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쟁] 이른바 5.18 시민군 주역 윤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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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재 작성일15-10-11 17:18 조회6,209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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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광주사태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시민군의 주역은
윤한봉과 윤기권이다.
광주 지역 지도를 구해가지고...
이런 것들
어떻게 어디 쪽으로
(중략)
출처: http://m.blog.daum.net/lss4375/2293#
/끝/
댓글목록
각성님의 댓글
각성 작성일
증거 추가네요. 수고하십니다. 구술 녹취록. 계엄군이 총을 쏘니까 할수 없이 무장한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2달전에 무기고, 다이너마이트 털어 무장할 계획. 감사합니다.
지만원님의 댓글
지만원 작성일
세간에는 5.18의 영웅이 윤한봉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광주에는 윤한봉도 윤상원도 또는 그 누구도 5.18의 영웅이 아니었다. 윤한봉이다 윤상원이다 하고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은 5.18에 영웅이 단 1명도 없는 5.18족들의 장난질이다. 자신이 구술하여 증언한 것만 보아도 윤한봉은 고등학교 시절 농땡이였다. 졸업해서도 농땡이 치다가 군에 갔다. 뒤늦게 전남대 축산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다니다 박형선 등 민청학련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광주 운동권 바지사장을 했던 사람이다.
그의 증언에는 이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부마사태의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부산으로 가 많은 서민들과 이야기를 나웠다. “내가 앞장 서면 따라오겠지, 따라오지 않는 민중은 고생을 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등등의 내 생각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부마사태의 동력이 바로 민중의 힘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이제 곧 광주가 터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80년 3월 말이었다. 70년 내내 민주화를 열망해온 각계각층의 열망이 곧 불타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어나면 무조건 지고 피가 바다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비극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운동권도 나도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조직화되지 못한 봉기는 필패다. 광주가 피바다에 잠긴다. 나는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골돌히 생각하면서 4월을 맞았다.“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그가 갑자기 곧 광주에서 피바람이 분다는 영감이 떠올라 지도도 준비했고, 자기의 영감에 동조할 사람을 찾다가 ”경찰에 잡히면 무조건 사형당한다“는 말을 듣고 이리 저리 숨어 다니다가 5.18을 서울 산동네에 숨어서 맞았다.
3-4월에 그에게 어째서 광주에 피파람이 불 것이라는 뜬금없는 영감이 떠올랐을까? 그는 영감이 떠오른 배경과 논리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나는 아래와 같이 추측한다.
북한 작전부대와 전국의 고정간첩들이 광주와 전남지역 일대에 몰려들어 온 것은 1979년 11월 부터였다. 북한에서 잠수함과 쾌속정 등으로 직접 내려온 특수군이 있었고, 사북탄광 사태와 부마사테를 배후 지휘하던 북한특수군도 목포-광주로 몰려왔다. 이렇듯 북한 요원들은 민가, 여관 등에 사태 몇 개월 전부터 전개되어 탄약고 위치를 확인하고 군시설과 아시아자동차공장, 광주의 주요 지형지물 등을 사전에 익히고 전략을 짜고, 위장 옷, 가발, 시체 처리물 등 군수품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묻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는 상식이다.
윤한봉은 내가 보기에 이런 사실을 누군가로부터 귀띔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시대인 2000-2002년에 이런 어설픈 영웅 노릇을 했던 것이다. 5.18에 윤한봉이 기여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간첩들이 다니면서 무기고 위치를 수소문하고 다닐 때 윤한봉의 귀에 이런 사실들이 전달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김일성조선타도님의 댓글
김일성조선타도 작성일
나가 누구여 나가 바로 윤상만 이랑께
해남 출신 군후배가 알려주길 해남 윤씨들이 6.25 전후로 붉은 완장을 찼다
누구의 영향인지 짐작이 가는군요
지금은 본관을 바꿨다고 하데요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한 인간이 수 많은 사람들을 지옥불로 끌고 갑니다.
들쥐떼처럼 ,,,,,,,,
아 그 문중에는 윤봉길 의사 같은 분은 없으신가 ??????????????
이상국님의 댓글
이상국 작성일지박사님이 역시 전문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