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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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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50 조회6,3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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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선 철로를 따라 경기도가 끝나고 강원도가 시작되는 접경지대, 양평역과 원주역 중간쯤 되는 지점에 구둔역이 있다. 기차에서 내려 둑으로 형성된 언덕길을 따라 내려가면 개울도 있고, 들녘도 있고, 초등학교도 있고, 느티나무들도 있는 분지 형의 마을이 전개돼 있다. 전국이 현대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 지금도 이 마을만큼은 개발의 손톱자국이 나지 않은 70년 전의 그대로다. 그래서 이 마을은 2006년 “대한민국 근대유형문화재”로 등록됐고, 2008년에는 경기도로부터 ‘영화체험마을’로 지정돼 있다.  


마을의 동쪽, 산세를 따라 반달 같이 굽어간 높은 언덕에는 중앙선 철도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칙 칙 퍽 퍽. . . 칙칙퍽퍽 . . . . . 북쪽 굴에서 나온 검은 기차는 남쪽 굴로 사라질 때까지, 내리막길에서는 흰 연기를, 오르막길에서는 검은 연기를 힘겹게 뿜어냈다. 서쪽 고래산 기슭에는 해맑은 냇물이 흰 속살을 내보이며 남북으로 흘렀다. 내가 살던 집은 서쪽산 밑자락에 지어진 외딴집으로,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냇물이었다. 높은 집에서 바라보는 냇물은 언제나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내를 따라 늘어선 미루나무, 버들나무, 찔레꽃 그리고 숲 사이로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 하얀 조약돌 밭, 이렇게 조화된 풍경은 어린 나에게 한없는 아늑함과 꿈을 뿜어내 주는 고향의 젖무덤 같은 것이었다. 특히 장마철,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내리 꽂힐 때가 가장 좋았다. 굵은 빗줄기가 세찬 바람에 이리 저리 흘러 다니면서 자아내는 희뿌연 기운과 내리 꽂히는 빗줄기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곤 했다. 화로 불에 묻어둔 감자 한 개에 설렘을 간직한 채, 처마 밑에서 강하게 부서지는 물방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 때가 많았다.


동네의 어디를 가나 개울은 명경지수, 두 손을 짚고 엎드려 입을 물위에 대고 쭉쭉 빨아들이는 것이 바로 당시의 물먹는 모습들이었다. 투명한 물을 봇둑으로 가둬놓은 깊은 물,  귀족형의 피라미와 불거지들이 아름다운 비늘을 반짝이면서 떼를 지어 다녔다. 나는 한없이 고개를 달아매고 쪼그려 앉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곤 했다. 단 한 마리라도 어항에 길러봤으면! 얼마나 동경했는지 모른다.


분지의 한 가운데에는 어린이 키 정도로 깊은 작은 보가 하나 있었다. Y자 형의 분지를 따라 두 개의 계곡에서 흘러 온 물이 이 보에서 합쳐지면서 수량이 2배로 늘어났다. 더운 여름이면 이 보는 몇 안 되는 동네 꼬마들의 유일한 놀이터가 되었다. 신작로 가장자리에서 옷을 벗어 책보와 함께 겨드랑이에 끼고 보를 향해 냅다 질주하면서 책보와 옷을 도톰한 백사장에 내던지고 물속으로 수평 다이빙을 했다. 물속으로 들어간 나는 눈을 뜨고 거북이 몸짓을 하면서 바닥에 코를 스칠 정도로 밀착한 채, 한동안 하얀 모래 위를 질주했다.  


그 동네 한 가운데에 당시 ‘일신국민학교’가 있었고, 나보다 일곱 살 더 많은 넷째 형은 형제들 중에서 막내만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어리광이 질질 흐르는 나를 업고 개울을 건너 학교에 입학 시켰다. 그리고 나는 그 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경기도 양평군의 면사무소 소재지인 지평에 있는 지제중학교로 진학을 했고, 여름에는 걸어서, 겨울에는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당시에는 서울로 통근하는 사람들을 위해 통근열차가 원주로부터 청량리까지 운행되었고, 이 통근열차가 구둔역을 통과하는 시각은 새벽 5시였다. 시계도 없는 새벽, 첫닭이 울면 나보다 47세 많으신 환갑의 어머니는 나를 깨워 새로 지은 밥에 계란을 넣어 비벼주셨다. “에구 딱한 것, 추워서 어떻게 하나!”


새벽 5시 20분 정도에 지평역에 내리면 학업이 시작되는 8시까지 추운 겨울 시간을 어디에서든 보내야 했다. 역무원 사무실에는 무연탄을 때는 난로가 있었지만 늘 신세를 지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아마도 지제중학교 1학년 중에서 선생님들로부터 가장 예쁨을 받는 학생은 나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선생님은 음악과 영어를 동시에 가르치시는 미남선생님으로 평양에서 피난 나오신 남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새벽에 기차에서 내리면 곧장 선생님 집으로 오라고 했다. 눈 내린 겨울 새벽에 길을 뚫으며 선생님 셋방에 도착하면 문밖에도 문 안에도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추위를 못 이겨 달려오긴 했지만 막상 문 앞에 다다르니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한동안 서성거렸다. “서, 선생님, 주 무 세 요?” “그래, 어서 들어오라, 어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선생님은 두꺼운 이불을 제치고 등잔에 불을 붙이셨다.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아이를 가운데 눕히고 사모님과 주무시다가 일어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책상에서 여러 가지 영어책을 내주셨다. 2학년, 3학년 책도 있었다. “이거 출판사들에서 교과서로 골라달라고 선생님한테 온 거야, 이거 다 가지고 공부해” 나는 교실에 가기 전까지 이렇게 신혼 중인 선생님 셋방에 가서 영어책을 읽고 외웠다. 학업이 끝나면 교실에서 시간을 기다리다가 밤 9시 정도에 지평역을 통과하는 통근열차를 탔다. 군인들과 교복 입은 형들이 필자를 무릎에 앉혀 주면서 영어책을 읽고 해석하라 시켜도 보고 자기가 공부하던 수학책들도 주었다. 밑줄이 한없이 많이 그어져 있었고, 책들의 여백에는 형의 이해하는 방법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렇게 얻은 풍부한 영어책들과 수학책들을 싸들고 청량중학교에 다니는 동네 형들을 따라 넓은 서울로 올라왔다. 지금의 장안평에서 독방을 얻어 노동일을 하는 큰 형 집에 머무르며 신문도 배달하고, 철판을 두드려 시발 자동차를 만드는 이른바 서비스공장도 다니고, 건설현장에 가서 여러 가지 일을 거들면서 일당도 받았다. 서비스 공장은 지금의 종로 5가에서 대학로로 향하는 길목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는 노천부지였고 지금의 지프차 형으로 만들어진 시발택시의 차체를 아세치렌 가스불로 달구어가지고 망치로 때려 만드는 곳이었다. 긴긴 여름날에도 점심을 굶었고 얼굴은 검은 흙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나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철조망 밖 인도에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여학생들의 모습들이었다.


당시 숭인동 근방 청계천의 둑 밑에는 고흥중고등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어엿한 동대문 상고가 됐지만 당시에는 3류 학교였다. 나는 학비를 마련해 가지고 그 학교의 교무실로 찾아갔다. 땅땅하고 얼굴이 잘 생긴 선생님이 교무실 입구에 서서 우물쭈물하는 나를 불렀다. “너 누구야, 이리 와 바”, “너 여기에 왜 왔어” “학교를 다니고 싶어서요” “야, 이놈아 무작정 무슨 학교야” “저는 양평군 지제중학교를 다니다 왔는데요, 2학년으로 입학하고 싶어서요” “전학 증명서 가지고 왔어?” “없는 데요” “야, 이 맹랑한 놈 봐라, 너 눈이 참 예쁘구나. 이리 와 바” 그는 영어책을 꺼냈다.  “너 임마 여기를 크게 읽고 해석해봐” 필자는 크게 읽고 해석을 했다. “야 이놈 봐라, 시골뜨기 치고는 제법인걸, 수학선생님, 여기 이놈에게 2학년 수학문제 좀 풀어보라 하세요” 수학선생님은 인수분해, 2차 연립방정식, 응용문제 들을 풀라고 했고, 나는 매우 빠른 속도로 풀었다. “어 이놈 봐라, 영어 선생님, 이 애 수학도 잘 하네요” “그래요?”


담임선생님이 나타나시더니 “너 이리와” 하고는 나의 손목을 잡고 2학년 반에 데려다 앉혀주었다. “네 자리 여기야, 알았어?” 고흥중학교는 이렇게 해서 들어갔다. 담임은 이인수 선생님, 키가 큰 미남선생님이었다. 어쩌다 시골에 가면 과수원에서 과일을 싸들고 담임선생님 집으로 찾아가 새벽잠을 깨우곤 했다. 이렇게 들어간 학교를 나는 가끔씩 한동안 나가지 못하곤 했다. 돈이 벌리면 나가고 돈이 떨어지면 슬며시 그만 두었다. 그만 둘 때는 슬며시 사라졌고, 다시 나가고 싶을 때는 이인수 선생님을 찾아갔다. “오, 너 왔니? 안 보여서 걱정했잖아. 그래 학교에 다시 나오려고?” “예, 학비를 좀 마련했거든요” 그는 나를 고1 야간반으로 데리고 가서 앉혀주었다. “네 반 친구들 다 여기에 있지?” 나쁜 곳으로 빠지지 않고 공부를 하겠다며 다시 찾아온 것만으로 고마워하신 것이다.


2학년 조금, 3학년 조금 다니다 보니 졸업장도 없었다. 중학교 졸업장 없이 고1이 된 것이다. 이렇게 가끔씩 나갔지만 시험을 치면 꼭 2등을 했다. 1등은 똘똘이 김영조라는 학생이 했다. 고1도 몇 달 다니지 못하고 한동안 돈을 벌었다. 나이에 맞춰 학교에 다시 가려하니 고2로 가야 했다. 그런데 용두동 미나리 밭 한 가운데 검은 판자로 지어진 야간학교가 하나 있었다. 한영고등학교였다. 거기에서도 졸업장 없고, 전학증명서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어느 날, 한영고등학교 3학년 담임 이종선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다. “야 지만원, 너 기록을 보니까 중학교 졸업장이 없더라, 내가 한영중학교 졸업장 하나 만들어 줄께” 


이렇게 해서 나는 한영중학교 졸업장과 한영고등학교 졸업장을 쥐게 되었다. 요사이 내가 이런 이야기를 주위에 들려주었더니 마치 이상한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신기해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다. 지금의 시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목가적인 옛날사회, 이러한 낭만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에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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