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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판부를 재판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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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3-12-08 15:59 조회5,1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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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속 없이 사는 ‘영원한 자유인’ 되려다 거미줄에 얽혀


내가 겪어온 역경은 내가 자초한 역경이었다. 내 기득권을 얻으려고 자초했던 것들이 아니라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열정의 반대급부였다. 나는 선진국의 사례들을 많이 연구했다. 우리나라의 낙후된 국가경영 시스템과 정책에 대해 많은 말을 하였다. 김대중 이전의 10년 동안 나는 우리 사회의 폭넓은 공간에서 신선한 충격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때 김대중이 내게 접근했다. 1등 칸을 타고 중국을 갈 때 그는 부인의 자리에 나를 앉히고 갔다. 중국방문 10일 동안 그는 나를 자기 옆에 앉히고 뭐든지 물었다. “지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요?” 
 

대통령이 되면서 그는 제게 여러 사람들을 보내 자리를 제의했다. 2000년 총선 때 한나라당 부총재가 내게 전국구를 주겠다 제의했고, 정책위 의장 자리를 맡으라는 제의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은 소망 때문에 모두 거절했다. 당시 나는 장관들보다 더 날렸고, 더 많은 벌이를 했고, 더 없이 행복했다.  

육사22기 졸업생 앨범에 나의 포부가 실려 있다.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 그 앨범에 기록돼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유명인(somebody그)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나는 무명인(nobody)이 되고 싶어 했다. 이는 즉흥적인 생각에서가 아니라 사관학교 4년 동안 자습시간의 60%와 4년간의 주말을 투자한 독서의 결과였다.  

1980년대 나는 홍릉 국방연구원에서 근무했다. 나의 제안에 의해 윤성민 국방장관은 전무후무하게도 “국방예산개혁”을 5년간 추진했다. 육해공군에서 지만원을 모르는 장교는 없었을 것이다. 적도 많았지만 “지만원은 국보”라며 적극 옹호하는 장군들도 많았다. 공군이 국방예산의 8%에 해당하는 2억 5천만 달러에 휴즈사로부터 방공자동화 장비들을 구입했지만 그 장비는 중국과 북한으로부터 넘어오는 항공기들을 단 한 차례도 탐지하지 못했다. 당시 보안사는 내게 분석을 부탁했고, 나는 “ 이 장비를 가지고 적기를 포착한다면 그게 기적일 것이다. 이 장비는 25달러의 가치도 없다”는 결론을 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도 자유인의 선택 

이때도 옷 벗을 각오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국방장관, 공군총장 등이 청와대에 불려가 전두환으로부터 혼찌검이 났다. 그들은 나더러 연구소를 떠나라 했지만, 나는 아예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버렸다. 장군계급을 코앞에 두고 내가 스스로 옷을 벗은 것은 장군이 내 자유를 속박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으며, 대령에까지 올라간 것은 국가가 나에게 석사와 박사 학위를 따게 해준데 대한 의무기간을 채우다 보니 올라간 것이었다.  

나는 대위-소령 시절에 군 장학금으로 미국 해군대학원에 유학했다. 미해군대학원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죤 스타인백'의 컨트리로 불리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미 서해안 몬터레이 반도에 있다. 영화 ‘피서지에서 생긴 일’과 ‘에덴의 동쪽’이 여기에서 촬영됐고, 미국의 작가들과 시인들이 많이 찾는 낭만의 공간이요 그림 같은 공간이었다. 바람이 이는 밤이면 파도가 무섭게 포효하고, 조용한 밤이면 물개 우는 소리, 실파도 소리가 침상의 시상을 자극하는 시인의 고향이기도 했다.  

한국 국민들은 프린스톤이니 하버드니 스탠포드니 하지만 당시 미해군대학원 학비는 스탠포드 대학 학비의 2.5배나 되었다. 미국의 그 어느 대학도, '학생 1명에 교수 1명'이 따라 붙는 가정교사식 학업진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해군대학원은 나에게 이를 허락했고, 주말에도 교수를 지정하여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미국에서도 유례가 없는 귀족학교인 것이다. 국가로부터 이러한 혜택을 받았기에 국가는 나에게 의무 복무기간을 추가했다.  

                             출세의 길은 넓고 자유의 길은 험하고 좁았다 

1987년 2월, 나는 45세에 대령계급을 버렸다. 그리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갔다. 아무런 기약도 약속도 없었다. 그냥 시작한 방랑이었다. 나갈 때에는 홀트양자회로부터 미국으로 입양되는 어린 아이 3명을 맡아 미국의 양부모에게 인계하는 대가로 항공료와 미국내륙용 항공티켓을 여러 개 얻었다. 이 티켓을 가지고 여러 지역을 다니다 보니 지극히도 우연하게 나를 좋아한다는 미 국방성 고위간부를 만났다. 그는 내가 근무하던 국방연구원을 방문했다가 나의 연구 방향에 많은 동감을 표시했던 분이었다. 이 인연으로 인해 나는 내 모교인 미해군대학원에 적을 두게 하고 미해군대학원과 펜타곤에서 동시에 근무하게 해주었다.  

나는 1990년 귀국했고, 그로부터 10년 동안 그야말로 자유로운 공간에서 명실공히 자유인으로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강연과 집필과 방송, 아마도 1990년대에 필자는 매스컴의 프리마돈나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자동으로 생활비가 벌리는 자유인, 이른바 프리랜서의 이 길이 바로 내가 사관학교 독서를 통해 꿈꾸었던 그런 길이었다.  

이 행복했던 시절에 이변이 발생했다. 북한에 충성하는 김대중이라는 반역자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1998년 2월, 서울중앙지검의 검찰이 나를 법정에 세웠다. 전력증강사업(율곡사업)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던 글이 국방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생전 처음 겪는 재판, 참으로 역겹고 불쾌했다. 그 이전에 나는 검찰이나 판사 같은 사람들과는 거리가 아주 먼 자유공간에서 활동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에 대한 상식이 일천했다. 검사나 판사에 대해서는 아주 멀리 거리를 두고 기피해야 할 '불청객'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면서 그런 존재들이 드디어 내 발등을 물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이 태어나고 생활하고 죽는 것은 절대자의 프로그램 대로 진행된다는 것이 나의 운명관이다. 이것이 아마도 절대자가 짜 놓은 나의 인생경로일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판인생에 대한 기록들은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 대상일지도 모른다.

 

2013.12.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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