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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에 대한 끝장토론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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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일 작성일10-01-18 11:50 조회2,49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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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모 싸이트에서 진행중인 광주사태에 대한 끝장토론이 진행중임니다.
역사학도님과 광주518쪽 에 어느분과 토론이 진행중인글 임니다
1번 부터 글을 올렸으나 도배로 간주되어서 삭제 가 되었내요.
1번부터 궁금 하신분들은 조갑제닷컴이나 동아누리 를 이용하여주시고
광주사태에 대한 자료나 궁금증이 계신분들은 역사학도님의 카페에 오시면 됨니다.


http://cafe500.daum.net/_c21_/bbs_list?grpid=rUoh&fldid=3Fdk



반론하겠습니다.

 

 이데아님은 시민군의 최초무장시점이 5월 21일 오후라고 여전히 우기고 계십니다.  님의 그런 주장들을 대표하는 두 문장을 인용합니다.

 

<<시위대가 무장하는 장면은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의 장면이며. 기어이 날조하시려거든 힌츠페터님 앞에서 한번 우겨보십시오.
 방송원본에서도 시위대가 무장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찍으신 뒤
 시위대가 무장하는 장면은 21일 오후의 장면이라고 벌써 몇번을 설명해드렸습니까? >>

 

 시민군 차량 안전사고에 의한 사망자가 이외에도 많이 있었거니와 최초 발포자는 시민군이었음을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은 5월 21일 시민군 오발 사고로 시민군이 죽어간 사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

 

이 증언은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 에서 자세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 후후후... 역사학도님은 언제나 자폭자료들을 제시해 주시면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 주시는군요.

 님이 제시하신 글을, 캡춰화면에서 삭제된 윗줄까지 다 포함하여 다시 옮겨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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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도청 앞 발포

 

21일 아침 8시경에 광주역에 가보니 군인들은 없었고 뒤집힌 채 부서지고 불탄 차만 8대 있었다. 분수대와 가로수에 부딪힌 차 등은 대부분 일반 트럭과 군인 지프차였다. 곳곳의 전화박스에, '부처님 오신 날 2시 집합'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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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아침 8시경에 광주역에 가봤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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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앞에는 태극기로 덮인 시체가 리어카에 실려 나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때려 죽인 사람'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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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시인지는 설명이 없지만 광주역에 있었던 사람이, 다시 도청 앞으로 이동했군요.
 참고로 광주역에서 도청까지는 지금 현재 차량으로 곧바로 이동하는 경우 대략 20분 전후의 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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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차량을 타고 무등경기장 쪽 롯데제과 앞으로 갔는데, 롯데제과 앞에서 사람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안에서 나온 사람이 무엇을 요구하느냐고 하여 안에 있는 식품을 다 달라고 30분 정도 실랑이를 벌이자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 있는 빵, 계란, 콜라를 지나가는 차마다 조금씩 분배했다. 계란을 실은 트럭이 있어 차째로 가져가 려 하자 롯데제과 직원이 만류해 계란만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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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몇시인지는 설명이 없지만, 광주역에 있던 사람이, 도청에 갔다가, 다시 무등경기장쪽 롯데제과 앞으로 갔다는군요.
 참고로 롯데제과는 광주역에서 도청과 반대방향 쪽으로 1Km 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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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로 나가니 시민들이 김밥, 우유, 빵 등을 나눠 먹고 있었다. 나도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김밥 2개, 우유 1개, 콜라 2개를 내 몫으로 받아 먹고 전일빌딩 앞으로 가다 삼촌을 만났다. 삼촌은 나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며 야단을 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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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몇시인지는 설명이 없지만, 아침 8시에 집을 나와 광주역에 있던 사람이, 도청에 갔다가, 다시 무등경기장쪽 롯데제과 앞으로 갔다가, 또다시 금남로로 나갔군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됐겠지요?

 그리고, 금남로에는 시민들이 김밥, 우유, 빵 등을 나눠 먹고 있었다고 하는군요.

 

 자! 여기서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음식을 나눠 먹었다는 시간이 언제인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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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11:00 - 12:00 동별로 시위대에게 음식 제공

 

* "지역주민들이 돈을 걷어 동 단위로 음식을 만들어 시위대에게 제공한다는 말을 듣고 산수동 오거리로 나갔다. 아주머니들이 모여 벽돌을 쌓아놓고 그 위에 커다란 솥을 걸어 밥을 짓고 있었다." (구술 : 손종래, 현사연 조사)

 

* "18일, 시내에서 계엄군이 학생들을 죽도록 때리는 것을 목격하고 집에 돌아온 뒤 문 걸어 잠그고 바깥 출입을 삼가고 지냈다. 2,3일을 그렇게 두문불출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식 키우고 사는 사람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밖으로 나갔다. 같은 동네 사는 선배 언니와 함께 동네 아주머니들을 모아 쌀을 걷어 밥을 지었다. 라면상자에 비닐을 깔고 주먹밥을 만들어 전남대 의과대학 앞으로 가서 시위차량이 지나가면 차에 올려주면서 몸조심하라고 격려도 해줬다." (구술 :김경애,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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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수기의 주인공이 금남로에서 음식을 나눠 먹은 시간은 대략 11시 이후의 어느 시간이었겠군요.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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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공수부대가 도청 안에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나와 삼촌은 떼밀리다시피 해 도청 앞까지 가게 됐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공포다."

 누군가 외쳤다.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나 총 맞았어요."

 

 그러나 곧바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대열에서 빠져나오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소독만 해주고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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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여기 공포탄 발포가 몇시쯤에 있었으며, 이후의 상황이 어떤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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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5

 

- 도청 앞 YMCA 앞에서 군이 난사하여 수십 명 사망.

 

- 동시에 '탕, 탕' 군중들을 향해 수없는 총탄이 퍼부어졌다. 처음에는 공포탄 인 듯했다. 우리 팀은 합의한 듯 책상 밑으로 엎드렸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골목과 빌딩으로 몸을 숨겼다. 총소리를 제외하고 시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는 완전히 지사에 갇히게 됐다. 시간이 흘렀다. 사무실 캐비닛에 기대어 도청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의 군인들이 분수대 앞에 횡으로 앉아 금남로쪽을 향해 거총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월간조선, 1985. 7)

 

12:58

 

* "소방서 부근에 있는데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나는 전남여고를 거쳐 노동청 앞으로 갔다. 도로를 꽉 메운 시민들이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동안 구호를 외치자 총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공포탄이다' 하고 소리쳤다. 골목으로 피했던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 순간 수천 발의 총소리가 났다. 그때 교련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이 배를 움켜잡고 고꾸라졌다. 그것을 본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바닥에 엎드린 채 골목을 향해 기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엉덩이에 총을 맞았다. 다음 순간 세 명의 시민이 공수가 쏜 총에 맞고 쓰러졌다." (구술 : 이대성,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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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역사적 증거들과 동일하며, 님이나 제가 알기로도 집단발포가 이루어진 시각으로 알고 있는 1시경의 일이로군요. 맞지요? 또한 공수에게 실탄이 재지급된 시간은 오전 10시 30분이경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시지요?

 

 자! 공포다. 라고 누군가 외쳤고, 시위대열이 자꾸 밀리자. 이 수기의 주인공은 삼촌과 함께 미문화원 쪽으로 빠져나갔는데, 뒤따르던 한 청년이 총에 맞았다고 소리쳤고, 대열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뒤에야 그사람을 근처 병원으로 옮겼으며, 소독만 해주고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군요.

 

 자! 공포탄 발포가 있은 후 곧이어 실탄에 맞은 사람이 나왔고, 시위대열을 빠져나와 이사람을 병원에 옮기는 등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겠군요. 맞지요?

 

 즉, 이사람이 말하는 상황을 역사적 증거에 대입해 추론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도청 앞 집단발포 시각인 1시경부터 현장에서 이탈하기 시작, 총에 맞은 사람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등, 상당한 시간이 소요됬겠군요. 맞지요?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야 드디어 아래와 같이 총기를 지급받은 것을 서술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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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청 앞에는 2, 3명의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용감한 몇 사람이 접근하여 시체를 빼가지고 오면 박수를 쳤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사람들이 시체를 상가 통로를 통해 후문 쪽 식당 담 밑에 나란히 뉘어놓았다. 그런데 전일빌딩 뒷골목 쪽에서 공수부대들이 몰려와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게 저지하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서 끄집어갔다. 나는 동구청 옆 건물 다방 옥상(4, 5층)에 올라가 있다가 공수부대들이 철수한 후 내려와보니 시체 2구도 없었다. 그 자리에 양철문이 덮여 있었다. 양철문을 들어보니 시체가 있던 자리 사방 1미터에 피가 흥건히 고여 두부 두 개의 크기로 응고되어 있고, 피비린내가 확 풍겼다. 사람들이 다시 모여 "저런 죽일 놈들이 없다"며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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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지금 설명하고 있는 이 시각이 언제인지는 설명이 없지만, 지금까지의 서술을 역사적 사실과 대입해보니, 1시경의 집단발포 이후 총에 맞은 사람을 병원에 후송해 주는 등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었을테고, 이는 대략 2시 이후의 상황임을 알 수 있겠지요?

 

 자! 과연 맞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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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

 

- 비아, 영광, 나주, 영산포, 무안, 영암, 화순, 장성 등지의 무기고, 화약고에서 탈취해 낸 카빈 M1 소총,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등이 반입되어 드디어 젊은이들이 무장을 시작했다. 이들은 대개 손에 6발씩의 탄환을 들고 도청 쪽으로 진주해 왔으며 시민들은 박수와 흥분과 걱정으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계엄군은 자신들의 행위로 시위대들에게 무장의 필요성을 가르쳐준 것이다. 이때부터 계엄군은 도청으로부터 흩어져 관광호텔과 전일빌딩, 도청 건물 등으로 들어가 숨어서 저격했고 무장한 젊은이들은 건물 기둥 뒤에서 응사했다. 그러나 시민군이 손에 쥔 M1과 카빈은 계엄군이 가진 M16의 무서운 위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카빈 1백 정이 M16 10정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이후 5시 30분경까지 운집한 군중을 향한 계엄군의 치열한 사격이 계속되었다. 병원은 의사가 부족한다 발디딜 틈도 없이 시민들로 붐벼 수라장이었다. 동명로와 도청 사이의 네거리에도 총에 맞은 3명이 쓰러져 있었는데, 두 명만 겨우 끌어냈을 뿐 여전히 방치된 복판의 한 사람 위로는 계속 총탄이 빗발처럼 오가고 있었다. (5.18 광주시민 의거 진상)

 

- 효덕동 파출소 무기 탈취

 

* "21일 오후 금남로에서 어떤 시민으로 부터 '계엄군의 총에 맞아 고개가 떨어져나간 청년의 비보'를 전해 듣고 화가 치민 나는 그 길로 친구와 함께 지프차를 타고 무기를 탈취하러 나섰다. 광-목간 도로를 가던 중 효덕동 파출소가 보이자 무조건 쳐들어갔다. 무기고의 열쇠를 부수고 그곳에 있던 카빈 4, 5정을 차에 실었다. 그때 나주경찰서에서 무기를 가지고 들어오는 차량을 만나 실탄을 지급받고 그들과 함께 광주공원으로 집결했다." (구술 : 김광호,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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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겠지요?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 수기의 주인공은 아래와 같이 전남대 앞으로 다시 이동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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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 전남대 정문 쪽에서도

 

 그날 오후에 전남대 정문 쪽으로 갔더니 담을 따라 1개 대대 정도의 군인들이 서 있었다. 사람들이 문을 열라며 데모를 하는데 군인 지프차에 대형 촬영기를 단 민간인(기자라고 했다)이 들어오자 시위대열이 길을 터주었다. 다리 한 가운데서 촬영을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 자식 간첩이다."

"저 자식 끌어내려!"

"아니예요. 저는 간첩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끌어내렸다. 시위대열 선두에 선 사람이 공수에게 휴전을 요청하여 그 사람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갔고, 공수 한 명이 왼쪽 쪽문을 열고 데리고 들어갔다. 공수와 민간인이 악수를 하자 시위대열의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그 사람은 수위실 뒷쪽으로 끌려갔다.

 

 다시 데모가 시작됐고, '전두환 찢어죽이자', '계엄령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살인마들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공수들은 또 최루탄을 쏘았으나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왼쪽 담을 무너뜨리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전남대 사회대 건물 자리에 위치한 대학원 앞에서 정문을 내려다보았다. 공수부대가 후문을 향해 S자를 이루며 뒤로 후퇴하는 것이 보였다. 다시 군인들이 집결하여 대반격을 가했다. 시민들이 외쳤다.

"도청으로 갑시다."

 

나는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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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수기의 주인공은 오후 몇시인지에 대한 설명은 하고 있지 않지만, 아래와 같은 기록으로 대략 몇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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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

 

전남대에 주둔한 공수부대를 공격하자 발포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3대의 버스와 1대의 용달차에 나누어 타고 운전을 잘하는 기사들에게 운전을 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조선대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들은 몰아내자고 했다. 그러자 한쪽에서는 전남대에 있는 공수들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우리는 두 편으로 나뉘어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2대의 차가 조선대로 먼저 출발하고 내가 탄 차와 버스 1대는 전남대 정문으로 향했다. 오후 3시경 전남대 앞에서 공수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던 시민들과 합세하였다. 공수들은 대개 전남대 안에서 진을 치고 있었고, 1개 소대 정도만 교문 앞에서 우리와 맞서고 있었다. 갑자기 공수 2,3명이 쫓아왔다. 시민들 10여 명은 재빨리 전남대 정문 앞 다리 부근에 몸을 숨겼다. 쫓아오던 공수들이 다리를 막 건너려고 하는 순간 시민들이 공수들을 덮쳤다. 이때 시민 4명은 무서워 도망을 갔고, 남은 6명은 공수 들을 잡아끌면서 두들겨팼다. 이를 본 다른 공수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우리 들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뛰었다. 나 역시 붙잡고 있던 공수들을 놓고 뛰었다. 한참 뛰는 도중 내 앞에서 도망가던 사람이 발목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나는 도저히 혼자 뛸 수가 없었다. 그래서 55세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를 일으켜세워 끌다시피 하고 도망을 갔다.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나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나는 공수들 3명에게 붙잡힌 것이다. 총에 맞았던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는지 돌아보지도 못하고 전남대 본관 안으로 끌려갔다. 이미 많은 숫자의 시민들이 잡혀와 있었다. 피가 범벅이 되어 신음하는 사람, 머리가 터진 사람 등 2백여 명은 넘을 것 같았다. 30세 정도로 보이는 한 사람은 두개골이 벌어져 차마 쳐다 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공수 한 명은 그 부상자를 워카끈으로 꿰 매고 있었다. 참혹했던 그 광경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 기막히고 환장할 장면을… 그들은 짐승이었다." (구술 : 김연태, 현사연 조사)

 

*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들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을 목격하고 도망치다 그곳을 지나던 미니버스에 탑승했다.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운전수한테 도청으로 가자고 했다. 미니버스가 MBC 방송국 앞을 지날때 나는 차에서 내려 장동 로터리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노동청 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내 옆에 있던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한 명은 즉사했고, 부상당한 다른 한 명은 병원으로 옮겼다." (구술 : 김광영,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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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위와 같은 기록을 볼때 수기의 주인공이 전남대 앞으로 이동한 시간은 최소한 오후 2시 30분 이후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셨습니까?

 


 자, 여기 당시 시민군 총기 및 실탄 사진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광주시민들이 이런 철모들이며 30만발의 실탄을 어디서 구해온 것이었나요?

 

<- 사진은 화창한 대낮에 도청안에서 차분하게 실탄을 나눠갖는 모습인데, 그렇다면 계엄군이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도청을 순차적으로 비우기 시작했으므로, 이 사진은 빨라야 계엄군이 도청을 비운 22일 이후에 촬영한 사진임을 알 수 있군요. 무기의 촐처는 위에도 서술되었다시피 각지에 흩어져서 가져다 모은 것과 계엄군으로 부터 탈취한 것들일테고요.

 


 힌츠페터의 영상물을 다시 한번 봅시다.  (지금 21일의 시위대 총기무장 상황만 동영상 잘라내기를 하여 올리기는 어려우므로 관전자들은 01:58부터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22“ 나는 사람들이 건설장비를 몰고 나오는 모습을 촬영했다.
군대와 직접 대결을 할 모양이었다.
시위대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36“ 시민들은 어디에선가 총과 실탄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 제가 누누히 말씀 드렸지요? 그 장면은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의 상황을 찍은 것이라고요.

 


 즉, 시민군 총기 및 실탄 분배 이전에 이미 그런 무장 보급조가 있었습니다.  시민군 김수영도 그 상황을 똑같이 표현합니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자, 탈북군인들의 증언을 따르면 총과 실탄을 분배한 자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당시 시민군 혹은 시위대 사망자 대다수는 시민군 편에만 있던 총기에 의해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아실 것입니다.  이 사실은 시민군 증언으로도 명백하므로 시민군 김수영의 증언을 좀 더 자세히 읽어 봅시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사람들이 시체를 상가 통로를 통해 후문 쪽 식당 담 밑에 나란히 뉘어놓았다.>>

 

<- 후~ 위에 이미 이 시각이 언제인지는 증명해 드렸으니 다시 설명해 드릴 필요는 없젰지요?

 즉, 위에 구체적으로 증명해드린 바와 같이, 1시경의 도청 앞 집단발포 직후, 총에 맞은 사람을 병원에 후송하는 등 시간이 한참 소요된 후의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자, 21일 오후 1시경의 시민군 사망자 대다수는 이처럼 시민군 총기 사고에 의해 사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민군의 증언은 미국 3대 방송사 ABC, CBS, NBC가 1980년 5월 22일에 보도한 광주사태 뉴스와 동일합니다.  동영상 시작후 3분 3초부터 3분 10초에서 NBC 기자는 분명히 시민 총기에 의한 총상으로 죽임을 당한 시민 사망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 역사학도님! 참, 질긴 분이시군요.
 그 방송은 힌츠페터님이 20일 오후부터 21일 오후까지 촬영한 1차 필름을 숨겨 서울로 빠져나가, 항공편으로 22일 새벽 일본에 도착하여 독일본사에 필름을 송부한 것이, 22일 ARD의 저녁 8뉴스 타게스챠우에 방송된 것을, 미국 방송사들이 재입수하여 방송한 것입니다.

 

 또한, 총기 사망자는 계엄군의 20일 저녁 발포때부터 있었다는 것을 내 바로 직전 반론글에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증명해 드렸지 않습니까?

 


  이데아님, 이제 시민군 총기사고에 의한 시민군 및 시위대 사망자가 있었다는 사실 분명하게 확인이 되셨습니까?  이외에도 시민군 총기사고에 의한 시민군 사망에 대한 시민군 증언들이 무수히 많이 있어요.  만약 이것이 고의적인 사고였다면 이것은 탈북군인들의 증언으로만 설명됩니다.  탈북군인들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시민군 뒤에서 시민군 혹은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쏘았다고 증언하거든요>

 

  시민군 김수영은 자신이 무기를 탈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무기 보급조가 주는 무기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기 보급조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많은 무기들을 확보하였는지를 우리는 물어야 됩니다.  만약 여전히 이데아님이 시민군이 최초로 무기를 확보한 시점이 21일 오후 1시 이후라고 주장하신다면 저는 님에게 세가지 구체적인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 이쯤되면 님의 주장들이 모두 근본부터가 틀렸다는 것을 잘 깨달으셨겠지요?

 

 다시 번거롭게 재설명은 필요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하겠습니다.

 


  힌츠페터가 저녁까지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 광주에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자, 과연 힌츠페터가 광주를 떠나기 전에 광주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해 오는 것이 가능하였을지 분명하게 확인해 볼까요?  그것이 가능할지 님이 근거자료나 답변으로 입증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세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 방송원본에 힌츠페터님이 필름을 숨겨 광주를 빠져나가는 도중 계엄군의 검문을 받는 사진이 나옵니다.

 

 


 


 


 

 그림자가 잩게 드리운 사진을 보면 이것이 해질무렵임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는 캄캄한 밤에 도착했다고 증언하시고, 일본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독일본사로 필름을 송부하셨고, 일본공항에서 3시간을 머문 뒤 곧바로 서울로 돌아와 가택연금 중인 신민당 김영삼 총제의 집앞을 취제하러 갔다가 광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맞지요?

 

 그 해질무렵을 대략 6시 전후쯤으로 잡아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만, 광주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정속주행일 경우 3시간 반 정도 소요되므로, 9시 반 정도쯤에 서울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캄캄한 밤이라고 하니 이보다 더 늦은 시간일 수도 있겠지요.


 항공편이야 미리 예약하셨다면 비행기로 일본까지 이동하는 시간은 대략 1시간 전후가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22일 새벽 일본공항에서 3시간을 머문 뒤 서울로 돌아오는데 또 1시간 전후가 소요 되었겠지요.

 충분히 아침이 아니라 새벽에도 돌아오실 수 있는 넉넉한 시간입니다. 맞지요?

 


 첫째 질문, 5월 21일 시민군이 어디서 무기를 탈취하였는가요?

 

<- 위에 이미 증명해드렸지요. 재설명은 생략합니다.

 

 

 두번째 질문, 무기 탈취 후 시민군이 다시 도청 광장으로 왔나요?

 

<- 왔지요.
------------------------------------------------------------------------
21일 14:53

 

- 소준열 행정학교장 광주 향해 출발(헬기).

 

무장시민군과 계엄군의 무력 충돌

 

*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은 후 우리는 광주은행 본점 앞에 30여 명이 모여 연좌농성을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20대 청년이 앞에서 시위를 이끌고 선동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정의가' 등의 노래와 구호를 제창하고 있는데, 도청에서 또다시 총성이 들렸고, 앞에서 주동했던 청년이 팔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달려가자 우리도 재빨리 주변 건물벽으로 몸을 숨겼다." (구술 : 유승규, 현사연 조사)

 

* "오후 3, 4시경 공수들이 도청 주변에 있는 주요건물 옥상에서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전일빌딩 옥상에 있던 공수들은 광주경찰서 부근의 시민들을 향해 쐈고, 관광호텔 옥상에 배치된 공수들은 금남로 쪽을 향해 갈겨댔다. 이때 광주 경찰서 건너편에 있는 진주다방 주방장이 그 건물 옥상에서 구경하다 총에 맞아 즉사했다. 나는 가톨릭센터 뒤쪽 사거리에 몸을 숨기고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수를 땅바닥에 '바를正'자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약 30-40분에 걸쳐 금남로와 중앙로에 총을 맞고 쓰러진 사상자가 12명이었다. 동네 선배는 내가 그곳을 떠난 후 37명까지 표기하다 분통이 터져 그만뒀다고 했다." (구술 : 임춘식, 현사연 조사)

 

- 무장청년 15명, 도청 앞에 진격하며 총격전 벌임.

 

*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해 3시경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에 도착한 우리는 시위대의 환영을 받았다. 그 무렵 무장한 시민군은 우리가 처음인 것 같았다. 시위대들은 서로 총을 받으려고 했으나 20정 정도밖에 되지 않아 총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만 분배되었다. 특공대라고 불리는 무장청년들이 모여 작전을 세웠다. 도청 주변에 있는 공수부대와 정면대결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서로 흩어져 도청을 향해 진격하기로 했다. 나는 혼자서 가톨릭센터 뒷골목을 통해 도청 쪽으로 가기로 하고 동구청까지 왔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하자 상황을 살피기 위해 동구청 옆 골목으로 와 금남로 쪽을 내다보았다. 동구청 맞은편에 있는 공 사장으로 가서 싸우면 좋을 것 같아 그쪽으로 달려가는데 '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나를 겨냥해 쏜 것이다. 목과 어깨 사이를 스쳤다. 몸을 낮추고 기어서 겨우 그 자리를 빠져나와 치료를 받았다." (구술 : 최인영, 현사연 조사)
-------------------------------------------------------------------------
 이를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힌츠페터님이 시위대가 무장하는 장면을 찍은 시각은 대략 2시 30분~3시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힌츠페터님이 광주를 빠져나간 시각이 해질무렵 대략 6시경 아니 5시경으로 잡는다해도 시간은 충분하지요.

 


 세번째 질문, 시위대 혹은 시민군이 무기를 탈취하여 도청 광장으로 돌아오는데 몇시간 걸렸나요?

 

<- 위와 같이 1시경의 도청 앞 집단발포 직후부터 계산해보아도, 계엄군과 총격전을 시작한 3시경까지는 넉넉히 2시간은 되는군요.

 또한, 모든 증거들이 시위대의 무장시점을 1시 30분경으로 증거하고 있으니, 이때부터만 계산해보아도 총격전이 시작된 3시경까지는 1시간 30분이라는 여유있는 시간이 남는군요.

 


 다시한번 당부드리건데, 역사학도님!
 상상소설은 이제부터라도 부디 그만 쓰시고, 제발 역사적 증거와 증인과 모든 기록들을, 님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 정확히 대조해보고난 뒤에, 망상을 하시던지 소설을 쓰시던지 하셨으면 하고 다시한번 당부드립니다.

 

댓글목록

시사논객님의 댓글

시사논객 작성일

동일님, 맨위에 끝장 토론장 링크가 잘못 걸렸습니다.  여기 제가 정확한 링크를 드립니다.

http://cafe500.daum.net/_c21_/bbs_list?grpid=rUoh&fldid=3F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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