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논문] 5.10단선을 반대한 제주도인민들의4.3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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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2-28 14:18 조회15,65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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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1991년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가 발행하는 월간지 ‘력사과학’ 4월호에 실린 제주4.3사건에 대한 박설영의 기고문이다. 박설영은 1991년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가 펴낸 ‘력사과학론문집’ (129-192쪽)에 논문 “제주도인민의 4.3봉기와 반미애국투쟁의 강화”를 게재했고, 아래 글은 이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5․10단선을 반대한 제주도인민들의 4.3봉기
박 설 영
8.15후 남조선 인민들은 새 사회 건설과 나라의자주적인 독립을 위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려왔다.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저지 파탄시키고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한 인민들의 투쟁에서 선참으로 진행한 투쟁은 제주도 인민들의 4.3봉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지방들에서는 선거를 반대하는 인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김일성 저작집》 4권, 376페지)
제주도 인민들의 4.3봉기는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정책과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자유와 나라의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반미애국항쟁이었으며 성스러운 민족해방투쟁이였다.
제주도 인민들의 4.3봉기는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애국투쟁사에서 빛나는 자리의 하나를 차지한다. 제주도 인민들은 4.3봉기를 계기로 손에 무기를 들고 온갖 곤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미제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여 영웅적인 피의 항쟁을 벌려 놈들의 단독선거를 파탄시키고 자기들의 애국적 기개를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의 4.3봉기는 면밀한 사전준비에 기초하여 진행되였다. 그들은 봉기를 일으키기 위하여 무장자위대를 조직하고 면단위로 투쟁대오를 편성하였으며 무장을 비롯한 물질적 준비를 갖추었다. 지휘부에서는 무장대들에 임무를 주어 자기위치를 차지하고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제주도의 애국적 인민들은 1948년 4월 3일 새벽2시 한나산의 령봉을 비롯한 전도의 산고지들에서 일제히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무장봉기를 개시하였다.
봉기참가자들은 총과 칼, 낫, 죽창 곡괭이, 삽, 수류탄, 폭발물 등으로 무장하였다. 그들은 수십 개의 무장 습격조를 편성한 후 한 개 습격조에 한 개 습격 대상을 담당하는 원칙에 기초하여 같은 시간에 일제히 통일적 행동을 개시하여 적을 치고 신속히 퇴각하는 전술을 적용하였다. 이것은 적을 분산된 상태에서 각개 격파 함으로써 적이 다른 곳에 있는 력량을 집중하여 기동반 격 할 수 없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봉기한날 인민무장대는 반동단체에 가담한 량심적인 청년들과 전체 도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보냈다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량심있는 공무원들이여! 량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더라도 인민의 편에 서라! 량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따라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량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 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들을 물리쳐야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배족노들을 꺼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돌리지 말라! 량심적인 경찰원, 청년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애국 투쟁에 호응궐기하라! 존경하는 부모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들의 아들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 독립과 완전한 민족적 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에게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위하여! 오늘 당신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이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 서울 문우사, 1963년, 84~85페이지)
애국심에 불타는 제주도인민들은 이 애국적 호소에 따라 인민유격대를 물심량면으로 원호하였고 그들의 투쟁을 힘 있게 고무하였다.
봉기자들은 은밀하고 대담한 기습작전으로 도처에서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다. 그들은 조천, 함덕, 삼양, 외도, 한람, 저지, 고산, 애월, 성산, 안덕, 중문, 대정, 무릉등 14개 경찰지서, 출장소와 제주 서귀 경찰서를 비롯한 경찰관서, 서북청년단의 숙사와 교형리들의 앞잡이로 구성되어 있던 국민회, 독촉국민회, 대동 청년단의 반동무리들과 악질 관공리의 집, 행정기관들을 기습 파괴하였으며 많은 경찰, 관공리등 반동들을 체포하여 현지인민재판에서 처단하였다.
그들은 이날 전투에서 경찰지서 2개소를 불태웠으며 경관11명, 테로단원11명, 악질반동 10여명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경관 4명, 반동분자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다수의 미국제 카빙총과 탄약을 로획하였다 (로동신문 1948.8.29)
이것은 첫 무장봉기에서 발톱까지 무장한 적과 싸워서 얻은 제주도 인민들의 거대한 승리였다.
이 첫 봉거에는 500여명의 인민무장자위대들을 선두로 하고 로동자, 농민, 사무원, 어민, 해녀, 목동들과 학생등 3,000여명이 참가하였으며 그중에는 칠순의 백발로인과 어린소녀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인 존 메릴까지도 자기의 저서 '제주도 반란'에서 4월 3일 반란군(무장자위대-인용자)의 주력은 500명 정도...게릴라들이 하산하자 약 3,000명의 주민들이 가세했다고 썼다.(사회와 사상, 서울한길사, 1989년 10월호, 366페이지)
수많은 원쑤들을 족쳐버린 제주도의 거리와 마을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들끓었으며 승리자들의 기세는 충천하였다. 각지에서 성토대회와 군중시위가 벌어졌다. 인민대회들에서는 군중심판에 회부된 악질반동들을 처벌하였다.
봉기자들은 원쑤들에 대한 첫 타격의 성과를 공고히 하기위하여 4월 4일에 다시 폭동을 일으켜 11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파괴하고 여러 명의 경찰과 반동 놈들을 처단하였다. 이에 대하여 남조선 주둔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보고서 략칭 G-2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있다.
"4월 4일에 발생한 폭동으로 인해 경찰 사망 4, 부상 5, 행불 3, 우익사망 4, 부상 16, 행불 4, 미제 카빙총 6정, 일제 소총 1정, 탄알 119발 로획당함."
4.3봉기에 의하여 심대한 타격을 받은 미제는 항쟁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 하였다. 적들은 살인적인 폭압체계를 가일층 강화하였다. 4월 5일에는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4개의 경찰서를 증설확장하고 경찰직속의 토벌대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국방경비대 경찰 무장 테로단을 철저하게 제주도 이외의 지방 출신으로 배치함으로써 그들에게 지역차별감정을 촉발시켜 잔인한 살육전을 감행하도록 선동 하였다 미군정당국은 봉기가 일어나자 각 도경찰청에서 출동시킨 1,700여명의 경찰을 급히 제주도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북반부에서 월남한 악질반동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혼성제11련대를 주둔시켰으며 서북청년회를 비롯한 다른 지방 출신의 가장 악질적인 테로단을 긴급히 섬으로 끌고와서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과 교체하였다.
놈들은 제주도 인민들과 외부사이에 련계가 맺어지는 것을 끊어버리기위하여 해안을 봉쇄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놈들은 경찰지서, 파출소, 출장소, 창고, 지하실 등에 인간도살장을 수많이 신설확장하고 무고한 인민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빨갱이산부대와 연락이라는 죄명을 씌워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그러나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어떠한 탄압학살만행도 죽기를 각오하고 반미애국투쟁에 떨쳐나선 제주도 인민들의 완강한 애국항쟁을 저지시킬 수 없었다. 원쑤들의 발악이 심하면 심할수록 애국적 봉기자들은 놈들에게서 백배천배의 보복적 타격을 가하였다.
4월 3일부터 4월14일에 이르는 10여 일간의 투쟁행정에서 인민무장대의 력량은 량적으로 장성하고 질적으로 강화되였다. 이 항쟁에서 인민무장대는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일정한 교훈을 찾았다.
이룩된 성과에 기초하여 무장투쟁을 더욱 확대발전시켜 원쑤들에게 보다 큰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서는 그에 필요한 새로운 군사정치적대책을 세워야 하였다.
4월15일 항쟁의 세찬 불길 속에서 무장봉기자대회가 열리였다. 대회참가자들은 4.3봉기를 총화하고 5․10단선음모를 결정적으로 분쇄하며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실현하기위한 군사정치적대책을 강구하였다.
대회에서는 인민무장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열렬한 혁명정신 전투경험을 소유한 우수한 청년들 30명씩을 선발하여 인민유격대를 편성하였다. 인민유격대의 조직은 유격전투에 상응한 강철의 규률과 전투력을 가진 혁명적인 무력을 가지고 강대한 적과의 투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였다.
인민유격대는 맨우에 제주도인민유격대지휘부를 두고 그 밑에 련대(지대)와 그에 직속되는 소대를 두었다. 그리고 지휘부직속의 특공대(정찰공작대)와 특경대(지방반동의 동향감시대)를 조직하였다. 인민 유격대는 3개의 련대로 구성되었는데 그의 지방별 배치는 다음과 같다.
련대별 활동
련대별 |
활동구역 |
지대이름 |
1 2 3 |
조천면, 구좌면, 제주읍 애월면,한림면,안덕면, 대정면,중문명 서귀면,남원면,성산면, 표선면 |
3. 1지대 2. 7지대 4. 3지대 |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자료집 88페이지
유격대는 각 읍, 면에서 선발된 로동자, 빈고농, 어민 등 기본계급출신 가운데서 혁명성이 강하고 용감한 사람들로 구성되였다. 유격대의 련대, 소대, 독립소대내에는 유격대원들을 사상정치적으로 교양하기위한 정치소조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 밑에 공화국북반부에서 이룩된 민주개혁의 자랑찬 성과들을 해설 선전하였으며 '혈아' '인민통신' 등과 같은 혁명적 출판물을 통하여 대원들에 대한 애국주의 교양을 강화하였다.
유격대의 편성과 함께 각 읍, 면 단위로 새로운 자위대를 조직하고 비밀활동을 강화하도록 하였다.
자위대는 유격대와 군중과의 련계를 긴밀하게 보장하면서 마을마다에서 행패를 부리는 반동들을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해왔다. 또한 유격대는 농민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혁명조직들을 조직 확대하여 군중적 지반을 공고히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무장대에 대한 원호사업을 물심량면으로 진행하도록 하였다. 인민유격대는 4.3무장봉기이후 로획한 현대식무기와 피복, 군수물자 등으로 장비를 강화하였으며 가장기동대 가장 경찰대 가장국방대를 편성하여 대낮에 합법적으로 활동하면서 애국적 인민들과 함께 련달아 경찰관서를 습격파괴하며 도로와 적통신망들을 파괴하는 등의 투쟁을 줄기차게 벌려나갔다.
인민유격대는 4월15일 적기동부대 25명에게 섬멸타격을 가한 애월면 광령부락매복전투를 비롯하여 4월17일 삼양산골전투등 수차에 걸친 큰 전투들과 단신 또는 2~3명의 무장소조원들에 의한 적의 처단과 무기탈취 투쟁등 기동적인 습격전투를 전개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4월16일에는 제주도 인민유격대 명의로 5․10망국단선반대를 위한 무장봉기 성명을 발표하여 미제 침략군과 그 주구 악당들에게 일대 공포를 안기었다. 이와 함께 애국적인 인민들에게는 5․10단선 반대투쟁에 호응 궐기하여 단선을 결사적으로 분쇄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 호소는 애국적 인민들의 반미투쟁기세를 비상히 앙양시켰다. 그리하여 수많은 인민들이 한결같이 반미애국투쟁에 떨쳐나서게 되었다. 무장대의 맹렬한 활동에 대해서는 지어 미군사령부G-2보고서까지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월18일 새벽2시 도평리투표소가 피습당해 선거명부도난, 4월19일 200여명의 무장대가 오형리 습격 아침에 신초리 투표소가 피습당해 선거명부 분실, 밤 10시경 애월근처에서 경찰친척 1명 피살, 제주읍에서 동, 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전화선과 전주가 절단됨, 제주읍내와 공황을 련결하는 전선을 보수하던 경찰분견대가 총격을 받음, 4월20일 새벽3시 200여명 무장대 모슬포 습격, 오전 11시 30분 제주서쪽에서 하역작업을 하던 3척의 배가 총격 받음,"
"4월21일 밤10시경 대정면 동일리에 있는 투표소가 습격당하고 선거위원 피살됨, 11시경 폭도들이 북촌리 선거사무소 습격 송당리도 폭도들이 습격, 21일 밤 ~22일 새벽사이 이호리와 내도리 선거 사무소 피습, 22일 밤~23일 새벽사이 제주읍에서 동쪽으로 가는 전선이 다시 절단됨, 도남리에서 한 대청단원 어미가 피살, 4월24일 오후 1시 15분경 제주 공항에 착륙하려던 c-47기 총격 받음, 조천면 바늘오름에서 2명의 조선인이 전화선을 자름, 군정청내 PX건물이 피습, 24일 오전 8시~25일 오전12시 사이에 제주에서 서귀로 가는 통신선이 모두 절단, 4월 26일 새벽 3시 30분경 삼양리에서 6명의 폭도마을 습격, 4월27일 하모리에서 2개다리 파괴, 선거업무차로 한림에 갔다 오던 관리 6명이 신엄지경에서 피습, 26일 낮 12시~27일 오전8시 사이에서 제주읍부근의 전화선절단, 도련마을에서는 경찰과 무장대가 교전하였는데 무장대는 기관총도 사용하였음, 4월28일 새벽3시 30분경 14명의 폭도들이 신엄리 습격"
이상 자료들은 무장대의 활동정형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서도 무장대의 활동이 얼마나 맹렬하였던가 하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인민유격대는 공격성과를 확대하면서 적들을 내부로 와해하고 량심적인 경관들을 무장대에 인입시키기 위한 활동도 진공적으로 벌렸다. 인민유격대의 정치소조원들은 국방경비대 안에 침투하여 5․10단선의 매국적 본질을 해설 선전하였으며 '애국자들과 인민을 테로 학살하는데 가담하는데 가담하지 말라' '인민들과 함께 반미애국투쟁에 궐기하라' 고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속에서는 봉기자들의 투쟁을 각종형태로 지원하며 토벌에 미쳐 날뛰는 경찰대와 무력충돌을 일으키며 인민의 편으로 의거하는 현상이 속출하였다. 4월27일에는 국방경비대 제9련대의 한 개 중대 100여명 군인들이 련대장놈을 처단하고 애국적 의거를 단행함으로써 제주도 인민들의 무장력량을 강화하게 하고 적들 속에서 심각한 혼란을 조성시켰다.
제주도의 애국적 인민들의 모두 다 이렇듯 한 덩어리가 되어 무장투쟁에 과감히 일떠서자 비교적 민족적량심을 가진 국민회 대동청년단원과 관공리들도 매국단선을 배격하고 놈들의 학살만행을 반대하는 등 반미애국항쟁을 지원하여 나섰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들과 벌리는 무장투쟁은 무장대력량 하나만으로는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것은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지지성원 밑에 그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싸울 때만이 보다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제주도무장부대도 인민대중과 혈연적 련계를 맺고 그들의 열렬한 지지성원을 받았음으로 하여 그처럼 어려운 조건에서도 큰 투쟁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의 거대한 혁명적 영향 밑에 4월말~5월초에 이르러 5․10단선을 결정적으로 분쇄하기위한 제주도 인민들의 항쟁은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섰다. 이에 대하여 제주신문 특별취재반은 다음과 같이 썼다.
"5․10선거반대투쟁은 남북협상이 끝난 후 더욱 강화되였다. 남북련석회의 부산물의 하나로 남조선 단독 선거반대 투쟁위원회가 조직되였다.('사회와 사상' 1989년 11월호)
제주도 인민들은 전체 조선인민들과 함께 4월 남북련석회의 결정에 따라 보다 적극적인 투쟁대책을 취하였다.
이에 당황망조한 미제 침략자들과 매국배족적인 통치배들은 선거놀음을 기어이 성사시켜 보려고 5․10토벌공세를 준비하였다. 미 군정청과 괴뢰경무부는 본래의 감찰청을 경찰국으로, 대정 성산경찰지서를 경찰서로 승격시켜 제주 서귀 대정 성산 등의 4개경찰서로 증설 확대한 다음 거기에 무장대와 애국세력을 몰살하기위한 토벌대를 배속시켰다. 놈들은 그 기동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분대 소대 중대 대대로 편성하고 별동대란 것도 특별히 두었다. 도안에는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가 설치되였으며 각 경찰서 지시에는 작전명령소 지휘소 련락소 들이 도내의 말단행정단위에 이르기까지 경찰지서, 출장소, 파견소 주돈소 등을 신설확장하고 거기에 종래보다 비할 바 없이 많은 1,500여명의 완전무장한 경찰을 배치하여 놓았다. 이와 함께 적은 3,000여명의 국방경비대 병력과 수천 명의 무장테로단을 동원하였다.
이처럼 제주도전역에서는 중무장한 반동경찰이 수많이 늘어났고 하늘에는 비행기까지 동원되었으며 5․10단선을 감행하는데 리용하기위한 특별편성의 테로단 '향보단'이란것까지 조작되였다. 놈들은 '단기작전' 지역별토벌전'의 이름 밑에 매개지역과 산 부락을 빈틈없이 토벌대로 뒤뎦여놓았다. 미제침략군의 엄호밑에 제주도전역 에는 기동사찰대가 배치되고 경찰서 앞에는 기관총좌지가 설치되었으며 반동기관과 선거장 앞에는 바리케이트를 쌓아놓고 골목골목에는 무장경찰과 테로단이 배치되였다.
미제의 어용통신까지도 "미국의 헌병에 의하여 비호되는 경찰은 실제적으로 남조선에서 모든 도로들을 차단하기위하여 인원을 배치하였다. 검은 상의의 경찰이 카빙총으로 무장하고 여러 대의 트럭에 잔뜩 올라타고 거리를 누비였다. 보초가 총검을 번뜩거리며 투표장입구의 50보도 못되는 곳에 서있었다"(유피통신 1948.5․10)라고 보도하였다.
놈들은 대중적 학살과 초토화 작전을 배합하면서 수많은 부락을 불태워버리는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다.
제주도인민들은 적들의 토벌공세를 맞받아 주도권을 틀어잡고 4월말, 5월초부터는 무장투쟁, 대중적 폭동과 시위등 각종형태의 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선거자등록거부 선거자명부탈취 선거사무소 습격파괴 경찰과 반동의 처단등과 같은 투쟁을 벌려나갔다.
5월7일에 애월면 장전과 수산사이의 소나무 수림에서 인민유격대 10여명이 조병옥(경무부장)이가 이른바 <토벌대>란 명목으로 보낸 경찰전문학교 학생100명과 5시간이나 격전을 전개 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경찰전문학교 학생 22명이 처단되고 남은 자들은 모두 도주하였다. 그 후 놈들은 도저히 전투를 못하겠으니 서울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면서 3일간이나 버티기 투쟁을 하다가 공포 속에서 제주도를 떠나고 말았다한다.(로동신문 1949.4.3)
애국적 인민들은 적들의 야만적인 폭압 속에서도 원쑤들에 대한 항거의 주먹을 높이 쳐들고 삶과 민주주의와 인권옹호를 요구하여 나섰으며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애국력량을 보다 광범히 묶어세우면서 영웅적으로 싸우는 무장대와 협동하여 암흑을 걷어내기위한 싸움에 용감히 떨쳐나섰다.
그들은 낮에는 벼락데모, 밤에는 홰불시위를 벌렸으며 5월 8~9일에 가서는 여러 공장 기업소의 로동자 사무원과 적통치기관의 하급관리들까지 파업과 태업으로 선거를 반대하는 자기드들의 립장을 표시하였다. 제주도에 파견된 국방경비대 제9련대 장병들 속에서도 반미애국투쟁기운이 높아져 인민들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여 나섰다.
남북련석회의의 결정과 호소문에 적극 호응한 섬사람들은 거기에서 제시된 숭고한 과업을 관철하기위하여 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에 과감히 돌입하였다. 선거날을 며칠 앞두고 약5만 명의 제주도인민들은 한나산에 올라가 집단적으로 투표참가를 거부하였다.
단독 선거가 감행되는 5월10일 새벽에 제주도인민들은 총과 수류탄 칼과 몽둥이 휘발유병 낫과 망치 삐라를 안고 원쑤들을 향하여 총공격을 들이댔다. 봉기한 군중은 투표장들과 세무서 신한공사 출장소 등을 습격 파괴하였다. 청년학생들은 어깨를 결고 '던성결사반대'를 웨치면서 시위를 단행하였으며, 농민들은 적토벌대의 준동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도처에서 교량과 통신선을 파괴 절단하였으며 주요도로에는 바위 돌을 쌓아놓거나 웅뎅이를 파서 적들의 기동을 차단하였다 유격대는 한나산에서 일제히 내려와 수많은 경찰지서 출장소들을 습격 파괴하고 악질경관들을 처단하였으며 감금된 인민들을 구출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의 이러한 거세찬 투쟁의 불길은 반동지배층내에 적지 않은 동요와 분렬을 조성 시켰으며 일부 선거위원장 선거위원들은 선거사업을 포기하고 인민의 편으로 들어왔다.
이리하여 제주도에서 5․10단선은 사실상 완전히 파탄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의 유피통신은 제주도에서는 치렬한 전투가 벌어져 선거관리의 반수는 사임하여 버렸다. 그리하여 선거가 불가능하게 되어 6월23일로 연기 되었다고 비명을 올렸다.
당시 '제주도 선거위원장' 이란 놈은 중앙선거위원회에 선거 성적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북제주의 134개 투표구중 투표함을 거둔 것이 겨우 64개 그중 62개의 투표함에는 몇 표씩밖에 들어있지않으며 2개의 투표함은 빈통이였다 남제주에서도 71개의 투표소에는 전혀 투표가 되지 않았다.(로동신문 1948.5.22)
사태가 이러하였기 때문에 미군정장관놈도 부득이 제주도의 선거무효를 선언하지않을 수 없엇다. 제주도 인민들은 원수들의 야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체 조선인민과 함께 5․10망국단선을 반대하기위한 피의 항쟁을 전개함으로써 놈들의 기도를 분쇄하고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5․10단선을 반대한 제주도 제주도인민들의 4.3봉기는 일련의 특징을 가지였다. 그것은 유격투쟁을 기본으로 하면서 거기에 각종 형태의 투쟁을 결합한 반미애국투쟁이었으며 전체도민 30만 명 중 24만 명이 궐기한 대중적이고 전 인민적인 항쟁이였다는데 있으며 그리고 제주도인민들이 자체의 힘에 의거하여 벌린 투쟁이였으며 매우 간고하고 치렬한 성격을 띤 장기적인 결사전 이였다는데 있다.
조선인민의 5․10망국단선단정 반대투쟁의 한 고리로 전개된 제주도인민들의 4.3봉기는 남조선 인민들의 반이애국투쟁사에서 커다란 력사적 의의를 가지였다. 그것은 첫째로 남조선에서 5․10단선을 파탄시킨 첫모범을 창조하였고 둘째로 남조선인민들의 대중적인 반미애국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는데 있으며 셋째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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