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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에 대한 끝장토론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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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일 작성일10-01-25 14:45 조회2,9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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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님이 제시한 반론글을 링크 거신 것까지 모두 다 꼼꼼히 읽어보고 나서야 반론글을 씁니다.

 

 그러나, 님의 계속되는 반론글들을 보면 제 글은 거의 읽어보지 않으신채, 섣불리 님의 각본에 맞춰진 반론에만 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어 짜증이 마구 밀려옵니다.

 

 이 때문에 한소리 또 해야하고 한소리 또 해야하는 것이 보통 짜증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아래에 반론하신 글도 보면 지난 끝장토론 14.16을 꼼꼼히 읽어보셨다면 절대 다시는 하실 수 없는 반론들을 또다시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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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고 김경철님은 18일 금남로에서 공수에 끌려가신게 맞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님의 픽션 소설 들통이 나는군요.  어디로 끌려가셨습니까?  병원으로 끌려가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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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뭐가 들통납니까?
 이미 지난 끝장토론 14에서 모두 설명한 부분입니다.

 

 지난 끝장토론 14의 내용을 그대로 다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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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안사 505보안부대의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및 광주지검 [검시조서]에 따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자료를 옮깁니다.

 

 <5.18. 금남로에서 희생당한 김경철씨의 사례는 공수부대의 과격진압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김경철씨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일 03:00에 사망했다. 검찰 검시조서에는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등이 사인이며, 사망진단서에는 후두부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이 직접사인이었다. 그의 시신은 군 당국에 의해 광주통합병원 영안실로 옮긴 후 상무대 내 101사격장에 매장됐다가 가족들에 의해 망월동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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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안사 505보안부대]의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및 [광주지검]의 [검시조서]를 바탕으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를 토시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겨드렸던 것입니다.

 

 이를 보면 김경철님이 18일 금남로에서 공수의 구타와 함께 연행되었는데, 만약 생명이 위독하지 않았다면 다른 연행자들처럼 곧바로 상무대로 끌려갔겠지만, 생명이 위독하자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고, 19일 새벽 3시에 숨을 거두었으며, 이 시신을 군이 광주국군통합병원 영안실로 옮긴 후, 다시 군이 상무대 101사격장으로 옮겨 매장했다가, 유족들이 다시 시신을 거두어 망월동에 안장했다는 사실을, 내가 아닌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히고 있습니다.

 

 님이 조금만이라도 내 반론글을 성심껏 읽어보셨다면 다시는 할 수 없는 주장을, 님은 계속 픽션이니 뭐니 운운하며 우기고 계십니다. 이러니 제가 짜증이 안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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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다만 하루의 연장선 상에 있는 다음날 19일 새벽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이 주장의 문제는 그의 어머니의 증언과 너무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19일 오후 8시에 입원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여기 인용하면, <"19일 밤 8시에 들어와 주사 한 대 맞지 못하고 숨이 끊겼소" 하며 가르쳐 주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3315.html ).>  어머니 임금단씨의 이 증언에 의거 김경철군 5.18민주화운동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아래의 5.18재단 자료는 김경철군이 5월 19일 오후 사망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제작된 것이 분명한가요?  여하간, 만약 이데아님 주장이 옳으려면 그의 어머니 임금단씨는 거짓말을, 허위증언을 하신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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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임금단님의 증언록을 보면, 아들이 처남을 배웅하러 나간 뒤 다음날 19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19일 아침 일찍 상무대로 찾으러 나섰다가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집에 다시 돌아왔는데, 적십자 병원에 이름이 다른 농아가 입원해 있다는 연락을 받고 11시쯤(오전인지 오후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군요.)에 가보니, 다시 영안실에 가보라고해서 가봐도 없었고, 누군가가 와서 '19일밤 8시에 들어와 주사 한대 맞지 못하고 숨이 끊겼소'라고 가르쳐 주었는데, 병원에서 어딘가 연락하더니 군에서 국군통합병원으로 실어갔다고 전해주고는 피해버렸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즉, 임금단님이 적십자병원을 찾은 시각이 19일 11시(오전인지 오후인지는 모르나)인데, 누군가가 와서 '19일밤 8시에 들어와서 죽었다'고 전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임금단님이 적십자병원을 찾은 날짜가 19일 오전 11시라면 애초에 19일밤 8시라는 말은 어불성설이고, 오후 11시라면 아까 8시에 들어왔다고 말하지 굳이 3시간 전을 이야기 하는데 19일밤 8시에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임금단님이 전해들은 소식이 틀렸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18일 8시라고 전한 것을 19일 8시로 잘못 들으셨거나, 단지 증언록상에 틀리게 기록하신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보안사 기록과 광주지검 기록에 의하면 김경철님은 18일 저녁에 적십자병원에 들어와 19일 새벽 3시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처럼 님이야 어떻게든 증언록에서라도 꼬투리를 잡으려 하시니 문제가 되는 부분이지, 이미 수많은 공식 자료들이 인정하고 있는 사실에 따르셨다면, 증언록상에 서술된 사소한 오류는 곧바로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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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첨부한 [한겨레 2007-05-18 10:09] 기사대로라면 김경철군은 5월 18일 점심식사후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한겨레 기자는 공수부대는 5월 18일 오후에야 충정작전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오보한 것은 차지하고, 그 기사는 김경철군이 5월 19일 저녁 8시에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고 증언하는 어머니 임금단씨를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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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여기서 또 님이 제 반론글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선봉인 7공수 33대대 35대대가 18일 새벽 1시경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각 대학 및 방송국들 점령을 시작으로, 18일 오전 전남대 앞 충돌은 물론, 온종일 시위현장 곳곳에 투입되었다는 매우 기초적인 사실관계를, 님이 이와 같이 무지한 주장들을 함에 따라 명확히 증명해 드리기 위해, 지난 끝장토론 16에서 부득이 18일 상황일지 전체를 첨부하여 제시해 드렸는데도, 님은 여전히 공수가 18일 오후에야 투입되었다는 매우 무지한 주장을 여전히 하고 계십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끝장토론 16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군기록 뿐만 아니라 각종 자료들이 18일 온종일 시위현장 곳곳에 어떻게 투입되었는지를 매우 소상히 이미 밝혀드렸습니다.

 

 그리고, 임금단님의 증언록에 관한 것은 바로 윗 반론에서 이미 진위를 확인하셨으리라 보고 재설명은 생략하고요, 또 한가지 자꾸 김경철군 김경철군 하시는데, 고 김경철님은 1952년생으로 님이 동문동기라 주장하신 박근혜 의원과 동갑이십니다.
 살아계신다면 님과 얼추 비슷한 연배신데, 마치 한참 아랫사람이나 되는 듯이 군군 하시는군요.
 결례라고 생각치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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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만약 한겨레 기사대로 김경철이 병원으로 곧장 후송되었다면 그것은 그가 시위대에게 폭행당한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합니다.  그가 당한 사망사건과 군경과의 관계는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있도록 군경이 협력하여 도왔다는 것, 그리고 보호자 없이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던 그의 시신을 적십자병원은 유가족을 찾지 않고 광주통합병원에 떠맡겼다는 것뿐입니다.  이 경우 보호자 없는 환자에 몰인정한 적십자병원과 달리 광주통합병원은 선한 일을 한 것입니다.  공수부대에 억울한 누명을 씌워야 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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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매우 기초적인 사실마저도 계속 부정하며 이어가는 님의 소설들에 짜증이 마구 밀려옵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김경철님의 생명이 위독하지 않았다면 군은 적십자병원이 아니라 상무대로 끌고 갔을 것입니다.

 

 아래 5.18 연구소가 [월간지 관련기사]라고 명시한 내용 중 일부를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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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철이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나왔어요. 시내에는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우리는 여기 저기 돌아다녔지요 오후 3시나 4시쯤 되었어요 제일 극장 들어가는 골목, 그 앞에 큰 길이 있지요? 화니백화점도 있고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군인들이 쫓아오면 도망가고, 그때 나와 경찰이 또 황종호라는 친구가 같이 있었어요, 공수부대가 달려들었어요 경철이가 뒤통수를 맞았어요 우리는 재빨리 도망갔어요 그런데 경철이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어요."

 

 목포에 살고 있는 박인갑씨(35). 그도 역시 농아이다. 그는 김씨가 살해당했던 현장에 있었다. 그날의 참상을 '손으로 말하는'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수화하는 손짓도 점점 격렬해진다.

 

 통역하는 이경례씨(32) 목소리도 차쯤 끝이 벌려 왔다.

 

 "몽둥이가 순경들 차고 다니는 것이 아닌데요 훨씬 크고 넓적해요 그걸로 경철이를 마구 두들겼어요 경철이가 일어나서 농아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악을 썼어요."

 

 그 당시 김경철씨는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 회' 감찰 부장이었다. 그는 저고리 윗 주머니에 항상 그 신분증을 갖고 다녔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어요 양어깨며 등이며 머리를 내리치고 쓰러지면 발로 밟았어요 경철이가 의식을 잃은 것 같았어요 피는 흘리지 않았는데 군인들이 경철이를 앞뒤에서 들고 군트럭에다 획 던져 실었어요 트럭에는 다치거나 의식을 잃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마구 실려 있었어요. 트럭은 광주 천 쪽으로 사라져 가버 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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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가 어느 월간지에 실린 내용인지는 명시되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친구의 증언을 취재한 기사입니다.

 

 피곤해서 더이상의 설명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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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분명 김경철군은 보호자 없이 입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사건 당시 동행한 친구들이 있었다는 5.18측 주장과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지도 않았고, 그의 어머니와 부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다는 반증이 되니까요.  누가 김경철군을 적십자병원으로 데려간 것인가요?  지금 우리는 누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는지조차 모르는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공수부대원들에게 누명을 씌우는가요?  공수부대가 그를 때렸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없는 주장에 불과합니다.  5.18측 말이 계속 바뀌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쪽 주장은 객관적 사실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평상시에도 광주에서 폭력범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조폭 혹은 시위대가 그를 때린 것이었을 가능성 또한 열어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5.18측 말이 계속 바뀌고 있다는 것은 5.18측에서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김경철군의 사망원인에 대한 5.18측 주장은 거짓말로 뒤덤벅이 되어 있습니다.  목격자가 누구이며, 누가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까? 시위대인가요?  군인들인가요?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를 때는 이 사실관계부터 확인하는 것이 진상을 밝히는 순서일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 또한 소중한 것이기에 우리는 무엇이 객관적인 사실인지를 먼저 밝히고 말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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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와우~ 밀려오는 짜증에 열이 확 오르는군요.

 동행한 친구들도 농아였음을 또 어떤 전후사정인지를 위에 이미 제시하였으므로 재설명은 생략합니다.

 

 동행한 친구 있었고, 군인들이 트럭에 실어 끌고 가버렸으니 병원에 후송할 수 없었고, 친구들도 농아였으니 그의 어머니나 부인에게 곧바로 알려줄 수 없었고, 적십자병원에 데려간 것은 다름아닌 생명이 위태롭도록 마구 구타한 군인들이 막상 죽을 것 같으니까 상무대로 끌고가지 않고 뒤늦게 병원에 후송한 것이었고, 5.18측은 아무 말도 바꾼 적이 없고, 님은 이처럼 기초적인 사실마저도 극구 부정하며 자의적인 소설들만을 주구장창 읇조리고 있으며...

 

 결정타로 내가 정말로 님을 경멸하는 것은 [그렇다면, 더욱이 평상시에도 광주에서 폭력범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조폭 혹은 시위대가 그를 때린 것이었을 가능성 또한 열어두어야 합니다.]라는 매우 옹졸하고 편협하며 무지에 기반한 사실날조적 결론서술입니다.

 

 평상시에도 광주에서 폭력범죄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님이 얼마나 옹졸하고 편협한 인간인지를 새삼 분명히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전국 곳곳에서 수 많은 범죄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님과 같은 분들은 유독 전라도에서 일어난 범죄만을 사소한 것까지 이슈화하고 기사화시켜 마치 전라도가 범죄의 소굴인양 포장하려듭니다.

 님과 같은 분의 주장에 의하면 나와 같은 광주토박이는 그동안 광주에 살면서 수없이 폭력사건을 당했어야 합니다만, 나는 이날 이때껏 광주에만 살았음에도 학창시절에 또래 애들하고 주먹질 좀 해본 것 빼고는, 성인이 되어서 딱히 폭력사건을 당해보지도 목격해보지도 않았습니다.

 광주시민들을 마치 타지역 사람들과는 다른 인종인듯이 취급하는 님의 옹졸하고 편협하고 무지한 시각이 이런 곳에서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또한, 김경철님의 사연은 수없는 증거자료들이 증명하고 있음에도, 님은 어처구니 없다 못해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조폭 혹은 시위대가 그를 때린 것이었을 가능성 또한 열어두어야 합니다.]라는 궤변까지 주장합니다.
 정말이지 님과 같이 몰지각한 분을 상대하고 앉아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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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그럼 여기서 이데아님의 흑색선전물 감별론에 관한 다음 주제로 넘어갑니다.

 이데아님이 조선대학교 민주투쟁 위원회가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 살륙작전" 대자보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11.html 는 흑색선전물이 절대로 아닙니다."라고 감별하셨습니다.  그런데, 님이 저에게 끝장토론을 제안하신 동기가 "2.000 명 사망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님은 5.18측은 "2.000 명 사망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하시며, 저를 공격하신 것이 이 토론의 발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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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제가 님에게 끝장토론을 제안한 동기는 님의 지난 7년간의 역사날조행위 전체에 대한 것입니다.

 

 첫 반론글의 첫대목에서 님이 [5.18의 사기꾼들이 5000명 학살설을 주장한다.]는 대목에 대한 반론으로 [그 5000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부터 보고나서 이야기하자.]로 시작한 반론글이었습니다.

 이것은 토론의 발단이 아니라, 전체 반론글의 첫 한대목일 뿐이었고, 논쟁을 계속 이어갔지요.

 

 이 대목에서 5000명 사망설은 결국, 님의 당시 반론에 의하면 북한방송이 한 것이라고 님 스스로가 밝히셨고, 2000명 사망설은 당시 군기록관의 말을 빌린 김대중이 했다고 역시 님 스스로가 밝히셨습니다.

 

 1989년 국회청문회를 대비해 보안사가 작성한 [검거 및 훈방인원] 통계를 보면, 5.18일부터 항쟁이 끝난 6월 27일까지도 총 2,699명이 지속적으로 연행되었습니다.

 때문에, 2000명 사망설은 당시 연행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으므로, 훈방여부 및 사망여부 등의 공식집계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오해였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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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님은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 대자보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17.html 에는 “학생 혁명군 상무대 무기고 무기 탈취!”라는 흑색선전이 있으므로 흑색선전물이라고 감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2.000 명 사망설" 유언비어 대자보는 흑색선전물에서 제외되어는가요?  실제로 "2.000 명 사망설" 유언비어 대자보가 있었는데, 바로 조선대학교 민주투쟁 위원회가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 살륙작전" 5월 22일자 대자보였습니다.  21일 오전 10시에 금남로에 삐라로 살포할 때는 200 명 사망설을 주장하더니 하루만에 "2.000 명 사망설"로 뻥튀기기 되었습니다.  자, 사망자 수 뻥튀기기는 흑색선전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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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당시는 끌려간 사람도, 중.경상을 입은 사람도, 죽은 사람도 많은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이고, 이에 사망자가 몇명인지에 대한 패닉상태에서 오는 오해는 있을 수 있어도, 계엄군의 본진인 상무대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광주시민들이라면 상무대가 어떤 곳인지 다 아는데, 그 상무대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를 하는 그 대자보는 명백한 흑색선전물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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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운동권 대자보는 운동권 대자보고, 흑색선전은 흑색선전입니다.

 운동권 대자보는 비폭력 결사를 주장하지만, 흑색선전은 폭력 결사를 주장합니다.
 이처럼 물과 기름과 같이 서로 전혀 어울리지가 않습니다.>라는 감별론을 제시하셨습니다.

 

 자, 여기 5.18 단체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 하는 "고등학생 여러분" 대자보가 있습니다.

 

<고등학생 여러분이라는 제목의 대자보>

 

 이 대자보 전문은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72.html 에서 보실 수 있구요.  저는 우리가 그 작성자가 누군지 모를 때는 흑색선전물이라고 말하였고, 님은 "흑색선전은 폭력 결사를 주장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님의 말도 제 말도 모두 맞는 것이 아닐까요?

 

 위의 이 대자보 명의는 "고교생 일동"이지만, 고교생이 작성한 대자보가 아니었습니다.  이 대자보에서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는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거져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피를 마시고 사는 흡혈귀와 같아서 숭고한 피의 댓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선혈을 뿌린 학생 시민들의 진정한 뜻을 깨닫고 참다운 삶의 가치만을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여 조국의 민주화가 이룩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합시다.> 등의 표현들은 고교생의 표현이 아닙니다.  고교생은 이런 유혈폭동 결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 님의 흑색선전물 감별론에 의거할 때 위의 대자보는 흑색선전물임을 인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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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아니오! 절대로 흑색선전물이 아닙니다.

 

 님은 [광주학생항일독립운동]과 [3.1독립만세운동], [마산 3.15의거], [4.19혁명]을 누가 주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중.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야 철이 없습니다만, 그시절의 고등학생들은 요즘의 아이들과 그 면모가 달랐습니다.
 아니, 지난 촛불집회를 보면 그 시작이 중.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시작하자 어른들도 두고 볼 수 없어 동참하게 되었지요.
 뭐, 님과 같은 분들이야 또 배후세력 운운하시겠습니다만, 각설하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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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투사회보」 제6호 대자보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25.html 에서

"광주시민의 민주화 투쟁, 드디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다."

"광주시민은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무장을 강화한다."

"광주시민은 하나로 뭉쳐 더욱 힘을 내어 싸우자!" 등의 표현은 전민봉기를 목표로 하는 폭력 결사이지, 비폭력 결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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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그건 님 생각이고요.

 

 투사회보 6호는 5월 23일날 작성되었다고 써있군요.

 이미 수많은 시민들이 살해된 후고 시위대도 무장하여 시민군화한 시점이지요.(뭐,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 무장을 유도한 자들은 보안부대 3개조라는 강한 심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째, 계엄군이 발포하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는다.]라는 대목에서 그들의 무장이 다름아닌 정당방위를 위한 것임을 명백히 알 수 있으며, 또한 흑색선전 삐라들에서만 등장하는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라는 지렁이 허리 부러지는 소리는 눈을 씼고 찾아봐도 전혀 써있지 않군요.

 

 그러므로, 역시 이 투사회보 6호 또한 흑색선전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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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그리고 이데아님이나 저의 명의를 도용한 성명서가 흑색선전물입니다.  이데아님이 80만 광주시민 명의의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 대자보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37.html 내용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님이 정말로 광주를 사랑하신다면 5.18단체들이 이 성명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막으셔야 합니다. 제가 요 아래에 일부 캡쳐해 드리는데요.

 

<5.18 연구소 자료 캡처 화면>

 

 "헬리콥터의 기총소사로 온몸이 벌집이 되어 죽은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 "이들은 마약에 중독되어," "금남로를 지나는 사람은 무조건 찔러 죽였고," "도려낸 젖가슴을 벽에 붙이고," "잘라낸 머리를 막대기에 꽂아 들고 다녔으며," "나이어린 중·고등 학생들도 군화에 짓밟히고 총검에 찔려 죽었으며," "이 비행을 보다 못해 말리던 경찰 정보과장마저도 총검으로 찔러 죽였던 것입니다" 등의 성명들은 흑색선전입니다.

 

 19일 사망자기 이미 수천 명이었나요?  이런 표현은 어찌 된 일인가요?  "공수부대는 18일과 마찬가지로 학살을 계속했고 사상자는 수천으로 불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헬리콥터의 무차별 기총소사로 인하여 또다시 수없는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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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5월 24일자 대자보로군요. 역시 흑색선전물이 아닙니다.

 

 헬기기총 소사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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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09:00

 

- 전교사 무장헬기 지급 건의. (전교사 작전일지)

 

 

09:45

 

- 전교사 무장헬기 10대 지원 승인 접수. (전교사 작전일지)

 

 

10:00

 

- '광주시민 단결하라' 외치고, 여고생들도 태극기 들고 앞장. 주부, 꼬마들도 각목, 갈쿠리 등을 데모대에 건네주고, 도청 도경이 고립돼 군, 경은 헬기로 진압 화기 공급, 고속버스 시내에 못 들어오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13:25

 

- 헬기 이동보고

 

1. 보안요원 3명 수송
. 일시 : 용산 출발 11:02, K-57 도착 12:55
. 기종 및 대수 : UH-1H 1대

 

2. 작전지원 헬기 이동
. K-16 11:15, CAC 도착 13:10
. 기종 및 대수 : UH-1H 10대 (육본 상황일지)

 

 

14:00 월산동 로터리 헬기 기총소사

 

* "우리가 탄 차가 월산동 로터리에서 백운동 쪽으로 달리는데 도청 쪽에서 헬기가 날아왔다. 헬기에서 총을 쏘며 지나갔다. 그 총에 맞은 여학생 한 명이 가로수 아래로 픽 쓰러졌다. 나는 얼른 차에서 뛰어내려 그 학생에게로 갔다. 어깨에서 피가 흘러 헝겊으로 팔을 동여맸는데도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상처를 지혈하고 학생을 차에 태워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 (구술 : 이광영, 현사연 조사)

 

* "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이동하는 헬기에서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소리와 불빛을 내는 것을 봤다. 헬기는 지상 1백30미터 정도의 높이로 날아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동교(불로동다리) 주변을 향해 쏘았다고 들었다." (구술 : 조비오, 현사연 조사)

 

* "서석병원 담에 기대 있는데 양동 쪽에서 계림동 쪽으로 날아가는 헬기에서 총을 쏘며 지나갔다." (구술 : 김정기, 현사연 조사)

17:00 헌혈하고 나오던 여학생,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즉사

 

* "기독교병원에 피가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시민들이 헌혈한 피를 각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수거하여 기독병원에 보급했다. 우리가 탄 차가 양림동을 지날때 한 여학생이 차를 세웠다. '헌혈하러 가는 길인데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주세요' 라고 말했다. '어른들이 헌혈을 많이 하고 있으니 학생은 그냥 집으로 가라'고 해도 한사코 헌혈을 하겠다고 하자 기독교병원까지 태워다주었다. 우리는 차를 돌려 전남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병실이 부족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복도에 방치되어 있는 환자를 급히 기독교병원으로 옮겼다. 기독병원에 도착해 보니 한쪽에서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어 그쪽으로 가봤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조금전 헌혈하겠다고 조르던 그 여학생(박금희)이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 있던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 학생이 헌혈을 하고 집으로 가려고 병원 마당을 지나갈 때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고 했다." (구술 : 이광영,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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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공수들을 보고 [마약에 중독(AP통신에 의했다고)]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그만큼 공수의 폭력이 잔혹했음에서 기인한 오해인데, 이 부분도 공수가 왜 그토록 잔인한 폭력을 휘둘렀는지를 알 수 있는, 지난 끝장토론 16에서 제시한 부분을 다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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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공수는 18일 새벽 1시경 광주에 도착과 동시에 무차별한 폭력을 휘두르며 온종일 시위 곳곳에 빈번하게 투입됩니다.

 

 부마항쟁 직후 보안사가 작성한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의 내용을 보면, [초동단계에 신속 진압.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데모요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함. 군이 출동하면 최강의 위엄과 위력을 과시하여 위압감을 주어야하며...]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7공수대원 면담 기록에 보면, 1980년 초반부터 이전보다 충정훈련 시간이 많아졌으며, 부대에서 퇴근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충정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하며, 11공수대원의 진술에 의하면,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

 

 이에 광주에 투입된 공수대원들은 시위여부와 관계없이 눈에 띄는 젊은 사람이라면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해 무조건 연행했으며, 18일 하루 7공수 33대대만 103명의 시민들을 연행, 35대대만 173명을 연행했습니다.

 

 보안사의 [충정업무 일일 주요사항]에 보면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했습니다.

 

 이같은 지침이 현장에 투입된 공수대원들에게 더욱 더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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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손옥례님이 대검에 젖가슴이 찔리는 등 처참하게 살해된 것을 두고 [젖가슴을 도려내어 벽에 붙였다]고 한 것은 목격자가 패닉상태에서 말이 와전된 것이겠으나, 아래와 같은 사실이 있습니다.

 신동아가 당시 광주지검의 부검기록을 다시 고려대 황적준 교수에게 정밀 감정의뢰하여 기사화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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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소녀 젖가슴 대검에 찔려

 

 한편 대검에 의한 자창에 함께M16총알 세례를 맞고 숨진 사례도 있다. 이는 5.18당시 계엄군이 젊은 여자의 젖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소문의 진상을 밝혀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황박사는 이 사진의 사체는 너무 부패돼 있어 육안으로는 확인해 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당시 검찰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 성명: 손옥례(19살. 여)
- 사망일시 장소:1980.5.22 장소 불상
- 사인별:M16총상 및 자상
- 부위 및 사인:1. 좌 유방부 자창 2.우측 흉부, 하악골, 좌측 골반부, 대퇴부 관통 총상. 직 접 사인은 우흉부 관통 총상

 

 풀어 말하면 당시 19살이던 손양은 M16총알 세례중 한 발이 왼쪽 엉덩이쪽에서 앞으로 뚫고 지나갔으며, 또 한 발은 오른쪽 등을 뚫고 오른쪽 앞가슴으로 나갔다는 뜻이다. 이와 함께 손양의 왼쪽 젖가슴은 대검에 의한 열창 등으로 심하게 훼손됐다.

 

 계엄군이 먼저 손양의 등뒤에서 총을 쏘고 다시 왼쪽 유방을 대검으로 찔렸는지. 아니면 유방을 먼저 칼로 찌르고 총을 쏘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9살의 젊은 여성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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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라낸 머리를 막대기에 꽂아 들었다]고 하는 부분은 사실확인이 어려우나, 임신 8개월중이던 고 최미애님이 M-16총탄에 전두부를 맞아 후두부가 박살난 형태로 살해되신 것에 대해, 패닉상태의 시민들이 거의 머리가 없어지다시피한 최미애님의 시신을 보고 말이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 아닌지 추정할 수 있으며, 이 또한 신동아의 부검기사를 옮겨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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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임신부도 가리지 않은 공수부대

 

 『전남고 영어 교사와 중매 결혼한 딸은 내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 신방을 차렸다. 얼마 있지 않아 아들을 얻고 곧바로 또 임신을 해 80년 5월에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사위는 시간관념이 정확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마음먹은 일이면 항상 정확한 시간에 처리했다. 21일 아침에도 학교에 볼일이 있으니 나간다며 12시에는 들어오겠다고 말했다. 바깥은 소란스럽고 들리는 소문이 흉흉하니 미애가 남편을 마중나간 모양이었다. 미애는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는 아이였다. 미애는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아이였다. 18일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 무섭다고 느끼면서도 공수부대가 설마 배부른 자신에게까지 어떻게 하겠느냐 싶어 밖으로 나갔던 것 같다. 바로 그때 나는 시위대를 위해 며칠째 주먹밥을 만들어 제공하다 피곤해 잠깐 잠이 들어 있었다.

 

 갑자기 이웃 연탄 집 아저씨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뭔가 일이 생겼구나 싶어 맨발로 뛰어나갔다. 나중에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 애기를 들어보니 미애가 평화 시장으로 들어오는 골목 맨홀 뚜껑 위에 서서 남편을 찾고 있는데, 인근 전붓대 뒤에 서 있던 공수 부대원 한 사람이 미애에게 총을 겨누고 이어 총소리가 났다고 했다. 미애는 임신복을 입고 있어서 누구의 눈에도 잘 뛸 수밖에 없었다. 총소리와 함께 미애가 쓰러지자 사람들은 미애가 기절한 줄 알았단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 가보니 남색에 붉은 색 무늬의 임신복이 먼저눈에 들어왔다. 일으켜 세우려고 보니 머리 뒷부분이 없었다. 땅바닥에는 보리밥 같은 덩어리가 흩어져 있었다.(황적준박사는 M16 자동소총은 화력이 세 정통으로 머리를 맞을 경우 그 뒷부분을 절단 시킬수 있다고 말했다)

 

 학생 하나가 잘못하면 시체마저도 뺏길지 모르니 어서 집으로 데려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어떤 사람은 팔을 붙잡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붙잡고 거실에 데려와 미애를 뉘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애의 배가 불쑥불쑥 깊은숨을 쉬듯이 튀어나왔다. 뱃속에 있던 아기가 뛰고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살려야 한다고 발버둥을 치며 여러 군데 병원에 연락했지만 소용없었다. 사위는 1시20분경에 집에 돌아왔다.

 

「자네 마누라가 죽었네 」그 소리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23일에 장례를 치렀다』

 

 최미애씨의 검시는 23일의 장례가 있은 훨씬 후인 6월 7일 조선대 부속병원에서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최씨의 어머니인 김현녀씨는 장례를 치른 지 18일만에 검시를 해야 한다면서 시체를 다시 파라는 연락이 왔는데, 이에 불응할 경우 유언비어 유포 죄로 집어넣겠다고 협박을 당했다고 밝혔다. 당시 임신부가 죽었다고 소문나 있는데 진짜 죽었는지, 죽었으면 누구의 총에 죽었는지를 알아 유언비어를 차단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해서 최미애씨는 검시를 마친 뒤 망월동에 묻힌 것이다. 그후 김씨는 89년 국회 청문회가 열리면서 증인으로 선정돼 당시의 상황을 증언 한 바 있다.

 

 『얼마나 떨리던지 죄를 짓지 않은 내가 떨리는데 죄짓고 나온 사람들은 얼마나 떨릴까 내심 생각하고 그들의 표정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떨리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하긴 그렇게 뻔뻔스러우니 그런 만행을 저질렀겠지 생각했다. 증언을 마치고 집에 와 보니 당시 광주 시내 중학교 서무 과에 근무하던 미애 아빠가 한숨을 쉬며 얘기를 했다. 누군가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왜 청문회에 나가 그런 얘기를 했느냐며 나중에 두고보자고 협박을 하더라는 것이다. 대죄를 지었다며 참회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협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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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말리던 경찰 정보과장이란, 고 안병하 도경국장님을 말하는 것인데, 물론 당시에는 죽지 않으셨으나, 당시 공수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며 어디론가 끌려가신 것을 보고, 목격자들로서는 충분히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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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15:30

 

* "관광호텔 안의 이발관에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 종업원들과 함께 나가봤다.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데모를 하다 공수들에게 밀려 도망가고 있었다. 뒤쫓아간 공수들이 30-40명의 시민, 학생을 동구청과 관광호텔 앞으로 붙잡아왔다. 공수들은 붙잡혀온 시민, 학생의 옷을 벗게 한 후 팬티만 입힌 채 구타와 기합을 주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했다. 한국은행 부근에서 공수 2명이 여학생을 끌고 왔다.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공수들은 욕을 하며 더욱 거세게 발길질을 했다. 잠시 후 공수들이 다른 사람을 잡으러 간 사이 어떤 아저씨가 그곳에 잡혀있던 사람들을 모두 도망가게 했다. 30-40명의 시민,학생을 풀어준 사람은 도경 경비과장이라 했다. 그것을 보고 달려온 공수에 의해 그 아저씨는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터지고 동구청 뒷골목으로 끌려갔다." (구술 : 김후식,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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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안병하 도경국장님의 기록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도 나오는데, 18일 공수에게 끌려간 안병하 전남도경국장님이, 27일 체포 위주가 아닌 해산 위주의 시위진압을 하는 등의 직무유기를 했다는 구실로 합수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겪은 뒤, 자진사표를 조건으로 석방되었고, 고문 후유증으로 1988년 5공 청문회를 앞두고 돌아가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24일자 80만 광주시민 일동이 썼다는 대자보가 설명하는 모든 사건들은 일부 와전된 사건들도 없지 않으나 모두 실제 사건들을 소상히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일부 와전된 사건 언급은 위와 같이 고의적인 것은 아닐 것이고, 공포에 질려 패닉상태에 빠졌던 당시 시민들의 입을 통해 와전된 사실들이 부분적으로 섞여있으나, 거의 모든 내용이 실제의 사건들에 기반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의 그 24일까지만해도 그만큼 광주의 참상이 실제로 아비규환을 방불케 할 수 있었으므로, 충분히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패닉상태에서 본의 아니게 소문을 와전시킬 수도 있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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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지금 이 시간에도 수천만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계엄군에게 개처럼 끌려가"  당시 광주시 성인 인구가 얼마였는데 수천만 명이 끌려갔는가요?  이데아님이 "유신잔당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등의 과격한 폭력 결사 성명을 님의 명의로, 즉 광주시민의 명의로 발표하라고 동의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동의하신 일이 없다면 광주시민의 명의를 도용한 그런 흑색선전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을 반대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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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아주 사소한 한글자 한글자를 다 트집잡으시는군요.

 24일까지면 당시 공수에 끌려간 사람들이 보안사 [검거 및 훈방인원]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1205명이나 되었는데, 당시로선 정확한 통계가 없었을테니 다소의 과장도 없지 않았겠지요.

 당시 우리 국민 총수가 3천5백만이었는데, 진심으로 수천만이 끌려갔다고 썼겠습니까? [수천명의]라고 쓰려던 것을 [수천만의]라고 잘못 쓴것일 테지요.
 사소한 것까지 트집잡지 맙시다.

 

 또, [유신잔당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죽여 피로 하여 죽어간 우리 아들딸들의 한을 풀어 주소서!]
 24일이면 이미 현재 공식집계된 바로만 총 124명의 시민들이 살해된 시점입니다.

 사망자만 공식집계로 그 정도로 죽어나갔을 뿐만 아니라, 중.경상자까지 합하면 1205명에 이르는 시점인데, 그 분노가 어느정도였겠습니까?

 

 입장바꿔서 님의 부모형제나 아내나 자식이나 친구나 이웃들이 그런 꼴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라고 해도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죽여버리고 싶다고 했겠네요.

 당시 시민들의 분노는 그 정도로 거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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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광주시민으로서의 이데아님의 명의는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함" 대자보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76.html 에서도 도용되었습니다.  "18일과 19일 환각제와 술을 마신 흡혈귀 계엄군들에 의해 학생·시민이 머리가 깨지고, 팔이 잘리며, 창자가 밖으로 튀어 나오는 등 처참한 모습으로 연행되는 것을" 그런 사실이 있었나요?  이것이 19일 상황입니까?  "이때 150여명의 사망자와 700여명의 부상자들이 흘린 피는 강물이 되어 흘렀고..," "학생·시민들을 마치 사냥하듯 대검던져 꼬꾸라뜨린 후."
 "전남대 총장이 할복자결을 한 것은 미친개처럼 날뛰는 계엄군들이 시민·학생들을 살해하는 장면이 얼마나 참혹했으면 자결을 하였겠는가?"  만약 전남대 총장이 할복자결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런 허위사실 유포 성명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은 막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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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27일자 대자보로군요.

 

 환각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공수의 믿기 힘든 잔혹성에 기인한 오해일 가능성이 높겠으나, 공수가 술을 마시고 시민들을 죽인 사례는 실제로 있습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505보안부대의 [광주사태 검시참여 결과보고]와 [광주지검 검시조서]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보고한 기록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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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2.경 전교사 연병장에서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 대령 등이 목격했다고 우리 위원회 면담과정에서 증언했다. 김순현 전투발전부장에 의하면 그 부상자는 헬기로 곧바로 광주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며, 몇 시간 후 병원장에게 확인한 결과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자신에게도 대들었으며 술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우리 위원회는 김순현 전투발전부장 등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조사했다. 당시 광주국군통합병원에서 검시했던 사망자는 총 15명이었다. 검시 후 이중 1명은 가족들에게 양도됐고, 14명은 전교사 내에 있는 101사격장에 가매장됐다. 광주국군통합병원에서 검시했던 사망자들 중 자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송정교, 전재서가 있다. 송정교는 24일 송암동에서 사망했다. 전재서는 [검시참여 결과 보고]에 5.22. 21:30에 앰뷸런스로 통합병원에 도착한 후 5.23. 05:20에 사망했다고 기록됐다. 그의 사인은 우측 두부(귀 뒷부분)의 자상과 총상이 같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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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일이 님의 사사건건의 주장에 대해 증거해 주는 것이 무척이나 피곤합니다만...
 어쨌거나 당시 공수대원들은 시위대를 공격할때 머리를 공격하는 사례가 매우 많았고, 실제로 머리가 깨지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창자가 밖으로 튀어나온지까지는 모르나, 님도 잘 아는 19일 오후 최초의 계엄군 총격 피해자 김영찬님의 부상이 바로 복부 오른쪽을 관통하여 좌측 엉덩이뼈로 빠져나간 총상이었습니다.

 당시 장출혈이 너무 심했고 2미터 정도의 장을 잘라내어 생명이 위급한 상태였으며 5번 이상의 재수술 끝에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던 분입니다.

 

 전남대 총장이 할복을 했는지의 여부까지는 제가 모르겠으니 넘깁니다.

 

 다만, 27일자의 이 대자보의 내용 또한, 다소의 사실와전이 있다하더라도, 실제 공식집계로만 165명의 사망자와 2,699명의 연행자(중.경상자)들이 발생한 대참사가 벌어진 시점이기에, 그 당시의 시민들의 분노를 짐작한다면 대자보상에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그럴 만 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역시 흑색선전물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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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5월 20일 방송국들에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하여 "400여명의 시민·학생이 사망하고 1,800여명의 부상자가 났음에도 “군경 5명 사망, 시민 1명 사망”식으로 왜곡보도하는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라고 설명합니다. 20일 군경 5명 사망한 것이 사실입니다.  3공수 정관철 중사와 함평경찰서 순경 4 명 등 5명이 사망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날 400여명의 시민·학생이 사망하였다는 주장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사실대로 보도하고, 유언비어대로 보도하지 않았다고 방송국들에 불을 지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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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군경 5명 사망 시민 1명 사망은 분명 왜곡보도입니다.

 군경 5명이 사망했다면 20일까지의 집계라는 이야기인데, 20일까지 사망한 시민들은 공식집계만봐도 총 17명입니다. 또한 보안사의 [검거 및 훈방인원] 통계에 의하면 20일까지만 총 920명이 연행(중.경상)된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경 5명 사망 시민 1명 사망이라고 보도했으니 명백한 왜곡보도가 맞고 시민들이 충분히 분노할 만한 사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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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여기서 토론을 종결짓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결론을 내려야 하는데요.  님이 <그 당시의 운동권은 주사파라는 것도 없었으며,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그 누구보다도 갈망하던 열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이라고 하신 주장에 대한 한마디 반론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 당시의 운동권 주축은 자유민주주의체제 전복을 목표로 삼던 남민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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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5.18을 북괴군이 개입했다고까지 황당한 주장을 하는 님이 무슨 말을 하신다해도 곧이 듣기지 않습니다.

 남민전이건 낙지전이건 부침개건을 이야기하게 되면, 민청학련사건이니 인혁당사건이니 또 더욱 복잡한 이야기로 빠져듭니다.

 

 분명한 것은, 마산 3.15 민주의거때도, 4.19 민주혁명때도, 부마 민주항쟁때도, 5.18 광주민주화운동때도, 6월 민주항쟁때도... 님과 같은 분들은 한결같이 공산당의 개입을 주장했었고 실제로 조작간첩사건들까지 공작하셨으나, 결국 이러한 의거들로 대한민국이 공산화되기는 커녕 민주주의의 씨앗이 튼튼히 뿌리내리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님이 쓰시는 소설들은 님과 뜻을 같이하는 분들에게나 읽어주십시오.
 모든 민주화운동을 공산당의 개입으로만 해석하는 님과 같은 분들의 주장은, 저로서는 웃음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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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는 전국의 대학가 운동권에서 각종 성명들을 발표하고 대자보들을 만들었었습니다. 광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씀이지요."라고 하셨는데" 아래 캡쳐된 기사를 예로 드시는 것인가요?

 

  (선명한 글씨로 보시려면 http://study21.org/518/photo/daily/5-21bill.gif 를 새 창에서 여셔야 함).  그런데 이것이 바로 님이 옹호하시는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그 당시 전국에 유포한 성명서였는데요?  저 역시 그때 그 대자보들을 모두 읽고 있었습니다.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전해준 대로 서울대 총학생회가 대자보를 작성하여 전국에 유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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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아니오.

 

 80년 5월 16일.

 전국 59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이화여대에서 회의를 열고, [비상계엄을 5월 22일까지 해제]하고, [현 과도정부는 민주적 정부에게 연내 정권을 이양]하고, [정치일정을 5월22일까지 명백히 공개하라고 요구]한 것.

 국민연합이 [제2차 민주화 촉진 선언문]을 발표하며, [5월 7일 제1차 선언에서 요구한 사항에 대해 5월 19일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할 것]을 요구하고,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5월 22일 정오를 기해 대정부 투쟁에 돌입 할 것]을 선언한 것과 같은 것을 예로 든 것입니다.

 

 님이 제시한 것도 좋은 예이긴 하지만 그것은 5.18 광주항쟁 당시인 5월 25일에 뿌려진 대자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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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그 당시의 운동권은 주사파라는 것도 없었으며,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그 누구보다도 갈망하던 열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라고 주장하셨는데, 광주사태 당시 강경파 시민군 중 정체 파악이 가능한 자들이 바로 적화통일세력 "남민전" 잔당들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섬세하게 다루어질 문제입니다.  저는 순수한 운동권과 불순세력을 구분합니다.  남민전 소속이 아닌 운동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민전 잔당의 전민봉기 음모에 이용당했을지언정 남민전 소속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민전 잔당이 있었으며, 그들이 1979년 10.26 사태직후부터 북한군 특수부대원들과 더불어 전민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북한군은 잠수함 타고 광주에 침투하였다 / 탈북자 5.18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들(1)  / 탈북자 5.18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들(1)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25.html 에도 광주시민민주투쟁위원회 명의의 전민봉기 선동 대자보가 있는데, 광주시민민주투쟁위원회라는 괴단체가 광주사태 때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민주투쟁위원회가 본래 남민전 산하조직이었어요.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도 학생회 조직이라기보다 남민전 산하조직이었습니다.  아래 유인물의 조선대 학생들이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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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위에 말씀드렸다시피, 남민전이니 낙지전이니 하는 이야기는 님과 뜻을 같이하는 분들하고나 이야기하십시오.

 

 제가 운동권 출신이 아니라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투사회보 6호의 내용은 흑색선전에서나 등장하는 [상무대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라는 지렁이 허리부러지는 소리는 전혀 써있지 않은 멀쩡한 민주화운동 대자보내요.

 

 지난 역사에서 그런 민주화운동들을 공산화운동으로 모함해온 분들이 바로 님과 같은 분들이고, 민청학련사건이나 인혁당사건과 같은 것이 님과 같은 분들이 민주화운동을 공산화운동으로 모함 왜곡한 사건이었음이 속속 드러난 지금, 제가 더이상 이런 머리아픈 이야기들을 논하고 싶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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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그간 최선을 다하셨으며, 진지하게 토론에 임해주셨고, 반론을 제기해 주신 이데아님께 갈채를 보냅니다.  광주시민의 명예 보호가 님과 제가 공유하는 가치입니다.  님도 저도 이 토론으로 인해 생업에 어려움을 겪지만, 우리가 그 작성자들의 정체를 모르는 흑색선전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야 하는지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의 토론이 관전자들이 그 문제를 판단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지난 몇주간의 우리의 끝장토론은 유익한 토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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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예! 님께서 과연 광주시민의 명예를 보호하려하시는지는 매우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제가 이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다가 밥벌어 먹고 사는데도 오히려 방해만 되는 이 고된 일을 자처한 것은, 다름아닌 내가 광주시민이고 내 부모형제 또 내 친구 선.후배와 이웃들이 모두 광주시민들인데, 그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끊임없이 중상하고 모함하는 것을 마냥 두고볼 수 없어, 나름대로 귀한 시간 쪼개어 공부하고 부족한 필력으로나마 글을 쓰며, 광주시민의 명예를 보호하고자 노력하였음은 진심이었습니다.

 

 제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닌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는, 5.18 재단측이 현명하게 사료를 잘 선별하여 선택하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토론이 관전자들이 그 문제를 판단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지난 몇주간의 우리의 끝장토론은 유익한 토론이었습니다.]  이 말씀에는 깊이 공감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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