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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에 대한 끝장토론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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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일 작성일10-01-18 11:54 조회2,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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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모 싸이트에서 진행중인 광주사태에 대한 끝장토론이 진행중임니다.
역사학도님과 광주518쪽 에 어느분과 토론이 진행중인글 임니다
1번 부터 글을 올렸으나 도배로 간주되어서 삭제 가 되었내요.
1번부터 궁금 하신분들은 조갑제닷컴이나 동아누리 를 이용하여주시고
광주사태에 대한 자료나 궁금증이 계신분들은 역사학도님의 카페에 오시면 됨니다.



http://cafe500.daum.net/_c21_/bbs_list?grpid=rUoh&fldid=3Fdk






역사학도님? 입증된 것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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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군 최초무장시점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데아님의 반론에서 인용해 주신 시민군 김수영의 증언을 여기 재인용합니다:

 

<<당시 공수부대가 도청 안에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나와 삼촌은 떼밀리다시피 해 도청 앞까지 가게 됐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공포다."

 누군가 외쳤다.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나 총 맞았어요."

 그러나 곧바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대열에서 빠져나오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소독만 해주고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현장 목격자 김수영에 따르면 당시 공수부대는 도청 안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총소리가 났을 때 그 총소리는 시민군 총성이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최초의 총성은 칼빈 총성이었다고 말하고, 김영택 기자도 시민군 편에서 먼저 총성이 들렸다고 증언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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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작위적인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말씀하신 현장에 있었던 최초의 총성이 칼빈 총성이었다고 주장한 자는 누구랍니까?
 최초의 총성이 공포탄의 총성이라 주장하는 서술은 봤어도 칼빈 총성이었다는 서술은 또 처음 보는군요.

 

 그리고 김영택 기자의 증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님이 제시한 88년 5공 청문회 동영상에서도 1시경 공수가 집단발포를 하자 시위대 쪽에서도 총성이 들렸다고만 말했을 뿐입니다.

 저는 광주지리를 잘 알기에 그곳이 총성이 사방으로 울려퍼지는 장소임을 잘알고 있으므로, 실제로 시위대쪽에서 응사가 있었는지도 매우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최소한 김영택 기자의 증언만 보더라도 시위대 쪽에서 먼저 총성이 들렸다는 증언은 한적이 없습니다.

 왜 자꾸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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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군 김수영은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고 있었습니다.  도청 안에서 쏜 총은 90도 좌측으로 한참 떨어진 미문화원쪽으로 도저히 발사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김수영 군 뒤의 청년은 정면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은 것이 아닙니다.  탈북군인들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시민군 등 뒤에서 쏘았다고 합니다.  김수영군 뒤에서 따라오던 청년은 분명히 등 뒤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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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문화원쪽으로 빠지려는 중이지 이미 빠져나온게 아니지요. 빠져나온 뒤에는 병원으로 후송했고요.

 이때는 이미 공수의 집단발포가 한창 일어나고 있는 중인데, 날아드는 총탄에 맞은채로 황급히 뒤를 따라오면서 총에 맞았다고 호소하는 중이지요.
 사람이 총을 맞으면 그 통증을 곧바로 느끼지 못합니다. 총을 맞은채로 따라나오다가 곧 자신이 총을 맞은 것을 느끼고 총에 맞았다고 호소한 것이지요.

 

 또, 그놈의 가당치도 않은 북괴군 타령을 또 하시는데, 님의 얼토당토 않은 주장데로라면 공수부대가 당나라군대라 공수부대 속에 북괴군이 함께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집단발포 당시 첫 사격에는 설마 발포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시위대가 정면에서 총탄을 맞은 경우가 많았겠지만, 곧바로 놀란 시위대가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졌을때는 당연히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을테고, 당연히 뒤에서 총탄을 맞은 사람들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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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그러면 저의 이전 글의 질문 중 세번 째 질문에 대한 님의 답변을 여기 인용합니다:

<<세번째 질문, 시위대 혹은 시민군이 무기를 탈취하여 도청 광장으로 돌아오는데 몇시간 걸렸나요?

 

<- 위와 같이 1시경의 도청 앞 집단발포 직후부터 계산해보아도, 계엄군과 총격전을 시작한 3시경까지는 넉넉히 2시간은 되는군요.

또한, 모든 증거들이 시위대의 무장시점을 1시 30분경으로 증거하고 있으니, 이때부터만 계산해보아도 총격전이 시작된 3시경까지는 1시간 30분이라는 여유있는 시간이 남는군요.>>

 

 드디어 시민군 최초무장시점을 21일 오후 3시로 앞당겨주셨군요.  그러나, 명확하게 오후 1시 30분 이전이었습니다.  시민군은 오후 1시 30분 이전에 이미 총기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데아님이 21일 11:00 - 12:00 동별로 시위대에게 음식 제공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시민군 이용일의 아래의 증언의 사실성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아마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몰려가서 너나할것없이 총을 들었다. 그 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바로 내 옆사람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들은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 쪽으로 나뉘어 모두 흩어졌다.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은 아예 밟혀버렸다. 잠시 후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또 어떤 사람이 장갑차를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러닝셔츠만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상체를 위로 내놓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총을 한 자루 던져주었는데 그는 필요없다며 받지 않았다. 그 장갑차는 얼마쯤 앞으로 나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도청 쪽에서 저격병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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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시민들에게 음식이 나누어진 것과 위 증언은 아무 관계도 없고요.

 

 요약하자면, 점심때가 지나서 지하상가 쪽에서 누군가 총을 싣고 왔고, 사람들이 이 총을 집어들자, 그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와 바로 옆사람이 맞아 쓰러졌으며, 이에 사람들은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쪽으로 나뉘어 흩어졌다...

 

 자! 이때 이미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계엄군 저격병의 저격이 시작되었다고하니, 최대한 시간을 앞당겨 생각해보아도 최소한 1시경부터의 도청 앞 집단발포 시점이군요.

 또한 김영택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도청 앞에서 집단발포가 시작되자 시위대쪽에서도 총소리가 들렸다고하니 1시가 조금 지나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하고 놀라운 사실이 하나 나왔는데, 이 사람들이 말하는 가톨릭센터는 도청 앞에서부터 시작 금남로 1가의 끄트머리 즉, 도청 앞에서 전방으로 1Km 이내의 좀 떨어진 장소입니다.
 이곳은 사거리이고, 이 사거리 한모퉁이에 가톨릭센터가 도청을 바라보는 쪽으로 위치해 서있으며, 양쪽길이 각각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으로 갈립니다.

 그런데, 이 가톨릭센터에 벌써부터 저격병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또, 누군가가 가져온 총을 집어들자마자 곧바로 저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계엄군이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밖에 안됩니다.
 그렇다면 그 총기를 가져왔다는 누군가는 시위대 사살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한 신군부의 프락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김영택 기자도 5공 청문회에서 증언하기를 도청 앞 집단발포 이전에 복면을 한 수상한 자들이 카빈 총 3~4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으므로, 김영택 기자가 보았다는 그자들이 바로 총기를 나눠줬다는 그자들과 동일인물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요.

 

 또한 그동안의 의문이었던 김영택 기자가 증언한 1시경 도청 앞 집단발포 직후 시위대 쪽에서도 총소리가 들렸다는 증언의 의문이 단박에 풀리는 대목입니다.

 김영택 기자가 도청 쪽에 있었다면, 가톨릭센터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는 분명히 시위대 쪽에서 들리는 총소리가 됩니다. 즉, 그 총소리는 시위대가 쏜 총이 아니라, 가톨릭센터 옥상에 배치된 계엄군 저격병의 총소리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또, 잠시 후 사람들이 다시 모이자, 어떤 사람이 장갑차를 타고 태극기를 손에 들었는데, 총을 건네주자 필요없다면서 안 받았고, 그 장갑차가 앞으로 나가더니 도청 쪽 저격병의 총에 목을 맞아 즉사했다...

 

 즉, 이전의 반론글에서도, 님이 제시한 국방부 검찰부 보고서의 1시 돌진 이후 1시 30분경 또 돌진했다는 것과, 이수범님의 1시 30분 돌진을 확신하는 증언으로 증명해드린 바와 같이, 태극기를 흔들며 도청 앞으로 돌진했던 장갑차는 1시 30분경에 돌진했으므로, 위 서술에서 말하는 시각은 집단발포가 시작된 1시경 직후부터 태극기를 흔드는 장갑차가 돌진한 1시 30분 사이의 상황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맞지요?

 

 그렇다면 남는 의문은 이제 딱 한가지 입니다. 위의 정황으로 보아 김영택 기자가 목격했다는 복면을 하고 카빈 총을 든 수상한 3~4명이, 1시 전후에 가톨릭센터 4거리에서 총기를 나눠줬다는 자들과 동일인물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과연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님과의 초반 논쟁에서 화두가 됬던,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이라는 복면부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님은 물론 북괴특수부대라는 주장이고, 저는 북괴군의 침투는 모든 상황증거들에 의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므로, 김영택 기자의 증언록에서도 등장하는 용팔이 사건의 그것과 매우 닮은 신군부의 프락치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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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외에도 몇 대의 차가 도청을 향해서 나가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 차 뒤에는 몇몇 사람들이 낮은 포복자세로 따라갔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총을 배급받은 사람들은 총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들었다. 한편 사람들은 낮게 떠다니는 헬기를 맞추겠다고 하늘을 향해서 공포를 쏘기도 했다. 나도 총을 받았다. 비록 그 이전에는 쏘아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지만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폼을 잡고 가톨릭센타 옥상을 향해서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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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1시 30분경 태극기를 흔들면서 도청으로 돌진한 장갑차에 대한 서술의 다음 상황이므로, 이 서술은 1시 30분 이후임을 잘 알 수 있으며, 계엄군과 시위대가 총격전을 시작한 시각은 이 앞전의 반론글에서 밝혀드린바와 같이 3시경이므로, 이 서술은 1시 30분 이후에서 3시 사이를 설명하는 서술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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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증언은 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page=10&sn1=&diu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1 에서 자세히 보살 수 있습니다.  "아마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몰려가서 너나할것없이 총을 들었다."  바로 이 장면이 아래의 힌츠페터 영상물 중 21일 장면에서 보여지는 장면입니다.  사건 전개 순서를 보세요.  시민군 총기무장시점이 먼저이고, 시민군 장갑차 사고가 나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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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하하하! (실제로 웃은 것을 그대로 써봅니다.)

 

 역사학도님! 제가 누누히 말씀드렸지요. 아 글쎄 힌츠페터님이 찍은 시위대 무장장면은 21일 오후 장면이라고 대체 몇번을 증명해드렸습니까? 예?
 이것은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부정할 수가 없다니까요. 다른 누군도 아닌 촬영한 힌츠페터님이 잘 알고 계시는 명백한 사실이란 말입니다.

 

 힌츠페터님은 오전에는 시신들이 트럭에 실리는 장면들을 찍으셨고, 당시 도청 앞은 찍으신 적도 없거니와, 그 장면은 힌츠페터님이 도청 앞 집단발포 소식을 전해듣고 나와보니, 시위대가 이미 도청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서 아애 작정을 하고 무장을 하고 있는 장면이며, 이는 도청 앞 집단발포 후 시위대가 격분하여 최초로 자발적으로 적극적인 무장을 하는 장면, 즉, 이 앞전 반론글에서 증명해드린 바와 같이 1시 30분경을 기점으로 시위대가 사방으로 흩어져 각지에서 총기를 구해온 뒤, 계엄군과의 정면대결을 위해 도청으로의 재진격을 결의하는 2시 30분경부터 3시 사이의 장면이란 말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님이 주장한 것들 중 가장 신빙성이 있었던, 저 위의 1시 전후의 상황과도 완전히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저 위의 증언에 의하면 누군가(복면부대)가 총을 가져와서, 그것을 집어들자 마자 곧바로 가톨릭센터 위의 저격병에게 총격을 받았으며, 곧바로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서술하고 있잖습니까?

 대체 이 우왕좌왕하는 상황이 어디를 봐서 힌츠페터님 동영상에 나오는 상황과 같습니까? 예? 전혀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삼척동자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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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시민군 증언 사이트로 들어가시면 오전 9시에 시위대가 군용차량을 탈취하는 사건 증언이 있습니다.

 

<<"불질러 버리기 전에 열어!"

 곧 문이 열렸다. 조금이라도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내려서 차를 한 대씩 끌고 나왔다. 어떤 사람이 8톤 트럭을 조립이 덜 된 상태에서 끌고 나오려고 하자 그곳 직원이 차를 가로막으며 못 갖고 나가게 했다. 제발 검사인이라도 받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검사를 맡은 차량들은 시내로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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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 힌츠페터님의 필름은 21일 오후의 장면, 즉, 총기로 본격적으로 무장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 어디에 총기 무장을 했다고 나옵니까? 예?

 

 위 증언자가 아세아 자동차에서 차량을 탈취한 시점은 오전이지만, 누군가(복면프락치)가 총기를 가져왔다고 서술한 최초의 시간은 최대한 앞당겨보아도 오후 1시 전후입니다.

 자! 이사람이 언제 아침에 총기를 입수했다고 하던가요? 예?

 

 님 스스로가 어처구니 없는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주장한 것들에 의해, 오히려 힌츠페터님의 촬영시점이 언제인지만을 더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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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본에서 힌츠페터는 21일 오전의 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2“ 나는 사람들이 건설장비를 몰고 나오는 모습을 촬영했다.
 군대와 직접 대결을 할 모양이었다.
 시위대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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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더더욱 잘 아시겠지요? 이 상황이 어느 시점의 상황인지를 말입니다.
 이는 님이 아무리 날조하려 해도 절대로 날조를 할 수가 없는 명백한 역사적 진실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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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이용일의 증언이 이어집니다.

<아마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몰려가서 너나할것없이 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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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힌츠페터님의 영상과는 눈꼽만큼도 관련이 없는, 집단발포 직전인 오후 1시 전후란 것을 이제 잘 아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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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페터의 보도가 이어집니다.

 

<36“ 시민들은 어디에선가 총과 실탄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이때 사람들의 구호는 ‘우리를 죽여라’ ‘싸우다 모두 죽자’였던 것으로 기 억된다.
 정말 그들은 죽을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일이었다.
 나는 남은 필름을 모두 사용해 이 상황을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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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발포가 있은 후인 오후 2시 이후의 상황이라는 것을 이제 잘 아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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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힌츠페터가 그 영상물을 촬영한 시점이 21일 오전이었음을 명백히 입증하는 증거물이 바로 아래의 삐라입니다.

 21일 오전 10시에 이미 금남로 일대에 운집한 시위대 수가 십 만명이었다고 하는데요.  그 시민군을 향하여 살포된 삐라가 바로 이 삐라입니다.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때 가장 대표적인 광주민주화운동 문서로 등재될 문서입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17.html 에서 그 전문을 보실 수 있는 이 삐라는 5.18단체들이 몹시 소중하게 여기는 삐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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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 전에도 말씀 드렸지요.
 그 삐라가 무기를 탈취했다고 주장한 곳은, 파출소도 아니요, 예비군무기고도 아닌, 세상에나 무려 상무대랍니다. 예?

 

 상무대란 육군전투교육사령부를 말하는 것이고, 31사단도 이곳으로부터 육군본부의 명령을 하달받는 계엄군이 우글거리는 총 본진이며, 그런 상무대 무기고가 개나 고동이나 무기를 탈취할 수 있을 만큼 허술한 곳이 절대로 아니라고요.

 만약, 거기서 누군가가 무기탈취를 시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이없는 개죽음이라고요.

 또한 실제로 거기서 무기가 탈취되었다는 기록은 군이고 어디고 그 어디에도 없다고요.

 또한, 상무대 인근에는 505보안부대와 중앙정보부 즉, 당시 전두환이 사령관이었던 정보기관 2곳이 모두 몰려있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약 거기서 정말로 무기를 탈취(?)한 자가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신군부의 공작조 즉, 프락치라고 밖에는 설명될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 상무대는 내부 협조가 있다면 모를까, 북괴군은 커녕 람보가 들어가도 총기탈취가 불가능한 곳이란 말입니다. 아니? 람보도 그런 미련한 시도는 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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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대본에서 ‘우리를 죽여라’ ‘싸우다 모두 죽자’ 란 구호는 한국어가 영어로, 영어가 독어로, 독어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구호이며 실제 구호는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하라!”였습니다.  이 구호 삐라가 금남로에 운집한 시민군 및 시위대에게 살포된 시각은 정확하게 5월 21일 오전 10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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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담하십니까? 저는 그런 기록은 본 적이 없군요.

 기록을 찾아보면...

 

11:30 집결지를 알리는 전단 배포 - 전남지역 학생총연맹 이름으로 '오후 2시 도청 앞에서 도민궐기대회를 갖자'는 전단이 시내에 뿌려져 도청점령설을 뒷받침했다. 시내의 시위상황이 예측을 불허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같은 상황은 광주 동구청 건물 3층 우리 지사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순식간에 일어났다. (월간조선. 1985. 7)

 

11:40 - '4.19 의거로 연결하자'는 제하에 '각 대학은 대학별로 집결지를 정해 행동할 것' 과 '전남대생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조선대생은 계림파출소, 서강실업과 간호대는 MBC 방송국, 고교생은 산수 오거리, 시민은 도청으로 집결하라'는 내용을 담은 전남민주학생총연맹 명의의 전단이 살포. (신동아, 1985. 10)

 

12:00 - 도청 앞에서 전단을 뿌림.
- 압수한 차량에 학생의 시체를 싣고 시위.
- 평소 사격술 훈련의 강화와 적절한 사격 통제대책이 필요. (특전사 전투상보)

 

 위와 같은 기록은 있습니다.

 

 즉, 님이 제시한 삐라에는 [놈들은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라고 써있는데, 그렇다면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에 작성된 삐라라는 이야기가 되고, 그것만 보자면 차라리 어느정도의 신빙성이라도 있었으나, 이내 [학생 혁명군 상무대 무기고 무기 탈취!]라는, 지나가던 개도 웃을 얼토당토 않은 허무맹랑한 주장이 써있습니다.

 즉, 님이 주장하는데로 그런 삐라가 실제로 살포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애시당초 얼토당토 않은 새빨간 거짓말이 담긴 흑색선전용 삐라라는 말입니다.

 

 또, 님은 그 개도 웃을 흑색선전 삐라에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하라!]라고 써있다는 것을 빌미로, 힌츠페터님 영상에서 나오는 [우리를 죽여라. 싸우다 모두 죽자.]라는 말이 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즉흥적인 거짓말을 또 하셨는데, 당시 수많은 시민들의 죽음에 분노한 시위대가, 어차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는 단호한 결의에서 나온 말이지, 님의 상상속에서나 존재하는 북괴특수부대의 자살특공 구호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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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세요.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군용 차량들을 탈취한 시각이 오전 9시였으며, 그 군용차량들을 탄 시위대가 금남로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였습니다.  시민군이 군용차량을 타고 달리는 장면이 힌츠페터 영상물에 나오쟎아요.

 

<나는 사람들이 건설장비를 몰고 나오는 모습을 촬영했다.
군대와 직접 대결을 할 모양이었다.
시위대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힌츠페터가 시미군 차량이 달리는 장면을 촬영한 시간은 오전 10시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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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지금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위 증언자가 군용차를 탈취한 시점에는, 역사적 증거와도 매우 일치하게 전혀 총기무장이 없었다는 것을 매우 명확하게 알 수 있으며, 힌츠페터님이 촬영한 시점에는 총기무장이 있었으므로, 서로 시간상으로 눈꼽 만큼도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매우 명확하게 잘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힌츠페터님이 시민군(이때야 비로소 최초로 시민군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차량이 달리는 장면을 촬영한 시간은 오후 2시 30분에서 3시 사이였음을 매우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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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라는 제목의 위의 삐라가 금남로에서 살포되어 전 시민군/시위대에게 배포된 시간도 오전 10시였습니다.  오후가 아니었습니다.  시민군/시위대가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라는 제목의 위의 삐라를 손에 들고 금남로에서 점심 식사를 한 때도,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하라!”의 구호를 외친 때도 21일 오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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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간 소설가로서의 님의 재능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이시점에 와서는 그 개도 웃을 삐라가 실제로 뿌려졌는지 자체를 따질 가치도 없으며, 아애 그 삐라 자체가 순 엉터리없는 흑색선전이며, 금남로에서 음식이 나눠진 시간은 11시에서 12시 사이이지만, 위 증언자가 수상한 복면프락치들로 부터 총기를 지급받은 시간은 1시경 도청 앞 집단발포가 시작되는 바로 전후 시간대이며, 힌츠페터님이 찍으신 상황은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고 나서인 오후 2시 30분에서 3시 사이라는 것을 매우 명확하게 잘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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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으로 시민군이 5월 21일 오후 1시 반 이전, 즉 시민군 장갑차 사고 이전에 이미 총기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입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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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으로 위 증언자 일행이 1시경 도청 앞 집단발포가 시작되기 전후에 3~4명의 수상한 복면남자들로 부터 총기를 지급받았으나, 곧바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가톨릭센터 옥상의 저격병으로 부터 총격을 받았으며, 이외의 나머지 시위대는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인 1시 30분경 부터 각지로 흩어져 무기를 구해와 본격적인 무장을 시작했으며, 힌츠페터님이 촬영한 장면은 분명히 21일 오전이 아니라, 시위대가 각지에서 무기를 구해 재집결한 21일 오후 2시 30분에서 3시 사이였다는 것이 다시한번 매우 명확하게 입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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