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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재판부를 재판한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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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4-01-31 20:29 조회1,9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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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템미래당 창당


2005년으로부터 2007년 대선 경선 당시까지의 시국은 안보부재, 이념부재의 시기였다. 옛날의 좌익활동을 극렬하게 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뉴라이트라는 조직을 전국 규모로 만들어 뭇 언론들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애국과 통일을 부르짖으며 수많은 애국 국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들은 ‘반공’을 죄악시했고,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국가사회에도 좌우익이 나란히 존재하야 한다는 극히 불순한 생각을 사회에 정착시키려 했다. 좌익도 우익처럼 국가를 사랑하는데 그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일 뿐이니, 좌익을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이 운동을 이끌고 있던 김진홍 목사는 나 역시 좋아했던 사람이었지만, 아침묵상 등 그의 설교내용과 강연내용을 보면서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캐나다의 어느 회원으로부터 김진홍 목사가 2003년 미주지역에서 “예수가 좋아요-삶의 자리에 대한 회고 및 미래 전망 제2부”라는 기독교방송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매우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자기가 “북한에 갔는데 노동당 간부가 어느 날 아침 아홉시 반에 나타나 거류민증을 수여했다고 자랑했다. “김진홍 동지, 동지는 남조선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유일한 공산주의자임을 인정합네다” 자기가 '북한거류민증 제1호'라고 자랑했다.

이 뉴라이트가 이명박 후보를 적극 지지하는 활동들을 했다. “우리는 성인을 대통령으로 뽑는 게 아니다” 이명박에 흠이 많지만 능력이 출중하니 이명박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7년 대선 직전에는 북한 스파이 대장(대남사업부) 김양건이 청와대를 방문했고, 이어서 국정원장 김만복이 김정일에게 갔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국민의 저항 없이 북한을 더 많이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김만복이 김정일에게 이렇게 보고했다는 보도까지 나올 정도로 이명박의 이념과 행동에는 불안한 요소들이 매우 많았다.

이념에 대한 불안감은 박근혜에도 이명박 못지않게 많았다. 2002년 북한을 다녀온 이후 그는 김대중의 6.15 선언을 적극 지지하는 활동을 했고, 김대중에 선물을 들고 가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사과한다'고 했고, 미북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2005년,0 미국에 건너 가 김정일은 약속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며 북한을 압박만 하지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전체가 '이념을 거론하면 표가 떨어진다'며 이념논쟁을 기피했기 때문에 사회에는 반공이념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전무했다. 참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이에 불안감을 견디지 못한 회원들은 빨리 정당을 만들어 대안 세력을 창출하자고 졸랐다.

순전히 인터넷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을 소통 도구로 하여 매일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회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이웃들에게 자기 주머니를 털어 식사자리를 마련하는 등의 방법으로 입당원서들을 확보하여 6개 광역지구당을 창당했다. 이어서 2007년 3월 27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창당대회를 가졌다. 1,000명이 정원이라는 장소에 밖의 복도까지 가득 메운 인파가 한마음 되어 감격과 감동의 눈물로 대회를 치렀다.

그 다음 날인 3월 28일에는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 서류를 제출했고, 3월 30일에는 선관위의 과장급 2명의 간부들이 손수 '중앙당등록증'을 당사로 가져왔다. 중앙선관위 과장들은 등록증을 내주면서 선관위 직원들 30명여 명이 창당대회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자기들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대한민국 창당역상 가장 훌륭하고 감동적인 창당의 역사라고 했다. 총재로 추대된 나는 총재 수락 연설을 했고, 그 일부를 발췌하는 것이 당시 위험했던 시국의 일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총재 수락 연설문 발췌

지난 4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등산로와 시내를 누비며 계몽지를 나누어주시고, 사무실에 나와 온갖 궂은일을 다해주신 독립군들이 계십니다. 시국진단을 열심히 구독하시고, 많은 회비를 내주시고, 사비를 들여가며 월간 시국진단지를 널리 보급해 오신 애국회원들도 계십니다. . .

1998년, 이 땅에는 정부가 좌익세력에 의해 점령되는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9년, 세계 각국은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앞으로 앞으로 달려갔지만, 매우 분하게도 유독 대한민국만은 이들 좌익세력에 의해 나날이 파괴돼 왔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국가를 지키려는 정당이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한나라당까지도 계절이 바뀌었으니 옷도 갈아입어야 한다며 북한 감싸기에 충성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적화통일의 벼랑 끝에서, 노심초사, 가슴 졸이던 애국의 영혼들이 갈 곳을 잃었습니다. 이 갈 곳 없는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지금 시스템미래당의 깃발을 꽂습니다. .
창당을 하려면 수백억은 있어야 하고, 창당 발기인들 중에는 이름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단돈 1억도 없었습니다. 돈 없이 창당을 한다 하니, 사람들은 저를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이름 있는 사람이 합세할 리 없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저를 비난했습니다. “한나라당을 깨려고 나왔다”, “제2의 이인제가 되려고 나왔다”, “뒤늦게 대통령 병이 단단히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 답답한 시기에 시스템미래당 마저 탄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뻔 했을까!” 저는 후회하지 않으려고
창당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붉은 완장 부대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할 때, “마지막으로
창당을 한다고 나서기나 해볼 걸”,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창당이 성공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주위의 모든 분들도 같은 생각들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기적의 날인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창당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를 비상시국에서 구해내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정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창당을 한 것입니다. 우리 당원 중에 정치에 경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순수한 애국시민들이 국가를 위해 민병으로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국민의 쿠데타요, 시민의 혁명인 것입니다.      

당원이 스스로 알아서 당비를 냅니다. “당원을 확보할 테니 돈 좀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직을 수행하는 분들은 스스로 당비를 내고 자원봉사로 일합니다. 이렇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수백억씩이나 되는 많은 자금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시스템미래당은 정경유착 없이도 운영되는 정당이 한국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청정정당'의 효시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시스템미래당의 탄생일입니다.

당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오늘이 있기까지의 뿌리를 간단히 요약해 드리고자 합니다. 2001년, 저는 안양에서의 생활을 접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 홍천 오지에 가서 차분히 여생을 정리하며 살려고 조립식 주택 하나를 지었습니다. 가족들은 이미 이사를 해서 주민등록을 옮겼고, 저만, 하던 일을 정리하기 위해, 안양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낙향 계획이 한 순간에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2002년 4월초, 3공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낸 장경순 선생께서 시국선언문을 써 달라 부탁을 해왔고, 장경순님은 저로 하여금 그 시국선언문을 향군회 세미나에 모인 700여명의 군중에게 낭독케 하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청중의 반응은 흥분의 도가니였었고, 그 폭발적인 인기를 타고 장경순님과 저는 ‘자유수호국민운동’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광고를 통해 당시 대통령인 김대중과 당시 국방장관 김동신이 좌익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대중의 좌익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여 녹음 테이프를 만들었습니다. 전국에 10만 개 정도 확산시켰습니다. 많은 분들이 테이프를 복사하여 돌렸기 때문에 더 많은 테이프가 유통됐을 것입니다. 2002년 5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라디오, TV, 일간지 등에 체력이 달릴 정도로 인터뷰들을 했고, 그래서 미국 교포사회가 흥분되었습니다. 호응이 쇄도하자 갑자기 전직 장관, 전직 국회의원 등이 나타났습니다. 스스로를 애국자로 도금하면서 끼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게 아니라, 제가 하는 일에 끼어들고, 제 직책인 본부장 자리를 내놓으라 했고, ‘여기가 지만원 띄워주는 조직이냐’, 장경순님을 선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저는 제가 만든 자유수호국민운동을 떠났습니다.  

8월16일, 저는 동아일보에 ‘좌익세력의 최후발악이 시작된다’이런 제목의 광고를 냈고, 거기에 김대중을 ‘김정일에 약점 잡힌 간첩’으로 묘사했습니다. 임동원이 도청문제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재판기록을 보면 당시 김대중과 임동원이 저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생생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들은 저를 구속시킬 명분을 찾았습니다. 광고문 중에 ‘5.18은 소수의 좌익과 북한 특수부대가 순수한 시민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다’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이를 트집 잡았습니다.  

광주검사 최성필이 안양에 경찰들을 보냈고, 이들은 처음부터 조폭과 같이 험악한 얼굴로 분노를 분출했습니다. 6시간 동안 수갑을 뒤로 채운 채 호송하면서, 아비 같은 사람에게 온갖 종류의 욕을 하고 폭력을 가했습니다. 그 아픔은 고통을 넘어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습니다. 드디어 민주화의 성지를 상징한다는 광주법원이 학자의 ‘역사관’에 유죄를 선고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5.18은 성스러운 민주화운동인데 어째서 지만원은 좌익폭동사태라 하며 다른 소리를 내느냐, 그것이 죄다” . 참으로 어이없는 판결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위에 무법천지 광주공화국이 있었습니다.

반면 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역사바로세우기를 한다며 모든 역사를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4.3사건 동의대 사건 등 대한민국을 파괴-전복하려했던 모든 폭동사태를 줄줄이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정통역사를 좌익역사로 바꾸고, 간첩과 빨치산을 애국자로 바꾸었습니다. 이 처럼 우리는 지금 붉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광주구치소를 나온 저는 다시 충무로 호프집에서 사랑방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광주 법관들의 야만적 행패에 분노한 대위 출신 한 청년이 저를 찾았습니다. 애국을 구체화하려면 사무실과 조직이 있어야 한다며 일을 시작하자 종용했습니다. 그는 화양동에 사무실 하나를 마련해 주었고, 그래서 2003년 8월 1일, ‘대안세력창출본부 국민의 함성’이라는 시민단체를 발족했습니다.

사무실을 열자 자원봉사자들이 오셨습니다. 노력봉사를 하면서도 번갈아 가며 “오늘 점심은 제가 쏩니다”,  오순도순 일을 했습니다. 시민운동의 이상적인 전형이었습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좌익들이 대거 국회로 몰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낙선운동’을 했습니다. 좌익 국회의원들의 행동과 발언록을 찾아 좌익서열을 발표했습니다. 1억원 이상에 해당하는 광고를 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중랑경찰서 경찰들이 새벽 4시에 아파트 경비실을 점거하고 제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침 7시에 저를 구인해 가려고 아파트 문을 두드렸습니다.

월남참전 전우들의 도움을 받아 저는 경찰을 따돌리고 25일간의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영장도 없이 저를 체포하러 왔고, TV방송들은 제가 무슨 큰 죄라도 진 것처럼 ‘군사평론가 지만원 구속’ 이런 자막을 하루에도 수차례씩 내보냈습니다. 언론을 통한 지만원 죽이기였던 것입니다. 쫒기면서도 5개의 광고를 냈습니다. 제가 내보낸 광고문을 대량 복사해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다가 경찰에 잡혀가 구류를 살고 나오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 모두가 한나라당 이기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한나라당이 만족스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한나라당 밖에는 없지 않느냐, 이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121석이라도 차지했던 것은 한나라당만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반면 한나라당은 저와 같은 우익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마치 몹쓸 전염병이라도 걸린 사람인 것처럼 아주 멀리 했습니다. 저 같은 우익이 접근하면 표가 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만큼 한나라당에는 이념적 정체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유식한 국민들은 박헌영, 김달삼, 조봉암과 같은 과거의 좌익들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현존하는 위장된 좌익들에 대한 정보에는 캄캄했고, 심지어는 주사파가 무엇인지 조차 몰랐습니다. 민족, 평화, 통일,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좌익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전교조와 민노총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좌익세력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이 나라가 날로 좌경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던 것입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너무나 지친 나머지 2004년 총선 이후에는 화양동 사무실을 닫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려 마음먹었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사무실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드릴 때, 성금이 3천만원 정도 남았습니다. 이 3천만원을 다 사용한 다음 이 일을 접기로 하였습니다. 2005년 5월 8일, 저는 사당동에 있는 13평 정도의 사무실을 보증금 1천만원, 월세 65만원에 얻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성금 2천만원 중 천만원을 헐어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다급하게 돌아가는 안보의 위기를 알렸습니다. 이로 인해 오히려 회원 수가 늘어났습니다. 그만두려 해도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시국진단’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거쳐 간 회원들이 2만 명 정도는 되었지만 회비를 내지 않는 분들을 과감하게 정리했더니 지금은 착실히 회비를 내는 회원이 5천 명 정도 되었습니다. 5천명에게 책을 보내려면 주소 라벨을 뽑고, 그것을 봉투에 붙이고, 풀칠을 하고, 지역별로 묶고, 이를 3층에서 1층으로 내려다가 트럭에 실었습니다. 이 작업은 일요일에 했으며, 작업을 하는 날이면 10여 분들의 자원봉사자들이 나와 하루 종일 고생을 했습니다. 책이 1톤 박스 차에 가득 실렸습니다. 그 트럭을 제가 몰고 우체국에 가서 혼자 하역을 했습니다. 물에 담근 듯 옷이 땀에 젖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우체국 경비원이 함부로 대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건씩 전화 공해에 시달렸습니다. 물론 좌익들이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전화공해는 우익들로부터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무실에는 전화 받는 사람이 따로 없었습니다. 일부 전화를 거시는 분들이 전화를 받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보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저 역시 반말을 들으면서 기분 상할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당신들 내 돈 떼어 먹는 사기꾼들 아냐?” 험한 말을 하는 회원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너가 없는 분들에게는 시국진단을 더 이상 보내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픈 과정들을 치르고서야 5천 명 정도의 회원들을 단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한 겨울, 살을 에이는 추위에서도 곱은 손을 호호 불며 등산로에서 계몽지를 나누어주던 노 회원님들의 노고도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편히 계셔야 할 70대 80대의 어른들이 무엇이 아쉽다고 추위를 견디며 나이 어린 등산객들에게 귀찮은 존재로 취급받아야 했습니까. “선생님 한번 읽어 보십시오, 나라가 어렵습니다.” 등산객 한 사람 한 사람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눈을 내려 깔고 가는 사람, 어깨로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 받아서 구겨가지고 내동댕이치는 사람 …. 여기에 공원관리 직원이라며 나와서 시비를 걸었고, 악착같은 좌익들이 접근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 .

1만 당원이 확보되었습니다. 당원 확보에 나선 애국당원들 역시 이와 비슷한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가장 친한 줄 알았던 친구에게 입당원서를 써 달라 부탁했다가 거절을 당한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앞으로는 저 친구를 멀리해야지.” 배신감에 가슴앓이들을 했습니다. 귀한 지갑도 털었습니다. 오늘의 기적은 이러한 고통과 아픔들 위에 피어난 꽃인 것입니다.

희망과 약속이 있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 길만이 우리가 가야할 유일한 길이기에 10리를 가다 쓰러질지, 20리를 가다 쓰러질지 알 수 없는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조롱과 고통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 길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스템미래당에는 부자도 없고, 이름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름도 없고, 돈도 없는 우리, 알고 보니 우리가 바로 제2의 소돔과 고모라를 지키는 의인의 집단이었습니다.

이름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돈 없이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냈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그 무한한 힘만을 믿고 우리는 이 길을 줄기차게 가볼 것입니다. 무능과 무기력, 자조와 자학이 난무했던 1960년, 박정희장군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미래를 열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국가가 어려우면 누군가가 나서야 합니다. 48년 전엔 박정희 장군이 나섰고, 지금 이 시각에는 우리가 나섰습니다. 우리가 바로 미래요, 희망이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는 혁명세력인 것입니다.

존경하는 애국당원 여러분, 그리고 귀빈 여러분,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기성정당들, 어떻게 지어진 집들입니까? 과거의 몇 몇 정권들이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으로 지어놓은 집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당들에 기웃거리는 정치꾼들의 식상한 모습만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당원들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돌밭을 일구고, 석가래를 만들어, 새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 정당 역사에 하나의 전설을 남긴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위대한 자부심’, 우리 모두의 가슴 가슴에, 깊이 깊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파괴되고 찢겨지던 이 대한민국을 우리 손으로 구출해내고, 우리의 손으로 어엿하게 재건했다는 또 다른 하나의 ‘위대한 자부심’을 우리 다 함께 창조합시다. 감사합니다.  

  2007.3.27.  여의도 63빌딩에서 시스템미래당 총재 지만원


2014.1.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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