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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에 대한 끝장토론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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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일 작성일10-01-22 10:26 조회4,1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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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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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이것은 사실성립이 불가능한 주장입니다.  공수부대는 5월 21일 저녁 때 비로서 시위진압에 동원되었습니다.  김경철군이 낮에 구타당하였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지금도 광주에서 종종 폭행사건이 일어나고 있지요?  만약 그런 평상시 폭행 사건이 아니라면 시위대에 맞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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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사실 성립이 불가능해요? 공수가 21일 저녁 때 비로소 시위진압에 동원되요? 광주에서 폭행사건이 뭐 어쩌고 어째요?

 

 님은 언제나 막연한 주장을 항상 거침없이 하시는군요.


 사실관계 확인은 하지 않고 일단 먼저 우기고보는 님을 위해, 18일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부득이 길지만 18일의 상황일지와, 자료 보충까지 해서 제시해드립니다.

 

 님과 달리 저는 공정한 사람이기에, 형평성을 위해 군은 물론 시위학생들의 폭력까지 모두 제시해드리겠습니다.


 이것을 보시면 공수가 언제 어디에 투입되어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길더라도 필독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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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00:05 광주지역 민주인사 등 연행

 

1. 정동년, 김상윤 등 복적생과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들에 대한 연행작전.

 

2. 도서관에서 철야하던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의 회의장, 농성장에 공수부대가 급습, 학생회 간부 및 복학생, 시위주동 혐의자들을 검거하여 운동장에 옷을 벗겨 꿇어앉히고 구타한 뒤 연행. 공수부대와 합수부(안기부, 경찰, 보안대)는 새벽 5시경까지 학교와 예비검속 대상자의 가택 등을 수색.

 

3. 예비검속자 명단 : 정동년(전남대 4년), 권창수(전남대), 오진수(전남대), 이승룡(전남대 3년), 유재도(조선대), 유소영(조선대). (현사연 조사 종합)

 

* "조선대 방송실에서 선후배들이 모여 철야 간담회를 하고 있는데, 31사단 소속 통신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학교 통신시설을 점검한다며 들어왔다. 형식적인 점검 후 그들이 나가자 나는 화장실에 갔다. 잠시 후 방송실에서 험한 욕설이 흘러나오고 무엇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교내에 계엄군이 진입한 것이다. 그때가 밤 12시경이었다." (구술 : 진호림, 현사연 조사)

 

01:00 광주 일원 공수부대 투입

 

-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특전사 제7여단(여단장 준장 신우식, 2군 배속) 제 33, 35대대 82/604(장교/사병 이하 생략), 전남대 도착.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들을 급습,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후 체포.
(주 : 이날 전북대 이세종 사망)

 

7공수 31대대 장교 16 / 사병 172, 17일 24:00 출발 18일 01:05 전북대 점령 완료. (주 : 보안사 내부문건 전교사 전투상보)

 

7공수 32대대 장교 38 / 사병 291, 17일 24:00 출발 18일 01:25 충남대 점령 완료. (주 : 보안사 내부문건 전교사 전투상보)

 

7공수 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 장교 45 / 사병 321, 17일 22:00 출발 18일 02:00 전남대와 광주교대 점령 완료. 교내에 있던 학생 69명 체포. (주 : 보안사 내부문건 전교사 전투상보)

 

7공수 35대대(대대장 김일옥 중령) 장교 39 / 사병 283, 17일 22:30 출발 02:30 조선대와 전남대 점령 완료. 학생 43명 체포. (주 : 보안사 내부문건 전교사 전투상보)

 

* "17일 밤 전남대 총학생회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11시경에 군부대 트럭이 교내로 들어왔다. 그들은 통신 점검차 들렀다고 하면서 횡설수설했다. 자정이 되자 공수들이 정문과 후문으로 계속 밀어닥쳤다. 총학생회 사무실에 있던 7명 중 3명은 무사히 빠져나가고, 권창수, 오진수, 나 외에 1명이 새벽 1시경 공대 5호관에서 붙잡혔다." (구술 : 이승룡,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이하 현사연이라 약칭) 조사)

 

02:20 계엄포고문의 접수

 

- 포고문 접수 및 하달 / 전국 계엄령 확대 실시에 따른 조치사항 학교 병력배치

 

전북 14개 학교 52/660(01:29)
전남 20개 학교 114/1132(02:29)

주모자 검거 : 전북 46명 중 6명 전남 22명 중 8명

학교에서 체포인원 : 전남대 69명, 조선대 43명, 전북대 34명, 원광대 23명.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작전일지, 이하 전교사 작전일지라 약칭, 광주 치평동 소재, 흔히 상무대라 부름)

 

* "전남대 고용직에 근무했던 나는 5월 17일 밤 10시경 중앙도서관 문을 잠그고 숙직실로 와서 잠을 잤다. 새벽 2시쯤 되었을 것이다.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문을 발로 쾅쾅 찼다. 공수부대가 전남대에 진입한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중앙도서관 열람실의 비상키를 요구하더니 도서관 열람실을 샅샅이 수색한 후 공과대학 본관으로 갔다." (구술 : 고광윤, 현사연 조사)

 

02:26

 

- 제33,35대대, 31사단 96연대에 배속. (31사단 전투상황보고, 이하 31사단 전투상보라 약칭)

 

02:29

 

- 31사단 96연대, 사단 잠정부대 배속 받아 전남대, 조선대를 제외한 각 대학 점령.

 

호남신학대 3/42
서원보건전문대 3/35
동신전문대 3/27
대건신학대 3/29
서강전문대 3/32
성인경상전문대 2/47
기독간호전문대 3/35
송원전문대 2/47

 

- 31사단 96연대, 광주시내 방송국 점령. KBS 2/40, MBC 1/20, CBS 1/10, VOC 1/10(전일방송). (31사단 전투상보)

 

03:05 무기고 안전 지시

 

- 군사령부 무기고 안전대책 강구. 전 남북 계엄분소, 2군사령부의 지시를 받고 예하부대에 무기고 안전대책 강구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 새벽 전남대 입구에 전투경찰 배치

 

- 제31사단, 전남대 앞에 경찰 7백24명 투입 배치. (전교사 작전일지)

 

09:00 전남대학생들 등교 시작 (전남대 정문앞 싸움)

 

1. 전남대 정문 앞에 학생들 모이기 시작.

 

2. 일찍 등교한 전남대생 6명, 팬티만 입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3.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학교에 들어가려다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 전.

 

4. 휴교령으로 문이 닫힌 전남대 정문에서 학교에 들어가려던 교수 한 분이 계엄군에 의해 구타당하자 분개한 전남대생 2백여 명이 학교 정문에서 20분간 공수,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뒤 중흥동 금남로에 진출하여 연좌,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사임'을 요구하며 가두농성을 시작했다. 40여 분간 요지부동으로 연좌데모를 하던 학생들이 한일은행과 YMCA 양쪽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던 경찰의 최루탄에 견디지 못하고 흩어지자 사복형사들이 뛰쳐나와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에 연변의 시민들이 형사들에게 야유를 던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흩어졌다가 현대극장 앞에서 다시 일행을 규합. 이때 조선대학교 및 전문대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상기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신동아, 1985. 10)

 

10:00

 

- 전남대 정문 앞에서 전남대생 50명(2백∼3백, 4백 명이라고도 함) 시위.
- 군용트럭의 시내 질주가 목격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0:20

 

- 전남대 정문 앞에서 전남대생 5백여 명, 경계중인 공수부대와 충돌. '계엄철폐'를 외치며 도청 쪽으로 진출. (말, 1988.5)

 

- 제33대대, 전남대 정문 앞 2개 중대 투입. (특전사 전투상보)

 

- 제33대대 대대장 권성만 중령은 이와 같은 학생들의 시위에 대하여 즉시 2개 중대를 투입하여 시위학생을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투석으로 맞섰고 계엄군은 M-16 자동소총을 어깨에 비켜 멘 채 위력시위만으로 대처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자 거기에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말, 1988.5)

 

* "2백여 명의 학생이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 있었다. 교내에서 마이크를 통해 '다리에 있는 학생에게 알린다. 즉시 귀가하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 해산시킨다' 는 경고방송을 했다. 그 말을 듣고 흥분한 우리가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때까지 끄떡도 않고 있던 공수들이 몽둥이를 들고 질주해 오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거리가 잠잠해지자 다시 모인 학생들이 여기에서 소모전을 하지 말고 시내로 나가자고 하여 우리는 대열을 이루고 광주역,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거쳐 YMCA 앞으로 갔다." (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10:30 전남대 후문에서 시민 연행

 

* "전남대 후문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공수 2명이 내 양쪽 팔을 잡고 전남대 수위실로 끌고 갔다. 왜 나를 잡아가느냐는 물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군화발로 차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팼다. 수위실에는 먼저 잡혀온 몇몇 사람이 포승줄에 묶인 채 꿇어앉아 있었다." (구술 : 장천수, 현사연 조사)

 

* "오전 10시경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 전남대 후문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한 명이 내리자 담벼락에 숨어 있던 공수가 달려와 버스를 세우더니 승객들에게 내리라고 했다. 아무도 내리지 않자 공수 2명이 승차하여 닥치는 대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20∼30명의 승객을 끌어내린 후 전남대 수위실 부근에 감금시켰다." (구술 : 범진염, 현사연 조사)

 

10:50

 

- 광주역 앞에서 전남대생 2백여 명이 집결하여 금남로 도청 앞까지 행진하다 경찰의 제지로 광주우체국 쪽으로 흩어짐. (5.18 당시 시청에서 정리한 일지로 경향신문 1988년 5월 18일자에 발표된 '5.18 사태 상황 및 조치사항'. 이하 시청 상황일지라 약칭)

 

11:00 금남로 연좌시위 '흔들리지 않게' 부르며

 

-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앞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시내로 진출한 전남대생 5백 여명 연좌시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페퍼포그차를 앞세운 전경들이 도청을 등지고 있었다. 우리는 전경들과 1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연좌농성을 했다. '흔들리지 않게' 등의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는데, 어느 사이 우리 뒤쪽에도 전경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페퍼포그를 쏘고, 곤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하면서 연행하기 시작했다." (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 "동구청 앞에서 30여 명의 학생들이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대치 중이던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학생들을 연행하자 곧바로 진압되었다." (구술 : 임춘식, 현사연 조사)

 

- 한일은행 앞, YMCA 부근에서 전남대생 시위.

 

- 헬기로 시위대의 상황을 파악.

 

- 전남대생 2백여 명이 동대학 정문에서 계엄군과 투석전. 1백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 쪽으로 진출 중에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11:10

 

- 전남대 앞 시위대 해산.

- 충장로 파출소에서 대치. (육본 상황일지)

 

11:15

 

- 전남대생, 도청에서 집결하자고 하면서 분산. (계엄사 상황일지)

- 학생 1백여 명이 충장파출소에 투석, 유리창이 파손됨. (시청 상황일지)


11:25

 

- 광남로 진출 2백여 명의 학생, 공원 쪽으로 가면서 충장로 파출소 유리창 7개 돌로 파괴.(계엄사 상황일지)


11:30 가톨릭센타 앞에서 대치

 

- 학생들은 광주역을 거쳐 번화가인 금남로로 들어갔으며, 숫자는 2백 명쯤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농성하며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기동경찰이 길 양쪽에서 다가서며 페퍼포그를 발사, 해산시킴.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충장, 계림, 동명, 산수 등 5개 파출소 파괴. (월간조선, 1985. 7)


11:49

 

- 공원 쪽에서 몰려오는 6백여 명은 손에 돌을 들고 '전두환 물러가라','계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일은행 앞으로 진출. 가톨릭센터 앞에 3백50여 명의 학생 운집. (계엄사 상황일지)

 

11:50 본부 장교 10 / 사병 76, 조선대, 전남대 의대.

 

11:50

 

- 가톨릭센터 앞의 6백여 명, 한일은행 앞 시위대와 합류,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중, 경찰 최루탄 발사 해산시키며 주모자 체포중. (계엄사 상황일지)

 

- 금남로 충금동사무소 옆에서 학생 2백여 명이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해산되었으며 5명 정도가 연행됨. (시청 상황일지)


12:30

 

- 학생회관 앞, 금남로에서 해산된 학생 중 3백여 명 재집결, 불로동 다리 방면으로 진행하면서 계엄해제 등의 구호를 외침. (전교사 작전일지)

 

- 한일은행 앞, 2백여 명 재집결 가톨릭센터 쪽으로 이동하며 시위. 경찰 최루탄 쏘며 주동자 검거(6명). (계엄사 상황일지)


12:45

 

- 7공수 33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가톨릭센터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특전사 전투상보)

- 산수동 파출소 피습, 전남대생 20여 명 산수동 파출소에 투석, 유리창 20여 개 깨고 도주. (계엄사 상황일지)


13:00 공수대의 시내 투입

 

- 수창초등학교에 공수부대 차량 20여 대 집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1시가 조금 넘어서 수창초등학교 앞에 당도하니 공수들이 5열 횡대로 차도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비스듬히 메고 곤봉을 총검술 자세로 받쳐든 채 지휘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한발 한발 움직이고 있었다. 20-30명의 학생들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때였다. 지휘관의 긴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공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길가는 시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한 살상을 시작했다. 나는 데모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무원인 신분을 믿고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들리는 요란한 군화발 소리에 놀라 돌아다보았다. 수십 명의 공수들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오, 나는 공무원이오' 하고 황급히 외쳤으나 그들은 곤봉을 내리치고 발길질을 해댔다. 나는 그들의 곤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 김정섭, 현사연 조사)

 

13:10

 

- 군사령부에 군사령관 작전지도차 내방.(말, 1988. 8)


13:20

 

- 학생들이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 페퍼포그차 1대를 불지름. (시청 상황일지)

 

* "학생회관 정문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학생들이 전경들 주변으로 접근해서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졌다. 기습을 당한 전경들은 허겁지겁 도청 쪽으로 도망쳤다. 그들이 버리고 간 페퍼포그차, 몽둥이, 방패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기세등등해진 학생들이 페퍼포그차를 뒤집어놓고 기름통에 불을 붙여 차를 전소시켰다." (구술 : 이광호, 현사연 조사)


14:15

 

- 유동 삼거리, 불로동 쪽에서 온 3백여 명 해산.

- 조흥은행 앞, 한일은행 쪽에서 해산되어 공원 쪽으로 이동중인 3백여 명을 추적 분산, 주동자 검거중(10명). (계엄사 상황일지)


14:42

 

- 또다시 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1천5백여 명, 충장로 일대에서 1천6백여 명의 군중이 데모를 시작했다. 데모 군중들이 경찰관들을 향해 보도블록과 콜라, 사이다 병을 투척.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했으나 갈수록 과격해지는 데모대의 진압에는 실패. (말, 1988.5)


13:10

 

-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행. (특전사 전투상보)

 

15:00

 

- 계엄군 38/294명 투입, 시내 진압작전 실시(7공수).

 

가톨릭센타 : 33대대(35/367)

 

충 장 로 : 33대대(26/172)

 

- 시위군중 해산(체포 337명). (말, 1988. 8)

- 학생회관 부근, 페퍼포그 차량 1대 전소. (전교사 작전일지)

- 공중에서 헬기 3대 선회.

 

헬리콥터의 프로펠러를 이용해 시위진압

 

* "처음에는 헬기가 단지 작전을 지휘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전경들과의 투석전이 계속되면서 시위대들의 숫자가 계속 불어나자 헬기가 직접 시위진압에 투입됐다. 헬기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프로펠러의 바람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헬기가 다가오면 세찬 바람과 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어 골목으로 재빨리 피신했다가 재집결하여 투석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구술 : 임낙평, 현사연 조사)

 

- 학생회관 부근 학생들이 두 팀으로 나누어짐. 이들은 외곽지역의 학생들을 동원할 목적으로 한 팀은 광주공원-한일은행 앞으로, 다른 한 팀은 광주천을 거슬러 올라가 전남공고 방면으로 진출. (현사연 조사 종합)

 

- 데모대는 충장로 파출소와 중소기업은행 앞에서 연좌시위를 시작, 오후 3시경 에는 2천여 명으로 증가.

 

- 이때 제35대대는 금남로 좌우측, 충장로 등을 차단, 군중을 해산시키고 데모 군중 2백73명을 체포, 연행. (말 1988.5)

 

- 박승렬은 대인동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노상에서 시위군중 1천여 명과 합세 하여 대인동, 금남로를 거쳐 도청 앞까지 가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2시간 가량 시위를 하고. (공소장)

 

- 차명석은 지원동 수정아파트 앞에서 박관현이 계엄법 위반으로 수배되어 있음을 알고 체포를 면하게 할 목적으로 빌려온 자가용 대여차에 박관현을 승차시켜 21시경 전남 여천군 돌산면 방죽포 임해연구소 앞에 있는 김철만의 집까지 가게함. (공소장)

 

- 한정만은 16시까지 광주우체국 앞에서 경찰과 대치중인 약 3백 명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 유동 삼거리를 경유하여 광주역까지 시위. (공소장)


15:30

 

- 충장로 광주공원 일대 3백-6백 명 단위로 운집 시위. (말, 1988. 8)

 

- 박철은 동명동 파출소 앞 노상에서 군중 약 2백 명과 시위를 하면서 돌과 빈 병을 파출소 유리창에 던져 유리창을 깨고 일부 시위군중 7,8명은 파출소 안에 들어가 책상, 전화기 등 기물을 파손하고 일부 시위군중은 파출소 옆의 오토바이에 방화. (공소장)

 

- 유동 삼거리, 수창국교 근처 등에 M16소총을 비껴맨 일군의 공수부대 출현.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중심으로 시내 곳곳의 시위진압.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관광호텔 안의 이발관에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 종업원들과 함께 나가봤다.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데모를 하다 공수들에게 밀려 도망가고 있었다. 뒤쫓아간 공수들이 30-40명의 시민, 학생을 동구청과 관광호텔 앞으로 붙잡아왔다. 공수들은 붙잡혀온 시민, 학생의 옷을 벗게 한 후 팬티만 입힌 채 구타와 기합을 주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했다. 한국은행 부근에서 공수 2명이 여학생을 끌고 왔다.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공수들은 욕을 하며 더욱 거세게 발길질을 했다. 잠시 후 공수들이 다른 사람을 잡으러 간 사이 어떤 아저씨가 그곳에 잡혀있던 사람들을 모두 도망가게 했다. 30-40명의 시민,학생을 풀어준 사람은 도경 경비과장이라 했다. 그것을 보고 달려온 공수에 의해 그 아저씨는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터지고 동구청 뒷골목으로 끌려갔다." (구술 : 김후식, 현사연 조사)


15:40

 

- 7공수 33대대 38/294,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 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 전투상보, 특전사 전투상보)

 

* "오전까지 시위진압을 하던 전경들이 3시가 되면서부터 점차 물러가고 금남로 요소요소에 공수부대가 투입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M16을 메고 손에 곤봉을 들고 있었다." (구술 : 조일규, 현사연 조사)


15:45

 

- 금남로에서 군인들에게 쫓긴 대학생들이 북동 쪽 민가에 잠입하자 군인들이 가정집을 수색하여 대학생으로 보이는 장발 청년과 여자를 마구 때리고 차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한 후 차에 실어 연행해 감.(군인의 경상도 특유의 억양은 광주시민을 자극). (시청 상황일지)

 

시간미상<정호용, 전두환 등 군 수뇌에게 광주사태 보고하고 3공수 7공수 20사단 증파 결의>

 

- 서울 : 이때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정부장 서리 등 군수뇌부가 모여 광주사태에 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면서 제3공수여단과 제7공수여단을 동시에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두환 장군은,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게 좋겠어.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나서면 그만큼 이쪽의 시위가 위력적일 테니까."

 

이때 제9사단장인 백운택 소장이 전두환 장군에게 '제가 광주에서 희생하겠다'고 자기도 보내줄 것을 진언했으나 보류됐음. (제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은 정호용 사령관의 특별명령으로 이미 광주에 진주해, 제11여단의 4개 대대가 2개 대대씩 나뉘어 각각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말, 1988.5)

 

- 이때 제35대대는 금남로 좌우측, 충장로 등을 차단, 군중을 해산시키고 데모 군중 2백73명을 체포, 연행. (말 1988.5)

 

- 7공수 33대대 38/294,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 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 전투상보, 특전사 전투상보)


15:50

 

- 7공수 35대대 26/196, 충장로 출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오후 4시경 충장로 1가에 있는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공수 2명이 곤봉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초크가 묻지 않은 사람을 분류하여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런 후 광주우체국 앞으로 끌고 갔다. 우체국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공수들은 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 (구술 : 조훈철, 현사연 조사)

 

- 충장로 입구, 전남대생 1백여 명 경찰과 투석전. 공원에서 분산된 6백여 명 도청 쪽으로 이동중 경찰 분쇄, 주모자 검거중. (계엄사 상황일지)


16:00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로 시위양상 전환

 

- 전남공고 방면으로 진출한 학생들이 노동청 부근을 지나 동명파출소, 지산파출소, 산수파출소 등을 파괴.

 

- 광주공원으로 진출한 학생들은 태평극장 부근에서 경찰과 대치.

 

- 태평극장 부근의 시위대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진출. 여기에서 공수부대와 충돌함.

 

- 계엄군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 전시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을 연행하기 시작. 반항하면 구타. (월간조선,

1985. 7)

 

- 33대대 금남로 이동. 35대대 충장로 이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광주일고 입구 금남로상 횡단보도, 진압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해산 방송과 함께 무자비한 진압 개시. 체포명령과 함께 도망가는 행인까지 무차별 구타 체포.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1988). 이하 10일간의 취재수첩이라 약칭)


16:20

 

- 3백여 명의 시위대 동명파출소 습격, 유리창 50여 장 파손, 시장관사 투석, 지산파출소 쪽으로 이동중(연행32명). (계엄사 상황일지)


16:30

 

- 금남로와 광남로 교차점인 중소기업은행 부근에서 공중전화 박스 등이 바리케이드로 이용됨.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기타를 갖고 가던 학생, 기타로 머리를 얻어맞음. 헬기 3대 공중에서 비행(대학생 집결지 파악하는 듯). (월간조선, 1985.7)

 

- 최대통령 특별성명 발표, '국가 보위 등을 위해 계엄확대 등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조선일보, 5.20.)


16:30.

 

- 33대대 작전종료(금남로 시위진압- 편집자주). 103명 체포, 31사 헌병대에 인계.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특전사 11여단 (여단장 준장 최웅) 여단본부 260명 광주로 이동. C-123 수송기 5대에 분승, K-16기지 출발. 도착과 동시에 2군 작전통제하에. (계엄사 상황 일지)

 

*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학생 50여 명이 데모를 하고 있었다. 공수들은 젊은 사람이면 무조건 잡아다 피투성이를 만든 후 중앙국민학교 돌담 밑에 꿇어앉혀 놓고 군화발로 짓이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울컥 화가 치민 나는 죄가 있으면 법대로 처리하라고 항의했더니 곤봉으로 냅다 어깨를 후려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 이근재, 현사연 조사)


16:40

 

- 시위대 3백여 명 지산파출소에 투석, 기물파괴 및 방화. (전교사 작전일지)


16:48

 

- 전교사에 제11여단 선발대 도착(45/213). (말, 1988. 8)


16:55

 

- 한국은행 앞, 학생 2백여 명 공수 1개 중대와 대치, 투석. (전교사 작전일지)

 

17:00 경찰 20-30명이 시위대의 포로로 붙잡힘

 

* "농장다리 쪽에서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30여 명의 경찰을 인질로 삼았다. 우리는 경찰의 허리끈, 방석모, 곤봉 등을 빼앗은 후 그들을 앞세우고 장동 로터리로 갔다. 경찰 인질을 연행학생들과 바꾸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장동 로터리에 도착했을 때 공수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있었다. 그들은 인질과 연행학생을 교환하자는 우리의 제의에는 대꾸도 않고 곤봉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도망 치기에 급급했던 우리는 그때 경찰 인질을 놓치고 말았다." (구술 : 이광호, 현사 연 조사)

 

- 전남공고 부근으로 진출한 시위대 중의 일부가 노동청-전신전화국-전남여고-계림극장 부근으로 진출.

 

- 트럭에 분승한 공수부대 MBC 앞으로 진출, 무차별 진압. 청년,학생 연행 (현사연 조사 종합)

 

- 상점, 다방, 이발관, 음식점 등을 뒤진 공수부대, 학생들을 연행.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7:05

 

- 1천여 명의 시위대, 노동청 앞에서 계엄군 및 경찰과 대치중.(계엄사 상황일지)


18:00 계림동 일대의 살륙


-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 시민,학생 3백여 명이 운집, 공수부대와 충돌.

 

20-30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공수부대가 산수동 방면으로 후퇴. 시위대가 계속 추격했으나 증강된 공수부대의 반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공포지대로 돌변. 밤새워 인근주택가를 뒤져 청년들 연행.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실천문학사. 이하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로 약칭)

 

* "계림극장 앞을 지나다 보니 거리에 공수들이 쫙 깔려 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저놈 잡아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처럼 달려든 공수들이 이렇다 할말 한마디 없이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4군데나 찔렀다." (구술 : 이장의, 현사연 조사) - 김태종, 전용호, 김선출 등 문화팀은 무등영아원(이현철의 거주지)으로 가서 유인물 제작에 들어감. 프린트되는 대로 들고 나와 양림동, 사동, 구동, 월산동, 방림동, 학동 일대에 배포함. (현사연 조사종합)


19:00

 

- 35대대 작전종료(충장로 일대 시위진압 - 편집자주). 173명 체포, 31사 헌병대에 인계.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20:15

 

- 1백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은행 뒤쪽에 모였으나 별다른 상황 없음. 일부 계엄군은 시민들이 시위학생을 감싸면 '너는 뭐냐?'고 구타. (월간조선, 1985. 7)

 

- 가톨릭센터 앞, 6백여 명의 시위대 계엄군과 대치, 총검 진압(주모자 61명 검거). (전교사 작전일지)


20:20

 

- 노동청 앞 등 전시가지 2천여 명 산발적 시위. (전교사 작전일지)


20:30

 

- 계엄군은 여단 병력으로 증강. 광주시외 변두리와 대학가에 군인들 막사 쳐.

학교 정문에는 8명씩 무장하고 경계, 시가지 요소요소에 군인 배치. (월간조선,1985. 7)


20:40

 

- 가톨릭센터 앞 대치중인 1백여 명의 시위대, 경찰 투입 해산. (계엄사 상황일지)


21:00

 

- 계엄공고 제4호로 통행금지 시간 연장 조치. 21:00 - 익일 04:00까지. (말, 1988. 8)

 

- 31사단 작전회의, 5.18 04:00부로 7공수 33대대는 31사단에, 35대대는 공수여단에 배속, 중요지점에 거점 병력 배치. (특전사전투상보, 시청 상황일지)

 

시민동향

 

- 5.17 이전의 학생 가두시위에는 시민들이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으나 - 5.18에는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때리고 짓밟고 찌르는 등의 잔인한 행동을 시민들이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 일부 시민들은 군인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경상도 사람들이 난동을 부린다고 격분하였고, 일부 부녀자는 '내 자식도 어디 가서 저렇게 맞고 다닐 것이다'하고 울면서 칼에 찔린 청년들을 노상에서 치료해 주려고 하였음(군인들이 방해).

 

- 특전대원들이 '전라도 새끼들 씨를 말려버려야한다''면서 청년들을 폭행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음.

 

- 거부장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투석하자 군인들이 거부장으로 들어와 3명을 연행한 사례로 보아 일부 시민들이 학생 편에 가담할 우려가 있음. (시청 상황일지)


23:00

 

- 군사령부가 제11여단 작전통제 지시. (말, 1988. 8)


23:20

 

- 야간배치 완료

 

.경찰서 파출소 및 도로 교차지점 : 36개 지점

 

.계엄군 1개 지대(1/10)와 경찰 2개 분대(24명)로 합동배치(30명 규모) (말, 1988. 8)


23:40

 

- 31사단 작전회의 재개최, 33대대 광주역 점령 임무부여. (특전사 전투상보)


시간미상

 

- 광주시내 전역과 직장예비군 무기 및 탄약 회수, 군부대에 보관 : 무기 4,717정, 탄약 115만 발.

- 분산 무기고 탄약, 군부대 및 경찰서에 보관 : 55만 발 - 무기고 접근자 발포 승인 건의. (31사 지시 80-1)

- 복무규율에 의거 지휘관 재량 실시토록 지시. (말 198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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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공수는 18일 새벽 1시경 광주에 도착과 동시에 무차별한 폭력을 휘두르며 온종일 시위 곳곳에 빈번하게 투입됩니다.


 부마항쟁 직후 보안사가 작성한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의 내용을 보면, [초동단계에 신속 진압.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데모요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함. 군이 출동하면 최강의 위엄과 위력을 과시하여 위압감을 주어야하며...]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7공수대원 면담 기록에 보면, 1980년 초반부터 이전보다 충정훈련 시간이 많아졌으며, 부대에서 퇴근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충정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하며, 11공수대원의 진술에 의하면,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

 

 이에 광주에 투입된 공수대원들은 시위여부와 관계없이 눈에 띄는 젊은 사람이라면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해 무조건 연행했으며, 18일 하루 7공수 33대대만 103명의 시민들을 연행, 35대대만 173명을 연행했습니다.

 

 보안사의 [충정업무 일일 주요사항]에 보면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했습니다.

 이같은 지침이 현장에 투입된 공수대원들에게 더욱 더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했습니다.

 

 

 위와 같은 정황으로 잔혹한 구타와 함께 연행되어 숨진, 광주에서의 첫 희생자 고 김경철님의 사연을 다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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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첫 희생자는 시위대도 학생도 아니었다. 장애인 김경철이었다. 들을 수도 없고 말도 잘하지 못하는 그의 죽음은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내려왔다는 계엄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5월18일, 금남로에서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공수부대원들의 눈에 띄었다. 그들은 무조건 달려들어 몽둥이를 내리쳤다. 친구들은 도망쳤지만 경철은 들리지 않은 탓에 낌새를 몰랐고 공수부대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가지고 다니던 신분증을 보여주며 자신은 청각장애인이라고 해도 돌아오는 것은 매뿐이었다. 그는 나동그라지면서도 빌었다. 그들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했다. 애원하며 맞았다. 대답하지 않는다고 때리고, 벙어리 흉내를 내며 장난한다고 후려치고, 번호를 붙이지 않는다고 군홧발로 짓이겼다. 처절한 광경이었다.


 광주지방검찰청과 군 당국이 합동으로 작성한 김경철 사망자 검시서에는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놔안상 검부열사, 우측 상지전박부 타방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랬다.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지고, 팔과 어깨가 부서졌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졌다.


 어머니가 상무대 영안실에서 경철을 찾은 후 수의를 마련해 다시 갔을 때, 그녀가 들어선 것도 모르고 군인들은 시신을 씻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복도 한 쪽에서 시신을 두고 호스로 물을 뿌려가며 긴 손잡이가 달린 거친 수세미로 피투성이의 시신을 벅벅 문지르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더니 그 주검마저 함부로 다루는 것이었다. 도대체 심장이 얼마나 강하기에 그런 것일까.


 옷을 입히려고 시신을 덮고 있는 흰 천을 걷었을 때 어머니는 경악했다. 비로소 아들의 몸이 얼마나 처참히 찢기고 깨져 있는 지 알게 된 것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멀쩡한 곳이 없었다. 군홧발에 밟혀 발가락마저 으깨져 있었다.


 차라리 총에라도 맞았으면 고통의 시간이 덜했을 텐데, 죽는 순간까지 매를 맞았을 것을 생각하니 아들이 더욱 애처로웠다.


 국립 5·18묘지에 안장하는 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보며 어머니는 비에 젖는 아들이 안쓰러워 비닐을 가져다 덮어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는 아들을 당신의 품에라도 안아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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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4살 때 바위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쳐 사지가 마비되면서 3개월이나 병원생활을 하였다. 농아학교에서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과정을 독학으로 끝낸 그는 서울에 있는 계명양화점에서 착실하게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80년에는 광주에 내려와 국제양화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농아처녀와 결혼해 80년 1월에 혜정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5월 18일 그날도 온 가족이 모였다.  첫딸 혜정이 백일을 지낸지 스무날이 된 날이다. 김경철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처남이 영암에 간다 해서 버스터미널에 배웅을 나간 후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날 오후 금남로 제일극장 들어가는 골목에서 공수부대에게 뒤통수를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농아신분증을 보여주고 악쓰며 몸부림치는 경철이를 몽둥이로 마구 두들겨 패는 것을 친구들은 손을 쓰지 못하고 숨어서 지켜봐야만 했다고 한다.


 그는 말못한 것이 죄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쪽 팔과 왼쪽 어깨가 부서졌으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죽었다. 온 몸이 두부처럼 으깨진 것이다. “차라리 총에 맞아 죽었으면 편히라도 갈 것인데, 온 몸이 터질 때 꺼정 맞아 죽다니, 불쌍한 내 새끼 듣도 못하고 말도 못헌 것도 불쌍한디 맞아 죽다니…….”


 어머니 임금단씨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우리들 가슴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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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19일 03:00에 사망했다."라고 찍고서도 난독증이 있으셨던가요?  19일은 18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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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시위와 아무관련이 없었던 고 김경철님의 사인은, 위와 같이 18일 공수의 잔혹한 구타로 이미 빈사 상태로 트럭에 실려 연행되셨으며, 19일 새벽이라 하나 그날 하루의 연장선 상에 숨을 거두셨기에, 공식적으로도 18일의 희생자로 간주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약 몇일 후 숨을 거두셨다면 사정이 달랐겠지요.

 

 또한, 님 주장대로 19일 사망자로 간주한다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이미 당시 투입된 공수의 잔혹성은 충분히 입증되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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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돌로 찍었으니 의학적으로 사흘 후 죽었을 거라고 주장하셨는데"라고 반론하셨는데, 저는 여러 시민군과 기자들의 증언을 그대로 인용하여 시위대가 공수부대원을 돌로 쳐 죽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래에도 조선일보 서청원 기자가 5월 19일 송고한 기사가 캡쳐되어 있습니다.

 

<캡춰화면>

 

 시위대 경험과 시위대 관점으로는 시위대가 공수부대원 머리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시위대는 그렇게 알고 있었으며, 시민군들이 그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할 때 의학적 사망시간과 날자가 다릅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모릅니다.  단지, 5월 20일 정관철 중사의 죽음에 이어 21일부터 군인들이 또 죽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를 죽였다는 시민군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의 의학적 사망 시간은 5월 22일경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광주천변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것은 시민군 관점이고, 저는 관전자들의 이해를 위해 그가 현장 즉사한 것은 아니라는 첨언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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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당시의 공수대원들에게 내려진 작전지침은, 위에서 밝혀드린 바와 같이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였습니다.

 

 위 돌에 찍혔다는 대원 또한 끈질기게 1사람을 추격하다 보니, 그만 동료대원들로 부터 홀로 멀리 떨어져 고립이 되었겠지요.

 쫒기던 사람도 이런 상황이면 반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와 싸워서 이겼을때, 전라도사투리로는 실제로 죽지 않았어도 [디지게 패부렀다.] 또는 [죽여부렀다.]고 표현합니다.

 그 말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죽은 사람이 엄청 많을 것입니다.

 

 님이 제시한 조선일보 서청원 기자의 구술 또한 소문을 들었다는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소문을 곧이 곧대로 믿자면 당시 광주시민이 벌써 수백명이 죽었다는 소문도 있지 않던가요?


 그날 19일까지 시위여부와 관계없이 단지 공수의 눈에 띈 젊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학생.시민 도합 연행자만 405명이 연행되었는데, 그들이 모두 무차별 구타를 당하면서 연행되었으며, 김경철님과 같은 사망자 뿐 아니라, 이민오님과 같은 중상자만도 다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을 님과 같은 방식으로, 죽었는지 안죽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중상자들을 모두 사망자로 추정해버린다면, 그날의 사인으로 죽은 분들이 어디 한두분이겠습니까?

 

 어쨌건 님이 아무리 우기셔도 정작 군에서는 그날의 사망자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시민 / 군경의 일자별 사망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시민 사망자 집계는 5.18 유족회, 군 사망자 집계는 보안사의 [순직일자 및 장소] 자료에 따른 것입니다.

 

18일 시민 1


19일 시민 3


20일 시민 13 / 군 1 / 경 4


21일 시민 60 / 군 3


22일 시민 17 / 군 2


23일 시민 20 / 군 1


24일 시민 10 / 군 13(군 지휘체계 혼선으로 계엄군 서로간의 2차례의 오인사격)


25일 X


26일 X


27일 시민 23 / 군 2


28일 군 1


사망날짜 미상 시민 8


기타 시민 10

 

 또한, 보안사가 1989년 국회청문회에 제출한 [검거 및 훈방인원 통계]에 의하면, 18일부터 항쟁이 종료되고 나서도 6월 27일까지, 총 2699명의 시민들이 연행되었고, 이중 2.144명이 풀려나셨으며, 555명의 연행자가 잔류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들 거의가 구타를 동반하여 강제 연행되셨기에 거의 모두 중.경상을 입은 분들로 볼 수 있습니다. 이중 님의 방식을 적용하여 사망을 추정할 수 있는 분들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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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21일에만 52명의 총상사망자를 기록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첫번째 사망원인은 그날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하여 발생한 것입니다.  두번째 사망원인은 총성이 울렸을 때 도청광장에서 시민들이 일시에 한꺼번에 몰려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밟혔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사망원인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였습니다.  네번째 원인은 더 이상 피할 곳 없이 사방으로 포위되어 있는 군인들을 향하여 시민군이 장갑차와 버스 등을 타고 돌진했기 때문입니다.  간밤에도 순경 4명이 버스를 피하지 못하다가 어떻게 깔려죽었는지 본 그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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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확실하지 않은 것을 장담하시는 것은 님의 습관이시군요. 하긴 거짓말도 그정도로 자신있게 치셔야 사람들도 속아 넘어 가겠지요.

 

 첫번째. 교도소 앞 교전에서 많이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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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 20여 명의 시위대들이 트럭에 분승, 총기를 휴대하고 광주교도소를 습격하려다 이중 6명이 현장에서 숨진 것으로 밝혀짐. (월간조선, 1985. 7)

 

19:20

 

- 3여단 교도소에서 바리케이드 작업 도중 구난차 1대, 트럭 2대, APC 1대에 분승한 폭도들, 기관총 난사. 민간인 2명 사망. 아군 피해 없음. (특전사 전투상보)

 

19:30

 

- 무장폭도 교도소 기습, 장갑차 등 차량 9대로 와서 총격. 수비병력 교전 끝에 격퇴. 군인 4명 부상, 차량 1/4 1대, 1/2 5대, 장갑차 1대, 1/2 소방차 1대, M1 3정, 실탄 112발, 카빈 28정, 탄창 4개, LMG 실탄 39발, 사살 1명, 생포 1명, 부상 8명. (전교사 작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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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교도소 앞 교전으로 사망자가 나왔다는 기록은 이게 답니다.

 월간조선, 특전사, 전교사 각자가 주장하는 사망인원을 각각 다른 사망자로 간주하고 합산해보아도 9명이군요.

 

 두번째. 밟혀죽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총기 사망자 이야기하고 있지 밟혀죽은 사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요?

 

 세번째. 시민군 총기오발사고다? 시민군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람이 얼마나 있던가요?

 오발사고로는 어지간해서 사람 죽기가 쉽지 않습니다. 죽이려 마음먹고 제대로 쏘아야 죽지요.

 

 네번째. 차량사고다? 지금 우리가 총기 사망자 이야기하고 있지 차에 치어죽은 사람 이야기하고 있는게 아니지요?

 

 

 21일만 시위대 사망자 60명 중 총기 사망자만 52명입니다. 거의 대부분 도청 앞 집단발포를 비롯한 계엄군의 직접 사격에 의한 것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님과 같은 분들이 주장하는 소설이 하나 또 있지요. 시민군이 광주교도소의 죄수들을 풀어주려고 습격했다는 소설 말이지요.

 

 님 광주교도소가 어디인지 모르시지요?

 

 광주교도소는 광주외곽의 담양과 남부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습니다.

 전남대 앞에 주둔 중이던 3공수가 집단발포 이후 외곽봉쇄 명령을 하달받고 철수한 곳이 바로 이곳 광주교도소입니다.

 

 평소와 같이 광주에서 창평이나 담양, 곡성, 순천 등지로 출입하던 무고한 양민들이, 출입봉쇄를 명령받은 공수에 의해 무고하게 살해되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비단 광주교도소 사건 뿐만 아니라,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인 주남마을에서도 저 유명한 계엄군의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녹동마을 주민 총격 사건 등, 그렇게 광주시 외곽봉쇄를 명령받은 계엄군에 의해 무고한 양민들이 많이 살해되었습니다.


 또 군 지휘체계 혼선으로 계엄군 공수와 20사단 병력간의 오인사격 사건으로 계엄군 사망자 총 27명 중 13명이 이러한 계엄군끼리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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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또한, 5.18 기념재단에 문의해보니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라는 조직은 실체가 없는 유령조직이며"라고 하신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객관적인 사실에 공감할 때 보다 가깝게 진실로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더구나, 복면부대의 정체에 대하여 다음 기회에 더욱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보시겠다니 무척 기대됩니다.  이데아님의 다음 반론이 무척 기대되면서 오늘 제가 먼저 복면부대의 정체에 조금 파고들어 보겠습니다.

 

 복면부대의 정체는 대자보 작성자의 정체와 맞물려 있습니다.  복면부대의 문제는 우리가 그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의 문제 역시 우리가 그 작성자들의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저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님도 모릅니다. 

그래서 님이 마침내 "또한, 5.18 기념재단에 문의해보니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라는 조직은 실체가 없는 유령조직이며..."라고 하신 것입니다.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작성자의 정체에 관해 우리는 단지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상물인 5.18성명서들 및 시민군 증언과 탈북군인들의 증언에 의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데아님에 따르면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07.html 에 있는 성명서는 이제 5.18 기념재단에서 흑색선전 삐라로 간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5월 16일 정동년이 낭독한 또 하나의 흑색선전 삐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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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글쎄 저는 처음부터 아무리 봐도 흑색선전물이라고 누누히 말씀드렸잖습니까?

 상무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것은 내부협조를 받는 프락치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요.

 

 복면부대의 정체에 대해 깊이 케다가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합니다만...

 

 일단은 다음으로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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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1950냔 5월 16일 도청광장에서 5·16화형식이 거행되고, 전남대 공대 4년 정동년이 "결전에 임하는 우리의 결의"라는 성명서를 낭독했습니다.  5월 15일 작성되어 5월 16일 정동년이 낭독한 성명문 전문이 여기 있습니다: "결전에 임하는 우리의 결의"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1126.html .

 

 사실 이때가 학생들이 전두환이란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이고, 국민은 6월에 비로서 전두환이란 이름을 듣게 됩니다.  도대체 "민중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우리의 뜨거운 피를 이 산하에 뿌릴 것을 분명히 밝혀두면서"라는 문구가 어떻게 평화시위 성명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요?  이 말은 유혈투쟁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과 총무 양강섭은 유혈투쟁을 반대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 유혈투쟁 선언문의 작성 주체였을리 만무합니다.  전남대학교총학생회는 이 성명서 작성의 주체가 아니었다는 근거를 아래 명시하겠습니다.  물론 정동년이 작성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낭독하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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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글쎄요. 이미 4.19 혁명을 거친 시대인데, 국민들이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뭐! 전사모인 님 임의의 해석이야 내가 굳이 따지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각설하고 전문을 다 읽어봐도 제가 보기에는 흑색선전물과는 확실히 다른, 그저 전형적인 운동권의 대자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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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광주사태 성명서들에는 짝이 있습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07.html 성명서를 프락치가 작성했으며, 그 프락치가 보안대였다는 주장을 님은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그 경우 "결전에 임하는 우리의 결의"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1126.html 성명서를 5월 16일 정동년이 낭독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실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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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글쎄요. 전혀 봉착하지 않는군요.

 

 한국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전체적인 느낌이 그런대로 격조있는 운동권 대자보와, 과격하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담은 흑색선전 삐라는 확실히 다르네요.


 어떻게든 엮어보시려 애쓰시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운동권 출신도 아니고 데모 한번 해본 적도 없는지라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삐라가 대자보의 몇대목을 인용해서 포장했을 수는 있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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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먼저 정동년이 5·16화형식 직후 낭독한 성명서는 전남대생들이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서 아래 단락을 인용합니다.

 

<「이원적 집정부제」 「중대선거구제」의 구상이 바로 그것으로 유신잔당의 주축인 군부를 정치권에서 독립시킨 후,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하여 국회에서 단일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정당의 난립으로 내각이 불안정하게 되면 독립된 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형태의 “이원적 집정부제”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1980년 봄에 이원적 집정부제라는 것은 없었어요.  그 실체가 없는 유언비어였습니다.  김대중이 퍼뜨린 유언비어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남대 학생회 성명서에서 그런 유언비어 용어가 등장하는가요?  이원적 집정부제라는 것이 있었어야 그에 대한 항쟁 이유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었어요.  그것은 재작년의 광우 유언비어보다도 훨씬 더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였습니다.  1980년 봄 운동권 머리를 세뇌시킨 유언비어였으나, 전혀 이원적 집정부제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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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뭐! 정치적인 문제까지 깊게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군요.

 

 님이야 전사모시니 전두환을 옹호하시겠으나, 분명한 것은 당시 5.17 군사쿠데타가 없었다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의 인물들 중에 새 대통령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되었으리라 봅니다.
 서울의 봄 시기 전국의 학생들이 성명서를 발표하며 공통적으로 요구했던 것이 바로 민주정부 수립이었지요. 신군부의 5.17군사쿠데타가 없었다면 우리 역사에서 민주화가 훨씬 앞당겨 졌으리라 봅니다.

 

 아니, 차라리 10.26 사건이 없었다면 유신은 계속되었더라도, 12.12니 5.17이니 하는 그런 불경스러운 사건들도 없었겠지요.

 결국 그 여파로 전두환이 집권할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량한 광주시민들만 무고하게 학살을 당하는 비극이 초래되었으니...


 이런말도 있지요. 10.26이 없었다면 광주가 아니라 부산이었다고...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전사모인 님과 더 논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딴지 사절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단지 제가 광주사람이기에, 님과 같은 분들이 선량한 내 이웃들을 폭도로 몰고 빨갱이로 모함하는 것이 너무나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일 뿐, 애초에 정치에도 별 관심이 없거니와, 운동권도 아니고, 데모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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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광우사태 때 광우 유언비어가 무엇에 필요했나요?  그건 이명박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시위선동용이었습니다.  이원적 집정부제 유언비어도 최규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시위선동용이었습니다.  시위 선동 명분을 위해 그런 유언비어들을 조작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언비어의 목적은 유혈폭동 선동이었습니다.  이원적 집정부제라는 것이 그 실체가 없는 유언비어였을진대 정동년이 낭독한 성명서 역시 흑색선전삐라에 불과했습니다.  정동년이 낭독한 성명서는 "결전에 임하는 우리의 결의"로 시작하여 "민중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우리의 뜨거운 피를 이 산하에 뿌릴 것을 분명히 밝혀두면서"라는 말로 끝납니다.  그런 극단적인 표현이 사용된 성명서가 낭독된지 사흘 만에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07.html 대자보가 등장하였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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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글쎄 님은 뭐든지 편하실데로 속단해버리시는데요.

 이야기가 자꾸 엄한 곳으로 새는 것 같습니다만, 길게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촛불집회에 참여해보지는 않았으나, 심정적으로는 지지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촛불시민들은 무려 1달 동안이나 시종일관 비폭력으로 일관하며 정부의 성의있는 응답을 원했었습니다.

 국민들의 요구는 단지 검역주권을 지켜달라,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는 것이었는데, 끝내 마지막까지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물론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시늉은 했지만...

 

 그러나, 1달 후 마스크 쓰고 쇠파이프 들고 나타나 난동을 피운 수상한 자들 때문에 촛불집회의 의의가 훼손되버렸고, 국민들도 결국 모두 등을 돌려 버렸지요. 저도 그랬고요.

 

 어떤 시위에서든 순수한 의의를 훼손하는 불순한 자들이 개입하여, 의의를 훼손시키고 국민들의 등을 돌리게 만드는 역활을 하는 자들이 있지요. 그것이 빨갱이든 프락치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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