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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에 대한 끝장토론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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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일 작성일10-01-21 10:35 조회2,945회 댓글0건

본문

반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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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시민측은 18일 타박상(곤봉에 의한 전신구타)으로 1분, 19일 타박상으로 2분, 자상(대검에 의한)으로 1분, 20일 타박상으로 6분, 자상으로 2분, 총상으로 5분이며, 군경은 버스에 치여 전경 4분이 사망하셨습니다.

 

 시민측 희생자가 군경 측 희생자보다 벌써 4배가 더 되는군요."라고 하셨습니다.  미안하지만 18일 시민측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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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18일의 희생자는 고 김경철님 입니다.

 

 보안사 505보안부대의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및 광주지검 [검시조서]에 따라, 국방부 과거사 진상 규명 위원회가 작성한 자료를 옮깁니다.

 

 <5.18. 금남로에서 희생당한 김경철씨의 사례는 공수부대의 과격진압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김경철씨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일 03:00에 사망했다. 검찰 검시조서에는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등이 사인이며, 사망진단서에는 후두부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이 직접사인이었다. 그의 시신은 군 당국에 의해 광주통합병원 영안실로 옮긴 후 상무대 내 101사격장에 매장됐다가 가족들에 의해 망월동에 안장했다.>

 

 더 구체적인 자료도 있으나, 각설합니다.

 

 또한 사망하지는 않았으나 중상을 입은 학생이나 시민들이 첫날부터 대량으로 발생합니다.

 

 대표적인 중상자 사례는 이민오님의 경우입니다.

 

 <1980.5.18. 조선대 의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민오씨는 광주일고에서 있었던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주변에서 쫓아온 공수부대원들을 피해 광주일고 교장관사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교장관사의 안방까지 추격해 온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구타당한 뒤 광주 서부경찰서를 거쳐 상무대로 연행됐다. 5.19. 밤 상무대 영창에서 심각한 복통과 구토를 호소한 그는 이날 24:00경 광주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후송 당시 구타 후유증으로 췌장 및 비장 파열, 복막염 등이 발생하여 위험한 상태였다.>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광주사태 합동수사] 기록에 의하면, 시위여부에 관계없이 18일 첫날만 연행된 학생.시민들이 249명에 달하며, 이 모두가 거의 무차별 구타를 당하며 연행된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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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도]

 

  그리고 시민군 증언에 따르면 공수부대원 사망자들이 첫 사망자들이었는데, 한 명도 포함시키지 않으셨군요.

  시민군들은 5월 19일 광주천변으로 떨어진 공수부대원을 시위대가 돌로 찍어 머리를 으깨어 죽였다고 증언합니다.  시민군 김현채(당시 19세의 식당종업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곳(양동)에서 시민들이 공수를 돌로 찍어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적십자병원으로 갔으나 공수를 이미 병원으로 옮긴 뒤였다." 시민군 최종북 (당시 15세로 무진중학교 3학년)도 5월 19일 실제로 그런 끔찍한 사건이 이렇게 서술합니다.

 

<'폭력경찰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학생과 시민 2백여 명은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얼마 후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공수부대원 한 명이 따로 떨어진 채 광주천변으로 붸겨갔다. 그러다 광주천변으로 떨어져 버렸다. 시민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또한 군인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  그 외에도 여러 사건들이 있습니다.  시위대는 그 공수부대원이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여겼으나, 의학적 사망은 사흘 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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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아]

 

 19일까지 공수대원은 물론 군경 전체를 통틀어 단 1명의 사망자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님이 원글의 링크를 걸지 않으셨는데, 김현채님은 <그곳(양동)에서 시민들이 공수를 돌로 찍어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적십자병원으로 갔으나 공수를 이미 병원으로 옮긴 뒤였다.>라고 증언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즉, 증언자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공수대원과 격투 중 공수대원을 돌로 찍어버렸다는 소리를 누군가로 부터 그저 들었을 뿐입니다.

 

 최종북님의 원글도 링크를 걸지 않으셨는데, <얼마 후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공수부대원 한 명이 따로 떨어진 채 광주천변으로 붸겨갔다. 그러다 광주천변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것이 증언의 전부입니다.

 

 실제로 보안사의 [순직일자 및 장소]라는 기록에 의하면 19일까지의 군경 사망자는 단 1명도 없습니다.

 

 이것을 님이 임의의 상상으로 돌로 찍었으니 의학적으로 사흘 후 죽었을 거라고 주장하셨는데, 그런 식이라면 19일까지 학생.시민들이 총 405명이 연행됐는데, 그중에 사흘 후 사망하셨을 분들이 얼마나 많을지를 헤아릴 수가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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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그 다음날 20일에도 군경편에서 먼저 사망자가 있었습니다.  군인들에게 밥을 실어다 주는 배식차를 시위대가 쓰러뜨리자 달려온 공수부대원을 시위대가 차량으로 깔아죽였습니다.  3공수는 20일에야 광주에 도착하였는데 장병들이 아침과 점심을 건빵으로 때우고 저녁식사마저 못했기에 밤 늦게나마 급식 수령에 나선 배식차를 시위대가 쓰러뜨리자 달려온 정관철 중사를 잔인하게 차량으로 깔아 살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습니다. 더구나 그에게는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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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그 다음날 20일에도가 아니라 그분이 군 최초의 희생자십니다.

 

 제가 이 앞전 반론글을 쓸 당시 군경 사망자 수는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사망일자에 대한 정보가 없어 부득이 누락했었으나, 보안사의 [순직일자 및 장소] 기록을 보고 그 정관철 중사님이 군 최초의 희생자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국방부 과거사 진실 규명 위원회가 보안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을 조사한 내용 중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20. 밤에도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었다. 5.20. 21:50 광주역에서 경계중인 제3공수여단 16대대 정관철 중사가 시위대의 차량에 깔려 사망하자 3공수여단장 최세창은 각 대대에 M-16 실탄을 배부하고 장착토록 지시했다. 당시 3공수여단 본부중대 소속 하사 이OO는 우리 위원회와의 면담에서 본부중대 병력들이 3공수여단 작전 참모와 작전과 선임하사의 지휘 아래 지프와 트럭에 실탄을 싣고 전남대에서 광주역으로 지원 나갔으며, 그 과정에서 지원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루어졌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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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광주사태 때 시민군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총상은 시민군 증언들로 확인되듯이 대부분 시민군 총기오발 사고에 의한 것이었으며, 타박상 사망은 실제로는 시민군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증언 당시 전남대 교직원이었던 오병길씨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기저기 군용차량이 흩어져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온 것 같았다. 자동차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용납품차량을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무작정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장에 있었던 납품차량은 시운전도 하기 전의 것으로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을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395&page=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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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위여부와 관계없이 많은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민 총 사망자 165명 중 총상 사망자만 132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며, 이중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21일에만 52명의 총상사망자를 기록하여 하루 총상 사망자로는 가장 많은 기록을 냅니다.
 물론 시민군의 오발 사고가 없지는 않았으나, 수 많은 증거들로 확인되듯이 대부분이 계엄군의 저격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5.18이 종료된 뒤 6월에 보안사 주도로 검안의, 목사, 기자, 법무관, 경찰관, 보안부대 장교 등으로 구성된 사체검안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당시 군이 제시한 보상 기준이 양민 희생자에게는 1인당 400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하겠으나, 폭도에게는 위로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또한 양민과 폭도를 구분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M-16 총탄에 맞은 경우 폭도이고 M1이나 카빈에 맞은 경우 양민으로 구분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기준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총상이 어느 총기에 의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으나, M-16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고 기록하면 폭도로 구분되어 그나마의 보상금 400만원 마저도 유족들에게 보내드릴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대다수의 총상자를 양민으로 구분하기 위해 M1이나 카빈에 맞은 것으로 기록할 수 밖에 없었음을, 당시 보안사 사체검안위원회에 참여했던 문형배님 등의 의사분들과 목사님이 증언하십니다.

 

 또한, 타박상 사망자는 위의 18일 고 김경철님의 경우와 같이 공수대원에게 연행되는 과정에 무참히 구타를 당하여 사망하신 분들이며, 차량사고에 의한 사망은 기타 사망자로 분류합니다.

 보안사가 어거지로 타박상 사망자를 차량에 의한 것으로 분류하려 했으나, 실제 차량사망자는 5명에 불과합니다.

 

 님이 오병길님의 증언록과 또다른 정체불명의 증언록(?)을 짜집기하여 제시하셨는데,

 

 님이 링크하신 오병길님의 수기 중
<여기저기 군용차량이 흩어져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온 것 같았다. 자동차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용납품차량을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무작정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장에 있었던 납품차량은 시운전도 하기 전의 것으로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원문에 보면 24일의 목격담을 증언하면서, 막연히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 같다는 목격담이 아닌 추측을 쓰신 것일 뿐이며, 실제로의 차량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보안사 [사망자 실사보고]에 의하여도 5명에 불과합니다.

 

 그 아래 님이 어디선가 가져다 짜집기하신 『앰뷸런스 소리...로 시작하는 내용은, 오병길님의 수기에는 없는 그 진위가 수상한 정체불명의 것이므로 반론은 각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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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20일자는 [놈들의 발포가 시작되었다.]라며 20일 밤을 설명하고 있고, 21일자는 [놈들은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라며 21일 1시경부터의 도청 앞 집단발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라고주장하셨는데, 이것은 님의 큰 실수입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07.html 에서 보실 수 있는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라는 제목의 20일자 삐라는 실제로는 19일에 작성된 거예요. 아래 보면 5.18단체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 하는 5월 19일자 4대 성명서 목록이 있습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라는 제목의 성명서 작성일자가 5월 19일이라고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 보이시지요?

 

<캡춰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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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이것은 제 보는 눈이 정확했습니다.

 

 님은 [5.18 단체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 하는 5월 19일자 4대 성명서 목록]이라는 즉흥적인 거짓말을 하셨으나, 님이 지금까지 제시한 자료들을 관리하는 장본인인 [5.18연구소]에 직접 문의해보니 5.18 관련자료들을 모두 DB화 하다보니 진위여부와 관계없는 자료들도 무작위로 섞여 있다고 합니다.

 

 또한, 5.18 기념재단에 문의해보니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라는 조직은 실체가 없는 유령조직이며, 유네스코에 등재할 자료들은 현재 검토 중에 있고 결정된 것은 아직 없으며, 당연히 상무대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둥의 사실무근의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그 흑색선전 삐라는 등재대상으로 고려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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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계엄군의 발포 시점이 1시경이고, 사람들이 화순, 나주 등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시점이 1시 30분 경이니."라고 또 우기셨습니다.  왜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하시나요.  여기 5.18측 자료를 캡쳐해 드립니다.

 

<5.18연구소 상황일지 3장 부분 캡춰화면>

 

"13:00 무장을 시작한 시위대"라는 글자 분명히 보이시지요?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1_31.html 에서 이 자료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자료에 "무장한 시민군의 등장과 총격전,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한 LMG의 위력에 눌려 계엄군은 퇴각을 서두르게 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LMG 아래 사진에서 보이시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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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캡춰하신 화면은 5.18연구소 상황일지 3장 중의 한부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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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무장을 시작한 시위대

 

- 해남읍에 시위차량 도착.

- 광주에서 시외버스 1대가 해남읍에 도착해 여학생이 마이크로 광주상황을 설명하며 읍민의 궐기를 호소. 이에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해남교육청 앞 광장에 집결. 성토대회를 갖고 시가행진에 돌입. (현사연 조사 종합)

 

* "논에서 일을 하다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가던 중 광주에서 온 시위대을 봤다. 해남교육청 앞 광장에 시위대를 중심으로 한 많은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 주변에는 시위대들이 타고 온 버스 2, 3대가 있었는데 유리창은 다 깨져 있었고, 빨간 페인트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철폐' 등이 씌여 있었다. 광주에서는 공수들이 사람을 대검으로 찔러죽이고 무조건 잡아간다는 말을 듣고 오전까지 조용하던 해남읍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몇몇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빵과 음료수를 사서 시위대들에게 주면서 고생한다고 격려해 주기도 했다. 그날 오후부터 해남읍에 있는 관공서는 모두 문을 닫았다." (구술 : 유승헌,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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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는 현대사연구소 책자의 내용을 옮긴 것으로 무장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무장을 시작한 시위대]라는 것은 1시 상황일지를 총괄하여 붙인 제목일 뿐입니다.

 

 바로 그 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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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중들 카빈 3백 정으로 무장, 전남대 의대와 경찰국 쪽으로 진출중.

 

- 도청 함락 직전. 함락될 경우 통신 완전 두절될 듯. 곳곳에서 불길. 인근 읍 면에서도 몰려오는 것 같은 움직임. 군중들의 구호, '지방색이 웬말이냐', '기자들 때려죽여라'. 구호 때문에 기자들 피신, 연락이 어려운 상태.

 

- 도경 쪽에 포위돼 있던 군경이 군중에게 총을 쏘기 시작. 옥상마다 군인이 올라가 총을 쏘고 있다. 사상자? 수백 발 쏘았다. 주변은 시위대가 여전히 장악.

 

자동차, 트럭 1백여 대 몰고 다니며, 경찰도 도청 사수 각오로 임하고 있다. 교도소, 무기고 탈취 기도하고 있다는 소문 있어 군경이 대비하고 있다. (월간조선, 198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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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내용은 월간조선 1985년 7월호의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5.18 연구소에 직접 문의해보니, 상황일지 정리한 분이 자리에 안계시지만, [- 도경 쪽에 포위돼 있던 군경이 군중에게 총을 쏘기 시작.] 부분을 보고 도청 앞 집단발포 상황으로 오인하고 1시에 삽입한 것으로 사료되며, 5.18 재단 측에 문의해보니 [카빈 3백 정으로 무장, 전남대 의대와 경찰군 쪽으로 진출중.][도청 함락 직전]이라는 둥의 그 내용으로 보아 1시 상황이 아니라는 답변입니다.

 

 실제로 상황일지를 재검토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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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

 

- 폭도들이 카빈 3백 정을 휴대, 전남대 의대 오거리에서 분산, 경찰국 쪽으로 총을 쏘면서 이동. (계엄사 상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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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3시 50분의 상황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무장한 시민군의 등장과 총격전,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한 LMG의 위력에 눌려 계엄군은 퇴각을 서두르게 된다.]

 

 이것은 원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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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절 무장시민군의 등장]

 

(21일 오후 13:00 - 17:00)

 

 화순, 해남, 나주 등.........(중략).........무장한 시민군의 등장과 총격전,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한 LMG의 위력에 눌려 계엄군은 퇴각을 서두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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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제1절의 요약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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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22일 이후의 도청 내 LMG 사진>

 

 시민군 김영호는 5월 21일 오후 2시경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때 8톤 트럭에 탄 시민군이 LMG와 카빈으로 무장을 하고 시민들을 향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63&page=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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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예! 아시다시피 2시 이후의 상황이군요.

 

 또, 증언자들 대부분이 근 10년 세월이 다지나서 수기를 쓰다보니 시간을 연대기적으로 기억하지 못하여 구체적인 각 시간대를 나열하지 못하고 있으나, 실제로 LMG가 최초로 탈취된 기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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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

 

- 화순 동면 무기고 기습, M1 72정, 실탄 12,470발, 카빈 296, AR1, LMG 1, 실탄 1,500발 탈취.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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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3시 35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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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어 시민군 문관의 증언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오후 1시쯤 광주에서 시위대가 넘어왔다는 말이있어 화순경찰서 앞에 나가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버스 2대와 군용트럭외에도 여러 종류의 차들이 15대 정도 와 있었다. 시위대는 몽둥이로 차체를 두들기면서 구호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광주에서 난리가 났으니 젊은 혈기 있는 사람은 모두 차에 타시오" 계엄군들이 광주 시민을 다 죽여버린다고 하면서 젊은사람들은 싸우러 가자고 하는데 나도 젊은 사람으로서 차에 안 탄다는 것도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분한 생각이 들어 시위 차량에 올라탔다. 그때 우리 직원 3명도 함께 탔는데 나중에 보니 끝까지 남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처럼 시위 차량을 타고 무기탈취를 하고 다닌 것이 아니라 금방 차에서 내렸다고 했다.

 

나는 바퀴가 10개 달린 GMC트럭에 타고 다른 5,6대의 차량과 함께 동면지서로 갔다. 엉겁결에 차에 탔기 때문에 처음에는 차들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몰랐다. 차에 올라가니까 먼저 차에 타고 있던 어떤 사람이 내게 수건 하나를 건네주었다. 20여 명 정도가 광주에서부터 타고 온 것 같았는데 그들 모두가 똑같은 수건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1시 40분쯤 화순 동면지서에 도착해 보니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시위대들이 무기고에서 무기를 가지고나와 차에 싣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LMG 2대를 가지고 나와 내가 탄 차에 하나를 설치해 주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68&page=38 )

 

<22일 이후의 도청 내 LMG 사진>

 

 시민군 문관이 증언하듯, 그리고 아래 사진에서 보듯 LMG로 무장한 시민군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촬영일자 미상의 머리에 붕대를 둘러 묶은 무장자의 사진>

 

"그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으며...어떤 사람이 내게 수건 하나를 건네주었다. 20여 명 정도가 광주에서부터 타고 온 것 같았는데 그들 모두가 똑같은 수건을 가지고 있었다...또 어떤 사람들은 LMG 2대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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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마찬가지로 [오후 1시쯤...]으로 운을 띄우기 시작한 증언자의 수기가 시간을 연대기적으로 기억하지 못하여 구체적인 각 시간대를 나열하지 못하고 있으나, 실제로 화순에서 무기가 탈취된 최초의 기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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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

 

- 무장 과격분자 50명, 화순 무기고 기습, 총기 40정 탈취, 광주로 운반. (전교사 작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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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3시 5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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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참고로, 5월 21일의 나주 금성동 파출소 무기 탈취 시점에 대해서는 시민군 김성수의 증언을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69&page=38 에서 참고하세요.  나주에서 남평으로 남평에서 다시 임동으로 갔습니다.  무기탈취조가 오전에 출발하였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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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제시하신 수기는 [21일 오치고개 고속도로로...]로 운을 띄운 뒤 일체의 시간서술이 전혀 없이 그날 하루 일을 모두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나주 금성동 파출소가 실제로 털린 것은 21일 오후 3시 30분경이고, 5.18연구소의 상황일지에서도 2시경 일지의 구술자들의 종합적인 상황설명에서부터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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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그리고, 저 위에서 보았듯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1_31.html 에 있는 광주민중항쟁일지가 21일 오후 1시에 이미 무장시민군이 등장하였음을 명확히 밝힙니다.

 

<5.18연구소 상황일지 3장 부분 캡춰화면>

 

여기 몇 문장 인용하여 드립니다.

 

<13:00 무장을 시작한 시위대

 

- 해남읍에 시위차량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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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여기까지는 위에 이미 매우 구체적으로 진위를 밝혀드린 내용이군요.

 재설명은 생략합니다.

 

---------------------------------------------------------------

[역사학도]

 

<13:00 읍.면 지서를 습격하여 무기 탈취

 

- 광산 하남파출소 과격분자 8명, 차량 3대로 난입, 카빈 9정 탈취하고 도주(전교사 작전일지)

---------------------------------------------------------------

 

[이데아]

 

 음... 이것은 전교사 작전일지에만 등장하는 군요.
 전교사 작전일지를 신용하고 봤을 때 실제로 탈취가 되었다면, 우리가 수상히 여기는 그 복면부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광산 하남파출소는 도청으로부터는 너무나 먼 거리인데, 당시 도로사정으로는 거의 1시간 가까이 족히 걸리는 거리입니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곳은 송정리 공군부대이고, 그 다음이 상무대 즉 육군 전투교육사령부, 그 다음이 505보안부대, 중앙정보부 순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전교사 작전일지에만 등장하는군요.

 

 차라리 화순이나 남평은 시외지만 도청에서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20~30분이면 족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나주는 남평에서 조금 더가면 되고요.

 때문에 실제로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무기가 탈취된 곳들은 모두 화순.남평.나주 일대였습니다.

 

 결론은 시민들이 번거롭게 그 시간에 그 먼 광산 하남파출소까지 가서 무기를 탈취했다고 보기가 힘듭니다. 실제로 탈취가 되었다면 그 수상한 복면부대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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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함평.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 대의 차량에 분승한 광주 시위대 도착. 함평 경찰서장 환영하에 군중시위. 함평 신광지서 접수, 총기 1백여 정, 실탄 2박스, 버스 등 확보.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

 

[이데아]

 

 음... 이것도 역시 수상하군요.
 함평은 그야말로 너무나 먼곳입니다. 무안에 가까운 곳인데 당시 도로사정으로 도청까지 1시간 가량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함평에서도 광주에 오려면 마찬가지로 송정리 공군부대와 육군전투교육사령부, 505보안부대, 중앙정보부를 거쳐야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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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8

 

- 과격분자 1백 명. 차량 3대로 함평에서 목포로 향발. (전교사 작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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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전교사 작전일지에만 등장하는군요. 그것도 1시 28분에요.

 

 또한, 지난 복면부대의 정체에 대해 논쟁했던 내용대로 이들은 광주가 아니라 목포를 향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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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오후 1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였다. 영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지프차를 앞세우고 버스 2대에 가득 탄 시위대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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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이 내용에는 원문에도 그렇지만 무장에 관한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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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

 

- 영암경찰서 기습, 무기 탈취 후 도주(520정). (전교사 작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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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에서 무기가 털린 최초의 시간은 4시 5분이군요.

 

----------------------------------------------------------------

[역사학도]

 

이데아님께서 "역사학도님! 어디까지 하실 셈이신가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넘어가야지요.  이데아님은 오후 1시 반 이후에 시위대/시민군이 무기 탈취하러 출발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위 5.18 항쟁일지 사이트는 시위대/시민군이 오후 1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 이미 영암. 읍내에 도착하였음을 명시합니다.  두가지를 묻습니다.  (1) 이들이 도청광장에 있던 자들인가요?  (2) 시위대는 나주, 화순, 남평, 함평, 광산, 영암, 해남, 무안 등의 지역 어디어디에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언제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알았습니까?

----------------------------------------------------------------

 

[이데아]

 

 자! 지금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우리가 수상히 여기는 조기에 무장을 한 3~4명을 제외하면, 일반 시민들은 모두 1시 30분경을 기점으로 무기를 탈취하러 흩어진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1) 도청광장에 있던 분들도 있고 아닌 분들도 있겠군요. 전교사 작전일지에만 등장하는 광산 하남파출서나 함평신광지서는 그 진위여부도 수상하지만 실제로 탈취가 되었다면 우리가 수상히 여기는 복면부대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 나주, 화순, 남평은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실제로 시민들이 흩어져 무기를 탈취한 곳이며, 당연히 파출소나 예비군무기고 등을 현지주민들이 더 잘 알겠지요.

 

 광산은 전교사 작전일지에만 등장하는데, 1시라는 시간상 그 진위가 수상하지만 사실이라면 문제의 복면부대일 것이고, 함평은 역시 복면부대일 것으로 사료되며 1시 28분에 무기를 털어서 광주가 아닌 목포로 갔다고 하고, 영암, 해남, 무안 등은 모두 도청 앞 집단발포로부터 한참 지난 시간대에 무기가 털렸으니 굳이 진위 여부를 논할 필요도 없겠군요.

 

 

 


 자! 그리고 우리가 수상히 여기는 복면부대의 정체를 짐작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광주에서의 보안사 활동

 

 5.18이 발생하고 상황이 악화되자 보안사령부는 광주 현지로 보안사 요원들을 파견했다. 5.19. 09:00경 보안사 참모회의에서 광주상황에 대한 토의가 있은 뒤 당시 보안사 기획조정처장인 최예섭 준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최예섭 기획조정처정은 광주에 도착, 전교사령관 부속실에 기거하며 상황 파악을 했고, 주요 회의에 참석했다.

 

 한편, 보안사에서는 이외에도 합동수사본부 치안본부 조정관으로 파견중이던 광주일고 출신 홍성률 대령을 광주로 파견했다. 홍성률 대령은 '10.26'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노태우 9사단장에게 소식을 알리는 서신을 전달한 인물이었다. 그는 5.19. 15:00경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으로부터 광주로 가서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5.20경에 광주에 도착했다.

 

 홍성률 대령은 광주시내로 잠입, 정보수집 및 특수활동을 벌였다. 그가 남긴 보고에 따르면, 그는 광주시 사동의 친척 집에 비밀아지트를 설치하고 전남도경찰국 정보과 소속 경찰과 505보안부대의 정보과 요원의 지원을 받으며 광주시내에서 활동 중이던 정보조를 통합 지휘했다. 보안사 상황보고에는 "(5.23.) 18:30 시내에 잠복하여 특수임무를 수행중인 당 부대 홍성률 대령의 보고에 의하면, 극렬 폭도들의 약탈과 강제 동원 등으로......(중략)......" 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여기서 '특수임무'라는 것이 관심을 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 보고서의 상황보고는 '5.18'에 대한 일반적 평가와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광주 시내에서는 군경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는 광주시내로 잠입해 5.21. 09:00경부터 '지하정보' 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505보안부대 정보과 소속 상사 박OO과 전남도경 정보과 정보 2계장 경감 김OO의 지원을 받으면 활동했다. 그는 경찰의 정보기능을 통합해 3개조의 정보조를 통합 지휘했다. 이후 5.24. 광주 시내를 빠져나가 송정리 비행장에서 대기하다 5.27. '상무충정작전'이 끝난 뒤 전남도경을 지휘 감독한 뒤 6. 초순경 상경했다. 그 뒤 그는 6.10.경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정도영 보안처장 앞에서 '5.18'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설명했다.

 

(후략)>

 

 

 

 다음 기회에 더욱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보겠습니다.

 

 이외에도 20일부터 집단발포를 모의한 정황과, 아직 탈취되지도 않은 장갑차에 대한 대응을 논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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