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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사태의 진실규명을 위한 험한 여정-상-(이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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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4-04-10 20:55 조회5,4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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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사태의 진실규명을 위한 험한 旅情(여정) -상-

(2014.4.18)

이주천

원광대학교 사학과

I

1980년 5월 18일로 시작된 광주의 참변이 지난 지 어언 3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일반적으로 5.18은 4.19학생의거와 부마항쟁과 더불어 한국의 민주화에 공헌한 3대항쟁으로 지칭되고 있다. 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부터 81년 8월초순까지 서울에 체류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필자도 5.18을 목격한 현대사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5.18에 대한 재조명 시도는 2006년부터 학계에서가 아니라 일부 시민단체에서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대표적인 연구업적은 지만원박사의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등과 김대령 박사의 『역사로서의 5.18』이다. 그런데 작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동아와 조선방송을 통해서 5.18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다가 필자와 탈북자(임천용)씨가 5월 13일(조선TV)과 서석구 변호사와 이주성(탈북자)씨가 5월 15일(동아TV)에 두 편의 방송이 나온 뒤, 5.18단체의 조직적인 반발과 항의에 의해 5.18에 관련된 방송이 완전히 중단되고 해당 두 방송사는 사과방송까지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이후 4명의 출연진에 대한 고소고발의 협박이 여러 형태의 전화를 통해서 왔고 급기야 광주경찰서의 출석요구서로 압박이 가해졌고, 5.18을 기획한 방송연출가들은 중징계를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방통위에서 두 방송사에 대한 압박이 가시화되면서 5.18진실에 대한 규명 작업은 오리무중이 되었다. 즉 작년 한해는 5.18단체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횡포 앞에 진실규명 작업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여실히 증명한 한 해였다. 이렇게 5.18문제는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가위가 되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만한 세 가지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심지어 대권을 향해 도전장을 내는 후보자들은 표를 의식한 나머지 5.18광주망월동에 가서 참배하고 머리를 조아려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참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지의 바로미터로 악용되거나 (지지하지도 않으면서) 충성맹세식의 강제가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둘째로 심각한 좌경화 현상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5.18이후 左傾化(좌경화)에 몸살을 앓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세력이 커진 친북세력들은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대못을 박고 빨대를 꼽아서 대한민국이 이룩한 풍요하고 물질적 번영과 자유민주적 분위기를 최대한 악용하여 숙주의 영양분을 마음 놓고 빨아먹으면서 몸집을 키우고 있다. 서울시공무원간첩사건이 하루아침에 간첩조작사건으로 변질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으로 내세운 통진당과 급진좌익정당이 똬리를 틀고 국회에 버젓이 진출한 것은 이미 갈 때까지 간 좌경화의 實像(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여론이 곧 힘이고 정의라는 등식이 형성되면서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고 진실규명이 어려워지는 점이 다분히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극단적으로 발달된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폐단이다. 그러기에 일인독재 이상으로 무서운 가공할 대중독재 의 시대가 개막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한민국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신체적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면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도록 헌법으로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가치가 무시되고 있다. 걸핏하면 광주시민의 명예를 운운하면서 지역 정치인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형성하고 심지어 지역감정을 들먹이고 고소고발을 위협하면서 고약한 마녀사냥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작금의 분위기이다.

5월이 올 때마다 5.18역사의 재조명을 거론하는데 이 작업이 왜 필요한가? 그것은 ① 한국전쟁이후 민군 최대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사건인 점, ② 90년대 법원의 판결이 80년대초 5.18광주사태 당시 국민들이 인식했던 것과 너무나 거리가 있었던 위헌성 시비가 큰 점, ③ 한국사회의 친북좌경화의 물꼬를 튼 점, ④ 탈북자들의 숫자가 증대되면서 북한의 소식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점. ⑤ 국정원을 위시하여 국방부 등 국가기관이 앞장서서 진실규명의 노력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점, ⑥ 장기적 전망으로 5.18을 보는 상반된 시각과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향후 內戰的 상황으로 갈 가능성 등 때문이다.

 

II

 

대법원에서 5.18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란 판결(97.4.17)이 나왔지만, 역사적의 배경을 보면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정착되는 과정은 90년대에 ‘민주화의 狂風’속에서 좋게 말하면, 여야 정치인들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서, 나쁘게 말하면 정치보복내지 여론몰이식으로 우여곡절 끝에 억지로 봉합, 정리된 것이다.

5.18광주문제는 88올림픽시절에 국회청문회에서 국민의 관심을 끌었고, 전두환, 노태우 등 5-6공세력들이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본격적으로 사법부에 의해 재심에 들어갔다. 93년에 3당합당의 덕분에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노태우 비자금 정국을 돌파하는 승부수로서 5-6공세력의 단죄를 결심하면서 안양교도소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수감하였다. 그러다가 5.18국회특별법(1997) 제정을 거쳐 5.18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고 그에 가담한 주동자들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고 보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누구도 감히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聖域化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이란 공식은 ‘정통주의 해석’으로 콘크리트처럼 굳어졌다.

 

대법원 판결에서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차원에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무장한 시민군이 정규군에게 무기를 들고 저항한 유혈이 뿌려진 사건이기에 민주화투쟁의 구호를 내세우고 있지만, 역사적 성격으로는 민중항쟁, 무장폭동, 심지어 內戰적 성격을 안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대형사건들은 일단 법원에서 판결이 나면서 잘잘못이 가려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러나 5.18이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된 지 불과 한 세대밖에 거치지 않았는데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점화되고 있다. 왜, 그 이유는 무엇인가?

 

5.18을 바라보는 역사가의 입장은 대법원의 판결과 얼마든지 다를 수가 있다. 그 이유는, 대법원의 판결은 흘러간 과거의 기록이 되면서 역사가의 주요 참조자료의 일부로 되고 새로운 증언과 사실들이 등장할 때 역사는 새로 써질 수밖에 없는 역사학의 근본적 속성 때문인 것이다. 역사학은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과는 달리 현재라는 시간성과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 역사가들이 과거 계속 생성되는 기록물에 대해 끊임없이 재검토하여 새로 써 나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는 ‘쓰여진(기술된) 역사’(Written History)라는 뜻이 담겨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새로 계속해서 써지지 않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우선 5.18역사는 當代史(Contemporary History)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대사의 특징은 그 사건을 직접 체험한 생존자가 많이 있기에 어떻게 해석되는 가에 따라 사회적 입장과 개인적 이해관계가 크게 변하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보다는 주관적 감정에 휩쓸리기 쉽고 증언자의 진위와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 계속 등장하기에 이로 인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의 경우만 하더라고, 남침이냐 북침이냐라는 전쟁의 기원설에 관한 논쟁이 마침표를 치게 된 것은 90년대 김영삼대통령이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6.25에 관한 러시아비밀문서를 입수하고 난 뒤였다. 전쟁이 끝난 뒤 무려 40년이 걸렸다. 영국의 청교도혁명(1640-1660)도 내란이냐 혁명이냐를 두고 해석상에서 정리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명예혁명(1689)이후에서야 마무리 되었으니 무려 50년이상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동학농민전쟁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동학운동으로 사용하다가 농민군이 일본군과의 交戰이 중시되어 전쟁의 성격이 강조된 결과 동학농민전쟁으로 정착된 것인데 무려 100년이 걸렸다.

III

 

우선 5.18광주사태의 역사에서 논란의 핵심이 되는 부문은 광주사태의 원인과 성격과 연관된 민주주의 문제이다.

첫째로, 광주사태의 성격에서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개념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체육시간에 운동(Movement)이란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근육의 움직임을 말한다. (시민단체의) 운동이란 특정한 조직이 사회에 자신의 의사를 반영해 주도록 할 목적으로 다양한 평화적 방식을 통해서 장기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정치단체에 요구하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을 사전적으로 정의해 본다면, ‘정치적 권리가 제한된 민중이 참정권을 확대해 달라고 하거나 장기집권이나 부정부패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집회 및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더 달라는 요구와 이를 위한 집회와 시위, 서명 등 평화적 수단과 방법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 전달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중반기 유럽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마르크스-엥겔스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전혀 새로운 급진적 의미가 부과되었다. 기존의 半봉건 절대주의 국가내지 부르조아지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대중의 선전선동을 가미한 무장봉기의 형태로 사회변혁을 일으키려는 정치사회세력으로 등장한 마르크스-엥겔스주의자들은 스스로의 혁명운동을 정당화하고 대중의 공포심을 완화시키기 위해 앞의 혁명이란 두 글자를 생략하고 ‘운동’을 상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70년대에 좌익이념과 좌익서적과 함께 우리사회에 유입되면서 좌익(혁명)운동권들간에 통용되는 소위 ‘민주화운동’이란 개념으로 한층 발전하였다.

그런데 민주주의내지 민주화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뜻이 천차만별임을 우리 국민들을 별로 유념하지 못한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8.15해방이후부터다. 해방이후 모든 정치세력은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 중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애용했다. 그들은 자기 진영을 ‘민주진영’으로 자칭하고, 그들의 기관지로 <민주주의>라는 월간잡지까지 발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들이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민주주의가 있다는 것을 새삼 상기시켜준 것은 작년 통진당 비례대표인 이석기의원의 내란음모사건으로 소위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통진당의 강령이 널리 사회에 알려지게 되면서였다. 이정희 통진당 대표는 이석기 내란음모죄를 다루는 법정에서 변론을 통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식으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무려 12차례나 언급했는데, 그가 말한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은 것이다.

실제로 민주주의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대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민족민주주의 등 무려 7가지 종류가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가 많이 무분별하게 사용된 이유는 특정 정치세력이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위장하는 한편, 자신의 정치행위를 정당화하고 속임수를 써서라도 대중의 지지를 얻고 나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사용한 책략의 일종이다. 그만큼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민중에게 일종의 아편과도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통상적으로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여 사용하는 민주화운동은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처럼 법치주의, 국민주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대의정치를 기본적 가치규범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남한 인민들에게 요구하는 민주화운동(투쟁)은 자신의 우군이라 판단하는 남한의 진보(종북)세력이 주도하여 보수반동세력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켜서 정권을 장악하여 친북연공정부를 구성하는 한편, 대북정책에서 ‘우리 민족끼리’ 정신을 부활시켜서 ‘대북퍼주기’를 재개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를 위해서 ➀우선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가열화시키면서 국정원의 기능을 무력화시켜서 간첩이 활개치는 나라를 만들고, ➁더 나아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을 완전히 고립무원에 빠트리기 위해서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한미동맹의 고리를 끊고, ➂나아가 친일파 청산을 외치면서 이웃 일본과도 적대관계를 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즉 공산화통일의 전 단계 내지 중간 단계로서 민주화운동(투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하길래 북한은 남한의 진보(종북)세력에게는 북한의 3대 세습독재 문제, 주체사상-선군사상 문제, 열악한 인권 문제, 북핵개발 문제 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할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휴전선에서 北進(북진)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로, 5.18광주사태에서 가장 큰 의문점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과잉진압을 구실로 사건을 의도적으로 유발하여 무장봉기가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는가? 아니면 5.18주동자들이 사전에 치밀하게 모의, 기획하여 사건을 크게 터트린 것인가? 이점에 있다. 대부분의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은 계획적인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있다. 김영택(국민대 강사)은 “신군부의 정권찬탈을 위한 공수부대의 5.18 ‘과잉진압’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0.26 후 더욱 치솟은 국민들의 민주화열망을 잠재우기 위한 대책으로 ‘안보상의 위기’ 즉 ‘국가변란의 폭동’을 조작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 이에 따라 특단의 5.17조치를 단행하면 박정희에 의해 철저하게 지역차별을 받아 불만이 누적되어 있는 광주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시위진압’이라는 이름 아래 학생시위대는 물론 무관한 시민들까지 잔인하고 살인적인 ‘과잉진압’을 펼치면 틀림없이 ‘국가변란의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봉기를 유발하는 수순을 밟아 나갔다. 예상은 적중했다....”

김 씨는 신군부가 과잉진압하면 광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은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사태가 신속하게 진정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김영택은 계엄사령부와 신군부가 ‘북괴의 간첩과 오열의 조종을 받은 폭동’이라고 한 점을 반박하면서 “‘광주살육’·‘과잉진압’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항쟁 초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이러한 무조직·무지도자 상태였다.”고 광주사태의 자연발생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5.18주동자인 ➀김상집의 증언, ➁윤한봉의 녹취록과 이를 뒷받침하는 ➂‘자유노트’를 분석해 보면 5.18이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기획물임이 증명되고 있다.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김상집은 5.18이 군부의 의도적인 도발 때문에 일어났거나 우발적 사건이란 성격에 반대한다(1988년 5월 24일 한겨레신문). 김상집에 의하면, 당시 광주를 중심으로 全南(전남) 일대에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학생 등 여러 부분의 운동이 대중적 기반을 굳히고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이 5월 17일, 김대중 총재를 비롯한 정치인을 연행 후 신속히 연락을 취하고 전투세력화했다는 것이다.

윤한봉은 광주사태의 전체 작전을 기획하고 입안한 인물(Planner)이다. 김대령의 <역사로서의 5.18>(총4권)에 의하면, 코뮨독서써클을 조직한 시위주동자 윤한봉은 파리코뮨(Paris Commune)을 모델로 하여 무장봉기를 획책한 코뮨혁명주의자였던 것이다. 윤한봉의 행적을 살펴보면, 광주사태에서 내포된 민주화운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윤한봉은 1년동안 도피생활을 하던 중 81년 4월에 미국으로 밀항하여 93년 귀국할 때까지 미국에서 12년을 지냈다. 그런데 조용히 지냈던 것이 아니라 다음해 “교포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민족문화를 함양하며, 조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로 LA에서 민족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2년 후인 84년 그 학교에서 배출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재미한국청년연합(한청연)을 결성했다. 말하자면 그는 해외에서 친북, 반정부활동을 통해 친북인사, 반한인사로 분류된 것이다.

89년 임수경과 문규현(신부) 밀입북 사건 때 한청연과 윤한봉의 공작으로 추진된 것으로 안기부가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윤한봉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로 분류된 것이다. 그런데 김영삼은 후보시절 5.18광주사태에 대해 화해차원에서 전향적인 해결을 원한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고 청와대에 간 이후 처음 5.18을 맞이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여러 후속조치를 발표했는데, 윤한봉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지명수배 해제’였다.

그 내용의 요지는 “윤한봉씨 등 기소중지자 14명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수배나 사건 조사 없이 종결 처분한다”는 것이다. 한총연과 연관된 반정부, 친북활동에 대한 국가보안법 혐의마저 5.18과 함께 묻혀진 것이다. 당시 청와대 김정남 교문수석이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 수사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종용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김 수석은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윤한봉은 월간조선 기자와의 인터뷰(96년 1월호)에서 자신의 정체를 전부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점을 솔직하게 답변했다. “6.25전쟁은 누가 먼저 침략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은 민족주의자다.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어야하고, 미군은 철수해야한다. 북한에 국가보안법과 같은 법이 있는 것 믿지 못하겠다. 북에 대해서 좋게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현재의 여건상 북을 비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윤씨는 임수경의 밀입북 사건의 배후조종 책임에 대해서는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항변하면서 확실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 후 1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을 때, 노무현 좌익정부시절 5.18기념재단의 설립을 주도한 윤한봉씨는 더 솔직한 구술을 하게 되는 데 그것이 3차에 걸친 윤한봉 구술녹취록(2006)이다. 새천년민주당이란 당명처럼 좌익정권의 수명이 장기적일 것으로 판단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남은 짧은 생명을 직감하고 자신의 영웅적 행위(?)를 영원히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려는 애착이 있었는지 윤씨의 녹취록 진술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윤한봉의 녹취록은 5.18관련 주동자들의 고백 중에서 가장 솔직한 증언으로 높이 평가된다.

윤한봉의 녹취록은 5.18이 단순한 우발사건이 아니라 무장봉기를 위해 철저히 사전준비를 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요약하면, “➀무장을 해야한다. 총, 다이너마이트가 필요하다. ➁예비군 무기고와 다이너마이트 있는 곳을 파악하기 위해 만5천분의 일의 광주시 지도가 필요하다. ➂도청 주변도로 포위 작전의 수립을 위하여, 도청점거가 필요하다. 이는 정치적 승리를 위해서이다. ➃국제사회와 시국내용 성명서의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등이었다.

김상집과 윤한봉의 증언은 1980년 10월에 검찰에 입수된 ‘자유노트’에서도 그 타당성이 입증된다. 여기에서도 윤한봉의 사전준비 계획 등이 자세하게 날짜별로 기술되어있고 5.18당시 무기탈취, 도청 점령 등 그 당시 상황과 일치하는 사건이 다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용은 이러하다; “무장계획으로 죽창 배터리를 준비하여 방송국 건물을 접수하고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한다. 시위 계획으로는 1진, 2진, 3진의 특공대를 편성하고 경찰저지선을 돌파할 계획을 세운다. 우발계획으로는 휴교령 시 시위집결 장소를 도청, 공용터미널, YWCA 등을 지정한다. 조직 연계 계획으로는 서울조직들과 연계하고 호남권 각 대학, 시민사회조직을 결성한다.”

셋째, 5.18주동자들의 역사인식은 무엇이며 어떤 사회를 지향했는가 하는 점이다. 자유노트에 나타난 봉기주동자들의 역사인식은 1988년 국회 5.18청문회에서 질의답변에서 자유노트에 기록된 내용에서 일단의 모습을 드러낸다.

학생운동은 70년대 유신체제를 거부하고 유신잔당과 일부 독점자본 관료 제국주의자본을 제거하여 자유민주주의와 노동 농민현장에서 모순을 극복 민중운동에 수렴하여 민중해방과 민족통일에 수렴하여야 한다.

우리사회는 외국자본이 잠식하고 있는 신식민주의 이론에 입각하여 식민지 反(반) 봉건적 사회로 규정하고 국내 파쇼독재 가능성이 있으므로 외국독점자본 및 매판자본을 척결하고 통일에 대한 관념론을 지양하여 민중이 주체가 된 反帝(반제) 半封建的(반봉건적) 민주주의혁명을 해야 하는데 민중혁명의 주체는 학생, 노동자, 농민, 시민,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으며 혁명은 부르조아 민족혁명이다.”

이것은 “남조선이 미제의 식민지상태이기에 민중의 투쟁을 통해 해방시켜야한다”는 북한의 현대사인식과 궤를 함께하기에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언급된 민족통일은 대한민국이 주도한 자유민주적 통일방식이 아니고, 언급된 민주주의혁명도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방식이 아닌 것이다. 또 부르조아 민족혁명을 언급하지만 여기서 민족혁명이란 외세를 배제한 채(주한미군철수의 의미) 북조선 인민과 연대한 투쟁을 지칭한 것이다. 그렇다면 5.18주동자들은 군부집권을 저지하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발전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이 중심이 된 민중해방을 노래하는 민중사관을 간직한 채, 일종의 체제변혁 즉,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남한내의 혁명을 추진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결국 5.18주동자들이 “파리코뮨을 모델로 설정하여 광주코뮨(광주해방구, 광주공화국)을 만들려고 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된다.

파리코뮨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인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무모하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이고 프로이센군에 포위된 채 세당에서 황제가 항복하면서 제2제정(1852-70)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파리코뮨이 일어났다. 1871년 2월에 프로이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소집된 국민의회는 왕당파가 다수를 점하게 되었고, 공화주의적 파리사람들은 베르사이유에서 열리는 국민의회가 왕정을 부활시키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임시 국민정부의 행정수반을 맡고 있던 아돌프 티에르는 파리의 질서 유지를 위해 국민방위군(주로 파리 포위전 때 싸운 노동자로 이루어짐)을 무장해제 시키려고 결정했다. 그 결과 3월 18일 시 수비대의 대포들을 치우려고 하자 파리에서 저항이 일어났으며, 3월 26일 수비대 중앙위원회가 조직한 자치선거에서 혁명파가 승리했고 이들은 코뮨 (자치)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주민자치 평의회가 탄생되었다.

5월말 1주일에 걸쳐 티에르의 베르사이유 군대는 파리코뮨을 공격하여 잔인하게 토벌하였다. 이 과정에서 2-3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코뮨 주동자들은 대부분 즉결 처형되었고, 동조자들은 10년 이상 무인도로 유배를 보냈다가 결국 10 여년 뒤에 석방했는데, 모두 공민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계급적 분열과 당파간 대립은 1차대전 직전까지 지속되었고 그 후유증은 오래갔다.

파리코뮨의 비극적 결말이 세계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카알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에 보고서를 쓰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였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The Civil War in France)이라는 제목에서 노동자계급에 의한 국가해체의 상황을 목도하고 향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전망을 시도하였다. 그 뒤 파리코뮨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에 의해 장시간 망각되었다가 다시 이것을 계승한 인물이 바로 레닌이다. 1917 레닌의 볼세비키혁명은 파리코뮨에서 발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씨앗을 러시아의 상황에 개조변용하여 현실화시킨 것이다.

      (계속)



201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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