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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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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4:03 조회7,1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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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관 박정희

1948년의 세모, 박정희 소령은 한달 남짓한 옥고를 청산하고 풀려났다. 그리고 1949년 초, 문관 신분으로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에 보직됐다. 실질적인 역할은 상황실장이었지만 그런 직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 때부터 북한은 지리산, 한라산, 소백산, 웅진 등에서 유격전을 확대해가기 시작했으며, 박정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했다.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박정희는 하급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몇 안 되는 장교 중 한 사람이었다. 하급자들에게는 가정교사가, 간부들에게는 다정한 친구가 돼 주었다.

1949년 8월12일, 그는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아들 상희를 잃고 가장 사랑하던 막내 아들이 형무소에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알아 누운 후,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당시 어미니의 연세는 79세. 남들은 호상이라 했지만 막내 자식인 박정희에게는 한없는 슬픔이었다.

박정희에게 1949년은 악재의 해였다. 형무소에서 사선을 넘었고, 소령에서 파면되었고, 가까운 친구들도 빨갱이 누명에 연루될까 그를 멀리 했고, 동거하던 여인마저 떠나버렸고, 생활도 궁핍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다시 일어섰다.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백선엽 대령(정보국장)이 떠나고, 그 후임으로 이용문 대령이 왔다. 이 용문 대령 역시 일본 육사, 일본군 소령 출신이었으며 조선경비대 육군소장으로 6.25 전쟁 때 전사했다.

운 좋게도 박정희는 이런 이용문과 단짝이 됐다. 나이로는 한 살, 일본 육사 기수로는 7기 차이였지만 인격, 가치관, 지적인 면에서 상통하는 바가 너무 많았고, 박정희는 이용문으로부터 가장 많은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용문은 건장한 체구에 호방했고, 박정희는 은인자중하고 치밀했지만 서로는 상대방의 장점을 좋아했다. 시국관이 일치했고, 문제의 대응능력, 배짱, 포용력, 정열, 포부, 대인관계, 심지어는 술을 좋아하는 것까지 서로 닮았다. 청주를 들여 마실 때, 이용문은 껄껄 웃었고, 박정희는 싱긋이 웃었다. 당시의 박정희에게 유일한 위안은 이용문과 술이었다.

술을 좋아한 나머지, 그는 육사 중대장 시절에는 근무시간에도 막걸리를 병에 넣어 조금씩 마실 만큼 애주가였다. 평소에는 근엄했지만 술이 취하면 곧잘 팬티비람으로 주저앉아 격식과 체면을 팽개친 채 호탕하게 웃고, 춤추고 노래했다. 취하면 호의의 표시로 상대방을 끌어 안고 볼에 침을 바를 정도로 키스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거나해지면 ‘황성옛터’ ‘짝사랑’ ‘번지 없는 주막’ 등의 유행가를 부르고, 시조창, 한시를 읊으면서 흥을 돋우었다. 그래서 월급은 모두 술값으로 갖다 바쳤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주머니를 톡톡 털어 회포를 푸는 자유인이었던 셈이다.

1949년, 그는 ‘연말 종합 적정 판단서’를 작성하였고, 이는 당시 국방군이 작성한 문서 중 가장 걸출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방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사’는 이 판단서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최근의 적정과 제반 정세를 종합하면 오는 1950년 봄을 계기로 하여 적정의 급진적인 변화가 예기된다. 북괴는 전 기능을 동원하여 전쟁전비를 갖추고 나면 38선 일대에 걸쳐 전면 공격을 취할 기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백의종군하는 박정희의 예리한 정보판단은 한국정쟁사의 백미였다. 하지만 정부, 미군정청, 고문단은 박정희의 이 정보판단을 무시해 버렸다.  
2005.10.1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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