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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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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마디 작성일10-06-03 17:28 조회1,9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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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요약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
 
 
 
 
 
 
 
 
본문
 
 
↑ 5 ·18광주민주화운동 묘역 /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시해됨으로써(79. 10. 26) 대통령 대행체제가 되고 한 동안 정국이 불안정하였다. 이러한 시기를 틈타 신군부세력(전두환, 노태우 등)이 제2군사 쿠데타를 일으켜(12·12 사태), 순식간에 무력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정치권을 장악하였다. 또 다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통치 시대로 회귀하였다. 유신체제에 이어 민주헌정이 정지되고, 민주정치 지도자 투옥 등 군사독재가 재발하자 국민들의 불만은 극도에 달하여, 국민의 저항은 전국적으로 지속 확산되어 갔다. 그 동안 불만이 쌓인 전국의 학생 연대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이를 기회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도 역시 비상계엄군이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다. 이에 울분한 전남대학교 학생과 비상계엄군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한 학생이 속출하자, '계엄철폐' '휴교령철폐'를 외치며 중심 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다(80. 5. 18).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은 시위 학생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하여 죽는 학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민가나 관공서로 피신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추격하던 군인들은 드디어 민간인까지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은 피하는 학생들을 감추어주고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다가 민간인 부녀자도 사살당하기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광주시 외곽으로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군대는 탱크까지 동원하여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지키고 있어서 피신과정에서 체포 또는 사살당하였다.
 
이에 성난 학생들과 시민들은 합세하여 저항이 더욱 거세졌고, 일부 학생들은 도청(道廳)을 점거하고, 경찰서 등에서 총기를 탈취하여 저항하였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정규군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종교인,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었고, 시민군에게 총기를 반납할 것을 종용하여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의 무자비한 학살은 계속되었다. 무고한 어린 학생, 부녀자, 시민까지 무차별 살상이 이어졌다.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극의 현장은 외부에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 시내를 탈출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 비극의 사실이 전해졌다. 처음에는 유언비어(流言蜚語)처럼 전해지면서, 북한 무장 간첩이 침투하여 저지른 만행이라고 소문나기도 했으나 드디어 3일째 되는 날부터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그 잔혹상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드디어 10일째 되는 5월 27일 대규모 진압군이 투입되어 도청을 탈환함으로써 수많은 시체가 쌓인 가운데 시위는 진압되었다.

진행과정
10일 간의 시민항쟁 주요 사건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5월 17일(토) : 비상계엄 전국확대. 학생운동 지도부 검속. 광주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5월 18일(일) : 전남대생 50여 명 등교 저지. "계엄해제" "휴교령 철폐" 시위. 공수부대원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학생들 금남로로 이동 시작.
 
5월 19일(월) : 11여단 병력 증파.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파출소 방화. 공수부대 원들과 투석전 전개.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시위 진압 완화 건의.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학생 김영찬군이 계엄군 총에 부상.
 
5월 20일(화) : 고등학교 휴교조치. 가톨릭센터 앞 남녀 30여 명이 속옷채로 구타당함. 공수 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금남로에서 200여 대의 택시 차량시위. 시위대 버스에 경찰 4명 사망. 광주MBC건물 방화.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수) : 시외전화 두절. 시체 2구 싣고 금남로에 등장. 광주KBS건물 방화. 시위대 20사단 병력과 충돌. 공수부대원 전진 배치. 광주세무서 전소. 대형헬기 도 청 도착. 시위대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공수부대 사격 시작. 청년들 공수부대 집중사격으로 계속 쓰러짐. 헬기에서 도지사 시위해산 종용 방송. 시민들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시민들 탄약고에서 TNT  입수. 공수부대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에 조준사격. 외지에서 온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
 
5월 22일(목)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출혈자를 위해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도청 옥상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수습대책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 수습안 전달.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박충훈(朴忠勳) 신임국무총리 '광주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금)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시민 5만여 명 도청광장 집회.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 시내전역에 살포.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토) : 공수부대원,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 사격.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일) : 김수환 (金壽煥) 추기경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 전달.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 만장일치 채택.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 등 논의.
 
5월 26일(월) : 계엄군,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 귀가시킴. 시내전화 일체 두절.
 
5월 27일(화)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가두방송. 금남로에서 시가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 시민군에 무차별 사격. 계엄군, 도청과 시내전역 장악, 진압작전 종료.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시내전화 통화 재개.

사후 처리
5·18 광주 학생-시민운동에서의 희생은 1988년 제6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의하면,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었다. 그 희생은 6·25 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이었다. 그 후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 책임자 처리 등 사후처리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이어졌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5·18 진상 규명, 학살책임자 규명, 배후세력 규명 요구 -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미국 지목, 미문화원 방화 사건 - 6월항쟁 폭발(1987) - 6·29 민주화선언(1987)(군사독재 국민에 굴복) - 제6공화국 탄생(대통령 직선제) - 국회 ‘광주특별위원회’ 구성(1988). 광주청문회 실시. 광주민중항쟁을 '5·18 민주화운동'으로 규정. 책임자 처벌 요구 -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정(1995).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 -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1997) - 역사 교과서에 정식 명칭 사용

이상의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5·18광주민중항쟁이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어 '5·18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었다는 데에 있다. 
<류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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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기념일 [五一八民主化運動紀念日] 
 
 
 
 
 
요약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국가 기념일. 
 
 
 
 
 
본문


1997년 4월 17일, 5·18 주범들에 대한 반란 및 내란죄가 확정된 뒤, 같은 달 정부에서 5월 18일을 ‘5·18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 발표하고 그해 5월 18일 정부 주관 아래 첫 기념일 행사를 가졌다. 이로써 5·18 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이 특정 지역의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전국민적 차원의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역사적 평가 및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기념일 행사는 행정자치부가 주관하며, 광주광역시 5·18 묘역에서 한다. 기념일 제정 이후 국민적 정신 계승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5·18 희생자 국가 유공자 지정 및 5·18 묘지 국립묘지 승격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같은 여러 문제가 도출되기도 하였다.

기념식에는 정부 관계자, 국방부장관, 5·18 희생자 유족 및 시민 등이 참여한 가운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민주화운동 희생자 영령에 대한 묵념·헌화, 경과보고 및 헌시낭송 등의 순으로 진행되며, 5·18민주항쟁 과정에 숨져간 민주열사들을 추도하고, 그 숭고한 뜻을 되살려 민주주의 완성에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광주에서 개최되는 행사 외에 전국 각지에서도 추모행사가 열리는데, 1999년 행사 때는 5·18민중항쟁연합중앙회 주관 아래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장, 5·18 관련단체 회원,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등이 모인 가운데 추모식을 가지기도 하였다. 또 행사의 일환으로 광주인권상을 제정, 국내외 인권 향상에 이바지한 인물에게 미화 1만 달러의 상금을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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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묘역
 
 5.18묘역 민주의 문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산화한 영령들이 17년 동안 묻혀 있던 곳으로 1997년 새 묘역이 완성됨에 따라 이곳에 묻혀 있던 영령들도 치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새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현재는 고(故) 박종철, 민족시인 고 김남주 시인 등 5·18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민족·민주열사 37명과 아직까지 신묘역으로 옮기지 못한 5·18 희생자(2인) 등이 안장되어 있으며 옮긴 이들은 가묘상태로 남아 있다.

광주시가 추진중인 민주열사 신묘역이 조성되면 5·18 구묘역은 1980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사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며 그날의 참상을 후세에게 전하는 역사의 장소로 영원히 남게 된다.

5·18 신묘역에는 325명의 5·18 희생자들이 모셔져 있다. 총칼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최후 항전까지 불사하는 투혼을 보여줬던 그들은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던 우리의 이웃들이다. “이 조그만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하겠습니다”라는 메모를 남겨놓은 채 홀연히 세상을 등진 그들. 한 어머니의 사랑스런 아들이었으며 단란한 가정의 아버지였던 그들이 누워 있는 곳이다. 분노와 한숨 그리고 애절한 사연이 공존하는 이곳은 5월 정신의 발원지. 해마다 5월이면 유족들의 오열 속에 추모식을 비롯한 다양한 5월 행사가 열리며 자유와 정의를 갈망하는 인권단체들의 방문이 이어져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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