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리’ 박사에 대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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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07-19 13:13 조회8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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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리’ 박사에 대한 마무리
이 글을 쓰는 동기
마이클 리 박사는 열렬한 애국자로 활동하신다. 그가 5.18에 대해 나와 같은 진영에 선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북한 특수군의 침투방법이라는 기본사항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평가절하했다. 이런 폄하는 나를 비난하는 정담과 신목사 등과 싱크로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런 폄하행위들은 표현의 통로조차 막혀 있는 옥에 갇혀있을 때 발생했다. 5.18로 인해 감옥살이를 하고, 수억 원대의 금원을 광주 사람들에게 강탈당하고 있는 억울한 사람에 동정하기는커녕 함께 동조하여 지만원의 연구결과를 자기의 업적으로 돌리고, 지만원을 기본조차 모르는 사람인 것으로 절하시킨 것은 한번쯤은 짚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마이클 리’는 누구인가?
‘마이클 리’를 검색하면 미국인 뮤지컬 배우가 뜬다. 마이클 리 박사의 정보가 나무위키 등에는 아직 떠 있지 않은 것이다. 어느 나라에나 [인명록](Who is who)이 있다. 그 인명록에 그가 아직은 발견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2014년 월간조선 10월호에는 그의 자서전 [CIA 요원 마이클 리]가 소개돼 있고, 2024년에는 스카이데일리에 그 증보판이 연재됐다. 그의 자서전을 종합해 보면 그의 프로필은 대략 아래와 같다.
마이클 리가 밝힌 프로필
1933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에서는 1등을 하는 수재였지만 부친이 10세 때 사망하시는 바람에 고아원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22세에 신학교를 나와 울릉도 실습전도사로 일했다. 1956년 23세에 징집되어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포병학교에 2등병으로 배치되었다. 1957년 24세에 사병통역관 시험을 치러 14주(3개월 반)동안 군사영어반에서 영어교육을 마친 후 한국군 군사정보부대에 배치됐다. 한미협조 차원에서 미8군에 파견되어 귀순자, 간첩 등에 대한 심문내용을 번역하였다. 1958년(25세) 제대한 후 동 한국정보부대에 문관으로 취직하여 포로 심문관이 되었고, 1974년(31세) 15년 8개월 귀순자와 간첩 등을 직접 심문하였다.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병사로 영어교육을 3.5개월(14주) 받은 후 이런 능력을 발휘했다면 그는 초천재급일 것이다. 한미합동 근무성적이 뛰어났기에 미국이 특별 이민 비자를 발급해주어 1974년 5월(41세)에 도미하여 메릴랜드 주 K-마트에서 2년 동안 노동일을 하다가 1976년(43세)에 CIA국장에게 편지를 써서 시민권이 없는 상태에서 CIA직원으로 특별채용되었다. 그후 2000년(67세)까지 24년 동안 미 CIA직원으로 24개국을 순회 근무하다가 퇴역했다.
경력과 학력의 디스-매치
월간조선이 소개한 그의 학력을 보면 그는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정치학으로 학사-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1993년 60세에 정치학(북한학) 박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에 나타나 있는 이력을 보면 그는 CIA모자를 쓰고 24개국을 다니면서 근무했다. 각국에 1년씩만 근무했다 해도 24년이 걸렸을 텐데, 9년 정도의 시간을 어떻게 빼내 정치학 학사(4년)가 되고, 정치학 석사(2년)가 되고 정치학 박사(3년)가 되었는지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CIA 근무기간인 24년에서 9년 정도의 시간을 뽑아내 워싱턴D.C에 소재한 조지 워싱턴대학을 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CIA에서의 근무 기간은 15년(24-9)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15년 동안에 어떻게 24개국을 순회하면서 근무를 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가 어렵다. 더구나 그는 1985-95까지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탈북자들을 담당해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은 5년 동안에 23개 국을 순회하면서 근무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학력이 잘못 소개되었는지 아니면 근무 이력이 잘못 소개되었는지, 사회적 공인으로서 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그는 또 24년 동안 간첩의 침투 방법을 전문적으로 분석했다고도 했다. 그가 귀순자와 간첩을 심문한 기간은 그가 한국군 502군사정보단 A중대에서 근무했던 15년 8개월일 것이다. 16년 동안이라 해야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미CIA에서 24개국을 순회 근무하는 동안 본업을 수행하면서 북괴의 간첩 침투 방법을 연구했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의 자서전에는 다른 사항들에 대한 설명은 길고 자세한 반면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따는 과정은 별로 소개돼 있지 않다.
마이클 리의 5.18 증언 내용이 주는 혼돈
마이클 리의 5.18 지식은 정돈돼 있지도 않고, 신뢰가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5.18을 알지 못하면서 최상급의 전문가로 자처해왔다. 왜 이런 판단을 하는지 아래에 정리한다.
<2014년 10월 월간조선 10월호 발언>
마이클 리는 현대사의 예민하고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소상히 밝히면서도 기자가 5.18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① 내가 죽거나 ② 미국정부의 비밀해제가 이루어지면 알게 될 일이라 코멘트 하기를 회피했다. 이는 2014년 10월까지 그가 5.18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CIA의 이름으로 획득한 정보는 규정상 죽기 전까지 노출하면 안 되기 때문에 CIA자료가 훗날 비밀해제되어 세상에 나오면 바로소 5.18에 대한 진실이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그런데 그는 2016년부터 수많은 매체를 통해 5.18에 대해 이야기를 내놓았다. 또한 미 CIA자료는 2020년 5월 11일 미국이 한국 정부에 이관하었다. 122건 520쪽이고, 그 중 9건에 걸쳐 5.18관련 내용이 기재돼 있다. 이 공개된 CIA 문서에는 폭동의 주동자가 550명이고, 이들은 과격하여 인민재판을 열고 여러 명을 즉결처분하였다는 구체적 정보가 있다. 이 9건의 내용 중 마이클 리가 보고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2014년 월간 조선 10월호, 일부 캡처>
<2016.5.18. 뉴데일리 발언>
① "제가 CIA 소속으로 1979년 하반기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근무를 할 때 (동구권 정보망을 통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북한 조선노동당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이 한국 내에 포진해 있는 간첩망에게 지령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② "오스트리아 빈에서 수집한 이러한 정보를 워싱턴에 보고 했다.“
③ "당시 광주에 몇 명의 북한 특수부대원이 왔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분명히 북한 특수군이 개입한 것으로 믿는다. 다만 대규모 병력의 동시다발적 침투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한두 명 씩 산발적으로 침투해 숨어있다가 (5.18 사태 때) 집결한 것으로 보고 있다."
④ "불과 4시간 사이에 광주와 시외곽 지역에 있는 44개의 예비군 무기고가 털렸다는 점으로 볼 때 광주 시민들이 (무기고 탈취를) 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뉴데일리 발언의 요지>
위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는 비엔나 재직시 ”대남총책 '김중린'이 한국 내에 포진해 있는 간첩망에게 지령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는 데 이 정보를 CIA본부에 보고했다“는 것이 전부다. 이하 ③ ④ 항은 5.18에 대한 그의 견해에 속한다. 북한 특수군 몇 명이 광주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침투 방법은 한두 명씩 산발적으로 침투해 숨어있다가 5.18사건 때 집결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광주 및 시외곽에 소재한 44개의 예비군 무기고가 4시간 사이에 탈취한 것은 광주시민의 능력을 벗어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뉴데일리 발언의 의미>
비엔나에서 본부에 보고했다는 내용은 겨우 김중린이 남쪽에 이미 침투시킨 고정 간첩망에 지령을 내렸다는 사실뿐이다. 북한특수군이 왔다면 집단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한 두 명씩 축차로 왔을 것이라는 자신의 의견과 44개 무기고를 4시간 안에 턴 것은 광주시민의 능력를 벗어난 것이라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북한군을 침투하여 광주에서 작전을 벌이려면 김중린이 고첩들에게 준비명령을 내리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파견되는 특수군의 임무가 따로 있고, 그들에게 협조를 해야 할 고정간첩들의 임무가 따로 있다는 것은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는 말처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특별히 본부에 보고할 만한 정보라 할 것이 없는 성격의 것이다.
여기에서 사실관계에 해당하는 것은 "불과 4시간 사이에 광주와 시외곽 지역에 있는 44개의 예비군 무기고가 털렸다“는 표현이다. 이 표현을 해석하면 비단 마이클 리 박사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다 북한의 소행이라고 해석한다. 전문가만이 내릴 수 있는 해석이 아니다. 문제는 두 가지다. ① 하나는 44개 무기고가 마이클 리의 표현처럼 광주와 광주시 외곽에 소재한 예비군 무기고가 아니라 전남지역 17개 시군 곳곳에 위장돼 있는 경찰서 무기고와 극히 일부의 예비군 무기고라는 사실이고 ② 다른 하나는 44개 무기고가 4시간 만에 털렸다는 정보의 출처를 명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보 생산 전문가들은 낱개 첩보들의 출처를 명기해야 한다. 석사 논문과 박사 논문 그리고 모든 종류의 저서들에는 자료의 출처를 명기해야 한다. 그런데 마이클 리 박사는 출처를 반드시 밝혀야 할 이 중요한 정보에 대한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자기가 CIA에서 생산한 정보인 것처럼 표현했다.
아래는 내가 2008년에 수사기록과 북한 문헌을 조사하여 통계학적으로 생산한 정보다. 아래의 정보를 생산한 오리지널리티(발원지)는 지만원이다. 누구든지 학문을 한 사람이라면 자료를 사용할 때 출처가 지만원임을 밝혀야 하는 정보다.
아래 정보의 오리지널리티는 지만원
“300명의 시위대가, 5월 21일 오전 08시에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하고, 하루 전에 [군분교]라는 작은 교량을 중심으로 하는 매복지점에 중장비들을 동원하여 가두리장을 설치한 다음 5.21.08시에 계획대로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20사단 차량부대를 습격하여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한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아 인근에 있는 군용차량 제조사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향했고, 09시에는 또 다른 300명이 5대의 버스를 타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접근하여, 총 600명이 공장을 점령한 후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400대를 탈취하자마자 마치 예행연습을 한 사람들처럼 곧장 전남 17개 군에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로 달려가 불과 4시간 만에 5,403정의 총기와 8톤 분량의 TNT를 탈취해가지고 전남도청에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놓고, 그날 밤부터 광주교도소를 5차례 야간공격하였다.”
신사라면 정보의 출처부터 밝혀야
마이클 리가 진짜 고급 정보원이거나 학자라면 학자나 정보원이 지켜야 할 도덕율(code of conduct, moral principles)을 지켜야 신사다. 군 상황일지에 기재돼 있는 털린 무기고 수는 38개였다. 이것을 처음으로 카운트한 사람이 지만원이다. 6개의 무기고 이름은 북한 문헌에서 더 찾아냈다. 38개 무기고와 6깨의 무기고를 합한 숫자가 44개 무기고였다.
이 정보는 내가 2008년에 발간한 4부작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에 기재돼 있다. 나를 제외한 이 세상 그 누구도 44개 무기고를 카운트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마이클 리는 44개 무기고와 4시간이라는 숫자를 마치 자기가 취득한 정보인 것처럼 말했다.
한국사회에서 최근 가장 수치스럽게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 [표절]이다. 논문 표절도 부끄러운 행위인데, CIA 간판을 내걸고, 조지워싱턴 대학 박사학위를 간판으로 내거는 원로 학자가 내가 감옥에도 가고 수억 원의 억울한 손해배상금을 물고 있는 사이에 내 라이선스를 자기 라이선스로 가로채는 것은 도덕율 측면에서나 인간적 측면에서 도리가 아닐 것이다.
<2025.5. 조시마TV 인터뷰 내용>
2025.5월의 조시마(Z0SIMA) TV 내용을 보면 마이클 리 박사는 “지만원이가 5.18연구를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파악하지 못한 게 있다. 북한간첩들이 한꺼번에 동원된 줄로 예기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마치 내가 북 특수군의 침투 방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북특수군이 한꺼번에 집단으로 침투한 것으로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는 허위다. 나는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바보 사령관이 600명이나 되는 특수군을 한꺼번에 집단으로 내려 보낼 정도로 멍청하겠는가? 나는 잠수함으로는 10명 단위로, 태백산맥 루트로는 10-30명 단위로 침투시켜 광주 외곽에 은신시키거나 양아치 등으로 위장해 광주시가지 전투를 위한 정찰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탈북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기도 하지만 베트남 게릴라전에서 습득한 지식이기도 했다.
부마사태, 사북탄광사태에 대한 정보의 오리니낼리티는 마이클 리 박사가 아니다.
더구나 마이클 리 박사는 5.18을 간첩들이 배후조종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광주소요는 대구폭동이나 4.19처럼 고정간첩이 사주한 것이 아니라, 북한특수군이 직접 내려와 유언비어로 5.18현장을 분노케 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군사작전 현장들을 지휘한 사건이다. 현장 사진을 보면 현장에는 수많은 지휘자들이 있었다. 5.18을 주도한 북한의 주역은 북한특수군이고 조역은 껌팔이 구두닦이 등 개념 없는 광주의 부나비들이었다는 것이 나의 연구였고, 김경재와 권영해의 증언이기도 하다.
1979년 10월의 부마사태와 1980년 4월의 사북탄광 사태에도 수십명 단위의 북 특수군이 왔지만 공수부대가 출동하자 꼬리를 내렸다. 여기에 파견됐던 수십 명 단위의 특수군이 5.18을 위해 남파된 수백 명 단위의 특수군에 합류했다는 정보는 탈북자들이 2009년에 펴낸 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 반복 증언돼 있고, 이와 똑같은 내용들은 그 1년 전에 내가 저술한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에 이미 자세히 소개돼 있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데 마이클 리가 처음으로 밝혀냈다는 그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종합해 보면 마이클 리 박사는 여러 곳에서 득문한 조각 정보들을, 출처를 밝히지 않고, 마치 자기가 1980년 비엔나에서 획극한 고급정보인 것처럼 과장했다. 그리고 스카이데일리가 띄워준 정담 등과 시기적으로 싱크로 하여 지만원을 기본조차 모르는 사람인 것으로 폄하했다. 그가 최고라는 뜻이다.
2025.7.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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