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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재현의 피신과 재가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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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2:01 조회12,7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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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노재현의 피신과 재가 지연


총장 공관은 한남동에 있었다. 그 이웃에 국방장관의 공관이 있었다. 7시 20분경, 정승화 총장 연행과정에서 총소리가 발생했다. 노재현 장관은 이 총소리에 놀라 부인 및 아들과 함께 이웃 단국대학으로 피신했다.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했던 노재현은 8시 40경에야 국방부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이경률 합참 작전국장을 단국대에 오도록 하여 그의 차량 편으로 단국대를 나섰다. 복잡한 교통을 뚫으면서 가족들을 여의도 이경률 장군의 집으로 데려다 놓은 후 9시 30경에야 육본에 도착했다. 당시의 국방장관에게는 국가보다 가족이 먼저였던 것이다. 뒤늦게 육본에 도착한 노재현에게 국방차관 김용휴는 “정승화가 합수부에 연행됐고, 이는 대통령에 보고됐으며, 장관께서 사태를 원만히 수습해 주십사 하는 합수부의 통고가 있었다”는 내용의 보고를 했다. 


이 보고를 받고 노재현은 사태수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다시 한미연합사 상황실로 피신했다. 거기에서 10시 10분에 최규하 대통령과의 통화가 이루어 진 것이다. 대통령은 즉시 오라고 했지만 노재현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연합사 상황실에 있었다. 한편 노재현을 찾아달라는 합수부의 요청을 받은 김용휴 차관은 연합사에 있는 노재현과의 전화연결에 성공하여 즉시 대통령실에 가라고 수차례 간청했지만 노재현은 이를 무시하다가 13일 새벽 01시 30분에야 연합사를 떠나 국방부로 갔다. 속이 탄 김용휴 차관은 노재현을 보자마자 대통령 호출에 즉시 응하라고 강력히 주청했다. 노재현은 유병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불렀다. 그리고 김용휴 차관이 있는 자리에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사후 대책을 물었다. 두 사람은 빨리 대통령실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 뵙고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고 강력히 역설했고, 이에 비로소 노재현은 대통령실에 가기로 했다. 12월 13일 새벽 01시 50분이었다.


바로 이때에! 국방부로 출동한 1공수여단(박희도  준장) 병력과 국방부를 경비하던 수경사병력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국방부로 출동하던 1공수여단 제5대대(대대장 박덕화 중령)가 국방부 청사 옥상에 설치된 수경사 발칸포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아 쌍방 총격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 총소리를 들은 노재현 장관은 부관인 배상기 소령만을 데리고 국방부청사 1층 계단 밑 컴컴한 곳으로 가서 숨었다. 장관의 체신이 말이 아니었다. 노재현의 출두가 지연되자 13일 새벽 02시 30분에 신현학 총리와 이희성 중앙정보부 서리가 그들 스스로 국방부에 가서 노재현을 찾아 데려오겠다는 건의를 한 후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국방부로 갔다. 한편으로는 1공수여단을 풀어서 청사 내외를 수색케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내방송을 여러 차례 했지만 국방장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03시 50분경에야 노재현은 국방부청사 지하 1층 계단 밑에서 1공수 수색조에 발견됐다. 두 사람을 발견한 병사들은 “누구야”하고 총을 겨누었고, 이에 노제현은 “나 장관이다”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거수경례를 했고, 장관과 부관은 스스로 장관실을 향해 걸어갔으며, 병사들은 장관의 뒤에서 장관을 호위했다. 증거들에 나타난 사실이 이러한데도 검찰과 판사는 공수여단이 무력으로 장관을 체포하여 장관실로 압송했다고 판결했다. 필자의 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인 것이다. 


결국 장관은 새벽 04시경, 신현확 부총리와 이희성 서리의 권유에 의해 비로소 국방부를 떠나 대통령 공관으로 향했다. 신현확 총리의 차에는 신현확, 노재현, 이희성이 탔다. 대통령 공관으로 가던 중 노재현은 도중에 합수부에 들려 보고를 받은 후, 대통령 재가문서에 먼저 서명을 했다. 그리고 이학봉이 작성한 그 재가문서를 가지고 대통령에게 갔다. 당시의 노재현은 대통령에게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재가 서류를 가지고 가야 했던 것이며, 그 재가 서류는 합수부장이 가지고 있었다. 함께 차를 탔던 이희성은, 차가 보안사 정문에 이르렀을 때 노재현이 ‘합수부장실에 가서 재가서류를 자기고 가야 한다’며 스스로 내렸다고 진술했다. 1994년 3월 16일, 903호 검사실에서 이희성은 이렇게 진술했다.


신현확 총리 차량에 노재현과 내가 함께 타고 국방부를 떠났다. 보안사 앞에 이르자 장관이 스스로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합수부장을 먼저 만나야겠다’ 하면서 스스로 내렸다. 대통령이 머무는 공관 주변에 무장 경계병이 있기는 했지만 거슬려보이지는 않았다. 공관 내부에는 무장한 사람이 일체 없었다. 재가 장소에는 신현확과 최광수 비서실장이 배석했고, 나는 멀리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의사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12월3일 조치한 노태우(보안사령관)와 정호용(특전사령관)에 대한 인사는 누가 건의한 게 아니라 내가 독자적으로 조치한 것이다. 그리고 명령이 나기 전에 그들에게 구두로 명령을 하달했다. 나를 중정 부장서리로 발탁한 사람은 정승화 총장이며, 나는 다시 군에 복귀한다는 약속을 받고 서리가 되었다.       


그런데 판사는 보안사 앞에서 무장병력이 차를 강제로 세워 노재현을 보안사령관실로 압송했다고 판결했다. 고급 장교들 세계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행동을 했다고 판결한 것이다. 증거자료들을 읽으면 판검사들의 눈에 군은 기율도 없고, 예의도 없는 막가파 인생들만 사는 집단인 것으로 비쳐진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되는 장면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새벽 04시 30분경, 대통령 앞에 나타난 노재현은 대통령 호출에 장시간 응하지 않은 데 대해 꾸중을 들은 후 재가문서에 서명해 줄 것을 건의했고, 대통령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한 후에 서명을 했다. 최규하는 배석한 신현학 총리에게도 서명하라 했다. 그 재가 문서에는 총리가 서명하는 난이 별도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신현확은 여백에 서명을 했다.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최규하의 마음이 여기에도 잘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 때 대통령실에는 최규하 대통령, 신현확 총리, 노재현 국방장관 그리고 최광수 비서실장, 이렇게 네 사람만 있었고, 이희성은 같은 접견실이긴 하지만 재가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 전두환은 없었다. 재가가 끝나고 나오면서 노재현은 이희성에게 ‘총장에 임명됐으니 빨리 가서 지휘를 하라’고 했다. 대통령은 노재현에게 총장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느냐고 물었고, 노재현은 이희성을 추천했던 것이다. 그날 밤, 노제현은 국방장관으로서 정승화의 뒤를 이을 사람을 생각해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검사들은 이렇게 이루어진 대통령의 재가에 대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1.2.3심 판사들은 대통령의 재가는 사전 승인이 아니라 사후 승인이며 이에 더해 사후 승인은, 공관 주변을 무장 병력으로 에워쌈으로써 대통령에게 외포감(공포감)을 준 상태에서 그리고 늦은 시간에 6명의 장군들이 떼로 몰려가 공포감을 한층 더 증폭시켜 가지고 강압적으로 얻어 낸 것이기에 무효라고 판결했다. ‘사후재가’의 효력을 인정하면 전두환의 군사반란죄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 되고, 효력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죄가 성립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법관들은 상당한 근거 없이, 오직 무장군인들이 공관을 외워 쌌고, 6명의 장군들이 대통령에게 서명을 주청한 사실만을 가지고 대통령에게 공포감을 주고 협박하여 강압적으로 서명을 얻어 냈다고 판시했다. 관심법이 증거보다 우선한 것이었으며, 법관이 곧 법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육군본부와 주월사령부에서 전속부관을 하여 장군세계를 잘 알고 있으며, 고급 장교시절인 중령 때에는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면서 고위직들을 많이 접촉했으며, 대령 때에는 연구소에 있으면서 군 최고의 계급을 단 장군들을 아주 많이 접촉하면서 살았다. 장군 세계에는 아주 간혹 부족한 사람들이 있기는 해도 그래도 장군들이라 하면 사회지도층에 어울리는 기본 정도는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다. 순수하고, 정중하고, 매너에 신경 쓰고, 공분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렇지 못하면 부하들이 따라주지 않으며, 부하들로부터 경멸당하면 장군은커녕 중령도 될 수 없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런데도 검사와 판사는 이런 장군들을 조폭 정도로 취급하고, 조폭 수준에 어울리는 판결을 내린 것이라는 생각한다. 


재판부는 또 총리공관을 경비하던 육군 헌병대 구정길 중령(갑종191기)을 고명승 등이 무장해제 시키고, 막사에 억류시키고, 청와대 경호실 병력이 총리공관을 장악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재가를 압박했다고 판시하지만 이 역시 기록들과 다르다. 93년12월20일, 서울지검 903호 검사실에서 구중령(93년 당시 군인공제회 감사과장)은 이렇게 진술했다.


12월12일, 6시경, 전두환과 이학봉 중령이 들어오기에 내가 안내를 하고 부속실에서 대기했다. 8시경, 헌병감 김진기가 전화를 걸어와 지금 보안사령관을 검거할 수 있느냐 묻기에 명령만 내리면 가능하다고 답했다. 이후 전화가 더 왔지만 체포하라는 말은 없었다. 8시경에 전두환과 이학봉이 쏜살같이 나가서 나는 그들을 미처 안내하지 못했다. 그 후 위병소에서 전화가 와 청와대 경호실 사람들이 나를 만나자 한다고 했다. 정동호 경호실장(육사13기), 고명승 대령(육사15기), 사복 입은 사람(최영덕 총경 101경비단장), 1명의 소령, 군인 2명 정도가 있었다. 정동호가 내게 보안사령관의 지시인데 이 시간 이후 이곳 경비를 내게 인계하라고 했다. 반대 의사를 밝히자 곧바로 무장해제 됐고, 막사에 가서 대기하라 했다.


이처럼 전두환 일행이 총리공관을 나갈 때가지 총리공관 경비는 구정길 중령이 담당했던 것이다. 전두환 측이 무장 경비병을 깔아놓고 재가를 받기 위해 최규하에게 공포감을 주었다는 검사의 주장과 판사의 판시가 억지인 것이다. 구중령의 진술에 대해 당시 총리공관 경비를 인수한 최영덕(1928년생, 당시 총경) 101단장은 94년 2월 15일, 서울지검 918호 검사실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2월12일, 7시30분경, 고명승 대령이 만나자 하여 경호실 차장실로 갔더니 고대령이 함께 총리공관으로 가자하여 동승했다. 고대령이 구중령에게 공관경비를 101단에 맡기고 철수하라 하자, 구중령이 자기에게도 지휘계통이 있으니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겠다며 나가더니 20-30분 후에 의전수석인 정동열과 함께 왔다. 정동열은 이 사람들이 그동안 수고했는데 오늘은 공관 막사에서 자고 내일 철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떠냐 하기에 고대령이 동의했다. 나는 즉시 명령을 내려 공관경비를 인수했다. 경호실장 정동호는 정수석이 오기 조금 전에 도착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높은 사람들이 구정길을 강제로 제압했겠는가?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공관으로 갈 때 나와 고대령 두 사람만 갔다. 그날 밤 내내 두 사람이 함께 근무했다. 그 후 간혹 55경비대장인 임재길 중령이 안내소를 방문한 적은 있었다. 공관 출입자 통제는 의전비서실이 하는 일이었고, 우리는 경비만 했다. 출입자를 통제한 적도 없고, 공포감을 조성한 일도 없다.    


1994년 5월 20일, 서울지검 920호 검사실에서 고명승은 이렇게 진술했다.


8시 30분경 경호 실장으로 부터 인터폰이 왔다. 101경비단장 최영덕 경무관과 55경비 대대장 임재길 중령에게 101경비 1개 소대와 55경비 대대 2개 재대를 총리경관에 증강 배치하라고 했으니 고차장이 현장에 가서 직접 지휘를 해야겠다는 지시였다. 승용차를 타고 2-3분에 걸쳐 총리공관에 도착했다. 8시40분경 이였다. 최영덕을 태워 같이 타고 간 것은 기억하지만 병력은 나중에 온 것 같았다. 구정길 중령에게 비상이 발령되었으니 합동근무를 하자고 제안했더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2가지를 설명하였다. 첫째, 10.26당시 경호체제가 경호실과 안기부 직원으로 이원화 되어 있어 당했다. 둘째, 정승화 장군이 박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하여 연행되었는데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는 헌병감의 지휘 하에 있는 구중령이 단독으로 경비하는 것은 적절치 아니하다. 이에 구중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수긍하는 것으로 알고 기존병력과 경호실 병력을 1:1로 붙여 합동근무를 시작했고 구중령도 같이 서 있었다. 9시경 내가 초소 직원에게 안에 누구 있느냐고 물었더니 합수 부장이 보고를 하고 있다고 했다. 곧 합수 부장이 나가면서 나를 알아보더니 차문을 열면서 무슨 군대 병력이 이렇게 와 있느냐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떠났다. 빨리 떠나가기에 아무런 설명을 드릴 여유가 없었다. 초소 안에 들어와 보니 구중령, 101단장, 경찰관, 헌병 등이 있었다. 헌병감이 구중령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내용을 들어보니 첫째, 총리 공관을 완벽하게 장악하라. 둘째, 너는 내 명령에만 따르지? 라고 하자 구중령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섬뜩한 생각이 들어 경호 실장에게 전화 하여 통화 내용을 알려 주고 정승화와 김진기 와의 관계가 이상하니 합동근무가 아니라 교체근무를 해야 겠다고 건의 했다. 이에 경호 실장은 병력을 교체하라 지시 했다. 나는 구중령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에 구중령은 저희는 김진기 헌병감의 지휘를 받는 사람이다. 고차장의 지휘를 받을 수는 없다며 저항을 했다. 바로 이때 정동호 경호실장이 들어 왔다. 내가 그간의 사정을 보고하고 구중령이 거부를 해서 인계가 안 되고 있다고 했더니 정동호 실장이 대통령실에 들어가 정동렬 의전 수석과 상의해서 결정해 주겠다고 하며 들어갔다가 잠시 후 나오더니 경호실 병력으로 단독 근무를 시키라 고 지시했다. 그런데도 구정길은 거부하고 자리를 피하더니 조금 후에 다시 나타나 철수를 했다. 무장을 해제 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처럼 오래 전의 일이라 사람들마다 기억이 흐린데다가 입장에 따라 진술이 좀 다르다. 하지만 군에서 자란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런 상황에서 같은 고급장교들끼리 무장해제를 시키고, 감금한다는 식의 유치한 행동은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계엄이 선포돼 있는 최고 수준의 비상사태였다. 비상사태 하에서 대통령 공관에 대한 경계를 삼엄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법관들은 이를 ‘대통령에 압박을 가하고 공포감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고 판결했다. 6명의 장군들이 대통령에게 공포감을 주면서 결재를 요구했다면 대통령은 그 당시 그 장군들 앞에서 즉시 서명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재가는 이로부터 만 7시간 40분 만에 이루어 졌다. 6명의 장군들이 대통령실을 찾아가 시각은 9시 30분, 재가가 이루어진 시각은 이튿날 아침 05시 10분이였던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최규하 대통령은 본인의 소신대로 국방장관이 나타날 때까지 8시간 가까이 기다렸고, 국방장관이 나타나자 본인의 의지에 따라 재가를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걸 놓고 병력으로 공관을 에워싸고 장군들이 떼로 몰려가 공포감을 조성하여 강압적으로 얻어낸 결재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할까!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최규하 대통령과 한 방에서 하루 밤을 꼬박 새운 사람은 오직 신현확 총리뿐이다. 재가를 공포에 못 이겨 해주었는지 아닌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다. 최규하가 공관을 경비하는 경비병들과 6명의 장군들로부터 공포감을 느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도 이 두 사람이 가장 잘 아는 일이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은 끝내 증언을 거부했고, 신현확 총리는 1996년 7월 1일에 형사법정 417호실에서 열린 제18회 공판에 나와 증언을 했다. 이 증언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에 생생한 증언록을 그대로 발췌 수록한다.(총서 4권) 증언내용은 1,2,3심 재판관들의 판결과 정반대로 나타나 있다. 증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6명의 장군들은 최규하 대통령에 공손했고, 협박 같은 건 전혀 없었으며, 예의를 깍듯이 갖추어 건의했고,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먼저 만나본 후에 결정하겠다고 하자 공손하게 인사하고 나갔다. 무장병력이 공관을 포위하고 있는 사실도 몰랐고, 대통령 역시 장군들이나 경비원들로부터 위압감이나 공포감 같은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최규하 대통령이나 총리인 나는 합수부장이 노재현 국방장관의 사전 결재를 생략하고 곧바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것이 절차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은 보안사령관의 직보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지만 민간출신인 최규하나 신현확은 이런 직보의 의미를 모르고 타 정부기관에서와 똑같이 결재라인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정치판도는 노재현과 정승화가 밀착하게 연계되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에 대한 연행계획을 노재현에게 보고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최규하나 신현확 등이 알 리 없었을 것이다. 1996년 3월 18일 역사바로세우기 제2회 공판에서 채동욱 검사는 전두환 피고인을 상대로 대통령실에서 재가를 거절하는 대통령을 상대로 2시간(6시30-8시30분)에 걸쳐 재가를 조르지 않았는가를 집중 거론했다.


채검사: 최규하 대통령은 현직 계엄사령관을 연행하여 조사한다는 것은 중대한 사안이므로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듣지 않고서는 재가를 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지요?

전두환: 그렇지 않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국방장관을 배석시켜서 재가를 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국방장관을 빨리 찾아서 배석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가서 빨리 찾아오겠습니다 말씀드리니까 비서들 시키면 빨리 찾아올 텐데, 서울에 있는 사람이 어디로 갔겠나, 앉아서 차나 마시고 기다려 봅시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을 두 시간이상 모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저도 여러 가지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 어른이 기분이 나빠서 장관의 결재도 없이 이런 것 결재할 수 없어, 저보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라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저런 시국얘기도 듣고 저도 말씀드리고 이래서 근 두 시간 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국방장관의 결재가 없이 내가 결재하지 못하겠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은 전혀 없습니다.

채검사:  피고인은 총리공관에서 약 두 시간 동안 최대통령의 재가를 계속 요구하거나 또  설득했지만 결국은 최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했기 때문에 30경비단장실로 저녁 8시 반경에 건너온 것 아닙니까?

전두환: 그렇지 않습니다. 대통령 각하가 어느 분인데 거기서 보안사령관이 가서 10분 20분은 모르지만 두 시간이 넘도록? 그것이 상식적으로 되는 줄 아십니까, 대통령 각하를 모셔보지 못해서 그런데 대통령 각하가 누군데 ‘결재 안 돼 가져가’ 그러면 그만이지 거기서 어떻게 어린애같이 추근덕거릴 수 있겠습니까. 그럴 분위기가 아닙니다.


검사는 또한 대통령이 묶고 있었던 총리공관을 병력으로 위압하여 결재를 강요했다는 참으로 기막힌 억측에 대해서도 추궁했다.


채검사: 같은 날 저녁 8시10분경 김진기 헌병감이 구정길 총리공관 경호 대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보안사령관이 아직도 그곳에 있느냐, 지금이라도 보안사령관을 체포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구정길은 지금이라도 명령만 내리면 체포할 수 있다고 보고 하였다고 하는데 피고인은 그 당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전두환: 그런 사실 모르고 저는 대통령 끝나고 난 다음에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채검사: 피고인은 김진기 헌병감과 구정길 총리공관 경호대장 사이에 체포 전화가 있은 직후에 황급히 총리공관을 빠겨나갔는데 그 이유는 체포에 대한 통화 내용을 도청한 보안사로부터 피고인이 전화연락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전두환: 전혀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급하게 빠져 나간 일도 없고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30단에 초청해 놓은 사람들 미안하고 해서 대통령께서 국방부 장관이 도착할 테니까 이왕 기다린 김에 좀 기다렸다가 가라고 그러는데 제가 윤허를 받고 나왔습니다. 빨리 빨리 나온 게 아니에요.

채검사: 혹시 피고인은 총리공관을 빠져 나오기 전에 30경비단장실에 있던 노태우 9사단에게 전화를 걸어서 총리공관을 장악하도록 지시한 사실은 없습니까“

전두환: 없습니다.

채검사: 정동호, 고명승 등이 병력을 이끌고 총리공관으로 출동해 그곳을 경비하고 있던 구정길 둥 경호 대원들을 무장해제 시켜 막사에 억류시키고, 그 대신 자신들의 병력을 그 일대에 배치함으로써 총리공관을 장악했다고 그러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전두환: 모릅니다. 알 수가 없지요. 저도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에 사정을 알았는데, 최규하 대통령께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면 그것은 육군에서 경호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월권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경호실에서 당연히 대통령 경호를 위해서 조직되어 있고, 법에 다 임무로 부여되어 있는 경호실에서 경호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헌병이 대통령 경호를 맡는다? 이것은 아주 후진국의 아프리카나 이런 데서는 있을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정도 돼가지고 대통령경호를 경호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경호관이 수백 명 있는데 전문가들이 경호를  해야지 헌병들, 의무적으로 들어간 군인들이 경호한다는 것은 뭐가 크게 잘못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그게 잘못된 거예요. 대통령 경호를 헌병이 했다면 이는 엄청난 월권입니다.  

채검사: 결국은 청와대 경호실 병력으로 하여금 총리공관을 갑자기 대통령경호실과의 사전협의 절차도 없이 장악하도록 한 것은 대통령의 경호보다는 오히려 보안사령관인 피고인 등의 신변을 보호하고, 총리공관의 출입자와 전화를 차단해서 대통령을 사실상 연금하고 대통령의 동태를 파악해서 보안사측에 알려주도록 함으로써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둥에 있어서의 피고인등의 일련의 행위를 효과적으로 풀기 위해서 그랬던 것 아닙니까?

전두환: 그것은 비약된 논리 같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대통령을 누가 만나든지 합수부장이 아무런 상관도 없고, 또 누가 출입하든지 그것을 무슨 이유로 통제를 합니까.

채검사: 늦은 시각에 현역장성들이 떼 지어 대통령에게 몰려가 그와 같이 집단적으로 재가를 다시 요청한다는 것은 상식에 반할 뿐만 아니라 또 대통령에 대한 예의에도 어긋나는 것 아닙니까?

전두환: 보통 때 같으면 대통령이 들어오라 소리도 안하지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고 비상시국이기 때문에 대통령께 보고를 드려서 대통령이 들어오라고 다 허가를 맡고 들어간 것입니다.

채검사: 피고인 등의 이러한 재가요구에 대하여 최규하 대통령은 "왜 절차를 무시하고 연행부터 하였느냐 재가를 받기 전에 행동을 일으킨 것은 위법이다.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만 듣고 재가해 줄 수는 없다. 사건경위를 다 들어보고 판단해 보고, 또한 책임자의 이야기를 듣는 등의 정식절차를 밟지 않으면 재가를 못하겠다. 국방부장관을 데리고 오라"고 하면서 그 당시에 강력한 거부의사를 표명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까?

전두환: 수사 총책임자는 본인입니다. 만약에 수사를 잘못 했을 때 직무유기라든지 법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은 본인 이예요. 국방장관은 그 수사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절차상 국방장관을, 과거는 어떻게 됐든 간에 자기가 대통령이 일단 된 이상은 대통령에게 바로 직보로 하지 말고 앞으로는 관계국무위원을 통해서 하도록 하겠다 하신 겁니다. 그 분이 외교관 출신이시고 의전에 워낙 밝으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한국적인,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보안사가 대통령한테 직보하는 것은 본인 시절에만 한 게 아니라 보안사의 모체인 특무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김창룡 대령이 특무대장이었을 때 시작되었지요. 당시 특무대는 육군의 예하부대였습니다. 김창룡은 일개 대령이지만 모든 주요지휘관에 대해서 수사를 할 때는 육군의 예하부대이면서도 총장이나 장관의 결재를 거치지 않고 전부 대통령에게 직보를 해서 사건처리 하고 장관이나 총장한테는 추후 보고하는 것이 40년 가까이 보안부대의 하나의 특수성이고 관례입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외교관이시니까 이런 특수한 관례를 잘 모르시고 의전 적으로 국방부장관이 결재를 해야 되지 않느냐 해서 좀 늦은 것이지, 수사의 총책임자가 본인이라는 것을 대통령이 너무 잘 아시고 또 정승화 총장을 연행해 조사하는 이 자체도 이미 익히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런 사항입니다.

채검사: 그러한 것이 관행이라는 것은 피고인 개인의 생각이 아닙니까?

전두환: 지금 대한민국의 역대 방첩대장 출신, 보안부대장 출신이 아주 많이 살아 있습니다. 그분들한테 가서 물어보세요.

   

1994년 9월 17일 서울지검 공안1부 장윤석 부장 검사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증인으로 출석해 줄 것을 요청하는 문건을 보냈다. 이에 대해 최규하는 9월 27일 답신을 보냈다. 답신 내용의 취지는 이러했다.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대통령으로 처리했던 국정행위의 이유, 배경, 경위 등에 대해 일일이 해명해야 한다는 것은 국가 경영상 문제야기를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우려된바 크다. 대통령이 공적인 행위 즉,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책무에 의하여 처리된 국정행위에 대하여 후일에 와서 일일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야 어떻게 국정을 소신대로 처리할 수 있겠는가? 이런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전례를 만드는 것이며, 이러한 전례는 대통령 직무 수행에 계속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예상된다. 그동안 귀 검찰에서는 관련 인사들에 대한 조사를 마친 것으로 듣고 있는데 그만하면 진상이 밝혀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에 다른 일로 삼청동공관에 왔다가 이튼 날 새벽 6시가 가깝도록 대통령인 본인과 같이 접견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의견을 나누고 문제 처리에 임하는 둥 12.12사태의 자초지종을 겪은 신현확 총리도 이미 참고인 답변을 마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분들을 통해 당시 대통령이나 정부에 대해 알고자 하는 바를 다 알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미래를 향해 국민 모두의 역량을 합칠 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거사는 훗날 역사의 평가에 맡기는 것이 보다 타당하며 국익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최규하는 법원의 계속되는 증인신청 요구에 불응하다 96년 11월 14일 역사바로세우기재판 항소심 11차 결심공판 때, 강제구인 절차에 의해 법정에 섰지만, 위와 같은 취지의 간단한 성명만 낭독한 후 증인선서도 거부하고 모든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결국 최규하의 위 답신은 12.12 밤 대통령 공관에서 있었던 일은 신현확 총리가 가장 잘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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