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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정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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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12 조회10,1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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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5월. 나는 월남 근무 22개월을 마치고 귀국하여 육군본부에서 갓 준장으로 승진한 비육사 출신 장군의 전속부관이 됐다. 관리참모부 내의 핵심 부서인 예산회계처장이었다. 장군 부속실에는 4명이 있었다. 보좌관인 중령, 중위인 나, 정상병 그리고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부속실에 아가씨들이 떼를 지어 놀러왔다. 그런데 날마다 얼굴들이 바뀌었다.

“미스 윤.”

“네?”

“인기가 대단한가 봐요, 친구들이 그렇게 많아요?”

그녀는 대답 대신 책상을 내려다보며 실실 웃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말문을 열었다.

“지중위님, 요즘 우리 사무실에 아가씨들이 왜 자꾸만 오는지 아세요?”

“…….”

“베트콩 구경하러 오는 거래요.”

“베트콩이 누군데? 혹시……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요?”

“어유, 지중위님은 눈치가 빠르시네요.”

“내가 어째서 베트콩이래요?”

“깡마르고, 체구가 작고, 얼굴이 검고, 머리가 짧고, 입술이 푸르스름해서 영락없는 베트콩이라고 소문이 났대요. 장교들이 그랬대요. 월남에 못 가본 아가씨들 그 방에 가면 베트콩 구경할 수 있다구요.”


전속부관이 하는 일은 전화를 받고, 공⋅사를 불문한 모든 심부름을 잘해내는 것이었다. 청량리까지 가서 장군 댁 세금을 납부하는 일도 많이 했다. 사적인 심부름이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사회를 아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장군이 말씀만 내려주시면 알아서 하는 것이 전속부관의 핵심능력이며, 능력이 부친다고 보고하면 무능한 장교가 되는 것이다. 장군의 심부름을 잘하기 위해서는 여러 영관급 장교들의 도움을 받는 요령이 필요했다. 고급 장교들의 능력을 이용해야만 심부름을 잘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이웃 영관장교들로부터 귀여움을 받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과 장군과의 인간관계에 대한 센스도 필요했다. 장군이 귀찮아하는 전화를 연결하면 그에 대한 짜증은 전속부관이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부속실에 있는 정상병은 기생오라비라고 불릴 만큼 얼굴이 매끄럽게 생겼다. 그는 가끔 장군의 지시내용을 잊기 때문에 장군 방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나는 그를 단지 경상도 말을 쓰는 병사라고만 생각했다. 9월초, 나는 결혼식을 4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정상병이 갑자기 휴가를 가겠다고 했다.

“어이, 정상병.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9월 6일에 결혼식 하는 거 알고 있나?”

“예. 압니다.”

“장군을 모시는 일은 너와 나만 할 수 있는데, 네가 휴가를 가면 나는 결혼식을 연기해야 하지 않는가? 어떤가? 청첩장도 발부됐고, 식장도 이미 예약이 돼 있는데.”

“그래도 저는 가야 합니다. 이미 여자 친구들하고 조를 짜놓았습니다.”

나는 입장이 곤란해 중령 보좌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중령이 화를 내고 언성을 높여 야단을 쳤다.

“야, 임마. 네가 인간이냐? 결혼식장에 가서 심부름은 못해줄 망정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해?”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정상병은 장군이 파티에 나가기 위해 황급히 차에 오르는 순간, 느닷없이 휴가를 다녀오겠다고 보고를 했다.

“오? 그래. 잘 갔다와.”

장군은 나와 보좌관이 그의 휴가를 이미 허락한 것인 줄 알고 건성으로 대답을 한 것이었다. 정상병의 돌출행동에 대해 나는 화가 많이 났다. 2층 사무실로 올라와 정상병을 다그쳤다.

“야, 임마. 너 그따위 버릇, 어디서 배웠어?”

“아까 보시지 않았습니까? 장군님이 허락하셨는데 부관님이 왜 이러십니까?”

“정상병, 한 인간에게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대사인 줄 너도 알지?”

이런 설득은 그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적되는 화를 꾹꾹 참았다. 장군 방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만큼은 적극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상병. 명령이다. 못 간다. 알았어?”

“그게 무슨 명령입니까?”

그는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모욕감까지 주었다. 오래 참았던 것만큼 감정이 폭발했다. 그 때부터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몇 대의 주먹이 날아갔다. 그래도 그는 약을 올리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두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고 덤빌 기세까지 보였다. 아마도 체구가 작고 바싹 마른 나를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합기도 실력으로 그를 메어꽂았다. 억- 소리를 내면서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 그 다음부터는 짐승처럼 패 버렸다. 두드려 팰수록 분노가 더욱 증폭됐다. 재떨이도 날아갔다. 그 기세가 무서웠던지 그가 갑자기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볐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를 죽을 때가지 팼을 것이다. 일단 분노의 세계로 접어들면 이성이 끼어들지 못한다. 분노의 세계에서 과잉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지중위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요란한 소리에 인근 사무실에서 병사들이 몰려왔다.

“지중위님, 그만 하십시오. 저희들이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의 팔이 부어올랐다. 병사들과 함께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X-레이를 찍었다. 의사가 두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 정도면 괜찮아. 찜질만 하면 돼”하며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다시 사무실로 갔다. 일직 근무를 서던 소령이 갑자기 나를 힐난했다. 평소의 그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면을 바꾸니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소령은 이미 정상병의 어마어마한 배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잘못은 장군님한테 평가받을 테니, 소령님은 상황보고만 하십시오. 내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으면 나를 힐난하지 마십시오.”

이 말 한마디에 소령은 머쓱해 가지고 돌아갔다. 이어서 병사들이 나섰다.

“중위님, 저희들이 찜질해 줄 테니 퇴근하십시오. 탈영 같은 건 없을 겁니다.” 정상병 역시 반성을 하고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이튿날이었다. 정상병은 약속을 어기고 탈영했다. 장군이 출근하자마자 나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과 탈영사실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잘했어. 그놈은 혼 좀 나야 해. 불성실한 놈이야. 같은 일을 여러 번 시켰는데도 제대로 할 때가 없었어. 괜찮아.”

그날 오후였다. 장군이 김계원 참모총장 비서실에서 받은 전통(전언통신문)을 한 장 가지고 오셨다.

“야, 지대위. 이걸 좀 읽어봐. 염려는 하지 말고”

나는 1969년 9월 1일에 대위로 임시진급을 했다. 중위를 3년간 달아야 대위가 되었지만 그 때에는 대위의 수가 모자라 중위 1년 반 만에 임시진급을 시켰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전통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병사를 무단 구타한 몰지각한 장교가 있는 바, 엄중히 처벌하고 결과 보고할 것” 이 전문은 9월 3일에 내려왔다. 장군이 이 전문에 대한 이야기를 대령급 과장들에게 하셨다. 3~4명의 대령 과장들이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 국무총리실로 다리를 놓아가며 구명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정면 돌파만이 해결책이었다. 나는 이웃 병사로부터 정상병의 집주소를 얻어냈다. 물어보니 정상병은 내무반에서 ‘상당한 집’의 자손인 것으로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다. 퇴근길에 주소 쪽지를 손에 쥐고 찾아가 보니 서교동 2층집이었다. 30세가량의 여인이 꼬리치마를 입고 나와 대문을 열어주었다. 냉랭한 표정이었지만 깔끔하고 예쁘게 생긴 여성이었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자리를 권한 후 말문을 열었다.

“외국에 오래 머물렀다가 바로 어제 돌아왔어요. 와보니 글쎄 내가 가장 예뻐하는 막내 동생이 매를 맞고 얼굴과 팔이 퉁퉁 부어있지 뭐예요. 때려도 어떻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릴 수 있어요? 우리 아버님께서 화가 몹시 나 계세요.”

“알고 왔습니다.”

그녀의 모친이 돌 직전으로 보이는 사내아이를 안고 TV를 보고 있었다. TV 소리에 대화하기가 거북했다. 그녀가 짜증을 냈다.

“엄마, TV를 끄고 2층으로 올라가소 마”


“국무총리실에서 총장실로 전문을 보냈더군요. 사병 내무반에서도 정상병은 상당한 댁 자손으로 알려져 있더군요. 저는 4개월 동안 정상병과 한방에서 일했는데도 그걸 몰랐습니다. 만일 그걸 알았더라면 더 많이 때렸을 겁니다.”

잘못했다고 빌러 온 줄 알았던 그녀에게 이 말은 세도가에 대한 증오심으로 비쳤을 것이다.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그녀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몇 시쯤 오시나요?”

“10시쯤 돼야 오실 겁니다.”

“세 시간 남았군요. 불편하시겠지만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꼭 그 어른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2시간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손님을 두고 자리를 뜨는 일을 하지 않았다. 9시가 됐다.

“아버님이 늦으시는 모양입니다. 저와 이야기하시지요.”

“아, 아닙니다. 저는 똑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하기 싫습니다.”

“내 판단이 곧 아버님 판단이니 나하고 이야기하시지요.”

“정말입니까?”

“가정에서 그 정도의 역할은 하고 삽니다.”

밤중까지 기다리겠다고 버티는 나의 기세에 오히려 그녀가 더 초조해 하는 기색이었다.

“정상병을 불러 주십시오. 저는 그 애 앞에서 떳떳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상병이 2층에서 내려왔다. 나는 정상병을 앉혀놓고 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묘사해 줬다. 누나의 얼굴에서 노기가 일기 시작했다. 누나의 마음이 변해 가는 것을 눈치 챈 정상병이 가끔 반발하려 했지만 그녀는 위엄 있게 제지했다.

“누님께서 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나라도 두들겨 팼을 겁니다.”

“누님, 참 훌륭하시군요.”

“제가 어깨에 달고 있는 이 계급장, 그저께 달은 것입니다. 누님께서 보시기엔 하찮은 계급장이지만 제 일생에는 귀중한 이정표입니다. 저는 4개월 전까지 월남에 있었습니다. 어느 집 자식 치고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위는 소위에겐 하늘입니다. 그런데 그 하찮은 소위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21명의 우리 병사가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몰살한지가 불과 5개월 전의 일입니다. 그 중에 살아 나온 병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야전삽을 가지고 논바닥을 이리 파서 구르고, 저리 파고 구르면서 몸을 숨겼습니다. 5시간이나 공포 속에서 지냈습니다. 어둠이 깔리자 그 병사가 소대장에게로 달려왔습니다. 소대장을 붙들더니 엉엉 울었습니다. 소대장이 병사의 아버지였습니다. 월남에서 죽고 다친 병사들도 다 귀한 자식들입니다. 여기에 있는 정상병, 그 병사들과는 매우 다른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배경 좀 있다고 상급자를 우습게 여기다가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국무총리까지 동원하여 상급자들을 처벌해 달라 합니다.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정상병 하나만을 위해 있는 건가요? 만일 국무총리가 이런 일에 나선다면 그분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동생 말을 들을 때는, 지대위님이 우락부락하고 힘도 세고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듣고 보니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동생을 꾸짖기 시작했다. 세상에 못난 놈이라고.

“결혼식 잘 올리세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저애를 내일부터 부대로 보내겠습니다. 제가 가서 장군님께도 사과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뜻만 전해드리세요. 그리고 얘가 나가거든 혼을 더 내주세요. 그냥 두면 사람 노릇 못 합니다. 아버님께서 내일 당장 전문을 취소하실 겁니다. 제가 책임지겠어요”

그녀는 밖에까지 나와 택시를 잡아주며 다시 한 번 결혼을 축하한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정여인과의 만남에 대해 장군에 상세히 보고했더니 만족해하셨다. 이어서 정상병이 출근했다. 기가 푹 죽어 있었지만 곧바로 장군 방으로 들여보냈다. 정상병이 나타나자 장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고성으로 꾸중을 하셨다.


그녀는 사리가 분명했다. 어려 보이는 내게 얼굴까지 붉히며 사과를 했지만 내 마음속에 비친 그녀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깔끔했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이겼고 그녀도 이겼다. 만일 그녀의 정신세계가 세속적이었다면 그때 그녀의 위치로서는 나 같은 풋내기쯤은 철저히 무시했을 것이다. 이튿날 국무총리실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건의 당사자인 나와 정여인과의 오고갔던 말만 믿고 참모총장실에서 국무총리가 보낸 전통문에 대한 응신을 생략할 수도 없었다. 국무총리실로서도 일단 육군 참모총장실로 내려 보낸 전통을 상당한 절차 없이 취소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형식과 체면이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 내가 정면 돌파에 또 나섰다. 퇴근 후 정복을 입고 정일권 국무총리실로 들어갔다. 비서관들이 나를 힐긋 힐긋 훔쳐봤다. 한 비서관에게 전문의 사본을 내보였다.

“이 전문을 기안하신 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얼떨결에 당한 일이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분은 출타중이십니다.”

“저는 내일 아침 결혼식을 합니다. 오늘밤에 모든 걸 해결해야 합니다. 국무총리실이 병사의 구타 사건과 같은 사소한 일을 다루는 곳인지 확인만 하면 됩니다. 어느 분입니까? 이 전문을 기안하신 분이.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는 있을 거 아닙니까? 오늘 밤 그분 댁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어서 알려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떳떳한 공문을 띄워놓고 왜들 주저하십니까?”

막무가내로 다그치자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 듯 했다. 나이 든 비서관이 다가왔다.

“아, 대위님, 그 전문 때문이시라면 염려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내일 아침에 취소 전문을 치겠습니다. 취소시키라는 명을 받아 놓고 있었습니다. 약속합니다”

결혼을 하는 이튿날 아침, 나는 전화로 중령 보좌관에게 결과를 설명하고 결혼식에 가기 위해 시간에 쫓기면서 이발소로 갔다.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이발소가 드물었다. 적당히 깎아 달라고 재촉하며 이발을 마치기가 무섭게 택시를 타고 시계 바늘을 보아가며 남산 드라마센터 예식장으로 달려갔다. 신랑이 나타나지 않아 조바심을 하던 동기생 사회자가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마이크를 잡고 예식을 선언했다. 예식이 아니라 전투였다.


1969년 11월 29일, 나는 월남에서 귀국한지 7개월 만에 장군을 따라 다시 월남으로 갔다. 내가 모시던 장군이 사이공에 있는 주월한국군사령부 참모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나는 그 장군의 요청에 따라 사이공에서 6개월간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1970년 5월, 지난 1차 파월 때 22개월에 걸쳐 나름대로 정이 들고 익숙했던 곳, 투이호아 전투지역으로 다시 내려갔다.  한 달 동안 항공정찰기를 타고 다니면서 항공관측임무를 수행하다가 이내 포대장으로 부임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정인숙 사건은 바로 이 시기에 발생했다. 나와 여러 시간을 함께 했던  정상병의 누나가 바로 비극의 여주인공 정인숙이었다. 신문지상에 보도된 정인숙은 내가 만났던 정여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채색돼 있었다. 신문은 정인숙을 사리 분별력이 없는 나쁜 여인으로 부각시켰지만 내가 만났던 정인숙은 사리가 분명하고 공정했다. 자기의 피붙이가 관련되면 무조건 팔이 안으로만 굽는 세속인들과는 전혀 다른 깨끗한 여인이었다. 아마도 기사를 만든 기자들이 세속적인 고정관념을 가지고 마음대로 예단하고 각색하여 삼류소설을 썼을 것이다. 최근에도 나는 언론 기사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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