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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김정일과 김대중이 일으킨 적화통일 폭동(광주가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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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6-06-24 11:35 조회6,2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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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발등 찍은 5.18유공자들의 증언 


                                        요 약

1. 5.18 최고 유공자들은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며 이들은 5월 24일 오후 도청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2. 5월 24일 오전까지 도청은 높은 관료처럼 위엄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통제했고, 광주시민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광주사람들은 5월 24일 오전까지 도청에 들어갈 수 없었다. 

3. 5.18의 로고 인물인 윤상원은 5월 21일까지도 녹두서점과 은신처를 오가며 숨어 지냈다. 윤상원은 항쟁지도부가 영입한 손님이었다. 정상용, 김종배, 허규정은 수습대책위원이었고, 나중에 YWCA로부터 영입된 윤상원 등과 합쳐 ‘항쟁지도부’를 출범시켰다. 김종배가 김창길이 이끌었던 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위원장을 하고 정상용은 대외관계를 맡는 외무를 맡고 허규정이 내무를 맡았다. 윤상원은 대변인을 맡았다. ‘항쟁지도부’라는 것은 낯모르는 사람들 끌어 모아 임시방편으로 만든 임시조직이었다. 

4. 무기는 항쟁지도부 사람들이 모르는 그 어떤 사람들이 털었다. 항쟁지도부 사람들은 무기를 털지 않았다. 

5. 군법회의에 회부된 사람들은 그 80% 이상이 10-20대의 천대받던 부나비들이었다. 

6. 항쟁지도부 사람들은 운동권에 속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개인지격으로 휩쓸렸다. 시민들 하고 이리저리 밀려다니기만 했다. 그 시위는 누가 주도하는 사람도 없고 리더도 없었다. 항쟁지도부 사람들에서는 특별한 방법은 안 나오고 맨날 회의만 했다. 운동권 간부들은 모두 다 예비검속으로 미리 잡혀 가버렸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개념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한 마디로 5.18은 최고수준으로 대접받는 ‘5.18유공자’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5월 21일에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이, 5월 24일 오전까지 도청을 독점한 높은 관료처럼 위엄 있는 낯 선 사람들이 일으켰다는 것을 ‘최고의 5.18 유공자’들이 스스로 증언한 것이다, 광주에는 민주화시위를 주도한 지휘자도 없었고, 시위주체도 없었다. 5월 25일 밤에야 구성된 항쟁지도부는 개념 없는 콩가루들이 어쩌다 모인 주막인들이었다. 아래가 이를 증명한다. 

5.18은 김정일과 김대중이 손잡고 일으킨 적화통일 폭동, 이처럼 명확한 증거는 없다.

 2015년, 5.18 제 35주년 광주거리 기념 행진에 나타난 5.18의 로고, 김정일-김대중 캐릭터  

                           5.18 최상위급 유공자 정상용의 증언 

정상용은 당시 30세의 회사원이었고, 군법회의 제1심에서 무기형을 언도받았다. 김대중 시절에는 평민당 국회의원,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17권 65쪽 ‘정상용의 5.18회고’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한 마디로 기동타격대가 10대의 학생들과 20대의 품팔이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그는 또 5.18항쟁자료집 제1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와 김종배 허규정은 수습대책위원이었고, 나중에 YWCA로부터 영입된 윤상원 등과 합쳐 ‘항쟁지도부’를 출범시켰다. 김종배가 김창길이 이끌었던 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위원장을 하고 나는 대외관계를 맡는 외무를 맡고 허규정이 내무를 맡았다. ‘항쟁지도부’라는 것은 낯모르는 사람들 끌어 모아 임시방편으로 만든 임시조직이었다. 윤상원, 나, 이강현, 윤강옥 이렇게 넷이서 주로 대책을 의논했다. 25일 이후에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겨우 70-80명 수준이었다. 그나마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온건파인 김창길 등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남선이었다. 그가 권총을 쏘며 무섭게 해서 몰아냈다. 

19일에 나는 녹두서점에 있었다. 거기서 윤상원을 만나 대책을 의논하다가 21일 총격전이 벌어지자 흩어졌다. 녹두서점에 있었던 사람들이 ‘각자 처신하자’며 다 해산해 뿔뿔이 헤어졌다. 22일 다시 녹두서점에 모였다. 그리고 녹두서점이 비좁아 본부를 YWCA로 옮겼다. 김종배(총사령관역)와 허규정(내무위원장)은 여기에서 처음 만났다. 이 두 사람은 조선대 학생이었고, 운동권이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거기에서 생전 처음 만난 거다. 

윤상원의 투쟁 감각이 나보다 앞서 있었다. 김종배를 찾아낸 것도 윤상원이었다. 27일, 윤상원 등 여러 명이 도청건물 회의실에 있었다. 회의실에 있었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다. 전망이 좋은 2층 복도에 있던 사람들은 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다. 계엄군이 의표를 찔러 후방으로부터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5.18 최상위급 유공자 허규정의 증언 

그는 또 5.18항쟁자료집 제1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5월 26일 출범한 투쟁위원회의 내무위원장을 맡았다. 우연히 지나다가 공수부대 요원들이 젊은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도 공수부대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운동권에 속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개인지격으로 휩쓸렸다. 시민들 하고 이리저리 밀려다니기만 했다. 그 시위는 누가 주도하는 사람도 없고 리더도 없었다. 경찰도 공수부대를 욕하고 우리더러는 들어가라며 보호해주려 했다. 

21일 누군가가 도청을 탈환했다. 이걸 장악한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닌가?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우리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도청으로 간 거다. 장악한 사람들은 위엄 있는 높은 관료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우리에게 ‘곧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니 학생들은 나가라’고 말했다. 

종교계 지도자, 재야인사만 들어가고 학생들은 들어오지 말고 나가라 했다. 계엄군이 곧 들어온다 하니까 누구든 책임감 없이 나와 버렸다. 종교지도자들도 나갔고, 일반 시민들도 다 나갔다. 도망 나온 거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멀리 안 가고,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일부 시민들이 도청에 들어갔다는 말이 들렸다. 나도 다시 도청에 갔다. 갔더니 시국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있었다. 높아 보이는 사람들은 안 보였다. 

어른들은 시국수습대책위원회, 젊은 사람들은 학생수습위원회, 어른 청년이 각각 위원회 만들어 가지고 서로 말이 다르고 통제가 안 되었다. 조직이 움직이지 않고 엉망이었다. 그런데 윤석루(19세)가 나이도 굉장히 어린데 기백이 있어서 기동타격대를 장악했다. 윤석루는 학생도 아니었다. 특별한 방법은 안 나오고 맨날 회의만 했다. 운동권 간부들은 모두 다 예비검속으로 미리 잡혀 가버렸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개념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23일의 이런 모습을 본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남는 사람들은 오직 종교지도자들, 교수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태를 여기서 끝내고 시국을 수습하자고 했다. 나도 멋모르고 참여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내무위원장이 된 거다. 

                              5.18 최상위급 유공자 박남선의 증언 

5.18항쟁자료집 제1권에서 박남선은 이런 증언을 했다. 

나의 집이 31사단 앞이었다. 5월 18일, 전대 앞 데모를 봤다. 근무하는데 둘째 동생한테서 또 다른 동생이 계엄군에 맞았다는 전화가 왔다. 전대 병원에 가니 동생이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친구들과 조를 짜서 낙오한 계엄군을 돌과 각목으로 패기 시작했다. 차에다 몽둥이를 실었다. 당시는 아스팔트 위에 돌멩이 보다 총이 더 나뒹굴었다. 내 통제 하에 있는 사람들이 가진 총 말고는 다 회수하도록 지시했다. 

시민군은 모두 불루칼러들이었다,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등 가장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이 가장 앞장섰다. 운동권들은 다 광주에서 도망갔다. 지식인들은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얼굴 세울 궁리만 했다. 전남대? 5월 17일, 운동권 인물들 다 잡혀 갔다. 항쟁에 참여한 사람 거의 없다. 고등학생들, 총 들고 싸우겠다고 했는데 내가 26일 밤, 다 돌려보냈다.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은 광주가 통제해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간 사람들이다. 

                         윤상원과 함께 숨어 있던 김효섭의 증언 

“역사로서의 5.18” 제3권 (329-332)에는 김효섭의 증언이 있다. 

“상원이 형은 그게 자기가 생각해도 잘 안 되겠던지, 이번에는 무기를 개발하자고 했다. 깨진 보도 불록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철공소들에 다니면서 쇳토막 하고 나사를 많이 가져오라 했다. 21일 새벽부터 계림동 대인동을 다니면서 나사와 철근토막들을 구해 녹두서점으로 왔다. 그걸 가지고 나가 땡겨보았는데 날카로워 손에 피가 났다. 이거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는 순간 어디선가 모르게 총이 쏟아져 나와 버렸다. 수집한 쇳토막들은 소용없게 되었다.” 

                         5.18성역화의 호위무사 박준성의 증언 

5.18의 열렬한 호위무사인 박준성은 역사학연구소(http://www.ihs21.org/) 연구원이자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다. 그는 2005년 9월 5일 인터넷(http://blog.naver.com/logosist/17006521)에 “광주항쟁의 '주역'은 바로 노동자였다”는 제하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이었다.” 

                                        수사 기록 

당시 군은 광주사태 관련자 2,518명을 조사한 결과 1,957명은 훈방조치하고 561명을 검찰로 송치했다. 제1심 피고인 수는 모두 357명, 이중 252명만이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받았다. 그런데 이 357명을 연령별로 보면 10대가 71명으로 20%, 20대가 216명으로 61%를 차지했다. 10-20대가 81%를 차지한 것이다. 나머지는 30대 36명, 40대 23명, 50대 6명, 60대 5명으로 집계된다. 이들의 직업은 주로 하층 계의 직업들로 무려 59종에 이르며 직업별 구체적인 숫자는 아래와 같다, 

학생80 농업30 무직27 운전수24 종업원21 노동13 방위병13 교수11 목공11 상업9 공업7 회사원6 양화공5 용접공5 행상4 미장공4 광부4 목수4 선원4 교사3 변호사3 재수생3 보일러공3 교직원3 인쇄업3 조수3 운수업2 샤시공2 제과공2 석공2 신부2 자개공2 가구공2 회사이사2 재봉사2 정비공2 실내장식1 약사1 개찰원1 다방1 전기공1 변호사사무장1 서적판매원1 세공1 도자기공1 의사1 이발사1 양복점1 엿장수1 건재상1 신문보급소1 당원1 청과물상1 불럭공1 매점1 대학이사1 회장1 화가1 가톨릭회장1(서경원) 

사형을 받은 사람은 정동년(37, 복학생), 배용수(34,운전수), 박노정(28,인쇄업), 박남선(26, 트럭운전수), 김종배(26,학생)이고,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윤석루(20,구두공, 기동타격대장) 허규정(27,학생) 정상용(30,회사원) 하영열(31,공원) 윤재근(28,공원) 서만석(36,상업) 홍남순(67,변호사)였다. 

27일 새벽 진압작전에서 사망한 17명, 거의가 13세를 포함한 10대 학생들과 20대의 천덕꾸러기들이었다. 


2016.6.2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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