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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승만과 박정희를 생각한다(그랑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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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3:49 조회5,4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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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승만과 박정희를 생각한다
다시 이승만과 박정희를 생각한다

- 대한민국 정통우익세력의 부활을 확신하며




1.
해방 후 우리에게 다섯 분의 민족지도자가 있었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이 그들이다. 과연 이 다섯 분중에 누가 올바른 길을 인도한 훌륭한 지도자였을까?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들어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붕괴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모두다 서둘러 자본주의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동안 키워 왔던 국영기업들은 개방체제하에서 경쟁력이 없었으므로, 하루 아침에 문을 닫고 외국기업들에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실업률이 10%대인 지역은 상황이 너무 좋은 곳이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실업률이 70%를 넘는 곳도 있었다. 여자들은 몸을 팔고, 남자들은 품을 팔아야만 했다. 그나마 월급을 변변이 주는 곳은 외국기업들 밖에 없었으므로, 동구의 젊은이들은 필사적으로 영어, 독어, 불어를 배워야만 했다.


지난 40여년간 배워 왔던 지식, 믿어 왔던 가치관들이 하루 아침에 틀린 것이 되고, 거의 모든 것을 새로 고쳐 배워야만 했다. 지난 40여년간 편안하게 길들여져 있던 모든 제도와 관행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새로 생겨난 제도들은 무슨 소린지 언뜻 이해되지 않는 안갯속 같고 깝깝한 것이었다. "온통 헛고생한 40여년의 세월"이라는 쓰라린 낭패감을 안은 채 마치 하루 아침에 땅에 나와 살라고 내팽개쳐진 물고기떼와 다름없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비규환의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우리는 그동안 이승만이 민족분열을 획책했다느니 친일파를 온존시키고 독재를 했다느니하여, 그를 물어뜯고 할퀴고 우리 스스로를 자학하는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승자의 편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동구권 사람들이 깝깝하고 끔찍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을 동안, 우리는 승자의 언덕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해방 당시 쟁쟁했던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이승만을 냉랭히 외면한 채, 박헌영과 김일성의 진영으로 모여들었다. 1945년 당시 한반도는 온통 빨갱이들의 나라였다. 이승만이 외로이 들었던 "남한 민주기지론"의 깃발 아래에는, 해방 당시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던 친일파들까지도 다수 끼어 들었다. 이승만은 이 친일파들까지도 부여 앉은 채, 초라하고 오욕으로 얼룩진 모습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온갖 반대와 욕설을 무릅쓰고, 반공친미노선-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로 신생 대한민국의 방향을 힘껏 틀었다. 이는 우리가 승자의 언덕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이 되었다.


모든 정치지도자들에게 공과가 함께 하거니와, 아직도 이승만의 과를 천착하기에 바빠서 그가 우리 7000만 한민족에게 베풀었던 큰 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역사를 모르는 민족이다.





2.
1980년대 중반 한국은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어제까지 만성 국제수지 적자국가이던 한국이 년간 100억불내외의 국제수지흑자 행진을 계속하였고, 년간 경제성장률이 10%대를 넘는 고공행진을 계속하였다. 중화학공업위주의 고도산업구조와 수출상품구조가 정착되었다. 한국자본주의의 대성공을 알리는 화려한 불꽃놀이였다.


어디로부터 이런 경이적인 성공이 비롯된 것일까?


요사이 논자중에는 이를 "3저호황"때문이라고 쉽게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3저호황은 전세계 공통현상이었다. 선진국들은 제2차 오일쇼크의 충격을 가까스로 벗어나 경제성장률은 겨우 회복되는 수준이었고, 대만, 홍콩, 싱가포르등 또한 국제수지흑자의 증가가 대단치 않았으며, 브라질은 오히려 100억불 적자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오직 한국만이 비약적인 상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가깝게는 제5공화국 초기, 매섭고 세련된 솜씨로 새로운 성장체제로의 판짜기를 진두지휘했던 경제수석 김재익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최우선시했던 그의 정책들은 지금 음미해도 탁월한 바가 있고, 확실히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에 크게 기여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불과 3년여의 재임기간에 불과했던 김재익이 중화학공업위주의 고도산업구조를 창출하고 정착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누구도 언급하기를 꺼려했지만, 1973년부터 국가의 명운을 걸고 비장한 각오로 중화학공업투자를 감행했던 박정희가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을 만들어 낸 최고의 기여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했어야 했다.


박정희가 주도했던 중화학공업투자는 1979년 제2차 오일쇼크의 강타를 맞아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고, 그 와중에 박정희도 비운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지만, 5공 초기의 혹독한 구조조정과 경쟁력강화정책을 거친 후, "3저호황"을 만나자 화려한 꽃을 피우며 정착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를 달성한 단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전세계적으로도 이러한 산업구조를 가진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정도 뿐이며, 영국과 이탈리아는 이미 이 대열에서 탈락하였다. 중국이 이 대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따라 오고 있지만, 그들이 과연 한국 수준의 성공을 할 수 있을지는 최소한 10년은 더 두고 보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진국들의 대부분은 바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혹독한 고난의 역사가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6.25내전으로 지옥까지 다시 한번 굴러 떨어져야 했고, 1960년대 초가 되서야 남들이 섰었던 출발점에 형편없는 지각생으로서 겨우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불과 20여년만에 우리는 다른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를 이루어 낸다. 박정희가, 박정희와 더불어 우리가 이루어 낸 놀라운 성취였다.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는 한민족 5000년 역사를 통털어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보물이라고 생각된다. 이 위대한 보물단지로부터 경제적 번영과 복지는 물론, 강대한 군사력과 수준 높은 민주주의가 나온다. 질 높은 교육과 의료가 나오고, 깨끗한 환경이 나온다. 세계일류수준의 문화가 나오고, 보다 질 높은 삶, 인간다운 삶이 나온다. 한국이 주도하는 "좋은 통일"이 나오고, 국제사회에서 당당할 수 있는 한국인들이 나온다. 오랜 세월 주변 강대국들에 짓밟히고 주눅들어 살아 온 한국인들에게는 여전히 생경할 수 있는 "강대국 대한민국"이 나온다.


왜 한국을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라 할 수 있었을까?


우선 철강, 기계, 자동차, 조선, 전기, 전자, 반도체, 정보통신, 석유, 화학등 국가적 명운을 걸고 추진했던 모든 대규모 투자들이 단 하나도 실패한 것이 없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핵심적인 기업들의 소유권 내지는 경영권을 모두 한국인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한국은 강대국들만이 누리고 있는 훌륭한 밥벌이들을 우리 손으로 직접 영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1997년 뼈저리는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여전히 이 기조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의 위치에 올라 있다. 적어도 한국이 세계 5위권내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이 된다면 세계중심국가중의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남북으로 분단되고 세계 4강에 둘러싸인 이 기가 막히는 지정학적인 구도속에서도 한국은 자주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물적·군사적인 기반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일제 식민지, 6.25내전들로 말미암아 이 땅이 또다시 짓밟히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NO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한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세계 10위권이니까 "고지는 바로 조기"라고 말하고 싶다.


박정희로부터 비롯된 개발년대의 성취가 요즈음 온갖 우울한 기사들이 신문지를 얼룩지게 해도 한국에 대한 희망을 끝내 버릴 수 없는 이유이며, 향후 남북통일이 되어 먹여 살릴 식구가 갑자기 2000만명이 늘어난다 하여도 크게 걱정되지 않는 이유다.


박정희는 개발독재자로서 오직 성장일변도의 정책만을 추구한 사람으로 인상지워져 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에 대해,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 행동과 실적으로 그들의 실생활 향상을 진지하게 의도했던 사람으로 판단된다. 1970년대에 박정희는 심혈을 기울여, 공업화우선정책으로 소외되고 희생되었던 농어민들을 대상으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말로는 박정희를 존경하는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실제 우리 공동체사회의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배려나 구체적인 행동에 인색한 자들이나, 말로는 분배, 분배를 외쳐대면서 실제로 어떤 뚜렷한 성과도 보여 주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들과 박정희는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어쩌면 단군이래 박정희보다 이 나라를 단기간 내에 급속히 성장시키면서, 동시에 분배문제에도 성공한 사람은 달리 없는 듯하다.


새마을운동은 성공한 녹색혁명이었으며 당시 많은 후진국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때 분명히 우리의 농어촌은 활력이 넘쳤으며 희망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박정희가 죽고 난 후 새마을운동은 잊혀지고 추락해 갔지만, 그것이 1970년대 한국농업의 한 이상형을 제시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 이후 한국농업은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의 대지진을 맞으며 격렬하게 흔들리게 된다. 그 여진은 금번 칠레 FTA비준 반대시위까지 이어졌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타결이래 정부는 6조원을 농업에 지원하였다고 하며, 칠레 FTA로 인한 농가피해보상을 위해 1조원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2002년말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의 자본금이 8891억원이니까, 삼성전자 7개이상을 털어 넣겠다는 셈이다. 한국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인구기준 7.5%, GDP기준 3.4%인 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정부는 최근 120조원대의 농업지원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무슨 지원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1년치 한국정부재정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삼성전자 135개를 세울 돈이다.


그런 재원을 농업에 쏟아 부으면 국민경제전체에 무슨 긍정적인 효과가 얼마만큼 기대되는가? 식량자급, 식량안보는 얼마나 이루어지며 국제시세의 서너배라는 국내 쌀값은 얼마나 떨어지는가? 농민들이 사회적 약자라지만 7.5%의 농민을 위해 나머지 92.5%의 국민들이 이에 흔쾌히 동의할 수 있는가? 4월총선용 대책은 아닌가?


어떤 시원한 비젼의 제시도 없이 한국의 농업정책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게임"을 하며 계속 표류하고 있다.




3.
자주국방에 대한 박정희의 강렬한 의지와 실천은 거론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다. 차라리 경제발전의 성공을 위해 정치 민주화를 희생시켰다고 평가되는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한국의 정치 민주화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인가에 대한 올바른 천착이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박정희와 그에게 종사했던 우익세력, 산업화세력이 성공시킨 경제발전이 한국에 광범위한 중산층을 창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의 여론조사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항상 70%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참여에 있어서도 전투적이라 할만큼 적극적이었다. 우리가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라고까지 매도하는 바로 그것이, 한국의 대규모 중산층이 보여준 정치참여의 강렬한 모습이었다고 생각된다.


"지역적으로 분할·표출된 중산층의식"이 "지역감정"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정치의 민주화를 추동해 간 사실은 한국정치 민주화의 전 과정을 통해 명료하게 드러나 보인다. 학생운동·사회운동·노동운동의 자잘한 사건들은 거의 다 잊혀졌지만, 지역감정은 정치민주화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거대한 활화산과 같은 분출을 하면서 비약을 이뤄내곤 하였다.


1979년 김영삼에 대해 신민당 총재직무금지 가처분결정이 내려지자, 특히 부산·경남권의 중산층들은 폭동형태로 그들의 분노를 표출하였다. 부마사태가 터졌던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계엄령·위수령을 발령하는 등 초긴장상태로 빠지게 되고, 그 진압방법을 둘러싼 강온파간 갈등은 10.26사건을 유발하게 된다. 결국 부마사태는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종식으로 연결되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자, 특히 광주·전남권의 중산층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그들의 절망감을 폭발시킨다. 전두환 정권은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무력진압에 성공하였지만, 그 후유증은 전두환 집권 7년 내내 돌이킬 수 없는 멍에가 되어 끝 모를 정치불안, 사회혼란으로 이어진다.


마침내 1987년 6월항쟁이 발발하게 된다. 김영삼, 김대중이 모두 관여했던 6월항쟁은 "넥타이 부대"로 통칭되는 수백만 중산층 시민들이,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시위에 참여하면서 급기야 6.29선언으로 귀결되게 된다. 부마사태,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을 통해 표출된 격렬한 지역감정은, 마침내 총칼과 고문과 정보정치에 의존했던 군사정권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마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간 우리는 이들 사건들을 모두 민주화운동으로 성스럽게 불러 왔다. 어쩌면 이들 사건의 근본적인 동력이 매도당해야 할 "지역감정"이라는 사실에 대해 애써 눈감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영삼과 부마사태, 김대중과 광주민주화운동, 김영삼·김대중과 6월항쟁이 정확히 지역적으로 공명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역감정의 근본은 "지역별로 표출된 중산층의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지역감정에 의해 이들 사건이 일어났다고 솔직하게 표현한다해서 이들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과 의미가 훼손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한국 정치민주화 역사의 의미가 더욱 명료해 질 뿐이다.


또한 지역감정은 1980년대이래 한국의 정치구도를 지역별 중산층에 기반을 둔 지역정당구도로 구조화시키기에 이른다. 한국정당의 정강들간에는 차이가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역별로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중산층에 기반을 둔 정당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차이가 없는 게 당연하지 비난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비중산층적이거나 반중산층적인 어떠한 정치이념이나 주장도 의미있는 정치세력화하기에 불가능한 정치환경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군사정권이 무력화된 이후 지역정당구도는 각종 선거에서 지역간 합종연횡을 통해 차례로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탄생시키며 순조롭고 안정적인 정치민주화를 이루어 내게 된다. 한국의 정치민주화는 대규모 중산층 시민들이 "지역감정"이라는 이름의 정치참여를 통해, 때로는 격렬한 폭동과 시위로, 때로는 지역구도하의 선거로 이루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란 드높은 악명속에 거론조차 되지 않았지만, "지역감정이 한국정치의 민주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순기능"을 인정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선진국들의 정치민주화 경험에 따르면, 경제발전이 하루하루의 갈급한 생존문제에서 벗어난 광범위한 중산층을 성립시키고, 다수 중산층의 보다 질 높은 삶, 보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이 견고한 정치 민주화의 토양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동안 지역감정에 덧씌어진 악명때문에 우리는 그 말의 밑바닥에서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던 "대규모 한국 중산층들의 보다 질 높은 삶, 보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을 간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선진국 정치민주화의 일반적인 경험은 한국에서도 예외없이 타당했다고 보여진다.


물론 한국의 지역감정에 "국민소득 1만불 이하수준에서 형성된 아직 성숙치 못한 중산층의식"이 반영되고 있다는 비난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역감정을 망국적이라고까지 매도하는 것은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캐나다등 더 극심한 다른 나라의 예들을 고려할 때 분명히 과장되었고 자학적이다.


한국 민주화과정에 1980년대 학생운동·사회운동·노동운동의 기여를 부각시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운동권 사람들은 전체국민 5000만 중에서 항상 소수 또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용기있게 목소리를 높이 외친 자, 앞장 섰던 자로서는 평가될 수 있겠지만, 그들이 항상 소수로 남은 채 광범위한 중산층의 전투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한, 군사독재정권의 지속적인 탄압의 대상은 되었을 망정 군사독재정권을 패퇴시키지는 못할 일이었다.


특히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듯이, 그들은 후보단일화론·비판적 지지론·독자후보론으로 분열되면서, 김영삼, 김대중의 제도권 민주화세력으로 흡수합병된 후 소멸되어 갔다. 그들의 정치적인 정체성과 뿌리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1980년대 이래로 한국 중산층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은 그들이 때로 지역감정을 악용하여 국가분열적인 대립양상을 초래하기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대한 공로를 일정하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집권이후까지의 실적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그들의 국가에 대한 총체적인 기여는 대단히 회의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김영삼은 한국의 외환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는 대규모의 과잉투자들을 방임·조장하였으며, 특히 1994년이래 중국과 일본의 평가절하정책에 대해 손을 놓고 있다시피 했다. 1994년 중국은 30%의 평가절하를 일시에 단행하였다. 한편 일본은 1994년부터 아시아 외환위기때까지 점진적으로 30%이상의 평가절하를 해나간 반면, 한국은 같은 기간에 11%의 평가절하를 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한국도 최소한 일본수준의 평가절하를 했어야 했다. 그래서 수출을 빨리 늘리고 과도했던 외채를 상환하도록 압박했어야만 했다.


외환위기 초년도인 1998년에 한국경제는, 30-40%의 원화 평가절하만으로 485억불이라는 경이적인 무역수지 개선효과를 거둔다. (97년 -81.6억불, 98년 403.6억불 : 한국은행통계 기준) 이제까지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중에서 초년도에 이런 정도의 경이적인 무역수지 개선효과를 보인 나라가 있었는가? 도대체 이런 능력을 가진 한국이 왜 외환위기를 당해야 했다는 말인가? 높은 부채비율, 비효율적인 금융시스템등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고 해도, 한국경제전체의 펀더멘탈은 올바로 관리되기만 했다면 절대로 외환위기를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1994년이래의 환율정책실수에 대한 안타까움은 계속 남는다.


후임 김대중은 "우리는 2년반만에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며 국민의 정부의 치적인양 자랑했지만, 이는 우리가 영국, 남미국가들과 같은 "국가전반의 도덕적 해이로 인한 외환위기"가 아니라 "환율정책실수로 인한 외환위기"를 겪었다는 또 다른 방증이 된다. 환율이 적절하게 조정되자, 경제는 2년반만에 곧바로 회복되었던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외환위기의 원흉은 김영삼과 1994년이래로 재경원장관을 지낸 홍재형, 한승수다. 그들이 뭉기적거리는 동안, 무역수지적자는 1994년 39억불, 1995년 85억불, 1996년 230억불로 급속히 증가하게 된다.(한국은행통계기준)


강경식과 김인호는 이미 아시아 외환위기가 현재화된 상태에서 침몰하는 배의 마지막 선장단을 수락한 어리석음이 있다. 취임 후 바닥난 외환보유고를 인지한 즉시, 환율자율화조치를 취했어야 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강경식은 그대신 금융개혁입법을 들고 국회를 쫓아 다녔지만,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둔 이회창과 김대중의 외면으로 헛탕을 쳤다. 하지만 바닥난 외환보유고와 시시각각 다가오는 외환위기앞에서 금융개혁입법이 통과되었다 한들, 그것이 외환위기를 막는데 무슨 효과를 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외환위기같은 참변을 당하고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규명하지 않고, 그 원흉을 정확히 찾아내어 징벌하지 않고, 침몰하는 배의 선장단으로서 허둥된 죄 밖에 없는 강경식-김인호만을 희생양으로 때려잡은 한국인들의 불철저성과 몰역사성은 歷史의 神의 분노를 자아낼 만 하다.


흐리멍텅한 역사의식수준을 가진 한국인은 노무현의 대통령당선과 그의 계속된 실정을 통해 또 한번 神의 懲罰을 받고 있다.)


김대중이 5억 달러의 대북비밀송금을 한 것은 이미 입증되었다. 그 돈이 북한의 핵개발, 미사일개발에 전용되었으리라는 강력한 의혹도 이미 제기되었다. 만약 이것이 구체적 물증에 의해 뒷받침된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한국의 안보상황은 어찌 되는가? 그는 북핵위기를 조장한 장본인이란 말인가?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핵지뢰를 깔아 놓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대가로 그는 노벨평화상을 챙겼단 말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의혹들이 엄존하는 한, 그에 대한 평가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모두 무의미할 뿐이다.


"지역감정이 한국 중산층들의 강렬한 정치참여"였고, 한국의 정치민주화도 구미나 일본등의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중산층이 주도하는 민주화과정을 걸어 왔음을 인정한다면, 그간 한국 정치민주화에 대한 논공행상도 기존의 통념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선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한국의 정치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가장 큰 공훈자였으면서도, "말없는 다수"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공훈도 받지 못하고 잊혀져 있었던 한국의 중산층은 최고의 공훈자로서 복권되어야 한다.


둘째로 박정희와 그에게 종사했던 우익세력, 산업화세력은 "반민주적이다, 부패했다"는 온갖 비난과 모욕으로 얼룩지고 일그러진 모습이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자, 잘 살아 보자"며 경제발전에 처절할 정도로 매달렸던 그들은, 한국의 대규모 중산층을 창출하는데 가장 기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도 정치 민주화의 실질적인 1등공신으로서 당연히 복권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심정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많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진실만이 최대의 스승이다. 김영삼, 김대중등의 제도권 민주화세력이나, 학생운동·사회운동·노동운동의 운동권세력이 대규모 중산층을 창출하는데 기여한 사람들이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른 나라의 예와 비교해 보면 박정희등의 기여는 더욱 분명해 보인다. 압축적이었던 한국의 정치 민주화과정에는 레닌, 모택동, 호지명같은 세계적인 혁명영웅들이나 간디, 네루, 만델라같은 세계적인 반체제·민주화 영웅들의 활약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그들의 나라보다도 더욱 민주화된 사회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더불어 최고의 수준이며 세계적으로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다.


어찌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주된 이유는 그들의 나라는 광범위한 중산층을 창출하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고 한국은 성공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의 나라에는 없는 "박정희와 우익세력, 산업화세력"을 한국은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에도 근대화에 기여한 우익세력, 산업화세력이 많지만 위와 같은 세계적인 영웅들은 없다.)


박정희의 성공한 경제발전 노력은 광범위한 한국의 중산층을 창출하고 그들의 전투적이기까지 한 정치참여를 유발시켜, 오히려 그의 군사정권과 후임 군사정권의 종말을 재촉하는 아이러니를 야기한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박정희의 말에는 큰 공을 이루고도 끝내 배척받고 오해받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비장한 운명에 대한 예감이 서려 있는 듯하다. 이제 박정희에 대한 배척과 오해를 벗겨 내야 한다. 경제발전과 대규모 중산층 창출을 통해, 정치민주화를 위한 견고한 토양마저도 일구어 냈던 박정희의 공을 정확하게 평가해야만 한다.


결국 해방당시 이승만이 제창했던 "남한 민주기지론"은 박정희시대의 피눈물겨운 노력으로 끝내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친미반공노선(한미동맹체제), 시장경제체제하에서 급속한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에 매진하였고, 순서는 뒤쳐졌지만, 그 넘기 어려워 보이던 자유민주주의의 문턱마저도 두터운 중산층들의 추진동력을 받아 끝내 넘어서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경제발전과 두터운 중산층을 토양으로 하여 피어나는 하느님의 꽃이다. 피눈물, 피땀을 닦아가며 경제발전을 성공시킨 위대한 국민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앞장서서 피 흘리며 고문 받고 감옥 가고 죽어 갔던 사람들의 공을 과소평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재벌들이 경제발전의 과실을 지나치게 많이 누렸던 세력이었듯이, 소위 민주화세력으로 통칭되는 사람들은 정치 민주화가 지나치게 자신들만의 공인양 독점함으로써 과도한 권위와 보상을 받았던 것은 아닌지 이제 냉정하게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친일파가 독립투사로 둔갑한 경우가 있듯이, 혹시 반국가행위를 한 주사파가 민주화인사로 둔갑한 경우는 없었는가? 아직도 스스로 한국정치 민주화의 일등공신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혹시 내가 호랑이의 권위를 훔쳐내어 요사를 떠는 여우가 아닌지 독하게 회의해 볼 일이다.





4.
한국 외환위기의 원흉이라고 일반적으로 지목받았던, "관치금융체제"와 "재벌중심의 산업구조"의 창시자가 박정희라는 비난은 그에게는 좀 억울한 것일지도 모른다.


박정희란 사람이 관치금융-재벌구조가 국민소득 1만불 달성에는 도움이 되지만, 국민소득 2만불, 3만불로 나아 가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이들 구조를 부숴 버리고 새로운 방향전환을 시도했을 사람이라는 데에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까지도 지금쯤은 쉽게 동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박정희가 죽고 5공 초기에 김재익이 민간주도의 경제운용, 국가경쟁력 강화, 시장경쟁의 촉진, 물가오름세 심리의 억제, "경제학교과서에 씌어진 대로 실행한" 소득정책(이는 전두환의 철권통치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되었다), 은행민영화, 자본자유화, 외환자유화, 무역자유화등을 추진하였다. 김재익의 매섭고 세련된 손끝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김재익이 더 오래 살고 그의 경제정책들이 박정희 사후의 역대 정권에서도 새로운 성장체제로서 확고히 자리 잡아 갔다면, 관치금융-재벌구조는 점진적으로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고, 한국경제는 새로운 성장가도를 달리며 1997년의 외환위기마저도 저만치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김재익은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곧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5공이 끝나가면서 불어 온 노동운동의 열풍속에, 한국경제의 운용기조는 혼미를 거듭하게 된다. 이에 편승하여, 박정희가 감행했던 중화학공업투자가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으로 성공을 거두자, 재벌들은 제2차 중화학공업투자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물론 곧 개방되리라 예상되는 중국시장을 업계 모두가 또 한번의 대도약 기회로 인식하고 들떠있었다고 판단된다. 여기에 1980년대 후반부터 불황에 빠지기 시작한 세계금융시장이 신흥시장으로 돈을 풀기 시작하면서, 재벌들의 투자열풍은 질풍노도처럼 질주하게 된다.


삼성이 자동차사업을 치고 들어오니까, 현대는 LG와 더불어 반도체사업 진출로 맞받아 치며 쳐들어간다. 기존의 자동차 3사 현대, 기아, 대우는 각각 200만대 몸집불리기로 삼성의 자동차 진출에 맞대응한다. 삼성이 자동차사업에 들어가는데 나는 왜 안 되냐며 쌍용도 끼어든다.


삼성중공업이 조선도크 확장공사를 하니까 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도 뒤를 따르고, 삼호조선소의 신규건설도 추진된다. 한보와 현대가 종합제철소 계획을 추진하고, 삼성과 현대는 각각 세계적인 규모의 종합화학공장의 준공을 서두른다.


SK는 노태우 말기에 약삭빠르게 통신업에 진출하는데 성공하고, "통신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근거없는 낙관속에 너도나도 뛰어들게 된다.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을 못마땅해 했던 상공부장관이 곧 목이 날아가 버리고, 신규조선소를 건설하던 모 재벌회장은 "大馬이어야만 不死"이니까 "대규모로 건설하기"와 "막대한 돈꿔오기"를 독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금리-고임금구조속에서 관치금융-재벌구조는 공포스러운 과잉투자로 "비정상적으로 높은 부채비율"이라는 아킬레스 건을 허옇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역대 정권들과 우리들은 "고비용-저효율 구조"니 뭐니 말만 늘어놓을 뿐 의미있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 모두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의 외환위기를 두들겨 맞고 아시아에서도 2류국가로 굴러 떨어진 후에야 우리는 엄청난 고통속에서 구조조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잘 알다시피 일본과 중국인들의 나라 -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어느 나라도 IMF관리체제에 들어가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을 박정희와 관치금융-재벌구조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비겁한 책임전가로 보인다. 박정희는 그의 출발점이었던 국민소득 78불 수준에 맞는 성장체제를 만들어 내어 매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때 관치금융-재벌구조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박정희가 죽은 이후 훌륭한 모범을 보였던 김재익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새로운 성장체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치열하게 실천한 자를 찾기 어렵다. 우리 모두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관치금융-재벌구조에 오히려 안주하면서, 10여년의 세월을 비틀거리다, 꿈결속에 두들겨 맞은 외환위기 아닌가?


(관치금융은 경제개발시기에 부족한 투자재원을 특정 전략산업에 집중시키기 위해 박정희가 창출해 내고 훌륭한 성과를 보였지만, 정말 정신 똑바로 박힌 지도자가 엄정하게 통제하지 않는 한 망국으로 갈 수 있는 함정이기도 하다.


사실 박정희 사후 "타락한 관치금융체제=너도나도 은행돈 뜯어먹기=한국에서 은행돈 못 먹는 놈은 팔불출"이 1997년 외환위기의 遠因이 되었다. 물론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관치금융체제에 있고, 공산당 고위간부의 태자당들, 친인척들의 준동이 만만치 않으며, 금융관련 부패 얘기, 한국보다 더 심각한 은행부실화 얘기가 끊이지 않는 중국이지만, 외환위기를 당하지는 않았다)





5.
이승만이 하야한 지 40년이 넘었고, 박정희가 죽은 지 20년이 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수 많은 독재자들이 사망하거나 실각한 후 반드시 뒤따라 다니던 천문학적인 숫자의 부정축재환수문제와 해외비밀계좌 시비가 그들의 하야와 죽음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부정축재, 친인척비리, 가신비리, 대북비밀송금비리등으로 오물바가지를 뒤집어 쓰며 퇴장했고, 그들중 일부는 지금도 구질구질한 악취를 풍기고 있지만, 이승만의 하야와 박정희의 죽음뒤에는 이런 것도 없었다.


20세기는 5000년 역사의 한민족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중의 하나였다. 이 땅을 유린했던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끝나자 곧 40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고, 당대의 첨단 무기로 무장한 다국적군들이 뒤엉켜 싸운 6.25 내전이 있었으며, 공포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50년이 넘는 민족분단이 있었다. 100년이 넘도록 민족의 고난은 계속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한민족이 이 100년의 고난을 극복하고 승자의 언덕으로 나아가게 한 두 위대한 지도자였다. 이승만은 승자의 언덕을 향해 방향을 틀었고, 박정희는 우리를 승자의 언덕으로 인도하였다. 아직도 이것을 선뜻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면, 우리는 정말 역사를 모르는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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