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공간의 이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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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2-09-15 17:28 조회13,29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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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공간의 이력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충돌하는 역사였다. 북한의 끝없는 무장공격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정규전과 남한 빨갱이들을 동원하는 북한의 대남공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한 비정규전이 조금도 쉴 새 없이 전개되는 역사가 바로 대한민국의 역사인 것이다. 북한은 이를 쉬운 말로 정의한다. “남조선 역사는 진보와 보수반동 사이의 충돌 역사다”
아래의 간단한 국가 이력서는 유신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유신이 어째서 이 나라를 북으로부터 지켜냈고, 한국경제를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로 성장하는데 없어서는 안 됐을 매우 중요한 이니시어티브 였음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신의 이력서’인 것이다.
아래의 이력서를 보면 박대통령은 ‘민족중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우리도 천대받지 않고 굶지 않는 어엿한 국가가 되고, 종국적으로는 경제력을 키우고 그 경제력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키워 국민들로 하여금 북한의 끊임없는 공격으로부터 더 이상 개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오직 전진 또 전진을 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박정희의 전진행위를 방해하기 위해 김일성은 거의 매일 무장공비들을 남파하여 무고한 국민의 생명을 앗아감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박정희의 지도력를 의심하도록 만들고 급기야는 박정희의 목을 따오라며 33(31명은 옛날 이야기임)명의 무장공비를 청와대로 침투시켰고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박정희를 살해하라며 김대중이 일본에 세운 한민통으로 하여금 문세광을 보내 8.15행사의 기념사를 하고 있는 박정희를 저격하라 했다.
전방의 병사들이 나날이 희생당하고 무고한 국민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고 박정희는 북한과 대화를 하여 북의 공격행위를 완화해보려고 1972년 7월 4일, 이른바 ‘7.4공동성명’에 합의했지만, 김일성과 남한의 좌익들은 이를 통일의 호기로 생각하고 통일운동을 빙자한 국가파괴 행위를 노골적으로 감행하기 시작했으며 연일 통일운동을 빙자한 불법시위가 폭증했다. 이를 매우 위험하게 생각한 박정희는 드디어 7.4공동성명 3개월 만인 10월 17일에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2월 27일 유신헌법을 발효시키는 특별조치를 취했고, 73년 1월 8일에는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했다.
김일성의 전사 김대중은 여기에 불을 지피기 위해 73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코헨교수를 만나 ‘주한미군을 철수케 하고 원조를 중단케 하여 박정희를 압박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해 8월 8일의 납치사건을 유도했다. 빨갱이들은 외교적으로 코너에 몰린 박정희를 제거하기 위해 73년 10월부터 대학생들을 의식화-조직화 하여 74년 4월 3일의 대대적인 민청학련 및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남한보다 2배 다 잘살고 2배 이상 더 강한 군사력을 가진 김일성의 끊임없는 공격행위와 이를 배경으로 하고 김대중을 정점으로 하는 남한 빨갱이들의 선동과 선전을 통한 국론분열 행위들, 그리고 오직 출세에만 눈이 먼 정치모리배들의 발호를 그대로 두고서는 박정희는 그의 산업화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없었다.
유신은 바로 빨갱이들을 때려잡고 국가중흥을 이루어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유신을 나쁜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빨갱이들일 것이다. 유신은 국민에게는 따뜻한 울타리와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고, 빨갱이들과 출세에만 눈이 먼 정치 모리배들에게만 서릿발이었던 것이다.
유신 공간의 이력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 군사혁명
당시 실업률 30%,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2번째 국가, GNP 76달러(북한의 절반)
국가예산 소스는 대충자금(미국으로부터 임여농산물, 석유, 유연탄을 팔아 국가예산 충당),
1962년
박정희: 케네디에 돈 빌리러 갔다가 냉대받고 울어, 광부-간호사 서독으로 수출, 쥐털로 코리안밍크 수출, 가발수출, 기술고등학교 설립(기능공 양성)
김일성: 12월, 4대군사노선 발표(전국토의 요새화, 전인민의 무장화 등), 거의 매일 전국 각지에 무장공비 침투시켜 살인 만행
1965년
박정희: 2대 사건, 한일국교정상화 8억달러, 월남 파병으로 국위선양 및 경제발전 토대마련
김일성: 4월, 인도네시아 방문 연설(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혁명론 발표), 중공 핵실험 성공, 간첩 김영춘을 보내 도예종 포섭 제1차인혁당(지하조직, 57명 규모) 결성, 6.3사태(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등) 배후조종
1966년
박정희: KIST 설립, 포항제철 건설 착수
1967년
박정희: 과학기술처 설치, 월남장병의 용맹성 세계적 뉴스, 한국의 위상 제고, 미국의 적극적인 경제 및 군사지원, 차관 주겠다는 국가들 속출, 중동 특수,
1968년
박정희: 2월1일, 경부고속도로 착공
김일성: 1.23일 김신조, 1.28, 프에블로호 납치, 10.30, 울진삼척 무장공비 126명, 12.9, 이승복 살해, 북한의 호전성 하늘을 찔러
1969년
닉슨 독트린: 7.26, 닉슨 괌도에서 미국은 아시아에 군사개입 안 할 것
김일성: 9.12. KAL기 납치(51명, 강릉-서울행 여객기 대관령에서 납치), 연일 무장공비 침투
1970년
박정희: 국방과학연구소 설치
김일성: 6.22. 국립묘지 현충원 폭파
1971년
박정희: KAIST 설립
1972년
박정희: 1월부터 율곡8개년 계획 시동(국산화 박차), GNP 6% 국방비로 투입, 15억 달러 예상액이 실재로는 60억 달러. 연 경제성장률 13%, 7.4공동성명(민족, 민주, 자주평화통일에 합의). 8.3경제비상조치(사채동결, 지하지금으로 대기업 양성), 10.17, “대통령특별성명” 발표(국회해산, 계엄령 선포) 12.27. 유신헌법 발효(11.21. 국민투표 91.9% 찬성, 간접선거 통일주체국민회의 2.359명 대의원 선출, 유정회 73명).
1973년(오일쇼크의 해)
박정희: 1.8일, 긴급조치 1,2호 발표,
김대중: 4월, 미국 하버드대 코헨교수에게 미군철수, 군사원조 중단 압력 부탁, 8.8 도쿄 팔레스호텔에서 납치 129시간에 서울이송, 10월초부터 학생-재야운동으로 확대되어 1974년 민청학련 4.3사건으로 연결되고 이어서 긴급조차 4호 발동
1974년
4.3일, 인혁당 재건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 4.25.중정발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전복과 노동자,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
민청학련 관련자 규모 1,024명,
'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180명 군법회의 회부
1975.4.8. 대법원 사형선고, 20시간 만에 집행, 8명(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2002.9.12.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중정조작사건’이라 발표
2005.12.27, 법원 재심결정
2007.1.23. 서울중앙지법 무죄선고(280억 배상)
육영수 여사 저격: 8.15
1975년(4.30. 월남 패망)
2012.9.15.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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