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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치고 나온 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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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34 조회8,5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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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혈단신, 14세에 서울로 올라온 내가 고향집을 찾을 때면 마을 한 복판에 있는 초등학교 교정을 통과했다. 내가 다닌 학교였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육군사관학교 3학년, 2주간의 겨울휴가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두꺼운 제복의 롱코트를 입고 곧장 시골로 내려갔다. 학교 후문을 통해 교실 옆을 지나는 순간, 지나가던 동네 형이 나를 반겨주었다. “자네 참 멋지네 그려” 그 형은 어릴 때부터 급사로 일하면서 학교의 잡무를 맡아왔다.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있을 때 교실 건물에서 탁구를 막 끝내고 나오는 여 선생님이 형에게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유 선생님!"


형이 등 뒤에서 선생님을 불러 인사를 시켜주었다. 그녀의 뽀얗고 해맑은 얼굴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엄마”라는 말이 그리움을 자극하듯이 “여 선생님”이라는 말은 내게 설렘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학교에는 정말로 아름다운 처녀 여 선생님이 두 분이나 계셨다. 줄을 세울 때마다 여 선생님은 맨 앞에 서있는 나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꼬마들에게 줄을 세웠다.


"자, 앞으로 나란히 해요, 여기 선생님을 봐요"


어려서부터 내 몸은 늘 부실했다. 등교하는 아침이면 언제나 딱딱하게 다져진 모래 운동장에서 조회가 열렸다. 여름날의 따가운 아침 햇살이 맑은 공기를 뚫고 빛을 쏟아낼 때면 나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병든 병아리처럼 상을 잔뜩 찌그리곤 했다. 그런 내게 그늘을 드리워주시는 여 선생님, 내 옷섶에 검정치마 자락을 붙이고 가쁜 숨을 쉴 때마다 나는 행복하기도하고 설레기도 했다. 콧등에 송골송골 솟아난 땀방울은 그렇지 않아도 해맑은 여 선생님의 얼굴을 더욱 눈부시게 했다. 교장선생님이 단상에 올라 훈시를 하실 때에도 나는 앞에서 우리를 향해 서 계신 여 선생님만 바라 봤다.


'저 여 선생님들이 우리 누나나 형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릴 때부터 동경해왔던 여선생님, 바로 그런 여선생님이 지금 장성한 내 앞에 서서 수줍어하고 있다니!  


"안녕하세요. 지만원입니다"


"저 유미영이예요"


"저도 이 학교 졸업생입니다"


"아,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인사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녀는 도망가듯 사라졌다. 생도시절, 위인전과 소설에 심취했던 나는 문학청년 흉내를 내면서 참으로 유치한 연애편지를 써서 20리 밖에 있는 읍내에 가서 부쳤다.


"유미영 선생님! 제가 다녔던 산골 모교에 아름다운 선생님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선생님을 뵈었던 그 순간 이후 제 동공은 선생님이 지나가신 공간을 응시한 채,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해맑은 선생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남루했던 이 동네가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돌다리를 건넜습니다. 졸졸 흐르는 냇물 소리가 전과 달랐습니다. 오솔길 풀잎들도 오늘만큼은 부드러운 손길 같았습니다. 여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제겐 환상이며, 지금도 최고의 선망입니다. .... 중략 .... 다음 주 수요일 밤, 학교 돌담길에 어둠이 드리우면 저는 추위와 어둠을 가르며 선생님께 달려가겠습니다."


수요일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저녁을 일찍 먹고 그녀의 거처지로 향했다. 옛날 가마니를 깔고 공부하던 흙 담 교실이, 객지에서 온 선생님들의 기숙사로 개조됐다. 기다랗게 지어진 일자집을 흙벽돌로 칸을 막았다. 천장에는 벽이 없었다. 만일 천장에 쥐가 있다면 그 쥐는 국경 없이 이 방과 저 방을 헤집고 다녔을 것이다. 각 방은 한 개의 부엌과 한 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었다.


"무얼~ 하세요?"


방바닥을 덥히려고 장작을 지피고 있던 유미영의 등 뒤에서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나지막하게 인사를 했다. 옆방에 있는 남자 선생님을 의식해서였다. 그녀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지 않아도 감기 약 좀 사러 역전엘 가려던 참이었는데 참 잘됐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남한테 들킬까 몰래 주고받는 목소리들에는 오래 전부터 만났던 사람들처럼 친근감과 은근함이 배어있었다. 그녀는 방에 들어가 코트를 입고 나왔다.


"같이 가실래요?".


"군불은 어떻게 하구요".


"괜찮아요. 장작을 깊이 넣었기 때문에 안전할 거예요".


나란히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내린 눈에 그리 많지 않은 발자국들이 나 있었다.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행여 동네 사람이 볼까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마차 길 정도로 나 있는 길을 나란히 걸었다. 닿을락 말락, 간간이 가슴이 뛰었다. 약방은 언덕길이 끝나는 기차역 앞에 있었다. 약방에 거의 도착할 무렵이었다. 나의 둘째 형이 광솔 불을 들고 "만원아, 만원아" 하면서 애타게 부르며 역전 길로 올라갔다. 소나무 뿌리를 말려주었다가 어둠을 밝히기 위해 불을 붙여 들고 길을 나선 것이다. 소나무 뿌리에는 송진이 있어 웬만한 바람에는 꺼지지 않았다. 놀란 그녀는 어쩌면 좋으냐며 어둠 속에서 내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형, 나 여기 있어' 하고 나타날 수 도 없고, 숨어버리자니 헤매고 다닐 형이 안타까웠다.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가 갑자기 나를 낚아채서 뚝 아래로 엎드리게 했다. 형은 계속해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언덕길을 올라갔다. 형을 따돌린 후 약을 사 가지고 다시 동네로 내려왔다. 막상 학교 근처에 도착해 헤어지기가 싫었다. “우리~ 개울가, 어때요?” “그래요. 그거 좋아요. 집에 가도 별 할 일도 없는데요 뭐” 기다렸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이번에는 앞쪽에서 누가 손전등을 이리 저리 흔들면서 다가왔다. 외길에서 들키는 날에는 꼼짝없이 소문에 휩싸여야 했다.


나는 그녀를 낚아채 가지고 경사진 논둑 뒤로 숨었다. 나는 눈 위에 누웠고, 그녀는 내 몸에 기댔다. 색, 색, 그녀의 가쁜 숨결이 뺨으로 느껴졌다. 개울가 조약돌 밭, 발을 옮길 때마다 흰 눈이 뽀드득 소리를 냈다. 개울의 한쪽은 논두렁 밑을 파고들었고, 다른 한쪽은 실낱같은 송사리 떼의 놀이터가 되었던 개울,  봄이 오면 논두렁에는 물방울이 구를 만큼 반지르르한 버들강아지가 물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물속에는 피라미, 불거지 같은 귀족 형 물고기들이 비늘을 번쩍이면서 유유히 떼를 지어 다녔던 개울, 바로 이 개울가에서 나는 "아름다운 여성", 아니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여 선생님"과 데이트를 시작한 것이다.


숨 막히는 학교생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가슴 벅차 했다. 나의 팔을 잔뜩 잡아당겨 그녀의 어깨에 밀착시킨 채 어린애처럼 성큼 성큼 걸었다. 뛰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자제하는 듯 했다.


"우리 노래 불러요, 남자가 먼저 부르는 거예요"


"눈이 내리는데, 산에도 들에도 내리는데 . . . ."


안다성의 이 노래를 그녀도 좋아한다며 여러 번 불렀고, 서로가 자라온 이야기와 지금의 이야기들을 대충 주고받았다.  


"춥지요?"


그녀가 춥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잡아 그녀의 얇은 코트 속에 넣어 주었다. 뼈마디가 없어 보이는 섬섬옥수, 손바닥의 부드러운 살집이 또 다른 감정을 깨워주었다. 달빛이 눈빛에 반사되어 온 동네가 신비로운 동화의 마을 같이 뿌옇게 보였다. 개울을 덮은 얼음이 속으로 흐르는 물에 스쳐 여기 저기 찢겨져 있었다. 갖가지 모양의 어름조각들이 물살의 속삭임에 맞춰 끊임없이 너울거렸다.


“재미있는 얘기 좀 해줘요”


“그게 재미있을라나?”


“뭔데요?”


“저 위에 개울 있지요? 장마가 지면 물이 큰 한 줄기로 흐르고, 가뭄이 오면 물이 두 줄기로 갈라져 조금씩 흐르는 거 아세요? 거기 돌다리도 있고, 그 옆에는 물레방아간도 있잖아요. 6.25 때 피난을 갖다 왔거든요. 지금은 다리가 있지만, 그 때는 미군 트럭들이 개울을 차로 막 밟고 지나다녔거든요. 한 다섯 명 정도의 동네 형들이 개울가에 몰려 있을 때 미군 트럭이 한 대 왔어요. 차 위에는 몇 명의 미군들이 타고 있었는데 길에서 개울로 들어서려면 개울이 길보다 낮아서 차가 일시 정지하면서 서서히 들어서잖아요. 그 때 동네 형들이 미군한테 뭐라 했는지 아세요?”


“욕했어요?”


“아니 이렇게 말했어요. 헤이, 초코레토 시가레토 메니 메니 오케?”


“그게 무슨 말이예요?”


“초콜릿하고 담배 하고 많이 많이 달라는 말”


그녀는 제미 있다는 듯 한참 웃었다. “그래서 미군이 던져 주었어요?”


“미군이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무엇을 집어 던질 듯한 시늉을 내면서 그냥 지나갔어요”


“그게 다예요?”


“또 있어요. 북쪽 계곡으로 무왕리라는 동네 있지요? 그 동네를 채 못 가서 낫처럼 구부러진 도로 가에 논들이 좀 있었어요. 그 밑에는 물레방아간이 또 있는데 아시죠? 나는 그때 8살이라 동네 형들이 잘 데리고 다녔어요. 형들을 따라 그 논 지역을 지나는데  미군이 마른 논에서 불도저를 가지고 계단식 논둑을 마구 타넘어 다니는 거예요. 아마 늦가을이었을 거예요. 몸이 아주 날렵하고 싸움도 잘하는 형 하나가 또 헤이, 초코레토 시가레토 메니 메니 오케 한 거예요”


별 내용도 아닌데 그녀는 재미있다며 또 웃었다. “그래서요? 이번에는 성공했나요?”


“아니요. 지난번에는 약과였어요. 이번에는 도자를 가지고 몰려있는 우리들을 향해 거대한 삽을 올렸다 내렸다 위협을 하면서 깔아 죽일 듯이 막 달려드는 거예요. 논두렁 아래로 내려 뛰기도 하고 올려 뛰기도 하면서 뛰었지만 도자의 속도를 당해낼 수 없었어요. 모두 다 겁에 질려 혼들이 나갔지요. . . 결국 내가 낙오 됐지요, 처음에는 나도 형들을 잘 따라 뛰었지만, 한참 그러고 나니 쪼그만 게 힘이 없잖아요. 그랬더니 그 도자가 나만 따라 다니는 가예요. 나는 또 사력을 다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요. 도자도 이리 달려오고 저리 달려오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더 뛸 힘이 없었어요”


“그래서요, 어떻게 됐어요?”


“울었지요 뭐, 엉 엉. 팔소매로 이렇게 눈물을 막 닦으면서”


“어머 불쌍해라. . .   그랬더니요?”


“그랬더니 염소 콧수염을 한 미군이 차에서 내려 나에게 성큼 성큼 다가오는 거예요. 큰일 났다 싶었지요. . .내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박스를 주고 가더라고요. 그걸 가지고 눈물을 훔치면서 행길로 나와 형들에게 갔지요. 형들이 박스를 열어보니 학용품과 백지가 가득 차 있더라구요. 그런데 형들은 학용품들에 손도 대지 않고 나를 다 주었어요. 처음 보는 고급 학용품, 정말 오래 오래 썼어요” 


“얼마나 놀랬겠어요, 말은 안통하고. . 딱해라” 


순간, 얼음 빛이 너무 곱기에 내가 얼음 위로 발을 얹자 그녀는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아서요 학생, 그러면 발 젖어요, 이제부터는 선생님 말씀 잘 듣는 거예요” 그녀의 변해진 말투와 표정들에서 읽을 수 있듯이 어릴 적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를 많이 좁혀 준 것 같았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발길을 돌렸다. 둘이서 주고받는  뽀드득 소리가 한동안은 대화의 전부였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들이 나의 뺨을 스쳤고 그럴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온기가 스쳐갔다. 어느 새 둘이는 그녀의 토담 방을 향하고 있었다. 맞은편 교장 선생님의 사택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의 입을 막고 벽으로 밀었다. 문이 닫히자 둘이는 벽에 등을 붙인 채, 발을 수직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고양이 걸음을 시작했다. 한 손으로는 벽을 더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의 손을 붙잡고 주위를 살피며 한 발작 한 발작 전진했다. 이번에는 또 교장 선생님 댁 울타리에서 커다란 눈송이가 스르륵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또 한 번 가슴이 얼어붙었다. 한 배를 타고 위기의 순간들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동안 두 사람의 마음은 가까워질 대로 가까워져 있었다. 방바닥에는 열을 보호하기 위해 요와 이불이 이미 깔려져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세우면서 주의를 주었다. 옆방에 남자 선생님이 있는데 책장 넘기는 소리, 돌아눕는 소리까지 들린다는 것이었다. 말없이, 그녀가 여유분의 파자마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이불 속에서 갈아입었다.     


요 위에 배를 깔고 나란히 누웠다. 그녀는 여러 장의 백지와 연필을 준비했다. “전에 애인 있었어요? ”아니“ 서로가 먼저 쓰겠다고 연필을 빼앗기도 했다. 오랫동안 추위에 노출됐던 터라 두 사람 모두 콧물을 흘렸다. 그녀는 재빨리 두루마리 휴지를 말아 나의 코를 눌러 콧물을 짜 주었다. 아마도 휴지를 내게 건네면 내가 소리 내서 코를 풀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늘 어린 학생들의 코를 닦아 주던 것이 습관이 돼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필 빼앗기를 계속했다. 엎드렸다가 불편하면 다시 쪼그려 앉았다. 문풍지를 울리는 한겨울 바람소리가 사납게 울고, 바람과 눈가루가 종이 창문을 마구 때렸다. 그럴수록 두 사람은 더욱 아늑한 행복감에 도취했다. 뽀얗던 그녀의 눈가에 나른한 안개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주보던 자세는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흩어지지 않고 화석처럼 보존돼 있었다. 


해가 뜨자 두 사람의 처지는 천지차이로 변했다. 그녀는 교장 선생님 댁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나가서 했지만 나는 해가 저물 때까지 그녀의 방에 갇혀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넣어주는 빵과 사이다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틈만 나면 그녀는 숨차게 뛰어와 문을 열어보고 나갔다. 날이 저물자 또다시 그 개울가로 나갔다. 불과 두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피곤 끼를 느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데다 빵으로 세끼를 때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 오늘 집에 일찍 갈래"


"조금만 더 있다 가자"


"더 있다 가면 나 무서워서 집에 또 못 가"


"그래도 조금만 더 있다 가자, 내가 업어 줄게 응?"


나보다 두 살이 어린 유미영은 나를 이렇게 달랬다. 다음날부터 나는 그녀의 창 뒷길을 걸으면서 휘파람으로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불렀다. 그녀를 불러내는 신호였다. 그리고 철봉대들이 있는 운동장 코너로 걸어가면 먼발치에 그녀의 검은 실루엣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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