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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광주와 김일성의 북한이 야합한 5.18광주폭동, 화보의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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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5-06-20 15:26 조회9,3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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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한 애국단체가 35년 만에 밝혀낸 
                            5.18광주폭동의 충격적인 진실 
                               -대한민국 국민과 국제사회에 직접 호소한다-

 

1. 19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폭동사건은 현 조선인민군원수인 리을설(1921)이 3성장군인 인민군 상장이었던 59세였을 때, 북한특수군 600명을 이끌고 광주의 반미-친북 세력과 연합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한 무장 내란 사건이었다. 북한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범죄를 범했고, 광주는 여적범죄를 범한 것이다.  

2. 광주작전에 참전한 600명의 북한군사들 중 59명이 중장(2성) 상장(3성), 대장(4성), 차수(5성), 원수(6성)로 승진해 지금까지 권력핵심을 이루고 있다.  

3. 이들 59명의 장군들과 3명의 민간인들은 35년 전, 광주에서 얼굴사진이 찍혔다. 이들의 얼굴은 현재 북한 장군들의 얼굴 사진과 정확히 일치한다. 전문적인 영상분석 기법으로 분석한 결과와 과정이 이 책에 수록돼 있다. 이들 영상 분석 자료들은 한 시스템분석 학자가 12년 동안 연구해서 2014년 말에 발표한 연구결과와 정확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매우 효과적인 전달수단이 되고 있다.  

4. 이 충격적인 진실을 대한민국 국민과 국제사회에 직접 호소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가기관에 북한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포진되어 사실상 대통령과 국가 위에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대한민국 광주 게릴라전에 참전했던 북한군 장군들

  리을설 부각 (김정일과 찍은 사진)

  계급 별 명단

  특기할 인물

62광수 리을설:
인민군원수, 5.18광주 게릴라 참략전쟁의 총 지휘관. 북한에서는 “천출명장의 전설적인 항일투사”로 알려진 전설의 인물, 현재 인민군 서열 1위. 

36광수 최룡해: 당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총정치국장. 2014년 10월 4일,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황병서, 조선로동당 대남 담당 비서 김양건과 함께 2014년 아시안 게임 폐막식에 깜짝 참석했다.  

23광수 황병서: 현 인민국총정치국장, 

제4광수 김격식: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에 파견, 2010년 제4군단장으로 인민무력부 총정찰국장인 김영철의 명을 받아 천안함을 폭침, 2015년 5월 10일 갑자기 숙청당함.  

제14광수 김영철: 인민군 정찰총국장으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공격을 주도했고, 황장엽 암살 지령을 직접 내렸으며, 소니픽처스 해킹을 직접 지사한 인물 

제31광수: 연형묵, 1931년생, 광주에 왔을 때는 49세였다. 그는 군관출신으로 김일성 호위병이라는 경력을 달고 있다. 1988~92년 사이에 총리를 지내면서 남북 총리회담을 주도했다. 2005년 10월 의문사를 당했는데 김정일의 눈 밖에 나 암살되었다는 설이 파다하다.  

제5광수 김정각, 김정일의 영구차를 호위한 8명 중 사람. 인민군대장, 총정치국 제1부국장         

                   5.18 폭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2년 동안 연구한 이유  

한국에는 5.18 폭동을 민주화의 성역으로 고착시키려는 세력이 있고, 이들이 사실상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종북 공산주의 세력인 것이다. 이들의 권력은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5.18민주항쟁’에서 나온다. 그들이 1980년 5.18일부터 한국의 독재정권을 상대로 광주에서 무장 항쟁을 벌여 “반미-반독재-민주화” 운동을 성공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5.18’과 ‘민주화’라는 단어만 나오면 대통령도 언론도 주눅이 들고, 법과 정의와 논리가 사라진다. 오직 그들이 주장하는 무자비한 억지가 통할 뿐이다.  

5·18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와 국가 사이에 발생했던 10일간의 무력충돌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18일 09:30분경, 북한군 200여명은 계엄령을 집행하기 위해 광주 시내에 위치한 전남대학교에 주둔한 공수부대 1개 대대(400명)를 찾아가 돌멩이 공격을 가해 공수부대 요원 7명의 얼굴에 피를 흘리게 했다. 이렇게 시작된 광주폭동은 5월 27일 새벽 05시 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됐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5·18광주시위는 국가를 상대로 한 ‘반국가폭동’으로 인식됐고, 당시의 법관들도 그렇게 판결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때 아닌 ‘민주화’라는 광란의 쓰나미를 맞는 불운을 당하게 됐다. 광란이 휩쓸고 간 사회는 전과는 단절된 딴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사회인식도 대법원 판결도 모두 거꾸로 뒤집혔다. 문명이 사라진 원시림 사회에 김영삼 정권의 사생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라는 흉측한 괴물이 탄생했다. 헌법에서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능멸하고, 헌법이 불법으로 규정한 관심법과 마녀사냥에 의한 인민재판까지 동원하여 5·18에 대한 정통역사관을 뒤엎고 좌익세력과 ‘양아치로 대표되는 무산계급’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극시켰다.  

반역을 저지른 5·18세력이 오히려 '대한민국 역사에 화려한 획을 그었다는 민주화운동'으로 등극하여 대한민국을 깔고 앉아 입법, 사법 행정 모두를 호령해오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오직 '5.18민주화역사'만 존재하고 이승만의 건국역사와 박정희의 산업화역사는 악의 축인 것으로 짓밟혀왔다. 한반도 역사의 정통성은 북한에 있고, 김일성만이 위대한 지도자라는 역사관을 대한민국 국민과 학생들에 강요해 왔다.  

예전의 ‘내란세력’이 ‘헌법수호세력’이 됐고, ‘내란’을 진압한 국가는 ‘헌법파괴세력’이 됐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 동지’로 모시는 용공세력이 충신세력이 되고, 반공세력이 역적세력으로 전락한 것이다. 5·18 이 하나가 국가의 정통성을 뒤바꿔 놓은 원흉인 것이다.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국가기관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너무 많이 포진해 있다. 이런 공산주의자들의 총본부는 전라도이고, 전라도 사람들로 구성된 한국의 제1야당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국회를 마비시키고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35년이 지난 지금 나타난 객관적 분석결과와 사진 증거들에 의하면 이 엄청난 파라독스 뒤에는 북한이 있었다. 5.18 폭동은 광주의 총사령관 김대중과 북한의 총사령관 김일성이 야합한 적화통일 시도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자 김일성은 “지금이 결정적인 시기”라고 판단하고 소규모의 특수군을 꾸준히 남파시켜 1980년 5월에는 특수군 집단만 600명, 그리고 그들에게 군수물자와 정보를 제공하는 등 수를 알 수 없는 고정간첩들이 확보됐다. 이들 600명은 한국의 계엄군과 전투를 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 아니라 광주와 국가 사이를 이간하고 국가전복을 위한 무력폭동을 주도하기 위해 왔다. 

이간수단은 두 가지, 하나는 유언비어였고, 다른 하나는 북한군이 광주사람들을 총과 살인도구로 살해해놓고 이를 계엄군의 소행이라고 선동하는 것이었다. 유언비어는 “정부가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기 위해 전라도를 미워하는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보냈다” “전두환이 계엄군에 환각제를 먹여 마구 죽이고 있다” “공수부대원들이 여자들만 보면 옷을 벗기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서 청소차에 던졌다” 는 등의 허황된 것들이었지만 광주의 개념 없는 계급들은 이에 넘어가 북한군에 동조했다. 북한은 침량행위를 한 것이고, 광주는 적과 내통-합세하여 여적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북한은 해마다 5.18사건을 남한보다 더욱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으며, 북한에서 최고인 것에는 5.18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 결론은 2002년부터 2014년 9월까지 만 12년 동안 한 시스템공학자의 끈질긴 연구 끝에 비로소 도출되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2015년 5월 5일부터, 이를 증명할 시각적 증거들이 몇몇 반공 전문가들에 의해 수집됐다는 사실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장내란을 주도했던 북한군사 59명이 2,3,4,5,6성 장군들이 되어 북한정권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북한에 생존하는 유일한 인민군 원수 1명과 8명의 ‘차수’ 모두가 광주작전 참전자들이다. 또 다른 3명의 광주 폭도는 2010년 5월 17일 평양에서 거행된 5.18 제30주년 기념식장 로얄석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2006년 북한을 탈출하여 지금 현재 서울 근교에 살고 있는 가명 김명국도 1980년 5월, 광주작전에 참전했다.  

그런데도 한국정부는 해마다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기념하고, 북한군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총질을 한 5,700명의 광주인들을 국가유공자라며 보상금을 지불하고, 매년 최상급의 연금을 지불하며, 그 자식들에는 각종 시험과 취직에서 총점의 10%를 가산점으로 부여하고 있다. 5.18은 확실히 대한민국을 점령한 점령군 사령부인 것이다.  

                                    북한특수군이 광주에서 보인 위력  

전국계엄령 발동으로 광주는 물론 나라 전체가 공포로 얼어붙었던 5월 18일 아침, 젊은이라면 멀리에 나타난 경찰들만 보아도 오금을 저리며 꼭꼭 숨던 그 시각에 북한특수군 200여명이 계엄군의 집결지인 전남대학을 찾아가 돌을 던져 7명의 공수대원에 큰 부상을 입혔다. 광주에서는 200여명의 대학생이 모일 수 없었고, 이런 배짱과 능력을 가진 대학생들도 없었다. 그동안 광주-전라도 지방에서 암암리에 북한과 연계하여 반정부활동을 벌이던 이른바 좌경 운동권의 리더들은 모두 숨거나 잡혀갔다.  

300명의 특수부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20사단 지휘부가 5월 21일 오전 8시에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해 매복했다가 공격해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지휘부 차량 14대를 빼앗았다. 지프차를 먼저 빼앗은 목적은 방위산업 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그들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사단장 차 등을 본 아시아자동자 직원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4대의 장갑차와 374대의 군용트럭에 키를 꽂아주었다. 아침 9시, 아시아자동차에는 총 600명의 북한특수군이 집결했다. 이들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를 4시간 만에 털어 5,408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그리고 탈취한 무기들로 80-85명의 광주시민을 쏘아놓고 이를 공수부대의 만행으로 뒤집어 씌웠다. 6회의 교도소 공격도 단행했다. 이런 작전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을 능가하는 세계 최정상급의 특공작전에 해당할 것이다.  

드디어 그들의 싸움 상대인 공수부대가 구사일생으로 광주시 외곽으로 도망을 갔다. 광주시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계엄사령부의 조치였다. 이때까지 계엄군에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당시 1성장군인 제11공수여단장 최웅은 지프차를 타고 철로를 건너다 스나이핑을 당해 운전병을 잃고, 병사 5명의 호위를 받으며 밤새내 무등산을 헤매다가 무등산 정상에 주둔한 방공포대가 깔아놓은 지뢰밭을 용케도 통과하여 방공포대에 3일간 머물다 본대와 합류했다. 세계 최정상급 살인기계로 훈련된 북한특수군이 아니라면 광주에 출동했던 3개 여단 10개 대대 총 4,000명 정도의 공수부대를 이렇게 몰살지경으로 몰아넣는 작전을 펼 수는 없었다.  

5월 21일 밤, 이들은 2,700명의 수용자가 들어 있는 광주교도소를 6회에 걸쳐 공격하였다. 북한으로부터의 무리한 명령을 맹목적으로 수행하느라 죽은 것이다. 여기에서 490명에 이르는 북한군이 죽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북한군은 8톤 규모의 TNT에 뇌관과 도화선을 연결해 2,100발의 폭탄을 전남도청에 조립해 놓았다. 담뱃불만 던지면 히로시마가 되는 것이었다. 전라도에 민주화시위는 없었다. 북한특수군에 내통-영합한 내란행위가 있었을 뿐이다, 이상의 내용들은 2014년 10월에 발행된 ‘5.18분석 최종보고서’에 명쾌하게 분석돼 있다.  

                     어제의 역적과 충신이 오늘은 정반대로 뒤바뀐 한국사회  

5.18이라는 역사사건을 놓고, 1980년의 충신과 역적이 1996년에 뒤바뀌었다. 이런 기현상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이변이다. 이렇게 국가정체성이 뒤바뀐 것은 당시 선동과 거짓을 전문으로 하는 좌익세력이 한국사회를 사실상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으로 분열되어 반목과 충돌을 반복해 왔다. 해방 후 남한에서 발생한 수많은 소요사태들은 북한의 조종을 받는 남한좌익들이 일으킨 반국가 폭동이었다. 이런 불법한 폭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의 역사학계를 미리부터 장악했다. 학생들에게까지 교과서를 통해 북한을 미화하고 남한을 태어나서는 안 될 부끄러운 집단, 곧 북한에 흡수 돼야할 임시 집단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국가는 이를 시정할 능력을 상실했다. 국가기관의 요직들을 좌익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역사학의 펜대를 장악하여 과거의 모든 기록들을 부정하고 자기들이 조작한 내용들을 사실이라고 기록해왔다.  

생일 없는 사람 없고 생일 없는 국가 이 세상엔 없다. 그런데 매우 부끄럽게도 경제 10위권을 자랑하는 한국에는 건국절이 없다. 2008년 8월 건국 60주년을 맞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건국절 제정을 시도하였지만 남한 공산주의자들은 이승만이라는 존재와 건국절이라는 개념이 5.18의 숭고한 민주화정신을 훼손한다며 취소하라 명령했다. 2008년, 보훈처에서 많은 돈을 들여 광주 5.18묘지에 ‘건국 60주년 기념’ 조형물을 설치했다가 5.18단체들이 ‘건국개념은 5.18의 숭고한 이념과 배치되는 것’이라며 당장 철거하라 반발했고, 이에 따라 보훈처는 즉시 철거해야 했다. 드디어 ‘대한민국 건국’ 이라는 6개 글자는 박근혜 시대인 2014년에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교육부 장관의 지시로 삭제된 것이다. 이 정도로 대한민국은 북한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왜 광주와 북한이 저지른 내란행위를 대힌민국국민과 국제사회에 먼저 호소하는가?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한국정부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경악해야 할 국가는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는 이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도 남았을 터인데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이 방송과 인터넷에 확산되는 것을 차단시켜왔다. 박근혜 정부는 매우 수상하게도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봉쇄시키고 있는 김정은과 관계개선을 추구해왔다. 이런 시점에서 나의 연구결과는 박근혜 정부에 매우 불편한 진실임에 틀림없다.  

세계가 놀라야만 할 이 새로운 발견은 대한민국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에 대해서는 침략사실을 물어야 함과 동시에 UN에 이 사건을 회부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전라도에서 신격화되어 있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과 그를 추종하여 북한특수군 600명을 광주로 끌어들여 그들과 함께 총기를 들고 대한민국에 항적한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여적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형법 제93조(여적)는 “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박근혜 정부는 이런 강력한 조치를 취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지금의 박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이른바 5.18세력의 횡포에 노예화되어 있기 때문이고, 국가기관의 주요 포스트들과 언론계를 장악한 종북세력에 주눅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력과 맞서서 지난 12년 동안 투쟁해온 이 책의 저자는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를 이슈화 시켜 국제사회로 하여금 대한민국 정부가 가야할 길을 열어주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에게는 방송출연이 철저히 금지돼 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가 방송과 언론을 통제하여 이 새로운 진실이 확산되는 것을 원천 봉쇄시키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집단과도 같다.  

                  국가가 5.18역사의 진실탐구 노력에 가한 탄압-학대 사실 

진실을 탐구하는 나에게 한국정부가 가한 탄압과 학대의 역사는 5.18폭동사건의 본질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196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소위로 임관하여 대위에 이르기까지 44개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소령과 중령 때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 위치한 미해군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와 시스템분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과 석사에서 응용수학 박사과정으로 이전한 경우는 미 해군대학원 창설 이래 처음 있었던 사례였고, 박사논문에 수학공식 2개와 수학정리 6개를 실은 것도 학교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후 나는 한국 국방연구원에서 8년 동안 국방문제를 연구하다가 1987년 대령으로 예편하고 미해군대학원에서 교수를 했다. 1990년 귀국하여 군사 및 시스템경영에 대한 베스트셀러 책들을 썼고, 기고, 방송출연, 강연 등으로 10년 동안 수입 좋은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이런 나의 행복했던 인생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햇볕정책’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북한에 국부를 퍼주는 행위에 대해 나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앞장서서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KCIA 부장인 임동원을 시켜 나를 도청케 했다. 2005년, KCIA의 도청사건이 사회 이슈화 되면서 무제한으로 도청을 주도한 KCIA 수장인 임동원이 감옥에 갔다,  

1999년부터 임동원은 KCIA의 차장인 김은성과 통신정보국장에게 직접 지시하여 매일 나를 도청하고 감시케 했다. 김은성 차장은 차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매일 같이 지만원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임동원으로부터 추궁당했고, 그런 일이 그의 재임기간 중 가장 괴로웠던 것이었다고 검찰조서에 진술했다. 임동원의 이런 행위로 인해 대기업들과 예약돼 있던 수십 개의 강의들이 순식에 날아갔고, 방송, 기고가 일순간에 중지됐다. 이러한 손해와 불법 감시로 인한 고통은 일순간 공황으로 엄습했다. 2006년 나는 임동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한국 재판부는 겨우 2,000만원만 배상하라 판결했다.  

2002년 8월, 나는 김대중이 김정일의 총독처럼 행동한다는 3,500자의 칼럼 형 광고를 냈다. 김대중 정부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요동쳤다. 5.18유공자단체들이 광고문 중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됐다’는 45자의 문구가 ‘신성한 5.18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두 가지 폭력을 가했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어깨 12명을 서울로 데려와 내 사무실을 부수고 아파트 대문과 자동차를 파괴했다. 경찰은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이웃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와 가족들은 경찰의 사전 제보로 피난을 할 수 있었다.  

이어서 광주검찰청 최성필 검사가 경찰 4명(김용철, 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을 서울 근교 나의 집으로 보내 6시간 거리인 광주로 압송하였다. 수도권 국민을 광주로 잡아가는 것은 형사소송법 제4조 ‘토지관할 규정’에 어긋났지만 김대중 정권 당시의 광주는 법 위에 군림하는 점령군 사령부로 행세했다. 아들 벌되는 4명의 경찰은 나의 팔을 뒤로 젖힌 채 수갑을 뒤로 채우고 이동하는 6시간 동안 모욕적인 방법으로 육체적 린치를 가했고, 화장실 사용도 거부한 채, 언어폭력을 가했다. 검찰청에 도착해서도 최성필 검사가 또 다른 2시간 동안 수갑을 뒤로 채우고 곧 때릴 듯한 제스처를 쓰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이웃 여성 검사가 나타나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판사들이 고함을 지르고 탁자를 치며 노려보았다. 공포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101일 동안 나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었다.  

이후 누구든 5.18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면 지만원처럼 당한다는 정서가 한국사회에 팽배했다. 5.18은 광주가 지키는 성역이었고, 한국 좌익세력의 성지였다. 2002년부터 2008년 초까지 7년동안, 나는 5.18사건에 대해 재판한 1996-97년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18만 쪽을 모두 분석하여 1,720쪽 분량의 다큐멘터리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4권으로 발행했다. 여기에도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와서 독특한 특수전을 수행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5.18단체들이 또 고소를 했다. 5.18의 숭고한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2008년부터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나는 5년 동안 재판을 받았다. 판사로부터 ‘피고인은 언제든지 구속될 수 있다’는 예비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총 25회의 공판을 치렀다. 재판을 받으면서 나는 5.18에 대한 책 3권을 더 발행했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이 확실하게 왔다는 결론을 낸 책들이다.  

똑같은 “북한특수군 개입” 표현으로 인해 나는 2002년과 2008-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2002년 재판에서는 광주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008-2012년 재판에는 수도권인 안양과 서울에서 1,2,3심 재판을 받았는데 모두 무죄로 판결됐다. 이는 5.18세력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변으로 인식됐다. 수도권 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광주 5.18단체들이 70명씩 법정에 나타나 폭행을 했다. 방청하러 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40대 여성을 뒤로부터 공격하여 귀가 찢어져 얼굴과 바닥에 피가 흘렀고, 귀걸이가 분실됐다. 손톱을 세우고 나의 얼굴을 긁어놓겠다며 덤비기도 했다. 재판정에서 소란을 피워 3차례의 휴정을 유발시켜 결국 재판을 파행으로 몰고 갔다. 아버지 벌되는 노인들을 향해 일당 얼마씩 받고 왔느냐, 느그들이 5.18에 대해 뭘 안다냐 등 반말을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손가락으로 턱을 치기도 했다. 이렇듯 광주의 5.18유공자단체 사람들은 지금도 북한사회처럼 문명사회를 등지고 있다.  

2012년 12월 27일은 5.18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는 표현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날이었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와서 작전하고 갔다’는 금기의 표현이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2개의 TV방송국들이 2013년 1월부터 나를 여러 차례 초대하여 5.18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이 왔다는 증거를 물었다. 이 출연 사실은 “5.18분석 최종보고서‘ 209-210쪽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행자들이 모두 나의 결론에 공감을 표했다.  

그 후 5월까지 많은 탈북자들이 방송에 출연하여 5.18은 북한이 저지른 것이라는 증언들을 했다. 이중 가장 괄목할 사실이 두 개 있다. 첫째,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5.18 광주에 실제로 참전했던 사람이 탈북하여 현재 서울근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얼굴을 가리고 TV에 출연한 사진이 위 저서 100쪽에 있다. 그리고 그가 소속됐던 침투조직 도표가 99쪽에 있다. 둘째,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이 소개됐다. 위 책의 89쪽에는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이 TV에 출연하여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내용을 폭로하는 사진이 있다. “5.18은 북한이 저질러놓고 남한에 뒤집어씌운 것이고, 사태 직후 대남공작부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훈장을 받고 술파티를 했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나의 연구결과가 사회일각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광주사람들이 좌익 정치인들과 정부 당국자들을 압박했다. 그리고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내가 출연했던 2개 방송국들을 공격하고 보훈처와 전두환의 사저 앞에서 폭력시위를 했다. 방송국 건물 벽에 토마토와 계란을 투척하고 쇠뭉치로 유리벽을 타격하고,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들에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이 장면은 위 보고서 214-227쪽 사진들에 나타나 있다. 2013년 5월이었다.  

이에 당시 국방장관 김관진(현 청와대 안보실장)이 국방부 대변인을 통해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 국방부의 판단”이라고 발표했다. 이 내용을 토스 받은 정홍원 국무총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총리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발언을 했다.  

2013년 6월 10일,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민주주의 근간을 허무는 망언을 했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이에 반하는 표현은 역사왜곡이고, 역사왜곡은 반사회적 행위로, 이에 가담한 사람들의 인터넷 글에 대해서는 삭제 등의 조치를 취하고, 북한특수군 개입을 증언시킨 방송들은 방송통신위원회를 통해 제재할 것이며 역사왜곡자들은 검찰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대통령 직속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나서서 국무총리의 발언에 상응하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5.18에 대한 방송을 중지시키고, 2개 방송국 진행자들에게 감봉을 포함한 중징계를 내렸다. 방송진행자들에게 사과방송을 강요했고, 방송 출연자들에게는 영구적인 방송출연금지 조치를 취했다. 북한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게 하는 이변이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것이다.  

5.18에 대한 나의 새로운 연구결과를 방송하지 못하도록 차단한 방송통신심의원원회는 이어서 인터넷 공간까지 차단했다. 2013년 5월 7일, 유튜브에 게시한 동영상(제목: “5.18광주에 북한특수군600명 왔다“)을 2014년 7월 10일에 나에게 아무런 사전 고지 없이 슬쩍 한국측 접속을 차단시켰다. 이어서 2014년 10월 23일, 포털 사이트에 게시된 5.18연구결과물 28개를 무단 삭제한 후 수십 개의 글을 삭제하였다.  

2014년 11월, 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런 불법한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국가가 학문의 결과를 검열(Censorship)하고 차단하고 삭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5년 6월 12일, 서울행정법원 김국현 판사는 5.18에 관한 한, 1997년의 대법원 판결내용 이외의 그 어떤 연구결과나 증거도 허용되지 않으며, 소수의견은 다수의 의견을 왜곡할 우려가 있으므로 차단돼야 한다는 요지의 실로 전근대적인 판결을 내렸다.  

“5.18에 대해 1997년의 사법적 판단과 다른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허용범위 내에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도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허용범위 내에 있지 않다는 실로 충격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는 북한의 인민군 재판소에서나 있을 법한 판결이다.  

더구나 이 판결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사진 찍힌 폭도 3명의 얼굴과 2010년 5월 17일, 평양에서 거행된 제30회 5.18기념행사장의 로얄박스에 앉아있는 3명의 얼굴이 일치한다는 사진 분석 자료를 제출한 이후에 내려졌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돼 있는 것이다.  

나는 60세-72세에 이르는 황금기의 인생 12년을 진실탐구에 전념했다. 이 진실탐구는 대한민국을, 악령과도 같은 5.18세력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격려 받아야 할 이런 노력을 단지 대한민국에서 했기 때문에 나는 지난 12년간의 인생황금기를 국가에 차압당했던 것이다. 이상의 탄압에 더해 나는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확산하는 불명예스러운 대명사를 여러 개 얻었다. “지만원은 미친 사람이다. 그의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 “지만원은 말이 안 통하는 극우 극단주의자다” “지만원은 정신이 돈 친일파다” 사회 곳곳에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는 이 말들에 가장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사회생활을 하는 내 가족들이다.

                               1980년 광주에 나타난 얼굴과 북한장군들 얼굴 대조 분석  

62명의 북한 인물들은 번호가 매겨진 '광수'로 표현돼 있다. '광수'는 광주 게릴라 작전에 참전한 북한특수군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북한당국은 1980년 5월, 광주폭동을 TV로 중계방송했다. 이를 군 내무반에서 보던 북한 병사들이 제1광수가 장갑차를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야, 저거 광수다 광수" 하고 손벽을 쳤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하 사진분석 자료 전개 


2015.6.2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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