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이명박 호적 분석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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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11-12 14:42 조회22,9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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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게시물들은 2007.4.18. 및 4.29.에 시스템클럽 최근글에 있습니다. 이 글들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회원님들을 위해 다시 옮겨드립니다.
1. 이명박 가의 호적 공사
http://cafe.daum.net/yellow77/Z78k/270?docid=1MPhK|Z78k|270|20110207005217
2. 이명박 가의 호적 이야기
조선시대에서도 호적은 있었다. 당시의 호적은 양반이라는 신분을 과시하고. 과거 때 신분을 증명하는 데 사용된 중요한 문서였다. 호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양반들의 재산인 노비문서의 역할도 했다.
노비(奴婢)에서 노(奴)는 남자 종을, 비(婢)는 여자 종을 의미했다. 종들은 아버지를 모르고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노비 문서의 성명을 예로 들면 이뿐이는 伊分으로, 개똥이는 介童으로, 칠돌이는 七乭 등으로 표시했고, 사극에서 보는 것처럼 돌쇠, 떡쇠, 마당쇠 등 쇠(釗, 이름쇠)자가 많았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양반, 상놈, 노비로 갈라진 신분제도는 일본 총독부에 의해 처음으로 파기됐다. 미국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남북전쟁을 통해 1863.1.1. 노예해방선언이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 총독부가 상놈과 노비를 모두 명령 하나에 의해 해방시킨 것이다. 그리고 일본식민시절인 1923년 조선총독부가 조선호적령을 제정하면서 한국의 호적이 비로소 법에 의해 국가행정 차원에서 관리되기 시작하였다.
필자가 어렵게 구한 이명박家의 호적은 바로 1923년부터 시행된 일제관청에 의해 유지돼왔던 일본어 호적이다. 이명박 家의 본은 경주 이씨로 되어 있고, 이명박의 조부는 이종한(李鐘漢), 증조부는 이수발(李秀彂)이다. 이종한의 3형제의 이름은 이무특(李無特), 이경특(李景特) 이덕쇠(李德釗)로 되어 있으며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전혀 경주이씨 가문의 돌림자가 아니다. 조부인 이수발도 돌림자가 아니고, 이종한의 3형제 모두가 다 경주이씨의 돌림자가 아니다. 경주이씨 가문의 돌림자를 보면 ‘상(相)’자 위에 ‘우(雨)’자, ‘雨자 위에 鍾자, 鍾자 위에 圭자라 한다.
이명박의 아버지 덕쇠(德釗)는 그가 33세 되던 해에 경주이씨의 돌림자인 雨를 사용하여 충우(忠雨)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후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경주이씨 돌림자인 상(相)자로, 딸들의 이름은 귀(貴)를 돌림자로 사용했다. 이 중에서 돌림자를 이탈한 남매는 ‘명박’(明博)과 ‘말분’(末紛)이다.
이명박과 이말분이 호적에 돌림자로 등록되지 못한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명박은 자작 영웅전 ‘신화는 없다’에서 ‘말분’을 ‘귀분’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기자들이 이명박에게 왜 당신만 돌림자를 쓰지 않았느냐고 묻자, 어머니의 꿈에 크고 맑은 달이 어머니 몸속으로 들어와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답변했다.
이명박은 그래서 돌림자를 이탈하였다고 치고, 말분은 어째서 돌림자를 이탈하였느냐고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호적상에 기록된 엄연한 ‘말분’을 이명박은 그의 자서전에서 ‘귀분’이라고 소개했다. 이는 의도된 거짓으로 보인다.
이명박은 자서전에서 그의 모친을 '반야월 채'씨라고 소개했지만 모친계의 호적을 보면 '인천 채"씨로 되어 있다. 도대체 맞는 게 없고, 난잡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이명박 가의 호적을 샅샅이 분석한 것은 이명박이 그의 자서전을 왜곡하여 그의 부친이 유교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라고 왜곡-미화했기 때문이다.
3. 냄새 진동하는 이명박 가의 호적
이명박家의 호적을 보니 자서전은 만화로 쓰여졌습니다
항간에 난분분한 출생의혹과 병역의혹들은 그동안 의혹으로만 남아 있었을 뿐 확실한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시대에 작성된 호적은 이명박이 얼마나 거짓으로 자서전을 썼는지, 이명박家가 어떤 집안이었는지 생생하게 나타내 줍니다. 한마디로 이명박의 자서전에서 출생 부분은 맞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이명박 아버지 이름은‘德釗’(덕쇠), 1907년 생이고 어머니는 1909년생입니다. 이명박은 자서전에서 자기 아버지를 “유교 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라 소개했지만 일본시대의 호적을 보니 그의 부친은 ‘德釗’(덕쇠) 였습니다. 이런 이름은 양반풍의 이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호적에는 ‘덕쇠’가 33살에 이름을 ‘충우’로 바꾼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출신계층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덕쇠’라는 이름도 수치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이명박이 자서전에서 “유교풍의 양반타입”이라고 아버지를 띄우지만 않았다면 이를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양반가도 아니면서 양반가라는 인상을 갖도록 자서전을 썼기 때문에 문제를 삼는 것입니다.
2) 아버지가 낳은 셋째 아이인 국회부의장 이상득이 1935년생인데, 이명박은 아버지가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고 자서전을 썼습니다.
이명박은 자서전에서 아버지 이충우가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에 가서 자리를 잡고 머슴살이보다 더 고달픈 생활로 조금씩 저축해가지고 영일군에 돌아와 본이 “반야월”인 채씨 여인과 경혼한 후 다시 일본으로 가 6남매를 낳았다고 했지만, 이 역시 완전 거짓말입니다.
호적을 보니 1930년에는 첫딸 ‘귀선’이 태어내 있었고, 둘째인 상은이 1933년에 태어나 있었고, 1935년에는 이상득이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바로 위의 형인 이상득씨가 1935년생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고 자서전을 쓴 것입니다.
3) 어머니의 본이 ‘반야월’ 채씨라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이덕쇠의 부인 채태원씨는 본이 ‘반야월’ 채씨가 아니라 ‘인천’ 채씨였고, 두 사람이 결혼한 해도 1931년입니다. 이명박은 어머니가 반야월채씨인지 인천채씨인지 통 모르고 자랐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4) 아버지 3형제 중 2형제가 일본 오사카에서 이웃하여 대가족을 이끌고 살았는데 이명박은 자서전에서 이충우 혼자 일본에 갔다고 속였습니다.
자서전에는 이명박의 큰 아버지 두 사람(무특, 경특)이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뙈기를 나누어 갖고 자기 아버지 이충우만 일본으로 갔다고 되어 있지만 이 역시 거짓말입니다. 이덕쇠의 맏형인 이무특은 이덕쇠와 함께 일본 오사카에서 8남매를 거느리고 이웃하여 살았습니다. 이명박의 가문은 당시 일본 가문이었습니다.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기가 무서워 아버지 혼자만 일본에 갔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5) 이충우가 일본에 가서 6남매를 내리 낳았다는 자서전 내용도 거짓입니다.
이명박의 바로 위의 누나인 ‘귀애’는 1938년에 포항에서 낳았습니다. 채씨는 일본에서 귀선, 상은, 상득을 낳은 후 4번째 아이인 귀애는 영일군으로 돌아와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명박과 이말분이 각기 1941년과 1945년에 오사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이명박과 이말분의 이름은 1960년대에 가로쓰기로 만들어진 ‘세탁된 호적’에만 들어 있고, 원 호적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명박의 어머니 채태원家의 호적을 보면 소화시대의 기록, 단기시대의 기록, 서기시대의 기록이 모두 순서대로 잘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덕쇠家의 호적에는 1938년 귀애의 출생 기록 이후부터 기록이 단절돼 있습니다. 1941년생인 이명박과 1945년생인 이말분에 대한 출생신고가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출생신고를 떳떳하게 할 수 없는 사연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는 대목인 것입니다. 더구나 이명박은 남자 돌림자인 ‘상’자를 이탈했고, 이말분은 여자 돌림자인 ‘귀’자를 이탈했습니다. 꼬박꼬박 기록해 오던 호적에서 유독 돌림자를 이탈한 이 두 아이들의 출생신고만 누락돼 있는 것이 수상한 것입니다. 이복형제설은 여기에서부터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채씨가 넷째인 귀애를 영일군에서 낳았을 때, 귀선이는 9살, 상은이는 6살, 상득이는 4살이었습니다. 채씨는 아이들이 줄을 지어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적령기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만일 채씨가 귀애를 낳은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아이들에 대한 학교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면, 그 후 일본에서 태어난 이명박과 이말분은 일본에 있는 다른 여인으로부터 태어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상은이나 상득이가 포항중앙초등학교에서 이명박 가가 귀국했다는 1945년11월 이전에 학교를 다닌 기록이 있거나 증인이 있다면 이명박과 이말분이 다른 여인의 소생일 수 있습니다.
6) 7남매 중 이명박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이명박의 바로 밑엣 동생인‘末粉’이도 딸들의 돌림자인 ‘귀’자를 이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명박은 자서전에서 ‘말분’을 ‘귀분’이라고 속였습니다. 기자들이 이명박을 향해 왜 당신만 돌림자를 이탈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이명박은 어머니의 태몽 꿈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꿈에 크고 밝은 달이 어머니 몸속으로 들어와서 이름을 명박이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명박’이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매우 흔한 이름입니다. 이씨를 月山씨로 창씨개명한데 이어 이명박이 일본에서 태어났고, 그 이름도 일본이름으로 지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명박에게 다시 물어야 합니다.‘그러면 말분이는 왜 돌림자를 이탈했느냐?’, ‘왜 말분이를 자서전에서는 귀분이라고 속여서 소개했느냐?’ 이렇게 물어야 할 차례인 것입니다.
7) 채씨의 사망신고는 미스테리입니다.
이명박의 어머니 채씨는 1909년생입니다. 1930년에 첫딸 귀선이를 낳았고, 1964년12월15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사망신고는 만 8년간 유보돼 오다가 1972년2월22일, 채씨와 동거했던 맏사위가 신고했으며, 당시 맏사위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 아파트에 살았고, 채씨는 동 아파트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한강맨션은 지금의 타워팰리스 정도로 호화 아파트였습니다. 사망신고를 8년씩 늦춘 것에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면 재산 상속 등과 같은 피치 못할 사연이 있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채씨가 사망했을 때 이충우의 나이는 57세, 상은이 32세, 상득이 30세였습니다. 이들은 다 무얼 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8) 자서전을 자세히 읽으면 이명박은 서자로 느껴집니다.
이명박 자서전에서 이명박이 그의 어머니 채씨와의 관계를 모두 뽑아서 일렬로 나열하면 9개정도입니다. 이 아홉 곳에 열거돼 있는 내용들을 보면 이명박은 채태원씨가 낳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내용들로 보입니다.
“막내인 명박과 말분이만 남겨 두고 온가족이 서울로 떠났다”
“형들은 기골이 장대한데 유독 명박이만 작다. 유독 명박이만 성장기에 못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새벽기도는 형들에게 치우쳤고, 명박에 대해서는 맨 끝에 건강하게 해 달라는 단 한 마디였다”
“형들은 서울로 가고 막내인 명박이만 포항에서 부모님을 도와 돈을 벌어 형의 학비를 대야 했다”
“학비가 없는 교통고등학교에 가려 해도 어머니는 안 된다고 했다. 국화빵 팔아 돈을 벌어 형의 학비를 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야간고등학교라도 학비가 들면 절대로 갈 수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보내주는 돈으로는 배가 너무 고파 여동생과 함께 무작정 상경했다. 그런데 부모님의 생활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감옥에 있을 때 어머니가 딱 한번 찾아와 한 마디만 남기고 매정하게 돌아갔다”
9) 이명박이 호주인 호적도 미스테리.
이명박은 부인 김윤옥과 1973년4월30일부로 결혼신고 했다.
첫째인 주연은 1971년 12월11일에 출생했고 출생신고는 1975년 2월5일에 했다.
둘째인 승연은 1973년 6월1일에 출생했고, 출생신고는 1975년 2월5일에 첫 아이와 몰아서 했다.
셋째인 수연은 1975년5월19일에 출생했고, 출생신고는 1979년8월6일, 만 4년 뒤늦게 했다.
넷째인 시형은 1978년3월7일에 출생했고, 출생신고는 1979년 8월6일, 1년반 뒤늦게 신고했다.
2011.11.1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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