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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김정은이 친구로 보이는가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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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3-06-07 22:39 조회8,8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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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12시에 북한이 남북회담을 제의한 것을 남한은 6월 6일 19시에 북한의 제의를 수용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박근혜 정권은 오매불망 북한의 연락만을 학수고대했던 것일까, 그야말로 체면도 집어던지고 버선발로 뛰쳐나가 북한의 제의를 맞아들였다,

이것이 '박근혜 신뢰 프로세스'의 모습이라면 박근혜 신뢰 프로세스라는 것도 북한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굴종적 외교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탈북 청소년 9명을 남한이 유괴했다고 북한이 공갈치던 것이 엊그제였다, 개성공단에 제품들을 놔둔 채 보따리만을 들고 쫓겨나던 것이 엊그제였다, 연평도 포격이나 천암한 폭침에 대해서 북한은 사과 한마디라도 했는가,

박근혜 정권의 기억력은 이틀 전까지만 기억하는 모양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배우지 못한다면 박근혜도 김대중 노무현처럼 북한의 시다바리나 하다가 5년 세월을 허송하게 될 것이다, 3일 전의 꽃제비에서, 수 년 전의 천안함에서, 그리고 수십 년 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만나서는 안 될 자들을 만난 자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박근혜는 이런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1946년 10월 1일 아침, 대구에서는 남로당 조직인 전평 노동자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2일 아침 대구의대 학생들은 정체불명의 시체를 떠메고 다니면서 경찰의 발포로 죽은 시체라며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시체는 도립병원의 포르말린에 담겨져 있던 시체를 훔쳐낸 것이었고, 이 선동자들 중에는 나중에 제주 인민해방군 사령관이 되는 김달삼도 끼어있었다,

저녁에는 많은 군중이 모인 경찰서 앞에서 시체 데모대는 경찰서 현관 앞에 시체를 진열해 놓고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했다. 그리고 시체 데모대의 대표들은 대구 경찰서장의 면담을 요구했다, 그리고 경찰서장과 마주했다. 폭도들을 진압해야 할 경찰이 진압 대신 폭도들과의 협상에 나선 것이었다, 좌익식 표현으로‘평화회담'이었다, 시체 데모대는 경찰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여기에 남로당의 간부들도 가세해 데모대의 협박을 지원했다. 경찰서 앞에 진을 친 많은 군중들에게 위압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경찰서장이 너무나 평화를 사랑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이없게도 이성옥 대구 경찰서장은 폭도들의 요구에 굴복해 버렸다, 협상의 결과는 평화가 아니라 폭동의 대확산이었다,

대구 경찰서가 폭도들에게 접수되었다는 소식은 폭도들의 사기를 끌어올렸고, 반대로 사기가 떨어진 경찰은 대구 관내의 파출소와 지서, 그리고 대구 근교의 지서들까지 폭도들의 수중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살육과 약탈이 판을 치는 대구는 10월 폭동의 진앙지가 되었다, 협상, 평화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감상주의가 경찰을 폭도와 협상하게 했고, 이것은 무법천지의 해방구를 남한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1948년 4월 30일 상오 12시, 제주도 안덕면 산간부락에 있는 초가집에서 국군 9연대장 김익렬과 4.3폭동의 사령관 김달삼이 마주 않았다, 대한민국 제헌 선거를 방해하려는 좌익들의 4.3폭동이 발발한지 한 달여, 하루빨리 폭동 진압에 나서야 할 9연대장이 한가롭게 제주인민해방군 폭도 두목과 ‘평화 회담’이라는 황당한 회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7일 간이라는 휴전 기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남로당 폭도 두목 김달삼에게 휴전이나 평화회담이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4월 말에 국군의 진압이 강경해져오자 김달삼은 제헌선거가 실시되는 5월 10일까지 국군의 예봉을 피할 속셈으로 거짓 회담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4월 30일부터 7일간의 휴전이라면 선거 직전까지 국군의 진압으로부터 반란군 세력을 보전하려 했던 것이었다,

4월 말에 강력히 진행되던 국군의 진압이 계속 되었더라면, 남로당 폭도들을 계속 밀어부쳐 그들의 숨통을 일치감치 끊었더라면, 4.3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48년에 시작된 4.3폭동은 57년 4월까지 끌었다. 진압 부대장의 희미한 국가관, 빨갱이를 믿고 협상에 나섰던 것에 대한 대가, 그 빨갱이에 대한 안이한 판단에 대한 대가는 제주도민이 치러야 했다, 그 대가는 너무 처참한 것이었다,

1951년 7월 15일, 남부군 빨치산 500여 명이 덕유산 아래에 위치한 전라북도 장수군 일대를 습격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빨치산은 포로로 잡았던 경찰관 30여 명을 풀어주면서 경찰 측에게 회담을 제안하였다, 이튿날 아침 8시, 장계읍 근처에 있는 외딴집에서 경찰 측 대표로 나온 장수 경찰서 경무주임 일행과 빨치산 측과의 ‘평화회담’이 열렸다,

빨치산의 요구는 이런 것이었다, 장수군 일대의 3 개 리(里)를 해방구로 인정해 경찰이 공격을 안 해 준다면 빨치산도 다른 곳에 대한 공격을 일체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경찰도 편하고 빨치산도 편할 것이라는‘평화’제안이었다, 그러나 이 조건은 경무주임의 권한으로 결정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경무주임은 상부의 결정을 알아보고 정오까지 대답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자 경찰과 빨치산 사이에는 이 결정이 내려지는 정오까지에는 자동적으로 잠정적 '휴전'이 성립되었다,

최소한 아침부터 낮 12시까지 빨치산이 점령한 장수군 일대는 해방구가 되었다, 쥐새끼처럼 밤중에만 들락거리던 빨치산들은 벌건 대낮에 읍내를 활보하며 집집마다 들어가 먹고 마시고 목욕하며‘평화'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휴전 기간 사이에 막대한 양의 보급품을 바리바리 싣고 산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

빨치산의 제안은 경찰 상부에서 당연하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빨치산에게도 이런 황당한 제안이 받아들여지리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제안이 거부당해도 빨치산은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황당한 회담과 황당한 평화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무능한 경찰 치하에 있던 주민들의 몫이었다,

1952년 7월 5일 오후 2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 준장은 제76구역 수용소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공산군 포로는 약 17만 명으로, 수용소의 포로들 간에는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반공포로와 공산포로로 갈라져 극한대립을 하고 있었다, 공산포로들은 반공포로들을 조직적으로 납치 살해하여 암매장하는 수법을 쓰곤 했었는데, 도드 준장이 향하는 제76 수용소는 이런 비밀 암살을 조종하는 지하 지휘부였다,

제76 수용소에 있는 이학구 인민군 총좌는 며칠 전부터‘거사'를 계획하고, 지속적으로 도드 준장에게 면담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학구는 제네바 협정을 들먹이며 식사량이 부족하다는 둥, 식사에 반공포로들이 독약을 넣었다는 둥,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인권 타령을 하고 있었다, 도드 준장은 일부 장교들의 무시하라는 조언을 무시하고‘인도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면담을 수락했다, 수용소 정문에서 철망을 사이에 두고 수용소장과 포로 대표가 '인도주의'에 가득찬‘평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평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때, 20여 명의 포로들이 분뇨통을 들고 분뇨를 버리려 수용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들이 분뇨를 버리고 돌아오는 순간에 갑자기 호각소리가 울리고 이들은 도드 준장에게 달려들어 도드를 수용소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수용소 포로들이 수용소장을 포로로 잡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미군에게는 국제적인 망신거리였다, 더욱이 후임 소장은 도드 준장을 구출하기 위하여 인민군 포로들이 요구하는대로 각서에 도장을 찍어주어야 했다, 미국의 굴욕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평화를 믿었던 대가, 공산주의자들의 인도주의를 믿었던 대가치고는 너무나 비싼 대가였다,

1948년 4월 22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석회의에 김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북 연석회의는 남한의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북한에서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불러모아 남한의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자는 회담이었다, 김구가 입북하려 하자 입북을 반대하는 지지자들과 학생 단체들이 입북을 반대하며 김구 집 앞에서 저지 농성을 했다, 김구는 뒷담을 넘어 평양행을 감행했다,

해방 정국에서 가장 선명한 반공 노선을 걸었던 반공주의자의 인생에 치명적 오점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이승만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해 정권에서 멀어진 김구로서는 북한에 기대보는 것이 마지막 남은 수단이었다, 김구는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독립투사였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김구와 소련의 대리인인 김일성의 만나서는 안 될 만남, 김구에게는 불행한 만남이었다,

김일성은 김구가 김일성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으로 김구의 사진을 찍어 자기 선전에 이용했을 뿐, 김구가 김일성에게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김구는 김일성과의 만남을 얻은 대신 남한에서 쌓아올렸던 정치적 입지를 잃어버렸다, 김일성 뒤를 따라가는 김구 사진은 후대에서 김구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됨으로서, 반공주의자 김구는 본의 아니게도 종북에게는 숭상을, 우익에게는 조롱을 받게 되었다, 김구와 김대중은 북한과 접촉하여 북한에 이용당한 정치인으로서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선명한 반공노선을 걸었던 김구가 후대에서 남한 빨갱이들의 우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김구는 어떤 얼굴빛이 될까,

1972년 5월 4일 새벽 1시 평양 모란봉 초대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한 밤 중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후락은 김일성과의 면담이 있음을 직감하고 양복을 입으며 주머니 속에 청산가리가 잘 있는지를 확인했다, 비 내리는 밤길을 뚫고 이후락은 김일성 앞에 당도했다,

1972년 7월 4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통일의 원칙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7·4남북공동성명이었다, 여기에 담겨진 평화통일 3대 원칙에 박정희는 화를 내었다, 3대원칙은 북한이 주장하는 통일론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고, 북한이 일방적으로 제안한 것을 이후락이 즉흥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정희가 경제부흥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북한에 끌려가지 않고 북한과의 경쟁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박정희는 북한의 ‘평화’ 공세에 속지 않아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나중에 공개된 1973년 3월 8일자 루마니아 외교문서에는 북한 정권에서 7.4공동성명으로 남북대화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기반을 흔들어 야당 진영의 집권을 도우려 했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나왔다, 당시 니콜라이 차우세스쿠를 예방한 김동규 북한노동당 비서는, “남측과의 대화를 통해 남한 대중들에 혁명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울러 남한 괴뢰도당을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혼란상항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했다, 앞에서는 ‘상생의 평화’를 외치고 있었지만 뒤에서는 ‘파멸의 공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북한 정권이었다,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대중과 김정일은 반갑게 두 손을 마주 잡았다, 6월 15일 이들은 ‘평화’와 ‘통일’과 ‘민족’이 눈발처럼 나부끼는 6.15선언을 발표하였다. 사람들은 금방 통일이라도 된 것처럼 평화라는 미몽에 취했다. 그리고 남녁의 물자와 현찰이 바리바리 북녘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90년대 말에 300만의 아사자가 발생, 거의 가사 상태에 빠져 망명을 준비하던 김정일 정권에 비로소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철조망 공장이 다시 돌아가며 수용소의 철조망을 찍어내고, 핵 공장의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끊어지는 김정일의 숨통에 회생의 링겔을 꼽은 것은 김대중이었다, 만약에 이 때 김대중이가 황당한 ‘태양’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다면 김정일 정권의 숨통이 끊어졌거나, 외국으로 망명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쯤 우리는 평양 모란봉에 모란꽃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을 지도 모를 것이다,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지도자의 실수로 눈앞에 다가온 통일을 놓치고, 북한 주민을 억압하는 총칼을 만들어주고, 가장 위험한 정권에게 핵을 만들어 주었다, 김대중 개인은 노벨 평화상을 받는 명예를 누렸지만, 북한주민은 철조망에 갇혀 굶어죽고 맞아죽고, 대한민국은 김정일 핵개발의 동반자로 세계가 손가락질하는 치욕을 받았고, 결국은 북한의 조공국으로 전락하여 걸핏하면 북한에게 두드려 맞는 신세가 되었다, 이만하면 김대중을 무덤에서 파내어 부관참시 할 만하지 않은가,

2002년 5월 11일. 김정일 전용기로 평양으로 날아간 박근혜는 5월 13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과 마주 앉았다. ‘평화’와 ‘통일’이 눈발처럼 나부끼는 ‘화해’의 시대적 분위기에 박근혜도 편승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아버지 대에서 이룩하지 못한 7.4공성명의 열매를 맺자”고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천안함이 폭침되고 북한에서 포탄이 날아오고, 핵 공갈이 이어지는 지금, 7.4 합의정신은 무엇이며 6.15선언의 정신은 어디 있던가, 그것들은 이미 송장이 되었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화해’의 정신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죽이기 위한 ‘음모의 계략’으로 태어난 것들이었다,

박근혜와 마주앉은 김정일은 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했던 사건에 대해 이런 발언을 했다,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지른 것으로 미안한 마음이다, 당시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벌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를 습격했던 인물 중 한 명이었던 김신조는 당시 북한으로 도주한 1명의 무장공비가 북한인민군 대장 박재경 총정치국 부총국장이라는 것을 증언했다, 박재경 부총국장은 2000년 9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용순 당 중앙위 비서를 수행해 김대중에게 송이버섯을 전달했던 인물로 북한 군부 최고 실세 중 한 사람이었다,

김정일은 박근혜에게까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청와대를 습격했던 무장공비나 주도자들은 김정일에게 처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김정일 치하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역시나 믿을 수 없는 한 마리의 공산주의자였을 뿐이었다, 박근혜는 청와대를 습격한 무장공비를 처벌했다는 그 때 그 김정일의 발언을 잊었을까,

2007년 10월 3일 오후,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노무현과 김정일이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노무현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노무현이 먼저 알아서 비위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10ㆍ4 남북공동선언은 그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10.4 선언문은 북한에 대한 퍼주기와 NLL 떼어주기 처럼 북한에 대한 일방적 퍼주기를 약속하는 문서로 10.4 선언은 노무현의 무식을그대로 드러낸 선언문이었다, 선언문은 북측에서 나온 문안을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노무현이 그대로 도장을 찍어준 것이었다,

노무현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노무현은 임기를 3달 남겨놓고 있었다, 노무현은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비정상적인 정상회담에서 불가능한 약속을 실컷 해놓고 이명박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이다, 10.4 선언은 임기를 몇 달 남겨둔 노무현이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에 던지는‘깽판’이었다,

김정일이 핵을 개발할 때에도 노무현은 ‘북한 핵무기가 자위용이라는 북한 주장에 일리가 있다’며 북한을 옹호했고, ‘북한이 발사 하는 것은 핵이 아니라 인공위성일 수도 있다’ '핵 실험이 판명 됐으나, 성공여부는 모른다'며 자기 실책을 인정하지 않았다, 노무현이 부엉이 바위로 올라갔던 이유는 부부싸움이나 비자금 때문이 아니라 북한에게 속수무책으로 핵을 만들어줬던 무식한 정책에 대한 자책 때문이라고 해야 최소한 죽은 노무현에게는 모욕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자 북한에서는 정상회담의 대가로 5~6억 달러 상당의 현물을 요구했고, 이 제의를 이명박 정권이 거부하자 북한은 천안함 폭침을 도발하고 연평도 포격을 도발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냉탕과 온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결국은 정상회담을 구걸하다가 김정일에게 두드려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도발에 대해 강력한 대처도 하지 못했다, 김정일의 포격에 대응하여 이명박은 강력하게 대응하겠다는 구두포(口頭砲)만 날리다가 기회를 놓쳤다,

이명박 정권 기간 동안에도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목으로 물자들은 북으로 올라갔다. 줄 것은 줘 놓고서도 이명박 정권은 북한 정권으로부터 온갖 욕설과 수모를 받았고, 뒤로는 정상회담을 구걸하다가 매까지 얻어 맞았으니, 이명박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권은 어떨까, 북한과의 회담에 목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노무현이나 이명박에서 박근혜 또한 진일보한 대북정책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권은 지난 4월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협박하며 남북한이 일촉즉발의 대립 상태에 있을 때, 엉뚱하게도 류길재 장관은 북한에게 대화 제의 성명을 발표했다, 남북이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은 항복 백기를 빼어든 모양새였다, 정권이 무능하면 그 치욕은 국민들에게 돌아오고, 정권이 무식하여 주적을 친구로 오해했을 때 그 대가는 국민들이 피로 갚게 된다,

대화는 친구와의 사이에 필요한 것이다, 박근혜에게는 김정은이 친구로 보이는가, 김정일을 친구로 두었던 자들의 공적을 보라, 김대중은 북한에게 핵을 개발해주고, 노무현은 북한에게 핵을 제조해 주고, 이제 박근혜는 국민들의 머리 위에 핵을 터지게 하려는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남북대화가 아니라 핵의 제거이거나 핵의 중단이다, 이런 신뢰를 얻기 전에는 김정은은 친구가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다,

믿어서는 안될 자들을 신뢰했던 사람들, 공산주의자들에게 신뢰를 보냈던 사람들의 최후를 역사는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남침야욕에 빠진 공산주의자들을 친구로 삼았던 사람들을 대통령으로 두었던 국민들의 최후는 어떤 모습일까, 남북평화는 대동아공영이라는 말처럼 허황하다, 이런 허황된 망상에 빠졌던 국가의 말로는 비참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고 역사는 웅변하고 있다,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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