년 넘게 갇혀있는 세 모녀는 우리의 잃어버린 딸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영에는 윤이상이라는 우상이 여전히 강력히 남아있다. 아내와 두 딸을 사지에 남겨두고 자신만 탈출한 못난 남자 오길남! 통일정책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재직했던 그는 현재 성북구 월곡동에 산다. 그는 1992년 9월 피 맺힌 ‘탄원문’을 썼다. 이 탄원문에 음악가 윤이상을 어떻게 봐야 할지 답이 나와 있다.  


                                      보탤 말


윤이상은 1989091년 황석영과 함께 김일성에게 초청되어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했다. 황석영은 시나리오를 쓰고 윤이상은 음악을 깔았다. 이 사실은 필자가 2010년 1월에 처음 발견해 냈다




 


              윤이상의 지독한 빨갱이 전력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사건’ 에서 ‘구라파 거점 북한문화공작원’으로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았다.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동백림(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북한을 왕래하며 벌어진 간첩사건이었다.

 

2년 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그는 95년11월 사망 시까지 27년간 북한을 계속 오가며 친북반한 조직들에서 중요직함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90년11월20일에는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명 난 범민련의 공동의장이 됐다.


윤이상은 1992년 ‘오길남간첩사건’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오길남 박사(현재 서울 거주)는 독일유학 중 정치망명한 뒤 85년 입북하여 한민전 대남흑색방송요원으로 활동하다가 86년 북한을 탈출해 9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윤이상은 오길남의 입북을 적극 권장하고 도와주었고, 오길남이 북한을 탈출하여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갖은 협박을 하며 재입북을 권유했다. 윤이상이 독일에서 설립한 한국학술연구원(KOFO)은 북한의 자금을 받아 설립, 운영된 조직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다.

 

92년 안기부는 ‘입북자수간첩 오길남 사건내용’이라는 수사결과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윤이상은 80.11 북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로부터 ”고려연방제 창립준비위원회 결성을 위해 해외대표로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았을 만큼 북한의 지령에 의해 움직였다.  84.12 평양에 북한의 해외문화 공작전위조직인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설립하였고, 88.7 동경에서 정부의 대북교류 및 개방화 추세에 편승, 휴전선에서 ”남북 합동음악제“개최를 제의, 북한 측으로부터 즉각적 찬동을 얻는 등 북한의 문화공작에 따라 남북음악제를 추진했고, 17회에 걸쳐 음악제 구실 등으로 입북하여 김일성을 접촉하는 한편, 김일성 75회 생일선물로 작곡하여 바친 반미, 반파쇼, 통일투쟁을 내용으로 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 자작곡을 10회에 걸친 연주회를 통해 발표하는 등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북한의 문화공작원이다”


“너(오길남)는 칠보산연락소의 비밀을 빼내간 미제 고용간첩이다. 너 때문에 동독에 있는 공작 총책임자가 평양으로 소환됐다.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면 가족을 몰살 시키겠다. 모든 것을 용서할 테니 다시 북한에 들어가서 살아라. 네 문제는 김일성 수령도 해결할 수 없다는 등의 협박을 하며 오길남의 재입북을 권유했다.”


                  김일성이 가슴으로 아낀 윤이상


2000년 북한이 펴 낸 김일성 교시집 ‘재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 등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들이 있다. 


“윤이상 선생은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성과를 통하여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올렸습니다....선생은 범민족통일음악회를 통하여 북에서 남조선당국자들의 기만선전을 깨는데도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선생이 조국통일을 위해 앞으로 자기의 힘과 재능을 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나는 선생이 이 사업에서 큰 성과를 거두리라고 믿습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 주체89-2000년 1월20일)


“선생이 민족의 단결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북남동포호의 소집문제를 제기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나는 북남동포회의를 하자는 선생의 제의가 매우 좋은 발기라고 생각하면서 전적으로 지지합니다...나는 선생과 같이 민족분렬을 끝장내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이 있기 때문에 조국통일 위업은 반드시 앞당겨지리라고 확신합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 2000년 1월20일)


“선생이 주체사상은 현시대에 맞는 사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혁명과 건설에서 백전백승하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은 주체사상을 지침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아무 때든지 선생이 다시 와서 만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 2000년 1월20일)


“위대한 김일성 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내가 윤이상 선생을 아껴야 한다고 한 것은 음악계에서 그런 재간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드물기 때문입니다...그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고 재간둥이입니다.”(북한 발간 음악연구 2000년 28호, 리철우가 쓴「내가 체험한 윤이상 음악」





 

                                    윤이상은 북한의 영웅


북한에서는 20여년 전부터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평양에는 ‘윤이상 음악당’이 건립돼 있다.


92년 북한은 윤이상을 모델로 ‘민족과 운명’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해외로 망명했다가 친북으로 변신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선전물이다. 이 영화는 북한의 백과사전 등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칭송되고 있다 한다.


                  윤이상 부부의 더러운 아부행각


위 서신은 북한의 ‘문학예술출판사’(주체92(2003)년 출간)가 펴 낸 ‘영원한 추억’이란 책자에 있고, 같은 책자에는 윤이상과 부인이 쓴 편지도 들어 있다 한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서거 1돐을 맞이하여 그 영령 앞에 심심한 애도와 흠모를 절감하오며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도이췰란드 베를린의 병원에서 윤이상 삼가 올립니다. 1995년 7월 8일”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부르시던 저의 남편 윤이상은 오늘 병원 병석에 누워있어 저와 같이 수령님 령전에 가서 수령님을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만사의 원리라고는 하지마는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신지 벌써 1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항상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에 계심을 느끼며 수령님을 추모할 때마다 그 인자하시고 인정 많으시고 눈물 많으신 우주와 같이 넓으신 덕성과 도량, 세상의 최고의 찬사를 올려도 모자라는 수령님, 살아계셨어도 그러하였고 돌아가신 뒤도 부디부디 불우한 저의 민족의 운명을 굽어 살펴주소서. 수령님 령전에 무한한 평화와 명복을 빕니다. 1995년 7월 8일. 리수자.”

  

“아- 수령님,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떠나신지 벌써 어언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를 이으신 장군님께서 한 치의 빈틈없이 나라 다스리심을 수령님께서 보고 계실 것입니다. 부디 평안을 누리시고 영생불멸하십시오. 우리의 강토를 지켜주시고 민족의 념원인 통일됨을 열어주십시오.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 수령님 령전에 큰절을 올립니다. 주체88년 7월 8일 리수자”(주:주체88년은 1999년. 김일성 생년인 1911년이 주체1년)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쪼각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 같이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 1994.7.9 빠리에서. 치료 중에 있는 윤이상 부부”

                                                   


사진 맨 위 '영원한 추억'에 수록된 이수자씨의 친필 서신. 그 아래는 '영원한 추억'의 표지. 마지막 아래는 이수자씨를 만나는 노무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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