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고백: ‘죽음을 넘어. .’는 “내 창작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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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3-07-08 18:58 조회12,39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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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고백: ‘죽음을 넘어. .’는 “내 창작물 아니다”
2010.11.22. 황석영은 프레시안을 통해 ‘죽음을 넘어. .’가 자기의 창작물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프레시안의 편집자는 황석영의 표절을 끈질기게 추적한 신동아 기자(송홍곤)의 질문에 대해 황석영이 대답한 장문의 글을 전재했다. 편집자의 서두는 이러했다,
“지난 11월 소설가 황석영 씨의 <강남몽>의 표절 의혹을 제기했던 <신동아>가 최근호(12월호)에서 다시 '황석영 때리기'에 나섰다. . .이 잡지는 마지막으로 황석영 씨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도 '광주 시민 전체가 저자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주요 저자도 (당시 광주에 없었던 황 씨가 아니라) 광주에 있었던 다른 이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잡지는 이런 의혹을 뒷받침하고자 당시 언론 기사, 북한의 관련 기록 등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비슷한 부분을 부각했다. 이런 <신동아>의 의혹 제기를 놓고 황석영 씨는 <프레시안>에 자신의 입장을 담은 해명을 보내왔다. 황석영 씨와 <신동아>의 진실 공방을 독자들이 있는 그대로 확인할 수 있도록, 황 씨의 요청대로 해명 전문을 싣는다. 황 씨는 "<신동아> 측이 질의에 대한 응답을 자의적으로 편집해 실었다"며 "<신동아> 측의 질의도 참고로 전문 공개한다"고 전했다.” <편집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대한 황석영의 해명
“1980년 광주 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뒤에 광주 시민들은 엄혹한 검열과 감시를 무릅쓰고 자체적으로 진상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으며, 당시에 여러 팀이 시민들의 회상 인터뷰와 국내외 취재 기자들의 자료를 가리지 않고 수집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광주 항쟁에 대한 실록을 세상에 내놓고자 하였는데 5·18 관계 단체의 효시였던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발족되자 여기서 이들 자료들을 모아서 내게 대표 집필을 해달라는 위촉이 왔습니다. 당시에 광주에 거주하고 있던 나로서는 유명 작가로서 광주 시민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돕는 젊은이들과 함께 1984년 말부터 1985년 봄에 이르기까지 기록을 정리했고 같은 해 3월 중순에는 기록의 일부가 대학가와 몇몇 기자들의 르포 기사로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1985년 4월 말경 풀빛출판사에서 지하출판이 강행되었으나 수년 동안 불법 판금 서적이 되었고 나 역시 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 책은 나중에 5·18 광주 항쟁의 기록으로서 시내 도처에서 목격하고 체험했던 시민들의 구술을 통하여 집대성된 현장의 역사서가 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청문회와 증언에 의하여 재확인되었던 근원적 자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애초부터 이 책이 내 고유의 '창작물도 아니고' 광주에 거주하며 살아남은 한 사람으로서 책무를 느껴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출간된 것인 만큼 단 한 푼의 인세를 받은 적도 없고, 저작권에 대한 권리조차도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측에 양도했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1122073428
결 론
황석영의 위 해명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죽음을 넘어..’는 광주의 목격자들이 다수 참여하여 기록한 실록이다 2) 이 책은 황석영의 창작물이 아니다. 3) 황석영은 유명작가로서 광주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기록을 다듬어 황석영의 이름으로 발간했다.
여기에서 제2항과 제 3항은 정직한 말이며, 제1항은 거짓말이다. 이 책을 광주사태의 목격자들이 본 것들을 집대성한 것이면 ‘김대령 박사가 지은 ’역사로서의 5.18‘과 비슷한 책이 된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99%가 허위 날조된 것들이다.
“죽음을 넘어. . ”에는 아래와 같은 글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게 사실인지 잠시들 음미해 보기 바란다.
모두가 다 검찰보고서와 어긋나는 거짓이자 모략들이다.
이 책의 중간제목인 ‘화려한 휴가’의 글(47-51쪽)
공수대원들의 공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특수공봉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살기가 돋았고, 가차 없이 머리를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 .한손에는 대검을 또 다른 손에는 살상용 곤봉을 들고 닥치는 대로 쑤셔 박았다. . 시위 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는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 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얼굴을 위로 돌리게 해놓고는 안면을 군화발로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 곤죽을 만들었다.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서 사망자의 사망 진단은 각기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최초에는 타박상, 그 다음은 자상, 그리고 총상의 순서였던 것이다. . .
공수대원들은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가 축 늘어지면 멱살을 잡아 한손으로 쳐들어 걸레를 던지듯 트럭 위로 던져 올렸다. . . 주위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몸서리를 치며 발을 굴렀다. 공수대원은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았다. 무조건 닥치는 대로 서너 명씩 달려들어 곤봉으로 패고 군화발로 아무데나 내차고 짓밟았다. . .
이들은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의 1차 작전에서 시작하여 ‘충성’으로 끝나는 5차 작전까지의 임무를 띠고 광주에 투입되었다. 특히 제7공수특전단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병처럼 육성되었으며 광주시내에 최초로 투입될 때부터 살인허가를 받은 것처럼 잔인, 냉혹하였다. 이들은 부마항쟁 때에도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경력이 있는 부대였다...오후 2시부터3시 사이에 시외버스 터미널 부근으로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만행을 시작하였다...
공수대원들은 서너 명이 1개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은 무조건 쫓아가서 곤봉으로 머리를 때리고 공을 차듯이 가슴과 배를 내질렀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그들은 가차 없이 대검으로 배를 쑤셨다. 공수대원들은 골목마다 뛰어다니면서 주변에 숨어 있는 청년들을 두들겨 패고 나서 손목을 뒤로 하여 포승으로 묶고는 차에다 던져 올렸다.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즉시 발가벗기고 굴비 엮듯 엎드리게 하고는 계속 난타했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맴 돌았고 골목마다 비명과 흐느낌이 요란했다. 어떤 경우는 터미널 뒤편의 막다른 골목까지 달아난 학생이 드디어 잡히게 되자 자지러지게 무릎을 꿇으며 살려 달라고 연신 빌었다. 대문에 나와 내려 보던 할아버지가 너무도 애처로와 몸으로 가리면서 봐달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비켜 이새끼!” 하면서 할아버지를 곤봉으로 내리였다. 할아버지는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고 쫓겼던 학생은 돌을 집어 들었으나 공수대원은 가차 없이 곤봉으로 후려친 뒤에 대검으로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길거리로 나갔다.
시위 학생이 북동 우체국 옆 골목의 마지막 집으로 뛰어들어 다급한 김에 안방 장롱 속으로 숨었다. 공수대원이 곧 뒤쫓아와 혼자 집을 보는 할머니에게 방금 도망 온 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가 전혀 모른다고 대답하자마자 “이 씨팔년이 거짓말을 해? 맛 좀 봐야겠구만” 하면서 할머니를 곤봉으로 후려쳐 실신시키고는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마침내 안방으로 군화를 신은 채로 들어가서 장롱 속의 청년을 끌고 나와 역시 곤봉으로 안면과 머리를 짓이기고 끌고 갔다.
광주일고 부근에서는 길 가던 여학생을 아무이유 없이 붙잡아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내려 구둣발로 올려 차고 상의와 브래지어를 찢어 버리고는 여러 시민들이 보는데서, “이 씨팔년이 데모를 해? 어디 죽어 봐라” 하면서 계속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할 때까지 주먹과 발길질로 난타했다. . . 공용터미널 부근에서는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모두 정차시켜 놓고 차안을 검문하면서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불문곡직하고 끌어내렸다. 학생 아닌 청년들이 약간 반항하자 공수대원 7-8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돌려가면서 난타한 후에 “광주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한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안내양이 약간 반항의 기색을 보이자 “네 년은 뭐냐”면서 곤봉으로 후려갈겼고 안내양은 차 아래로 실신하여 굴러 떨어졌다. 만약 시내버스를 세웠는데 몇 미터 앞으로 더 나가서 정차하면 곧장 버스 위로 올라와 운전석에 앉은 운전기사의 뒷통수를 곤봉으로 타격했다.
공수대원들은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눈은 술기운과 살기로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22일에 시민군에 의하여 포로가 된 몇 명의 공수대원의 진술에 의하면, 이들은 이때 출동하기 전에 독한 술에다 환각제를 타서 마신 상태였으며 수통에는 빼갈을 담고 있었다.)...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단 말이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러는가. 좌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에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 봤지만, 저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 저런 식으로 죽일 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놈들을 죽여 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2013.7.8.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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