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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2.12의 육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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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2:00 조회12,9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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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2.12의 육군본부 


7시 15분경, 윤성민 참모차장은 퇴근하여 육본 내에 있는 참모차장 공관에 있었다. 7시 30분경, 총장 부인 신유경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총격전이 벌어졌어요, 살려주세요” 그는 즉시 군복을 갈아입고 헌병상황실에 갔다가 정보를 얻지 못하고 B-2벙커로 갔다. 여기에서 상황실장과 정승화의 부관 이재천 소령을 통해 총장이 합수부에 강제연행해간 사실을 알았다. 이때 윤성민은 총장연행을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며 합수부에 의한 군사반란이라고 생각했다. 생각과 판단의 차이는 이렇듯 입장에 따라 다른 것이다. “10.26과 관련해 총장이 합수부에 의해 연행됐다”는 간단한 말을 듣고 대부분의 장군들은 올 것이 왔다며 합수부의 당연한 임무수행이라고 생각한 반면, 정승화와 김재규를 따르던 장군들은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라고 분개했던 것이다. 30경비단에 모였던 사람들은 정승화가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나든지 아니면 합수부가 철저하게 조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몇몇은 그러한 생각을 전두환에게 전했던 사람들이었다.

            

8시경, 윤성민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본부사령 황관영 장군 인솔 하에 헌병감실 5분대기 기동타격대를 공관으로 출동시키고, 이어서 육군 의장대와 수경사 기동타격대(신윤희 중령)를 공관으로 출동시켰다. 1,2,3군 사령부와 육본 직할대들에 직접 전화를 하여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앞으로는 내 육성 지시에 의해서만 행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군사반란! 윤성민은 정승화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이며, 10.26이후의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정승화는 그를 참모차장으로 발탁했다. 이런 윤성민이 정승화 총장에 고마워하고 충성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2성장군에 불과한 합수부장이 감히 3성장군인 자기가 하늘같이 여기는 총장을 연행한 사실은 이런 윤차장에게 참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분개한 것은 인지상정에 속하며 인간사회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당시 군의 풍조로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 바친다”는 것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고, 이것이 무장(사무라이)의 덕목이라고 생각들 했다. 이런 문화 속에서 3성장군에까지 이른 윤성민이 소위 “새까만 후배”의 겁 없는 행동을 보고 하극상이라고 분개했던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윤성민은 여타 대부분의 장교들이 그러하듯이 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커온 것이다. 반면 합수부 측은 총장의 연행이 합수부의 당연한 임무수행이며, 이 당연한 임무수행을 군사반란이라고 호도하면서 비상을 걸고 병력을 동원한 윤성민 측이 법보다 개인적 연줄을 중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작전에는 정규전과 대간첩작전이 있다. 정규전에서는 상황의 위급정도에 따라 데프콘1에서 데프콘5까지 있으며 데프콘1은 전쟁돌입 직전상태를 의미한다. 대간첩작전에서는 진돗개 하나에서 셋까지가 있다. 진돗개 하나는 북한의 무장간첩이나 특수부대원 등이 침투했다고 판단됐을 경우에 취해지며 대간첩작전의 최고 경계령으로 군병력뿐만 아니라 경찰병력까지도 동원되는 비상령이다. 진돗개하나는 그 자체가 출동준비명령이라 할 수 있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7시 30분과 7시 40분에 각각 상황실장과 이재천 부관으로부터 두 체례에 걸쳐 보고를 받았다. 총장을 연행한 기관은 합수부이고, 연행은 10.26과 관련한 수사 목적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것이다. 이 합법적인 법집행 조치에 대해 간첩이 출현했을 때에나 발령할 수 있는 출동준비명령을 내린 것은 직권남용이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무모한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비상령이 내려지자 육본 보안대장 변규수 대령이 육본상황실로 달려갔다. 참모들과 김진기 헌병감, 문홍구 합참 본부장 등이 있었다. 당시 상황실이 파악하고 있는 내용은 “우경윤 대령 등이 총장을 납치했고,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까지였다. 연행계획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는 변규수 대령은 이 정보를 즉시 합수부 보안처장 정도영 장군에 보고하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정도영 역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정도영은 허화평으로부터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게 되었고, 즉시 변규수에게 전화를 걸어 “정승화 총장은 10.26과 관련하여 합수부가 조사차 연행한 것이니 육군 지휘부에 이를 알려주고 병력출동을 하지 말라”고 조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변규수 보안대장은 이를 즉시 윤성민에게 보고했다. 8시 20분경이었다. 


당시 군 내부와 일반 국민의 여론은 온통 정승화에 대한 의혹으로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윤성민 정도의 고위급 장군이라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윤성민의 반응은 이와는 정반대로 달렸다. 그는 총장의 대행자였다. 그런데 합수부로부터 연행의 진상을 보고받고도 이를 예하 지휘관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오직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만 알렸다. 이어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에 전화를 걸어 9공수여단을 육본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비상이 걸렸을 때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경비할 책임은 1공수여단에 주어져 있었다. 따라서 윤성민의 이러한 조치는 일종의 파행이었다. 1공수여단장은 육사출신(박희도)이었고, 9공수여단장은 비육사출신(윤흥기)이었기에 육군본부 경비를 비육사출신에게 맡기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당시 육본에 상황실에 있었던 대부분의 비육사출신 장군들에게 육사출신들은 이미 적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8시 20분경에는 1.3군 지역에 추가로 비상을 발령했다. 사정을 알지 못하고 비상령을 받은 예하 지휘관들은 혼란에 빠지고, 각가지 추측이 무성했다. 국방부 및 육군본부 참모들 역시 우왕좌왕하며 무성한 추측에 따라 중구난방 식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8시 40분, 윤성민은 성남에 있는 육군 행정학교 교장 소준열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행정학교 영내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의 사단장 박준병을 체포하라 지시했고, 이어서 특전사 정병주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71사단 사단장인 백운택을 체포하라 지시했다. 그들이 움직이면 문제가 커진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윤성민의 체포지시는 법에 어긋나는 멋대로의 처신이었다. 그 때 이 두 사람은 30경비단에 있었다.     


9시 20분경, 전두환은 윤성민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정총장이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사실이 확인되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연행하였다’는 취지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1996년 6월 27일 제17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윤성민은 이 보고받은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위와 같은 조치들을 취했을 당시에 나는 총장을 합수부가 연행해간 사실을 몰랐다” 그러자 변호인이 카세트를 틀어, 12월 12일 밤 윤성민과 이건영 3군사령관 사이에 있었던 통화내용을 들려주었다. 본인의 육성녹음을 확인한 윤성민은 비로소 전두환으로부터 보고받았던 사실을 인정했다. 이에 더해 윤성민은 94년 3월 8일 서울지검 918호 검사실에서 ‘10.26과 관련하여 합수부가 총장을 연행해간 사실을 7시 30분경에 상황실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인지하였다’고 진술했다. 윤성민은 왜 검찰에서도 인정했던 사실을 96년 6월에 법정에 나와 뒤집었을까? 그날 밤 정승화가 합법적으로 연행한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그가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했다 하면 이는 법관의 눈에 정당한 행위로 보일 수 없다는 것을 윤성민이 알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합수부가 연행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1,3군에까지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육본경비와는 거리가 먼 9공수여단을 육본으로 출동하라 명령하고, 2명의 사단장들을 체포하라 명령한 것은 정당한 법집행을 방해한 처사였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알면서 한 행동’을 ‘모르고 한 행동’으로 탈바꿈하려 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9시 20분, 윤성민이 전두환으로부터 ‘연행목적’에 대한 보고를 받은 직후, B-2벙커에는 30경비단에 유학성, 차규현, 황영시, 박준병 등이 모여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진기 헌병감 등 정승화 직계 장군들은 총장연행에 격분하여 강경분위기를 조성했다. “황영시, 차규헌, 유학성 등이 영관급 장교들을 이끌고 30경비단에 모여 정승화 연행을 지휘하고 있으니 무장헬기를 보내 정승화를 구출하고 경비단에 있는 장군들을 체포하자". 그러나 이러한 강경기류는 김종환 합참의장 및 대다수 군 수뇌부 간부들의 반대에 직면해 수그러들었다. 9시 30분경, 단국대로 피신했던 노재현 국방장관이 여의도에 가족을 피신시켜놓고 육본상황실에 나타났다. 장관을 찾고 있었던 김용휴 국방차관은 노재현 장관이 나타나자마자 정승화 연행과 총격전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보고했다. 이를 통해 노재현 장관과 육군본부 상황실에 있던 장교들은 정승화 총장이 연행된 이유와 과정에 대해 소상히 알게 된 것이다. 윤성민 역시 같은 시각에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같은 시각에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김용휴 국방차관은 장관과 장교들에게 사실을 알렸지만, 윤성민은 알리지 않은 것이다. 알리지 않은 것은 합수부의 정당한 법집행에 대해 그가 당시 취하고 있던 비상조치 즉 2인의 사단장을 즉시 체포하라는 등의 과격한 조치들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재현 장관이 육본 상황실에 온지(9시 30분) 얼마 안 돼서, 하소곤 작전참모부장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박희도 1공수여단장이 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출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박희도 준장은 30경비단에 있었다. 오보였던 것이다. 이 오보를 들은 노재현은 군 지휘를 팽개치고, “나는 연합사로 가 있을 테니 육군본부는 자체 방어 능력이 있는 수경사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만 던지고 또 다시 미8군 영내로 도피했다. 이로 인해 군에는 지휘공백상태가 이어지게 되었다.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모든 특전부대에 무장해제를 명령했고, 1공수여단(육사출신 준장)이 가지고 있던 모든 차량을 9공수여단(비육사출신)으로 이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1공수여단의 부대출동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당시 1공수여단은 수경사에 작전배속 되어있어 작전 지휘권은 수경사에 있었지 특전사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바쁜 정병주는 5-6회에 걸쳐 똑같은 명령을 반복해 내렸다. 윤성민은 무장과 출동을 전제로 하는 비상령을 내렸고, 정병주는 무장해제를 명했으니 특전사 장교들은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이 시각, 1공수 여단장인 박희도 준장은 30경비단에 있었기 때문에 부대는 부여단장인 이기룡 대령이 장악하고 있었다. 여단장은 자리에 없고, 위에서 내리는 명령은 앞뒤가 맞지 않고, 1공수여단에 대해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지 않은 특전사령관이 부적합한 명령을 반복해서 내리는 상황을 맞이하여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9시 30분경, 1공수여단이 이미 출동했다는 오보가 접수된 바로 그 시각에 이기룡 부여단장은 사태파악을 위해 작전참모 권대포 소령, 헌병대장 백남석 대위만을 태우고 육군본부로 직접 찾아갔다. 따라서 밤10시, 1공수 여단에는 여단장, 부여단장, 작전참모 모두가 비어있어 부대출동을 명할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비어 있는 부대에 정병주가 보낸 감시자들이 찾아와 부대출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이순길 특전사 부사령관, 강리건 인사참모, 홍덕현 교육발전처장이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1공수여단이 박희도의 지휘로 서울로 출동하고 있는 것으로 윤성민과 노재현에게 보고가 된 것이다. 후에 밝혀지기로는 제1한강교를 통과하는 이기룡 부여단장의 지프차를 본 초병이 이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였다 한다.


검찰은 또 이기룡 부여단장이 소령 1명과 대위 1명을 태우고 한강교를 통과한 것을 놓고 1공수여단이 출동하기 위한 통로를 미리 개척하려 한 것으로 몰아갔다. 검찰 스스로 그날 밤10시에는 1공수여단의 출동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위 1명과 소령 1명을 가지고 무슨 통로를 개척한다는 말인지 어이가 없다. 9시 30분경에 부대를 떠난 이기룡은 밤 10시경에 육군본부 B-2벙커에 갔지만 너무 혼잡하여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인근 민가에서 전화를 빌려 작전처장 이병구 준장과 통화만 했다. 특전사령관의 명령과 육군본부의 명령이 서로 반대되니 확실한 명령을 내려 달라고 했지만 이병구는 육본과 국방부 경계는 9공수여단이 출동하여 맡기로 되어 있다는 말만 했다. 1공수가 출동하기로 되어 있는 국방부와 육본에 9공수여단이 대신 출동하도록 되어 있으니 1공수여단은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다. 1여단을 따돌림 한 것이다. 이는 이기룡에게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조치였다. 이기룡은 이 사실을 박희도 여단장에게 보고를 하려 했지만 전화연락이 되지 않아 곧장 부대로 돌아가기 위해 10시30분경에 국방부 지역을 출발했다. 바로 이 시각이 육군본부 수뇌들이 수경사로 옮겨가는 시각이었다. 이기룡을 태운 지프차가 제2한강교에 이르렀을 때 검문소 헌병들이 총을 들고 차량을 세웠다. “수경사령관이 체포하여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들은 강제로 하차되어 체포되었다. 한편 박희도는 10시 30분경에 대통령 공관을 나와 부대를 향해 출발하였고, 밤 12시경에 김포에 있는 여단 본부에 도착했다. 이에 대한 이기룡의 진술은 검사가 그토록 물고 늘어졌던 1공수여단의 출동 주장이 얼마나 허구였지 잘 표현해주고 있다. 1994년 2월 22일 서울지검 908호 검사실에서 이기룡(육사17기)은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12.12 당시 1공수 여단은 강서구 공항동에 있었다. 나는 제2훈련소장을 끝으로 전역한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12월 12일,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자 나는 영외거주 장병들에게 비상소집을 한 후 마포소재 제3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에게 차량 할당을 하고 출동 준비를 지시했다. 당시 여단의 모든 작전사항은 부여단장인 내가 전적으로 담당했다. 여단장은 거시적 지침만 주었다. 그날,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는데도 여단장의 소재가 한동안 확인되지 않았다. 8시 30분경에야 여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여단장에게 비상이 발령된 사실을 알리고 내가 취한 상황조치 내용을 보고했다. 여단장은 알았다고 한 후 경복궁 30단에 있으니 특이사항이 있으면 연락하라며 30단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원래 비상이 발령되면 1공수여단은 국방부와 육본으로 출동하여 경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진돗개 하나라는 비상령만 발령되고 이렇다 할 지시가 없으니 참으로 답답했다. 계엄사인 육본과 1공수에 대한 작전명령권을 가진 수경사에 연락을 취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9시경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무조건 전부대원의 무장을 해제 하고 1공수가 보유하고 있는 차량을 9공수(부천)여단에 보내라고 명했다. 이에 나는 “저희 여단은 서울계엄군으로서 임무가 따로 있는데 사령관 말씀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했더니 전화를 끊었다. 약2분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똑같은 지시를 하기에 나는 또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비상사태에서는 계엄사의 지시에 따라 임무를 수행해야할 의무가 있는데 계엄사의 지시도 없이 무장해제를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고 항의를 하자 사령관은 아무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에도 6회 정도에 걸쳐 무장해제와 차량인도를 요구 했으나 나는 그때마다 거절했다. 마지막엔 “1공수 여단은 계엄사의 작전배속이 되어있으므로 부당한 요구를 중단해 주기를 바란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전화가 없었다. 출동용 차량은 특전사 차량이 아니고 제2군수지원사(인천시 북구, 산곡동)와 제3군수지원사(의정부)에 소속돼 있는 수송자동차대대의 차량이었는데 이 차량을 9공수여단으로 주라는 것은 특전사령관의 작전권한 밖의 일이였다. 9시 10분경, 이 기막힌 상황전개에 대해 그는 여단장인 박희도의 지시를 받기위해 30단으로 전화하여 박희도와 통화가 되었다. 그동안에 있었던 내용을 보고하고 ‘현재 병력출동 준비는 완료되었지만, 육본이나 수경사에는 연락이 되지 않아 답답하니 제가 직접 육본에 가서 알아보겠습니다’하고 건의했다. 박희도 여단장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9시 20분경 작전참모 권대포 소령과 헌병파견대장 백남석 대위를 지프차에 동승시켜 육본으로 출발했다. 제1한강교를 경유하여 10시경에 육본B-2벙커 출입구에 도착했으나 그 일대가 차량으로 대 혼잡을 이루고 있어 근처의 민간 전화를 빌려 계엄사 작전처장 이병구 준장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1공수 여단은 비상사태 하에서 당연히 출동하여 육본과 국방부를 경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아무런 지시가 없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문의 했더니 이병구 장군은 “9공수 여단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 같다,”며 어물어물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이 해괴한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여단장을 찾았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그는 차를 되돌려 부대를 향해 출발했다. 10시 30분경이었다. 11시경 제2한강교 근처에 이르렀을 때 박희도 여단장과 무전이 통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묻자 여단장은 부대로 복귀하기 위해 신촌을 통과 제2한강교로 가고 있다고 했다. “2한강교는 완전히 막혔습니다. 행주대교로 돌아가셔야 됩니다” 이 말을 끝으로 무전이 두절되었다.


11시 10분경 2한강교에 진입하니 차량이 막혀서 운행이 불가능 했다. 4명이 지프차를 인도로 들어 올려 통과하려고 하던 중 헌병 4명이 M-16소총을 내 옆구리에 들이 되고 체포하겠다고 했다. 영문을 모른 나는 ”나는 1공수여단 부여단장이다 지금 서울 계엄군으로 임무 수행중인데 무슨 짓이냐“ 며 호통을 쳤지만 예사치가 않아 보였다.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실랑이를 하기도 곤란해서 순순히 연행되어갔다. 수경사 작전 참모와 통화를 하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헌병 장교는 “수경사에서 1공수 부여단장에 대해 체포 사살 명령이 내려졌다”며 나와 권소령에게 수갑을 채우고 초소 지하실로 데려 갔다. 12월 13일 03시경, 헌병장교가 지하실로 내려와 수갑을 풀어 주고 권총을 되돌려 주면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사과하면서 돌아가라 했다.(진술 끝)


1994년 4월 26일, 서울지검920호 검사실에서 당시 1공수 5대대 14지역대 6중대장으로 근무했던 이경택(94년 당시 여의도에서 ‘군’지 발행)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공수는 모두 5개 대대로 구성돼 있다. 1개 대대에는 4개 지역대가 있고, 1개 지역대에는 4개 중대가 있다. 중대에는 장교2명(대위, 중위)과 하사관 10명으로 구성돼 있다. 2.5톤 트럭에 1개 중대가 탑승한다. 12월12일 밤9시30분경으로 생각된다. 그 때부터 “탑승하라”, “하차하라” 하는 명령을 20-30분 간격으로 8-9회나 반복하며 훈련을 했다. 검사는 신월동 3거리까지 출동했다가 되돌아 온 적이 있느냐고 묻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진술끝)


당시 1공수 제1대대의 대대장은 육사 22기 김경일 중령이었다. 그는 94년 8월 27일, 서울지검908호실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여단장이 30경비단에 갔다는 사실도 몰랐고, 비상이 왜 걸렸는지 통 몰랐다. 단지 밤 10시경, 여단의 누군가가 대대에 전화를 걸어 신월동3거리까지 출동하여 대기하라고 해서 출동했었다. 신월동3거리는 여단본부로부터 5분 정도 떨어진 곳이며, 2개대대 이상의 병력이 출동할 때에 집결지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거리가 넓어서 대규모 차량이 집결하는 데 좋은 장소였다. 1개 대대만 출동하는 경우에는 대대에 집결했다. 그러나 2개 대대 이상이 출동하면 늘 신월동 3거리에 집결하여 출발한다. 신월동3거리에 나갔더니 다른 대대가 오지 않아 이상하여 여단에 무전을 하니 일직사령 이풍길 소령이 그냥 되돌아오라고 했다. 근무자가 바뀌고 혼돈이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시 공수부대가 출동하면 목표를 정해 주는 데 그때는 출동 목표가 주어지지 않았다.(진술끝)  


위의 진술을 보면 검찰과 재판부의 판단이 억지라는 생각이 든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1공수는 당연히 출동준비를 해야 했고, 출동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국방부와 육본으로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놓고 검사는 박희도 여단장이 8시 10분에 30경비단에 있으면서 출동준비명령을 내렸고, 신월동(1공수에서 5분 거리)까지 불법출동 했었다고 뒤집어씌운 것이다. 8시 10분에 출동을 지시했는데 어떻게 여단장도 없는 상태에서 부여단장과 작전참모가 9시 30분에 모두 부대를 떠나 삼각지에 있는 B-2벙커로 지프차를 타고 갈 수 있었겠는가? 윤성민은 특전사가 9시 20분경에 이미 출동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1대대가 신월동삼거리에 나왔던 시각은 10시였다. 9시 20분에는 1공수여단이 영외로 나온 사실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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