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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사혁명으로 항일운동한 박정희(역사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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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3:49 조회6,5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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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사혁명으로 항일운동한 박정희(역사학도)
5.16군사혁명으로 항일운동한 박정희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말을 듣는 이유 중에 단기를 서기로 바꾼 것과 공문서 언어를 한문에서 한글로 바꾼 것 등이 있다. 이런 박정희 독재자론을 뒤집어 말하면 만약 516군사혁명이 없었다면 여전히 한국은 단기 달력을 사용하고 모든 역사 연도를 단기로 표기하는 나라, 여전히 공문서 공용어가 한문인 나라였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만큼 전통은 바꾸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소리를 듣는 보다 두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 조선 총독부 행정 서식을 대한민국식으로 바꾼 것이 그 하나요, 일본 상품 수입상이 변하여 한국 상품 수출상이 되게 한 것이 그 하나이다. 이러한 516군사혁명의 항일운동 때문에 그간 박정희가 친일파 운동권들로부터 독재자라는 소리를 들어왔지만 그것은 독재가 아니라 강한 리더십이었다.

우리나라가 1948년 8월 15일에 독립했지만 오늘날의 대한민국 행정제도가 정비되고 행정서식이 마련된 때는 516군사혁명 직후였다. 1948년 8월 15일에 건국했지만 정부와 관공서 행정 서식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1920년대 조선총독부 양식을 여전히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컴퓨터 시대인 오늘날 그 양식을 현대 국가에 알맞게 바꾼다 하더라도 수십 년 걸릴 그 방대한 양을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불과 몇달 만에 해내었다.

만약 노무현 정권이 조선총독부 양식을 한국식으로 바꾸는 작업을 맡았다고 하자. 일본을 부강하게 하자는 뜻의 부일(富日) 기업 장학금, 즉 친일 장학금을 받아 변호사가 되었던 노무현은 일본식을 고집할 것이요, 미국식, 영국식, 독일식, 프랑스식파들로 갈라져 밤낮 다툴 것이 아닌가? 그런데, 중국과 일본과 미국과 한국 행정의 달인인 박정희가 미국식 행정을 선택한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정부는 조선총독부 양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군대는 미국식 행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미국식 행정에 합리성과 실용성이 장점이 있었다. 일본 역시 맥아더 장군의 군정 이후 미국식 행정의 장정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때에 한국만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식 행정 양식을 고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었다. 원할한 대미 외교를 위해서는 미국식 행정이 유리하였다.

아마 1920년대 조선총독부 양식은 조선식과 일본식의 결합이었던 듯하다. 그 한 예를 우리는 장면 내각의 5개년 경제계획안에서 볼 수 있다. 무식한 이들은 5개년 경제계획은 2공화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내옹을 살펴보자. 총 80매 분량의 이 보고서는 장황한 만연체의 서론이 50매를 차지한다. 그리고 결론이 미국이 무상원조를 3배로 늘려줄 때 농업개량정책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용두사미의 이 보고서에는 독자가 알 수 있는 계획의 내용이 아무것도 없었다. 즉, 경제 개발이 불가능하게 하는 행정 서식이었다.

서론이 길었던 것은 서론이 장황하고 길수록 예의바르다는 조선왕조 시대의 패러다임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양식을 청산케 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이런 수십 쪽의 보고서를 한 쪽으로 줄이게 하고, 한 쪽으로 줄일 수 없을 때는 첫번째 쪽에 전체 내용이 요약되게 하였다. 그래서 516군사혁명 이후의 경제계획안은 그 청사진이 분명하였다. 만약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이런 행정 서식의 효율화와 간편화가 없었다면 경제 개발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와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는 이런 민주적 행정 덕택으로 국력이 날로 부강해지고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나 대통령 해도 박정희 대통령 시대와 전두환 대통령 시대처럼 경제가 발전할 줄로 기대하는 얼간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문민 독재자 김영삼씨를 보라. 김영삼씨는 중앙청이 총독부 건물이라며 폭파했지만 실은 그는 대한민국 행정이 조선총독부 시대 행정으로 되돌아가게 한 장본인이었다.

물론 문민독재자 김영삼씨가 행정서식을 과거 조선총독부 시대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조선 총독부 시대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본래 일본 행정이 실무자에게서 상부로 올라가는 상향식이었기에 일제 시대에는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의 한국은 중앙집권식 국가였다. 따라서 상부에서 하부로 내려 보내는 경제 계획 청사진이 명확하여야 했다. 그런데, 김영삼씨는 실무자와 전문가의 입은 막으면서 늘 서론이 길었다. 그의 서론은 경제를 발선시키자였다.

김영삼씨가 청와대에서 점심 식사는 칼국수만 먹게 하였다. 그의 서론은 경제를 발선시키자였다. 그러나 2공화국 경제개발한처럼 김영삼씨 계획에는 본론이 없었다. 민주주의 행정이 무엇인지 모르던 문민 독재자 김영삼씨는 한번도 박정희 대통령처럼 명확한 경제개발계획 청사진을 내놓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다가 마침내 IMF 사태라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양김씨 시대에 이르러 노무현 정권 역시 2공화국 시대의 무능으로 후퇴하고 있음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말을 듣는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친일 기업들이 변하여 애국 기업들이 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독재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516군사혁명이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경제적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516군사혁명으로 정권이 바뀐 사실이 없다. 오히려 그 당시 장면 내각이 쿠데타를 일으켜 윤보선 대통령을 내치려고 하였을 때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윤보선 대통령을 짐켜주며 보필하였지 않았던가. 그는 단지 친일 기업들이 변하여 애국 기업들이 되게 하였을 뿐이었다.

1961년 5월의 한국은 어떤 나라였던가? 단 1불의 외화벌이 능력도 없었던 나라였다. 미국은 마샬플랜으로 전유럽에 지원한 것 두 배의 지원을 한국 한 나라에 해 주었다. 그러나 연 3억불씩 무상원조 해주어도 전혀 경제 개발을 하지 않았기에 미국이 외화벌이 자구책을 세우라 했더니 장면 내각은 원조를 3배로 늘려주면 농업개량사업을 시작하겠다고 회신을 보냈으며, 미국의 냉정한 답신은 무상원조 전면 중단이었다.

그 당시 한국 경제 상황이 어떠하였던가. 당시 기업은 모두 수입상들이었다. 일본에서 수입하여 10배의 폭리를 취하는 거부가 될 수 있는데 누가 힘들게 수출하려 하였겠는가. 공장은 제일제당이라는 설탕 공장 하나뿐이었으며 연필 한 자루 생산할 능력이 없어 모두 일본에서 수입해다 써야 했다. 그러니, 아무리 미국에서 연 3억불씩 무상원조 해주어도 그대로 일본에 갖다바치는 그야말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마침내 미국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를 포기하려 하였으나, 516군사혁명이 일어나자 친일 수입상들이 저마다 애국 기업을 일으키겠다고 자원하였다.

역사에서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조선총독부 행정 서식을 516군사혁명이 현대 국가에 걸맞는 한국식으로 바꾸어 놓지 않았으면 그 뒤에 그 어느 정권도 그 방대한 작업에 감히 손댈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516군사혁명이 친일 수입상들을 수출 전선의 첨단에 서는 애국 기업들로 바꾸어놓지 않았다면 한국은 영구적으로 기업 없는 나라가 될뻔하였으며, 미국 무상 원조 중단 후에 경제 주권을 일본에 다시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나라였다. 양김씨 독재정권은 국정원을 도청 등 꼼수정치에 이용하였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중앙정보부는 합법적으로 무료로 선진국 기술을 이전해 와 애국 기업들에 제공해 주는 일을 하였다. 이렇듯 실로 박정희는 516군사혁명으로 항일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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