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영웅' 백선엽 장군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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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영웅이자 창군(創軍) 원로인 백선엽(100·사진) 예비역 대장이 10일 밤 11시쯤 별세했다. 백 장군은 최근 지병으로 건강이 많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백 장군 측 관계자는 "최근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고, 6·25 70주년도 잘 모르시는 것 같았다"고 했다.

1920년생인 백 장군은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다부동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며 32살 나이에 국군 최초의 대장에 올랐고,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에서 그는 패퇴 직전인 아군에게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고 말하며 인민군이 점령한 고지로 뛰어올라갔고 전세를 뒤집었다. 많은 6·25 전사가들은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유족은 부인 노인숙씨와 아들 남혁·남흥씨, 딸 남희·남순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다. 발인 15일 오전 7시.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에서 조국을 구한 백 장군은 1920년 11월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낸 뒤 평양사범학교를 나왔고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군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던 백 장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평양에 돌아왔고,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자 그해 12월 월남했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백 장군은 1946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부산 제5연대 중대장을 맡았다. 창군 원년 멤버가 된 것이다.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대령으로 제1사단장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했고, 전쟁 발발 당시 고급 간부 훈련을 받고 있었다.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1950년 6월25일 서울에 있던 백 장군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수색의 사단사령부에 도착했지만 이미 개성은 함락된 이후였다. 백 장군은 그해 8월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대구 북방 25㎞에 있었던 다부동은 대구 방어의 전술적 요충지였다. 당시 윌턴 워커 장군은 백 장군에게 "다부동에서 패해 전선이 후방으로 밀리면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했다. 백 장군은 이곳 전투에서 국군이 밀리자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다. 백 장군은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며 "우리가 밀리면 미군들도 철수한다. 앞장설 테니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고 했다. 백 장군은 자신의 저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에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는 하천을 이뤘다. 시체가 풍기는 냄새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백선엽 장군이 1951년 3월 국군의 서울 탈환 뒤 예고 없이 국군 1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왼쪽 사진). 가운데 사진은 광주 상무대비행장에 도착한 백 장군을 백선육아원 어린이들이 환영하는 모습이다. 오른쪽 사진은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오른쪽)이 2018년 11월 9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한미동맹 65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에서 백선엽 장군을 찾아와 거수 경례를 하는 모습. /백선엽 장군·독자 신의일씨 제공, 오종찬 기자

백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평양 진군의 선봉에 섰다. 당시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하자 백 장군은 영어로 직접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다"며 "어렸을 적 평양에 살아 길을 잘 안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1950년 10월19일 평양을 점령한 1사단은 김일성 집무실에 지휘소를 차렸다.

백 장군은 생전 본지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국군 장병과 함께 북한의 수도 평양에 첫발을 들여놨던 1950년 10월19일을 꼽았다. 백 장군은 "우리는 6·25 전쟁이 터진 뒤 다부동에서 김일성의 공세를 막아낸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고 북진에 나섰다"며 "그때 정말 신났다. 공산당을 물리치고 곧 통일이 될 거 같았다"고 했다.

백 장군은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막아내 동부 전선 붕괴를 막아내기도 했다. 그해 겨울에는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에도 나섰다. 1952년 7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53년 1월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 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 참가했다. 백 장군은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31일 예편했다.

미군이 존경하는 한국군인
예편 직후 주중(당시 대만) 대사로 부임한 백 장군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을 지낸 뒤 1969년 교통부장관에 임명됐다. 하지만 일체의 정치 활동은 하지 않았다. 6·25 전쟁 초기 한국군을 '민병대' 취급했던 미군도 백 장군에게만큼은 존경심을 표했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이 백 장군을 향해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이라는 경칭을 붙이는 게 전통이 됐다. 2013년엔 명예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됐고, 2016년엔 한국인 최초로 미8군사령관 이·취임식에 초대됐다. 해방 이후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정보국장(대령)을 맡고 있던 백 장군은 군에 침투한 좌익·공산 세력을 뿌리 뽑는 숙군(肅軍) 작업을 총지휘했다. 이때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하다 잡혀 열흘 뒤 수색에서 총살형을 앞두고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풀어주기도 했다.

친일 논란과 현충원 안장
현 여권 일각에선 20대 초반 일본군 장교 복무 전력을 들어 백 장군을 향해 '친일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극단적인 일부는 "백 장군을 국립현충원에 안장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백 장군은 1943년부터 만주 간도특설대에 복무했지만 "독립군과 전투 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는 "내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해 간 1943년 초 간도 지역은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없을 때였다"고 했다. 지난 2011년 이명박 정부 시절 국립현충원은 백 장군의 서울현충원 안장을 검토했지만 현 정부는 서울현충원이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백 장군은 대전현충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양승식 기자 yangsshi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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