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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4-08-17 13:22 조회6,8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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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에 정리된 5.18에 대하여


                                     사건 개요(위키백과)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2.12를 통해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고, 1980년 4월에는 중앙정보부를 관장함으로써 정보기관 전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선포하면서 국회를 폐쇄하고 학원을 동결시키고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들과 민주인사들을 체포했다. 이에 다른 지역은 조용했지만 오직 광주시민과 전남주민이 일어나 전두환 퇴진, 계엄령철폐, 민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며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시위를 전개했다. 이것이 5.18만주화운동이다.


                                     상황 개요(위키백과)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이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공수부대 측에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공수부대원에 의해 학생들은 구타를 당하면서 일부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 학생 300여명이 가톨릭회관에 집결해 시위했고, 이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시도했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했다. 이 모습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신군부 인사를 주축으로 한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을 방화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라남도 나주시, 화순군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5월 21일(수요일) 상황일지(위키백과)

04시 30분: 광주 KBS 건물 방화.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함.

10시 00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탈취해 광주시 내로 몰고 들어옴.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14시 00분: 시위대가 나주시, 화순군 등지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 시작.


                                 계엄군의 만행(위키백과)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는 "젊은 여자,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계엄군의)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부위에 집중됐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만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떠올랐다."라고 회고했다.


                                    지만원의 북한군 개입설(위키백과)

시민군이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는 계엄군의 학살과 폭력에 맞서 무장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 인민군의 개입에 따른 폭동 사태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개입설의 유일한 근거는 탈북자들의 카더라 통신뿐이다.


                               조갑제의 북한군 개입부정설(위키백과)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했다. 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 민주화 운동'이라 평가했고,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 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1)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2)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었다.

3) 전국 비상계엄령으로 해안과 항만이 철저히 봉쇄(밀봉)됐다.

4) 전두환 정권 하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확인했을 것이다.

5) 대대 규모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무장시민에 의한 국군 사망자가 7명에 그쳤을 리 없다.

6) 김일성이 5월 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를 투입했다고 해도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5월 20일 이후일 것인데, 5월 20일부터는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됐다.


                                   박근혜의 입장(위키백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2004~2006년에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는 2007년 8월에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상으로 주요쟁점 부분에 대한 위키백과 주장을 마감한다.


                                   위키백과 주장의 요지

1. 전두환은 12.12 쿠데타를 통해 사실상 국권을 장악하여 계엄령을 강화하고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고 국회를 폐쇄하고 정치인들을 체포하여 독재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이에 다른 지역은 순종하였으나 오직 광주시민들과 전남도민들은 남달리 민주화 의식이 투철하여 전남대에 배치된 공수부대에 공격을 가하였고, 이에 공수부대가 반격을 가함으로서 촉발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의 명령을 받은 공수부대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 불문하고 곤봉으로 타격하고, 발포를 하여 야수와 같은 살육을 감행하여 수천 명의 희생자를 냈다.

2. 1997년 대법원은 광주시위대를 전두환의 내란행위로부터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헌법수호 기관으로 판결했다. 조선일보 원로기자인 조갑제는 이를 ‘반공민주화운동’이라 정의했고, 화려한 휴가를 관람한 박근혜는 광주시민의 희생에 대해 가슴아파했고, 5.18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했다는 요지의 표현을 앞에 내세우고 있다.

3.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개입했다는 지만원 등의 주장은 오직 탈북자들이 전하는 카더라 통신에 근거한 것으로 설득력 없고, 조갑제가 주장하는 북한군 개임 불가설이 설득력 있다.


                       위키백과는 허위사실, 부정확한 사실들로 포장

위키백과에 정리된 “5.18민주화운동”은 A-4지 50매 정도의 분량이다. 그 중에서 주요쟁점에 대한 부분만 위에서 발췌했다.

1. 상황전개에 대한 내용들이 광주에 유리한 부분들만 기술하고 불리한 부분은 취급하지 않았다.

2. 검찰이 2년의 조사결과를 수록한 1995년 7월 18일의 ‘검찰최종보고서“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들을 상황일지에 수록했다.

3. 북한군 광주작전 참전설은 일반 탈북자들의 증언들에만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검찰수사보고서, 안기부 보고서,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들, 황장엽-김덕홍의 증언, 실제로 광주에 참전했던 탈북자의 증언, 현장사진 분석, 사태를 주도했던 자칭 시민군 지휘자들 및 광주 유지들의 증언, 일반 광주시민들의 증언들을 모두 종합하여 내린 결론이다. 북한군 개입설은 과거에 획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발굴함에 따라 2010년부터 본격 대두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1997년 대법원의 판결 시점까지 나타난 자료를 가지고 개입사실 여부를 재단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실제로 광주작전에 참가했던 당시 북한특수군 김명국(가명)이 서울 교외에 살면서 인터뷰 증언록을 내놨고, 채널A 방송에도 출연했다. 이에 더해 황장엽과 김덕홍의 과거 증언도 많은 언론들에 발표됐다.

4. 특히 가장 중요한 5월 21일에 대한 위키백과의 상황정리는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일부러 비켜간 것이다. 08시, 톨게이트에서 300명의 정예집단이 20사단 사령부를 기습공격하여 지휘차량을 탈취한 사실, 09시에 600명이 아시아자동차에 모여 4대의 장갑차와 374대의 군용트럭을 탈취하여 44개 무기고를 털어 12시부터 오후4시 사이에 5,408정의 총기와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한 사실 등을 모두 숨겼다.

5. 5월 21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에서의 충돌상황도 허술하고 틀리게 정리했다. 오전 9시30분 250여명의 학생들이 가방에 숨겨온 돌로 계엄군을 공격한 사실이 검찰의 최종보고서에 기록돼 있다. 5.18기념재단에 수록된 모든 증언자들의 일치된 이야기는 5월 18일 상황이 터지면서 광주의 교수들, 대학생들, 운동권 학생들은 5월 21일 밤 계엄군이 도청을 버리고 철수할 때까지 다 뿔뿔이 흩어져 숨어 있거나 다른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5월 21일, 09:30분경 전남대 앞에 나타나 각이 진 돌멩이로 계엄군을 공격한 “250명 규모의 학생집단”으로 표현된(검찰보고서) 그 학생집단은 전남대 학생들도 아니고 조선대 학생들도 아니었다. 나는 이들이 바로 600면 북한특수군의 일부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4.8.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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