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청원!, 이제 붉은 가면을 벗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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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리true 작성일19-04-17 23:26 조회1,312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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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원 "당시 기자로 광주 취재?"
2019-02-11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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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의원은 "(북한군 600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육로로 왔단 말이냐, 해상으로 왔겠느냐"
"13대 국회인 1988년에 열린 '5공 비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5·18 민주동의 진실이 낱낱이 밝혀졌다"
"두 전직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을 비롯한 당시 책임자들이 내란음모죄로 법적인 처벌을 받았다"
"광주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에 반대해서 항거하던 학생들을
김진태 의원 - 영상메지지를 보내,
1980년 5월24일. 광주시민, 조선일보 박래명 조광흠 서청원(기자)
맨 아래 서청원
● 광주시 해방일은 5월 27일 - 광주폭동이 10일만에 제압된 날
국가계엄군이 광주 시민폭도의 무장폭동-국가대적사태를 진압하고,
강제진입에 성공한 일자는, "1980년 5월 27일"이다.
그전까지는, "북한 김일성 파견의 특수위장-게릴라(일명 북한 광수-600명 추정)"가
전남도청을 장악하고 광주시민의 접근조차 막은 날이다.
광주시-변두리에서, "시민폭도가 제공한 군용찝차(당시는 군용 탈취물)"를 타고,
취재사진을 찍은 것은 광주사태의 참상을 찍어오지 못한, "기자위장의 거짓 활동자"로 보인다.
조갑제와 같은 위장간첩-활동자로 보인다.
조갑제는 '광주 5/18~5/27 기간'의 광주참상들을 한 장도 찍어오지 못한 자였다.
북한 김일성 정권이 송출한 광주참상(당시 북한TV 보도)들에서,
- 버스돌진의 국가계엄군 압사 현장, 시가지 방화와 경찰서, 방송국 불태우기,
- 전남도청 사수대와 무기회수 거부로 국가계엄군 대적의 무장공격 행위 등을
왜 한장도 촬영해오지 못했는지?
서청원 기자(현 무소속 의원, 전 박근혜 새누리당 친박좌장)는 밝혀야 한다.
당시, 경찰력도 모두 철수한 치안부재의 무력난동 지역에서,
9박 10일간 광주현장에 어떻게 체류할 수 있었으며,
현장체류 숙식 해결과 신변안전 보호는 누구의 지원을 받았는가?
밝히지 못한다면,
국가계엄령(국가 포고령)을 위반하고, 국가계엄군에 대적한 광주-시민폭도와
북한 특수게릴라의 공작지령에 따라, 활동한 "고정간첩-활동증명서"이다.
박근혜 정권에도 "붉은 전사들이 포진"하였다는 확인증명서가 될 것이다.
댓글목록
니뽀조오님의 댓글
니뽀조오 작성일
당시 황장엽씨가 말한 남한 침투 고정간첩 발표하기를 5만명으로 알려 주웠지만 정부 누구 하나
간첩 잡았단 소식은 못 들은봐 철수 따위가 간첩이 어딧냐구 주구장창 놀리던 #때 ~~
두눔은 간첩이 분명 하고요 이글을 읽는 순간 더욱더 가슴에 와 닿는 군요~~
건필 하소소,
용바우님의 댓글
용바우 작성일
당시 비표없이 구경하던 순천인 김인태와
광주인 김중식은,황장엽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북한군은 없었고 있을수도 없다고 했다면,
이는 간첩들이나 할수있는 소리다,국민이라면 누구나
북한군이 왔다고 하면,어떻게 왔을까 모두가 의문을
가져야 하는게,국민의 도리다, 위장간첩 빨갱이놈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