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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재판부를 재판한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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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4-01-31 23:18 조회6,0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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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나선 고대법대 출신 판검사들  
                                                   -홈페이지 서버 강탈-


2007년 6월 8일 오전10시, 성남수정경찰 사이버범죄수사팀 5명이 분당에 소재한 서버관리업체에 가서 내가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의 백업시스템을 포함하여 서버 두 개를 압수해갔다. 수사를 지휘한 검사는 1990년 고대법대를 졸업한 최재혁 검사이고 영장을 발부한 판사는 1998년에 고대법대를 졸업한 정석원 판사이며, 담당수사관들은 이문영-박홍일이었다. 
 

서버 압수를 주도한 최재혁 검사는 화곡고 출신으로 고려대 법학과 졸업하고, 사시42회로 합격해 당시 수원지검 성남지청 검사로 있었고, 압수영장을 발부한 성남지원의 정석원 판사는 대구 협성고 출신으로 역시 고대법대를 졸업하고 사시 제40회에 합격한 사람이었다.  

압수영장에 기록된 ‘공직선거법위반’, 압수영장을 집행한 두 사람의 경찰 수사관들은 이명박 자료 때문에 일단 압수했는데 구체적인 혐의는 서버를 조사해 봐야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회원들이 성남검찰에 가서 최재혁 검사에게 항의하자, 최재혁은 '내용은 수사관들이 잘 알고 있으며, 자기는 잘 모르는데 경찰이 수사에 필요하다고 해서 영장발부를 도와준 것 뿐'이라고 변명했다.  

나는 이문영 팀장에 데이터 복사를 요구했고, 이에 이문영팀장은 ‘80기가’ 짜리 하드 3개와 전문 엔지니어를 보내주면 하드에 복사를 해주겠다 했다. 하드 3개와 엔지니어 품값을 50만원에 구매했다. 6월 11일 오전11시경, 회원 3명이 엔지니어 1명과 하드디스크 3개를 가지고 약속한 대로 성남수정경찰서 이문영에게 갔고, 이문영이 복사를 해주려 했다. 바로 이 찰나에 박홍일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검사에게 요청해서 검사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이문영은 그들을 찾아간 4명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 요청했다. 나중에 다시 들어가니 박홍일이 이렇게 말했다, “하드에 복사해 줄 수 없다, 그걸 복사해주면 다시 홈페이지 systemclub.co.kr에 걸어놓고 가동할 것 아니냐, 그러면 이명박에 대한 비난이 계속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서버를 압수한 이유가 없다” 약속을 믿고 그들을 찾아갔던 3명의 회원 및 품삯을 주고 데려갔던 엔지니어는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 황당한 서버 압수는 이명박에 대한 나의 평론들을 봉쇄하기 위해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이유는 공직선거법위반이라는 혐의를 가지고서는 서버를 압수해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면 유권자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썼기 때문이고, 그 글을 입수하려면 종이 위에 프린트를 하면 된다. 따라서 ‘공직선거법위반’과 ‘서버압수’는 양립할 수 없었다.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서버를 압수해갔다면 이는 코미디다.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면 먼저 그 법을 위반한 글을 프린트하여 가지고 조사-기소하면 된다. 따라서 아무런 혐의도 없이 서버를 압수한 것은 경찰의 말대로 이명박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을 봉쇄하기 위해 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두 번째 이유는 6월 11일에 성남수정경찰서를 방문한 4명에게 들려준 박홍일의 말에 들어 있다. 경찰이 조사를 위해 서버를 가져간 게 아니라 홈페이지를 폐쇄하기 위해 서버를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구체적 혐의가 없으면서 영장을 발부받는다는 것은 법률적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구체적 혐의 없이는 경찰관이 검사를 설득할 수는 없다. 검사 역시 구체적 혐의가 없으면 판사로부터 압수영장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번 압수는 누가 주동이 되었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논리적 추론을 진행해보자. 내겐 그 주체가 최재혁 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혐의가 없는 상태에서라면, 최재혁 검사는 경찰 수사관을 그의 뜻대로 지휘할 수 있지만, 경찰수사관이 검사를 설득할 수는 없다. 따라서 경찰수사관과 검사 중 누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까?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상식인들은 검사가 지휘했을 것으로 볼 것이다. 그러면 또 구체적인 혐의가 없는 상태에서 검사는 어떻게 판사를 설득할 수 있었을까? 구체적 혐의가 없으면 판사는 절대로 압수영장을 발부하지 않는다는 것이 법의 상식이다. 그렇다면 이번의 정석원 판사는 어떻게 검사에게 압수영장을 발부해 주었는가? 아마도 검사와 판사 사이에 선후배 관계가 작용했을 것이다. 선후배관계는 때로 공적인 업무한계를 능가할 수 있다.  

최재혁 검사와 정석원 판사는 고대법대 선후배 사이다. 검사가 판사보다 8년 대선배다. 이런 사이에서는 뚜렷한 혐의 없이도 사적으로 선배 검사가 후배 판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한국적 현실이다. 그래서 일사철리로 압수영장이 발부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고대출신들이 언론인, 법조인 할 것 없이 이명박 밀어주기에 올인 했다는 소문이 팽배했다. 나는 지금도 이 사건이 당대의 권력남용 사례로 보고 있다.  

나는 경찰청장, 검찰총장과 대법원장에게 민원을 냈고, 6월 13일에는 대한민국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고대출신 이명박을 위해 고대출신 판검사들이 권력을 남용했다고 시민들에 호소했다. 그리고 압수된지 만 8일 만인 6월 15일, 회원들이 수정경찰서에 가서 압수되었던 서버를 환부 받아 그날 밤 11시부터 홈페이지가 정상 기동되었다. 그 후 최재혁 검사와 경찰들은 아무런 혐의도 알려주지 않고, 법적 조치도 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홈페이지에 나타난 글들로부터는 아무런 혐의를 씌울 수 없기 때문에 홈페이지 서버를 무단으로 장기간 압수하려다 내가 언론과 수많은 요로에 항의서와 진정서를 넣고, 소송을 내겠다고 강하게 저항했기에 8일만에 되찾아온 것이다. 이는 압수를 주도한 검사와 판사들에게 수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당시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에는 어떤 글들이 있었나? 
 

나는 당시 이명박을 이념이나 인격 면에서 많은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으로 분석했고, 따라서 그에 대한 분석의 글들이 당시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 글들 중 가장 이명박 세력에 타격을 주는 글은 2007년 5월 9일자에 게시한 글이 될 것이다. 아래의 글은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시스템클럽에 떠있다. 그리고 최재혁 검사와 두 경찰 수사관은 아래의 글에 대해 조사도 기소도 하지 않았다.  

아래 글은 2007년 5월에 '이명박수첩'으로 2만권 정도 발간되어 배포되었고, 제작하기 전에 담당 경찰관들과 담당 선관위 직원들로부터 "모든 근거자료로 뒷받침 된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다. 당시 서울역 행사에서 수첩을 나누어줄 때 이명박 측과 물리적 충돌이 없도록 주의해주기 바란다"는 코멘트를 받았다. 그리고 이 내용들은 2007년 6월 26일, 보다 더 구체화되어 한나라당 후보경선 청문회 자료로 제출됐다. 또한 2007년 5월에 발간한 특집호에도, 시국진단에도 모두 게제돼 있었다. 

시국진단 특집호 목차만 보아도 당시의 이슈와 나외 고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나라당의 정세 • 17

2. 이명박의 출생 • 24
3. 이명박의 병역부정 • 41
4. 이명박의 파렴치한 면모 • 62
5. 이명박과 지만원이 법정에서 싸우게 된 동기 • 65
6. 이명박의 사상 • 68
7. 강남교회 김성광 목사로부터 들은 협박성의 이야기 • 85
8. 뉴라이트의 정체 • 88
9. 뉴라이트 총사령관 김진홍의 정체 • 96
10. 한나라당 윤리위원장(기율부장) 인명진의 정체 • 110
11. 이재오의 정체 • 116
12. 손학규의 정체 • 128
13. 우리는 왜 김구를 바로 알아야 하는가? • 138
14. 민주, 통일, 민족, 친일청산, 김구, 장준하를 외치는 자들의 정체 • 161
15. 최근 역사는 북한의 집요한 대남사업의 성공사 • 170
16. 지금의 운명, 패망직전의 베트남과 똑같다. • 176
17. 거물 간첩이 쓴 기막힌 대남공작 실화 • 179
18. 한번 빨치산이면, 영원한 빨치산인 구조적 이유 • 195
19. 우리는 두 번씩이나 속아서 붉은 좌익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 206


                        2007년 5월 9일자에 게시된 이명박 의혹
 

1. 이명박은 ‘범인 도피-은닉 범’이었습니다.  

이명박은 1996년 15대 총선 때 종로에서 출마, 이종찬, 노무현과 싸워 승리했지만, 자신의 선거기획참모 김유찬씨가 6억8천만원의 선거비를 썼다고 폭로하자 김유찬에 큰돈을 주어 해외에 도피-은닉한 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죄에도 죄질이라는 게 있습니다. 범인에게 큰돈을 주어 해외로 도피시킨 죄는 대통령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파렴치한 죄입니다. 법원은 선거법 위반죄로 벌금 400만원, 범인 은닉죄로 3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11년 전의 벌금으로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 결과 그는 15대 국회의원에서 물러났습니다. 판결문은 홈페이지 ‘시스템클럽’ ‘최근글’에 있습니다. 

2. 관용차를 자기가 몰다가 사고를 낸 후 운전수가 운전한 것으로 날조하여 보험 처리한 전력도 있습니다.  

1997년 월간조선 신년호의 자료입니다. “이명박은 14대 의원(1992-96년) 당시 자신이 운전수 없이 관용차를 몰고 가다 민자당 정 모 의원의 비서관 김종만씨의 차와 충돌했으나 자신의 운전기사가 운전한 것으로 사고를 날조하여 보험처리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막다른 궁지에 몰렸다.” 잡범이나 저지를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까?  

3.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편법으로 재산을 신고하면서부터 숱한 물의를 빚고, 시달리느라 국회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1999년 윤치순 저, 동아춘추사가 발행한 ‘기자가 본 국회의원’이라는 책의 394쪽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14대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등원하자마자 불성실한 재산공개로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재산공개 6일 전, 시가 13억 원짜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도(都) 모씨 명의로 급히 소유권 이전 등기를 했고, 서초동 금싸라기 땅 위에 있는 건물을 지번과 규모도 밝히지 않은 채 5억9천만원으로 신고, 비난이 쏟아졌다. 등원 초부터 숱한 물의를 빚어 원내 활동은 형식적 활동에 그쳤다. 실물경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현실적 정책대안을 제시하기란 기대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는 현대건설 CEO 경력을 내세우지만 당시의 건설회사 CEO라는 것은 정경유착으로 공사를 따내서 수많은 하도급 업체에 도급을 떼어주고 뒷돈 받는 것이 관례화된 그런 직책이 아니었습니까? 물론 이명박도 이렇게 했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로 독자가 판단해야 할 사항입니다. 당시의 건설회사 CEO란 편법에 능한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국회의원이 되어 가지고 재산을 타인 명의로 감추고, 금싸라기 땅이 어느 지번에 있는지, 얼마나 큰 땅인지에 대해 밝히지 않고 축소 신고했다는 것은 바로 편법에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4. 이명박은 만화 같은 거짓말로 자서전과 어머니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명박이 쓴 책들 중에 자서전 ‘신화는 없다’와 ‘어머니’라는 두 가지 책이 있습니다. ‘신화는 없다’라는 책은 114쇄이며 70만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3월에는 ‘어머니’라는 책을 써서 출판기념회에 2만 명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책은 출생과 병역에 대해 허황된 거짓으로 부풀려 자신을 미화한 책입니다. 책을 읽은 사람들은 이명박을 우상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개의 책이 국민을 기만하여 표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책이기 때문에 2007년 4월 1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출판과 판매가 금지돼야 한다는 취지로 가처분신청을 냈습니다. 사건번호: 2007가합1255 출판및판배금지가처분  

5. 이명박은 붉은 좌익입니다.  

그는 박정희를 증오하는 모임인 6.3동지회를 지금도 지휘하고 있으며, 김정일 만나기 위해 서울시 조례 제정하여 대북지원비 200억 마련한 후 김정일측과 두 차례씩이나 협상을 했습니다. 김정일이 자신을 만나만 주면 평양시를 리모델링해 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청계천을 민노총의 로고 전태일에 바쳤습니다. 청계천 5.8km 중 평화시장 부근 700m를 전태일 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전태일 동상도 있습니다. 전태일은 박정희를 타도하고, 기업을 도산시키기 위한 좌익노동운동의 상징적 로고입니다. 1964년3월, 목사 300명이 [한국도시산업선교회], 약칭 [도산]을 구성하여 근로자에 대한 선교를 한다는 구실로 근로자들을 의식화시켜 노사분규를 연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생 노동자들이 기업에 나가 노동자들을 선동했습니다. 손학규 김문수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위장취업자를 양성한 대표적 인물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인명진 목사였습니다. 당시 노동운동은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 분신자살을 대거 기획하였습니다.  

가장 순진한 노동자를 골라 의식화 한 후, “너는 민중 앞에서 휘발유를 뿌리고 장엄한 분위기만 연출하라” 이렇게 명합니다. 그런 줄 알고 현장에 나가 휘발유를 뿌리면, 여럿이 바람을 잡으면서 불을 그어댑니다. 1970년대 이렇게 죽은 인간 불화살이 17명, 그 중 전태일이 제1호였습니다. 청계천은 곧 ‘전태일천’인 것입니다. 국가전복을 위한 폭력전사로 양성된 노동자집단이 바로 지금의 민주노총입니다.  

이명박은 열우당이 만든 4대악법을 지지했습니다. 국보법, 과거사법, 사학법, 언론법입니다. 그는 좌익들을 비호하는 발언을 하며, 손학규, 이재오, 김진홍(목사), 인명진(목사) 등 골수 좌익들과 친하게 지내며 캠프에는 좌익들로 우글거린다 합니다. 또 다른 골수 386좌익인 정태근을 서울시 부시장으로 데리고 있다가 지금은 캠프의 핵심 참모로 사용합니다. 이재오와 인명진은 국가전복 혐의로 감옥을 4번씩이나 간 사람이며, 김진홍은 북으로부터 유일하게 공산주의자로 인정받아 거류민증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명박의 출생 

이명박은 위 두 개의 책에서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이충우, 3형제 중 막내였다. 할아버지의 땅뙈기는 두 형이 차지했고 아버지 혼자서 친구들과 함께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에 갔다. 자리 잡고 저축하여 한국에 나와 반야월채씨 여인과 결혼을 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6남매를 낳았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유교 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었다. 남자 돌림자는 ‘상’자, 여자 돌림자는 ‘귀’자인데 나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 명박이라 지은 것은 어머니 태몽 꿈에 크고 밝은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그러나 이는 순 거짓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일본 호적과 기타 자료에서 찾은 사실들을 보면 위 이명박이 밝힌 가족사는 맞는 게 하나도 없는 100% 거짓말입니다. 제가 찾아내 진실은 이러합니다, 

아버지 이름은 원호적에 덕쇠(德釗)였고 33세에 일본에서 법원의 허락을 득해 충우로 바꾸었다. 덕쇠라는 이름은 떡쇠, 마당쇠 돌쇠와 같은 계열의 이름으로 양반과는 거리가 멀다. 두 형들의 이름은 무특과 경특이다. 일본에는 이덕쇠 혼자 간 게 아니라 맏형 무특과 함께 오사카로 가서 이웃에서 살았으며 형제가 대가족을 이루며 성을 스키야마로 바꾸어 씨족단위로 살았다. 

어머니는 반야월 채씨가 아니라 인천 채씨다. 총각으로 일본에 갔다는 1935년에는 이미 3남매가 무럭무럭 자리고 있었다. 현 국회부의장인 이상득이 1935년생이다. 덕쇠는 6남매를 모두 일본에서 낳은 게 아니라 4번째인‘귀애’는 포항에 건너와 1938년에 낳았다. 이 때 3남매는 4.6.9살이었고, 학령기에 접어들었다. 이 때 채씨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뒷바라지를 했으면 포항에 계속 눌러 있었다는 것이 된다. 만일 그랬다면 이명박(1941)과 이말분(1945)을 일본에서 낳은 여인은 다른 여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돌림자를 이탈한 것은 명박이 만이 아니라 말분까지다. 이를 속이기 위해 이명박은 위 두 책에 ‘말분’이를 ‘귀분’으로 썼다. 이복형제설이 끼어들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다. 자서전과 어머니를 읽으면 명박과 말분은 서자 취급을 받았다. 학교도 못 가게하고, 돈만 벌라 했으며 종국에는 막내 남매만 달랑 포항에 남겨두고 모든 식구들이 다 상경했다. 두 남매는 배고픔에 못 이겨 무작정 상경했다. 이런 서자 취급을 받았으면서도 어머니’라는 책을 써서 띄우는 것은 정략적으로 보인다. 

채씨는 1964년 56세로 타계했다. 이 때 아버지 나이는 58세. 상은과 상득의 나이는 33세와 30세. 그런데 만 8년간 사망신고를 하지 않다가 채씨와 동거했던 맏사위가 1972년에 했다. 사망 장소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 지금의 타워팰리스 격이다.

 

                                   이명박의 호적세탁  

호적도 세탁했습니다. 이명박은 호적이 멸실 우려가 있어서 1974년에 새로 제작했다고 법정에서 변명했지만 멀쩡한 호적이 왜 멸실된다는 것이며, 유독 이명박 가의 호적만 멸실될 이유가 무엇일까요?  

호적을 다시 기록하면 옛날 호적상에 나타난 변경사항들을 그대로 사진 찍듯 옮겨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이덕쇠라는 이름을 말끔히 지워버린 것입니다. 구호적에는 이덕쇠(德釗)가 이충우로 개명됐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있는데 신호적에는 이 개명사항이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개명사항은 호적에 필수 기록사항입니다. 구호적에는 이덕쇠(德釗)가 4남매를 낳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신호적에는 7남매 모두를 이충우가 낳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명박의 병역 의혹 

'신화는 없다'와 '어머니'에서 이명박은 자신의 병역사항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이후 나는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 어디 하나 정상적인 곳이 없는데다 결정적으로 기관지가 확장되어 있어 군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 그 길로 나는 군대에서 쫓겨났다. . 치료를 받고 다시 오라는 말에 군생활을 하며 치료를 받고 싶다고 사정했지만 군의관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인마, 군대가 무슨 요양원인 줄 알아? . .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시장청소를 하고, 청소 후 나온 쓰레기를 이태원 시장에서 지금의 잠수대교 근처까지 리어카로 날라야 했는데 . . 그렇게 2년을 보내자 내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쉬고 싶다. 단 하루라도 이 고달픈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가 찾은 탈출구는 군대였다. . . 그런데 남들 다 가는 군대에조차 퇴짜를 맞은 것이다. . .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니는 나를 덥석 끌어안고 울먹이셨다, 미안하다. 명박아. . .어릴 때 술지게미만 먹여 키워서 그런가 보다. 다 내 탓이다. . 어미가 잘못했다. 그 몸으로 새벽마다 리어카를 끌었다니 . .”  

이명박은 군대를 가고 싶어 했지만 술지게미만 먹고 거기에다 이태원에서 리어카를 끌었기 때문에 몸이 성한 곳 없이 만신창이가 됐으며, 군의관에게 군대 생활을 하면서 치료를 받게 해달라며 졸랐지만 수용되지 않았다는 애절한 사연으로 쓴 것입니다. 자신을 미화시키는 것은 물론 독자들의 동정심까지 이끌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황당한 거짓말입니다. 그에 대한 병무청 기록은 1961년 갑종, 1963년 입대 후 귀가(질병), 1964년 징병처분 미필, 1965년 병종(활동성 폐결핵 및 기관지 확장증),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명박은 대학 1학년시절인 1961년에 이미 갑종판정을 받았습니다. 갑종 판정이란 몸이 최고(A급)로 건강하여 군대에서 대환영한다는 뜻입니다. 이명박이 위 자서전과 ‘어머니’ 책에서 표현한 것은 1961년에 A급 판정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숨기고, 1964년과 65년 기록에 대해서도 함구했습니다. 오직 1963년도에 기관지확장증고도와 악성축농증 판정을 받아 귀가조치 받았다는 사항만 크게 연극적으로 부각시킨 것입니다.  

위 두 개의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명박을 아주 훌륭한 사람이고 그가 했던 고생에 대해 동정을 합니다. 가난과 병마를 극복하고 신화를 이룩한 그를 한 없이 존경합니다. 거짓입니다.

이명박은 1961년에 갑종판정을 받았고, 1963년 왕성한 선거운동을 통해 학생회장이 되었고, 1964년에는 박정희 정권을 뒤엎기 위한 학생운동을 하다가 건강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도피생활을 했고, ‘내란선동죄’로 만3개월간 감옥살이를 했고, 1965년에 여름, 현대에 들어가 술의 천하장사가 됐고, 40도를 웃도는 열대지역에서 콘크리트 가루를 마시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여 11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한 신화를 이룩한 600만 달러의 슈퍼맨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유독 1963년과 1965년 봄에 있었던 2차례의 병역관계 신체검사에서만 당시에는‘죽는 병’으로 알려진 기관지 확장증 중에서도 최고의 위험수위라는 판정을 받았고,‘악성 축농증’ 판정을 받았고 또 다른 죽을병인 ‘폐결핵’ 판정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비리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데도 그리고 병역비리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어 보이는 슈퍼맨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어려서 술지게미만 먹고 자란데다가 리어카를 끌고 다니느라 몸이 걸레처럼 망가져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명박이 병역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데 대한 논리는 2개입니다.  

1)“국가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병역 면제판정을 받은 것이라 아무런 하자가 없다.”  

이명박의 이런 주장에 의하면 대한민국에 병역비리는 단 한 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병무청이라는 국가기관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는 단 1%의 부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가 내세우는 유일한 해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명박은 그의 자서전 제64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들은 있는 줄 없는 줄을 동원해 군에 안 가려고 하는 마당에, 나는 군에 가고 싶어도 병들어 가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역비리를 저질렀는데 자기만 깨끗했다는 말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국가와 결탁하여 병역비리를 저지를 수 있다고 해놓고, 자기를 향한 의혹에 대해서는 “국가는 절대로 병역비리를 저지를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2) “대학시절에 병역부정을 저지를 만한 지위나 금력이 없었다.” 

이명박은 1964년10월1일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습니다(고대신문). 이 보석금은 어디에서 났습니까? 그는 6.3사태의 핵심 주동인물이었습니다. 6.3사태는 간첩 김영춘이 국내 인사들을 포섭하여 지하당을 만들어, 배후조종한 사건입니다. 1962년 1월, 간첩 김영춘이 국내인사들을 포섭하여 지하당 인혁당(인민혁명당)을 창당했고, 1964년에 발생한 소위 6.3사태는 인혁당이 한일회담 반대 이슈를 선동하여 배후조종함으로써 제2의 4.19를 재현하여 무정부 상태를 조성하고 남침의 기회로 활용하여 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한 사건이었습니다.

                                연약한 네티즌들을 고소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약점에 접근하는 네티즌들을 상대로 무차별 소송을 하여 입을 막음으로써 이 소문을 들은 다른 네티즌들이 감히 의혹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언론을 탄압하였습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명박은 두 개의 책(신화는 없다, 어머니)에서 가장 중요한 검증 사항인 출생과 병역에 대해 순 거짓말로 자신을 미화했습니다. 이 두 가지에 관한 한, 맞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 소문이 나돌고 의혹이 나도는 게 아닙니까? 인터넷 검색 엔진인 google.com에 검색어 이명박 출생 병역을 치면 40만개의 글이 뜹니다. 냄새가 진동한다는 뜻입니다. 자서전과 책을 거짓말로 써서 스스로가 냄새를 풍겨놓으면 의혹들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명박은 공적존재(public figure)입니다. 공적존재는 국민의 감시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공적존재에 대해 의혹이 제기되면 그 공적존재는 의혹을 해명할 의무는 있어도 고소를 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진국에서 통용되는 명예훼손 법의 기본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명박은 해명을 하지 않고 무조건 입을 막기 위해 힘없는 네티즌들을 상대로 마구잡이식의 고소를 하여 처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이명박은 제 입도 막으려고 지난 3월에 저를 상대로 고소를 한 것입니다. 이 소문이 인터넷에 뜨자 감히 누구도 이명박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짓말의 화신 이명박은 온갖 거짓말로 자신의 치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니 냄새가 진동한 것입니다. 냄새가 나자 ‘이번에는 정말로 좋은 대통령을 뽑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네티즌들이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이명박은 자신의 치부를 알려하지 말라는 뜻으로 힘없는 네티즌들을 벌 받게 했습니다. 2007.5.9.


                         검사와 경찰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 
 

2007년 7월 30일, 나는 최재혁 검사, 이문영 및 박홍일 수사관, 국가를 상대로 5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2007가합66175)를 냈지만. 1,2,3심은 1) 판사의 영장을 발부받아 적법하게 압수한 것이기 때문에 피고들의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의 서버압수 행위는 정당하고, 2) 서버가 압수된 날로부터 가환부한 날까지 불과 8일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업무방해라고 할 수 없고, 3) 컴퓨터에 의한 범죄의 경우 압수수색 현장에서 증거가치를 분류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이 범죄의 도구로 악용될 소지가 있었고, 상당한 기간 내에 가환부되었기 때문에 과잉수사가 아니라는 그야말로 동문서답에 천편일률적이고 극히 형식적인 판결을 내렸다. 판사들에게는 그래도 논리와 정의감이 있겠거니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2014.1.31.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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