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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먹여 체중을 늘려준 낯선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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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45 조회8,5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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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경복고등학교 건물에서 필기시험이 있었다. 시험 첫날 아침, 홍시 하나로 아침을 때우고 용두동에서 버스를 타서 광화문에 내렸다. 너무 긴장해서인지 내리자마자 위경련이 시작됐다. 병원에 들려 진통제를 맞긴 했지만 위를 쥐어뜯고 골이 뻐개지듯 아팠다. 하필이면 가장 자신 있던 물리와 수학이 들어있는 날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니 불길한 생각이 앞섰다. 첫날의 시험을 잘 못 보고 나니 그 다음 이틀간의 시험이 시들해졌다. 마음속에 육사를 포기한 후, 후기대학 중의 하나인 성균관대학을 지망해서 합격통지서를 받긴 했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하늘은 왜 내게 이토록 무심할까!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이 웬 일인가! 절망에 지쳐있던 어느 날, 육사로부터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긴장이 풀리면서 갑자가 독감이 찾아와 일주일씩이나 할퀴고 갔다. 어지러운 몸을 추슬러 가지고 제2차 체력검정 시험을 치러야 했다. 체력검정 내용은 신체검사를 다시 한 번 반복한 뒤에 턱걸이,역기,장거리구보,넓이 뛰기 등의 능력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제2차 신체검사는 육사 지구병원에서 치렀다. 또다시 그놈의 신장계가 크게 부각됐다. 바로 앞에 서있던 학생은 보기에도 나보다 키가 큰 것 같은데 키 부족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 광경을 본 나는 넋 나간 상태가 돼버렸다. 순간, 누군가가 나를 체중계 앞으로 밀었다. 키는 재지 말고 체중을 재라는 것이었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누군가가 와서 “야, 시간 없어, 빨리빨리 해” 하고 소리를 친 것 같았다. 신장 담당 하사관은 내 키가 충분한 수치로 기록돼 있어서 바쁜 마음에 재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니면 옛날 육군병원에서 나와 실랑이를 벌였던 그 하사관이 나를 기억해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키 재는 하사관이 혹시라도 마음이 변해 나를 다시 잡아당길까 무서워 얼른 체중계 위에 올라섰다. 1차 신체검사 때 나는 체중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일주일간의 심한 독감으로 체중이 3㎏씩이나 증발됐다. 체중을 재는 하사관은 조금의 배려도 없이 “불합격!”을 외치며 도장을 찍어버렸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또다시 넋 나간 상태가 되었다. 휑하게 뚫린 검은 눈에 순간적으로 눈물이 무겁게 고였다.


“야, 비켜.”


하사관이 소리를 쳤지만 나는 체중계 옆에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야, 안 들려? 비키라니까.”


바로 이때 키가 나만큼이나 작고 통통하게 생긴 대령 한 분이 나타났다.


“여기 요놈 무엇 때문에 그러냐?”


하사관이 사정을 설명했다.


“요놈 용지는 따로 뽑아놓아라. 내가 물 좀 먹여 가지고 올 테니.”


그분은 치과 사무실에서 주전자를 들고 나와서는 나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네놈은 이 물을 다 마셔야 해.”


갈증도 나지 않은데다가 몸살을 앓고 난 검부러기 같은 몸으로 물을 생으로 마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죽기 살기로 마셨다. 그 분도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안타까울 때마다 내 손목을 잡고 나와 체중계 앞에 세웠다.


“요놈 체중을 다시 재봐라.”


배가 터질 만큼 많이 마셨지만 겨우 1㎏ 남짓 보탰을 뿐이었다.


“아직 안되겠나?”


나를 다시 화장실로 데려갔다. 겨우 5백 미리 정도를 더 마셨다. 미달일 줄 뻔히 알면서도 그분은 나를 데리고 세 차례나 화장실과 체중계 사이를 왕복했다. 그때서야 그 하사관도 생각하는 바 있었던지 “대령님, 이제 됐습니다.” 하고 정정란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분은 나의 등과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어 주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신체검사의 최종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판정관 앞에 섰다. 그 판정관은 놀랍게도 키를 봐준 바로 그 미남 소령이었다.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토끼눈으로, 나는 그 소령에게 절을 꾸벅 했다.


“너 몸살 앓았구나. 입교해서 공부 잘해”


그는 웃는 얼굴로 신체검사 용지에 마지막 도장을 꾸-욱 눌렀다. 너무나 고마워 나는 그에게 허리를 두 번씩이나 굽히면서 뒷걸음으로 문을 나왔다. 꿈에서나 있음직한 아슬아슬한 악몽이었다.


목에까지 가득 찬 물배를 안고 병원에서 연병장으로 걸어갔다. 500m 거리. 발을 뗄 때마다 배에서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물배를 안고 어떻게 장거리를 뛰지?’


앞이 캄캄했다. 드디어 턱걸이부터 시작됐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턱걸이를 한다는 것이 배걸이를 했다. 턱이 걸려 있어야 할 철봉대에 배가 걸린 것이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휑한 눈으로 대위님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이 원체 초췌해서였는지 대위 시험관이 조교에게 나를 내려주라고 지시했다.


“아, 그 학생은 됐다.”


남아있는 4회의 턱걸이를 면제시켜 주었다. 역기도 다섯 번을 들어 올려야 했지만 그 대위님은 한 번만 들게 해주었다. 첫 회를 들어 올리는 데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입교해보니 그분은 체육과의 명물로 통하는 차대위님이었다. 드디어 2㎞를 뛸 차례가 왔다. 20명 틈에 끼어 출발선상에 섰다.


‘뛰다가 뱃살이 꼿꼿해지고, 힘이 모자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졸도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


어렸을 때에는 손기정 선수처럼 되어보겠다고 동네 꼬마들과 곧잘 마라톤 연습을 했다. 갈증 나는 여름철이라 개울을 건널 때면 엎드려 물을 마셨다. 마시고 나면 여지없이 뱃살이 꼿꼿해져서 뛸 수가 없었다. 드디어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물이 출렁이지 않도록 배를 잔뜩 안으로 집어넣고 뛰었다. 한 바퀴를 도는 동안에도 내 몸을 수십 번씩 꼬집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2㎞를 뛰는 동안 뱃속의 물이 내내 잠잠했다. 20명 중 6등으로 골인을 했다.


‘아! 이제는 끝났구나!’


대부분의 지망생들에게 신체검사는 하나의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내게는 첩보영화의 주인공이나 겪을 수 있는 온갖 스릴과 고뇌의 장애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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