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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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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2 17:33 조회16,1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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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실체
글:   민주시민  

『DJ 는 일제 때 도요타(豊田)로 創氏改名 (창씨개명)을 했어. 일본에 가서
옛 일본인 은사를 만나 「도요타 데스」라고 인사를 했대. 그 은사가 당황했다는 얘기가 아사히 신문에 실렸어. JP는 일본기자들에게 李會昌 총재를
「바카야로」(바보)라고 했다 잖아. 다시 말하지만 DJP 의 공통분모는 親日과親北이여. 『DJP의 공통분모가 또 있지. DJ와 JP 모두 일본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는 한국 정치인 이여. DJ는 일본에 가서 일본 천황의 한국 방문을 고대한다고 했고, 모리 일본수상이 독도를 저희 것이라고 해도 말 한마디 않고,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시켰고, 어업협정 에서 양보해서 이제는 일본 어선이 잡은 생선을 수입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여. 지금 교과서 왜곡 문제가 일어나도 강력하게 대 응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이철승 월간조선 4월호

정치평론가 이청암

김대중은 일본이 학생들이 주로 다니던 목포 상업학교로 진학......
교사인 "이사보로"는 웅변실력이 마치 대의사 (국회의원) 같다고 극찬할
정도였다......국어(일본어), 수신(修身) 산술(算術)과목에서 여러차례 만점을 받았다. 이사실은 그가 일본어를 잘 했고 일본 제국주의의 규범과 가치관을 주입시켰던 수신과목을 잘 이수했으며, 계산 실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물론 김대중씨는 항일운동을 한 경력이 없다, 오히려 친일성향이 강한 편이다. 김대중씨는 친일파와 제휴한 여운형씨가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일제시대에 친일경력이 있는 민주당 신파의 주요인사들에게서 정치를 배우고 성장했다. 그러므로 김대중에게 있어서 일본은 친숙한 존재로 다가왔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는 망명생활을 하며 1972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투쟁을 한 바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스노미야 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반국가 단체로 규정된 "한민통"을 조직하여 의장으로 앉는 등 일본을 무대로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김씨는 1989년 1월 7일 일왕 히로히토가 사망했을 때 , 우리나라 정치인으론 이례적으로 주한 일본대사관 빈소 히로히토의 영정앞에 45도 가량 숙여 조의를 표명한 일 조차 있다. (경향신문 1989년 1.9일자 참조)
그의 이러한 처신은 뜻있는 국민을 깜짝 놀라게 했다.

김대중은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목포상선 주식회사의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 뒤에 그는 학력과 관련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 관리 양성소인 만주 건국대를 중퇴했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김대중씨는 이처럼 일제 말엽에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빠른 계산 실력을 발휘하여 돈을 벌고 출세하려는 것을 청춘의 꿈으로 간직했다. 일본인 사장에게 잘보여 신임을 받은 김대중은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목포상선 주식회사를 재빨리 접수하여 22살에 이 회사의 사장 자리를 차지 한다.

(죽을 고비의 실체)

나는 일생동안 5번의 죽을 고비를 거쳐왔다. 첫 번째의 수난은 공산당에 의해나머지 네 번은 독재자에 의해서였다 -대중경제론 중.

거짓말입니다. 첫 번째는 공산당이 아니라 대한민국 육군입니다.

***첫번째 죽을 고비!!!! (진짜는 이것 뿐!!)

김일성과 긴밀하게 접촉한 여운형씨 중심의 건국 준비위원회에 가담함
으로써 좌익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고 좌파 조직을 발판으로 삼아 파란
많은 정치생애의 첫발을 내 딛는다...........

건준은 미군정청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5년9월7일 해산 당했다. 여운형도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휴양당하는 신세가 됐다. 따라서 건준의 맥은 극좌파의 손에 넘어갔다. 이들은 일방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을 선포하고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를 신속히 조직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공산주의 색깔이 보다 강화된 인민위원회에 호감을 갖고 목포시 인민위원회에 가입하여 이 조직의 행동대 격인 민주애국 청년동맹 목포지부 부위원장으로 맹활약 했다............

그는 이무렵 경찰이 목포시 인민위원회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리고 검거에
나서자 좌익인사 백남운이 대표로 있던 남조선 신민당에 가입 목포시당 조
직부장으로 활약했다. 남조선 신만당은 1946년 11월 23일조선 공산당 ,인민당과 함께 남조선 로동당 (남로당) 으로 합당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총본산이 되었다.

김대중은 또한 1946년 10월 31일 민애청 목포지구가 주도한 목포시 남교동
파출소등 4개 파출소 습격사건과 관련 하여 체포되 20일간 구류처분을 받았다.......

김대중은1949년 2월 21일 조선노동당 섭외부장, 민전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전남도경에 점거되 수사를 받는다. 그러나 해군 목포헌병대장 "박성철"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된다.

(박성철? 많이 듯던 이름인데, DJ가 주장하는 "목포해상방위대 사령관설" 을 입증해준 인물로 알고 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김대중은 좌익 경력이 있는 자들이 등록되어 있는 '보도연맹'의 맹원으로 군경에게 체포되 신안군 앞바다의 배 위에서 총알받이가 될 위기에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한 관계자가 살려주어 오늘까지 목숨을.......

군이 부산으로 철수하기 이전이 1950년 7월 15일경 목포지역의 보도연맹 맹원들을 전원체포하라는 명령을 상부로부터 받았다.

A급(20명)은 체포 즉시 처단, B급(수백명)은 수감, C급(수천명)은 훈계 후
감시하게 되어 있었다. A급 상위 랭킹에 김대중이 있었다.

나는 당시 김대중을 체포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김대중과 잘 아는 해군 중위 박성철이 정보를 미리 알고 입수, 2시간 전에 이미 체포한 뒤였다.

박성철은 부하에게 "김대중은 똑똑한 놈이니 요령껏 살려주라"고 명령했다 한다.

김대중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향해 날아올 총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총뿌리를 겨누고 있던 이 당사자는 "젊은 사람이 빨갱이지만 너무도 처량하고 불쌍해 그를 살려주었다" 고 증언.... ...
그는 "젊은 놈이 왜 빨갱이짓을 하냐 ! 총은 쏘겠지만 살려주겠으니 총소리와 동시에 바다로 뛰어 들어 살던 죽던 마음대로 해라" 며 공포만 쏘라고 저격병에 지시.....

***두 번째 죽을 고비는 과장 (군대안가고 얼쩡거리다 죽을 뻔함.)
"주님 6.25 당시 공산군 감옥에 갇혔던 저를 220명 재소자 가운데 140명이나 학살되는 가운서 탈옥해서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옥중서신 중.)
확률 36%를 가지고 웬 天運? (220-140=80, 80/220=36)

전쟁통에 죽을 뻔한 것이 자랑? 또 다른 서적에는 100명 중 20명죽고 80명 탈출하는데 섞여서 살았다고 적고 있음.

***세 번째 죽을 고비는 뻥

교통사고--단순 교통사고임.

교통사고가 자신이 박해당한다는 허구를 조작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대통령된 뒤에 지팡이 안 짚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입증됨.
(월간조선 1월호에 자세히 나와있음)

***네 번째 죽을 고비도 뻥이후락 현해탄 납치사건--말 그대로 단순납치사건. 죽일의도는 전혀 없었음.
(월간조선 2월호)

***다섯 번째 죽을 고비는 자작극
80년 사형선고--(광주사태는 전-DJ 모종의 합의)

5번이라 얘기하면서 한번은 꼭꼭 숨기고 거의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다.
불리한 1번은 빼고 4번이라 얘기하면 될 것을 왜 그랬을까?
이는 진짜는 그것 한번뿐이라서 뺄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 이를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것은 그가 대한민국 육군에 절대 우호적일수가 없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 만약 통일될 시 이북인민에 선전하기 위해 남겨 둔 것으로 볼수도 있습
니다.


( DJ-사기연설 비법공개)

DJ가 "(박정희가)죽이려 한다" 는 과대망상을 "죽을뻔 했다"는 참말, 실체로 둔갑시키며 어떻게 이미지를 조작하는지를 살펴 법시다.

DJ 언사의 특기는 연상법.

박통때 사용하던 대중반정(大衆反政)----대중(大衆)이 정부(政府)를 엎는다. 속뜻은 대중반정(大中反正)----김大中이 박正희를 엎는다.

그는 87년 6.29 선언 사면 복권 후, 후보 단일화의 열망을 뒤로 한 채,
전국을 돌며 서서히 출마할 바람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인천 유세

--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김대중이가 16년만에 "살아서" 돌아
왔습니다.!

두 번째 청주 유세
-- 꼭 "죽을줄만" 알았던 나가 "살아서" 여러분 앞에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 광주 유세---울먹이며
-- "살아서" 여러분과 만날 수 있게 해준 2000여 광주 영령과 하느님께 감
사드립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광주 시민들은 눈물을 주루룩.... )

공통점을 보이시죠?

①"죽을뻔했다" 하며 집권층이 반드시 죽이려 할만큼 자신이 대단한, 위험한, 큰일낼 인물이라는 피암시를 은연중 상대방에게 주입합니다.
②또 , 자신은 그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불사조와 같이 살아돌아 온, 반드시 살아서 역사해야 할 존재라는 것, (대통령 뽑아달라, 이 얘기죠)
③또 자신은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것,
④또 동시에 상대를 살인자(가해자)로 몰고
⑤자신은 핍박받았다(피해자다)--약자의 피해의식을 자극, 특히 호남에서 약발 만점.
⑥.또 항상 하느님을 등장시켜 신이 자기를 살렸다는 것.---자기에게 신이 역사한다? 과대망상의 극치.

어쨌던 일제시대 때 감옥에서 김일성과 장기뒀다고 구라치는 이의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습니다. (87년 대선 관훈토론시 "진짜 김일성과 장기를 뒀냐"는 조선일보 김대중 패널의 질문에 바둑울 둘 줄 몰라서 장기를 뒀다고 둘러댐 )

김일성과 장기 뒀다는 구라는 왜 치나? 고작 "장기"란 말에 숨어있는 술수는?

이는 "신선 장기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 는 말을 이용한 것으로

1) 장기⇒신선으로의 연상을 유도함으로써,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조차 신선같이 완전히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준신적 존재라는 것을 은연중 주입하기 위함. (훗날 예수 동생으로 발전.)

2)일제때 감옥에 있었다, 하필이면 김일성과? 이는 둘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뻥,

3)김일성과 장기를 뒀다는 것은 북의 대표가 김일성인데 반해 자신이
남의 대표라는 것, (김일성의 실체를 인정함)

4)더 나아가, 결국 둘이 신선 장기 놀 듯 한반도를 말아먹고 싶다!!!
(이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5)결국 국민을 장기판의 졸로 보고 있다는 얘기.
만약 김일성과 장기둔 것이 사실이라면 이북 방문시 김정일에게 "선친과는 같이
감옥에 있었고 장기도 뒀었다"는 인사말을 안할 리가 없읍니다.

어리석은 DJ 광신도들은 거짓 신선 장기놀음에 지금껏 도끼자루가 썩는줄도
모르고 빠져있었다는 것을 이제 서서히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도끼자루 아예 썩어 없어지면 나무는 날도끼로 합니까? 더 썩기 전에 정신 차
려야지요.

(퍼온 글)

광주사태를 민주화 운동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

가끔 억지 주장을 전개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그들의 주장을 분석해 보면 즉시 억지 주장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나는 광주에서 무고한 많은 인명이 유명을 달리한 것을 무척 안타깝게
여긴다. 그러나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과대 포장하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 역사는 후세가 평가한다. 당대에는 관련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가 제시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에 냉정하게 평가할 수 없다. 광주사태가 발생한지 20 년이
지났다. 이재는 어느 정도 냉혹하게 평가하여 후세에 교훈을 남겨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격하시키면 사건의 진면목(眞面目)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후세에 올바른 교훈이 될 수 없다.

*광주사태가 진실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광주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하여 이 땅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데 진실된 의미가 있다.*
민주화 운동이라고 거창하게 명분을 부여하면 무조건 일방적으로
가해자를 매도하게 되면 광주사태에서 진실된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이런 종류의 글은 한 편의 논문이 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내 사정으로 그렇게 할 수 없고 제기된 몇몇 논점만 거론한다.
논쟁을 명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글의 결론과 전제, 전제에서
---------
(퍼온 글)

   제목 : 호남피해망상론
글쓴이 펌식이   날짜 2001-07-16 오후 9:02:04  조회 48    


일부 청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역감정에 관한 토론을
지켜보면 호남측에서 터무니 없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치가 합당하고 설득력이 있는 근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권의 무협지를 쓰는 듯한 터무니 없는
주장을 전개하는 청년들이 있다.

문제는 그런 엉터리 주장을 계속적으로 전개하면,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 엉터리 주장이 진실인 것처럼
생각이되고 결국 자신도 모르게 진실로 믿게 된다.

이러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진실을
볼 수 없게 된다. 또 진실을 볼 수 없을 뿐더러 심지어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구에 사로잡혀 더욱 과장을 하게
되고 사태를 점차 악화시킨다.

한 마디로 자기 최면에 걸리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제시한다.

<경상도는 50년을 해처먹었는데 김대중이는 겨우 5년
해먹은 것까지고 왜그러나?>
이 말에는 두 가지가 담겨져 있다.
(1) 경상도가 50년 집권했다.
(2) 경상도가 50년 동안 해처먹었다.

이런 말이 진실이 아니다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알고
있어도 감정이 격해져서 계속하여 외치게되면 결국
자기최면에 빠진다. 이런 식의 주장은 전라도 피해망상에
젖어있는, 특히 비난의 손가락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를
좋아하거나, 희생양을 찾기를 원하는 성향을 가진
호남사람에게는 집단최면을 유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주문이 된다. 문제는 집단최면은 허구를 사실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데 있다. 나는 김대중 일당을 지지하는 사람이나 헌겨레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이런 부류로 분류한다.


(1) 경상도가 50년 집권했다.
1945년 8.15일 일제의 압제로 부터 해방되었다.
1948년 법이 제정이 된다. 이전에는 미군군정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주권국가로 볼 수 없다. 따라서
1948년을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

정부수립후 이승만 정권이 취임했다. 이승만씨는
본관은 전주이씨 출신으로 고향은 황해도다.
일단 이북출신으로 보아야 한다.

이승만을 뒤를 이은 윤보선은 충남아산 출신이다.
장면 총리는 인천 출신이다.

1961년 5.16 그 당시 군인이였던 박정희씨를 중심으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일단 그를 영남정권의
시발점으로 보자.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더불어 원적이 호남인 전두환이
집권하였다. 그 뒤에는 본토박이 영남출신 노태우가
집권하였다. 노태우 다음에는 본적이 고흥인 김영삼이
집권하였다. 여기서 100번 양보하여 원적과 본적을
무시하고 전두환, 김영삼을 영남인으로 간주하자.

김대중이 1998년 2월에 공식적으로 집권했지만 김영삼이
말년부터 그는 사실상 임시대통령 직을 수행했다. 따라서
김영삼이는 1997년 까지 집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래놓고 산수놀이를 해 보자. 1961 년부터 계산하면
영남정권은 총 36 년간 집권했다. 즉 호남인들이
내세우는 50년과는 14년 차이가 있다. 이부분은
단순한 숫자 차이가 아니다.

즉 50 년이 되기 위해서는 1998년을 기준으로 보면
1948 년이다. 즉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그 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북출신 이승만 정권,
윤보선(충남)/장면(인천) 정권을 모두 경상도 정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은 호남차별론이 진실이 아니라 과대망상에서
발생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또 한가지
사실은 호남차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한에서
호남이외의 지역을 모두 영남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것이다. 이 역시 과대망상이다.

즉 호남차별론을 뒷받침하는 큰 기둥이 진실이 아니고
허구라는 것을 아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2) 경상도가 50년 동안 해처먹었다.
1948년 정부 수립후 GMP가 이디오피아 보다 훨씬 낮았다.
1961년 5.16 이전까지 국민 일인당 GMP가 겨우 몇 십달러
로 1948년과 별차이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착수하려고 하니 국내자본이 형성되지 않아 외자를 유치하여
경제개발에 나섰다. 5.16 이전 이승만, 윤보선 정권이
무슨 해처먹을만한 것을 남겨놓았는가? 윤보선정권때
부정부패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을까?

50년 동안 해처먹었다면 지금 이 정도 경제개발이 되었나?
1961년 이전보다 더 못해야 되지 않나?
한 마디로 "(2) 경상도가 50년 해처먹었다"는 중상모략이고
지극히 비열한 선동이다. 여기에 상대방을 깔아뭉게
자신이 응호하는 정권을 지지하려는 정말 야비한 심보가
담겨져있다. 같은 고통을 받아도 남의 고통은 축소하고
자신의 고통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인양 자기최면에
집단최면을 걸고 있다.


(1), (2)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호남인들이 내세우는
호남차별론이 사실상 허구에 근접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호남차별론은 호남의 피해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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