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를 맞으며 이승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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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학포 작성일11-04-18 23:39 조회1,788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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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4.19혁명 51주년이다.
나는 그 당시 대학생 데모현장의 일원이 였었다. 시위 데모의 촉발은 다 알다싶이 3.15 부정선거에서 시작 되었었다. 당시 서울의 전 시가지가 대학생의 데모물결로 쓰나미가 되다 싶이했다.
내가 속한 대학생들은 종로,시청앞을 거처 광화문에서 서대문 이기붕 자택인가 공관인가 하는 그 방향으로 물밀듯이 가두행진을 벌렸었다. 다른 대학생(고려대,서울대)들은 당시 청와대 앞으로 가기 위해 대형 수도관을 구르며 중앙청 앞을 지나가다가. 경찰의 마지노선 저지선에서 경찰의 발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안다.
이렇게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상황보고를 받고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물러나겠다!”하고 즉각 하야를 했었다. 그는 또 “부정에 항의 하지 않으면 망국백성”이란 말도 했다 한다.
그가 하야를 하고 “이화장”을 떠날대는 대학생 그 누구도 그에게 돌팔매질이나 겨란 세례는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시위 군중은 위로의 박수를 보내는가하면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가 대통령이 였었지만 수하의 이기붕 부통령, 최인규 내무부장관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었다는 사실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데 대한 위로로 보였었다. 그러나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는 어쩔수 없이 책임을 면할수 없음은 당연지사다.
이리하여 그는 건국대통령으로서 불미스런 종말을 고하고 지극정성의 내조자 프란체스카 여사와 망명의 길을 떠난것이다.
이상과 같이 내가 격었던 당시상황을 글을 옮겨본 당시 상황이지만 사실의 오류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당시상황에서는 몰랐었 지만 그때부터도 좌익 빨갱이 세력이 데모 군중속에서 선동을 했다는 사실을 후일 알게되었다.
나는 오늘 4.19를 맞으며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그냥 잊혀버리고 싶지않는 심정이다.
오늘 언론보도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씨가 처음으로 4.19묘역에 참배하고 희생자 유족들에 사죄성명을 발표 하겠다고 보도 되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역사는 그의 공과를 그대로 기록하고 우리는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전적 책임 이란걸 부정하고 싶진않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법적 책임은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없드라도 그는 자유대한민국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을 위해
해외에서 많은 활동을 했고 미국을 움직이게한 그의 역량의 공로를 부정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는 누가 뭐래도 세계에서 보기드문 반공주의자로 우리는 인정해야한다.만약 그 당시 그의 공로가 무산되고 좌익 빨갱이 남로당 천지로 접수되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바로 킬링필드의 김일성 치하. 생각만해도 끔찍한 "그들이 말하는 낙원(?)"이 되었을것이다.
이제 4.19가 51주년이 넘어가고 있다. 이쯤해서 우리들은 건국대통령으로서 그의 위상을 되찿아주도록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만이 아직 건국대통령에대한 기념관과 조형물이없다. 이젠 그의 공과를 포 함한 기념관과 동상이 세워져야한다. 그것이 올바른 역사다.
어찌해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역적 빨갱이 김대중 보다 못하단 말인가? 빨갱이 대통령은 위상을 지켜주고 건국대통령은 이렇게 천시해도 된단 말인가?
제삼 얘기지만 이젠 국민합의로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 이승만대통령을 빨갱이들의 오욕의 그늘을 지우고 빛을 보게해야한다.
댓글목록
경기병님의 댓글
경기병 작성일김대중 노무현의 실체를 알고 난 후로부터 현대사의 이면이 보이기 시작했죠. 이승만을 이해하게 되었고 박정희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김종오님의 댓글
김종오 작성일
장학포 선생님!
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국회의사당(당시 태평로)앞 광장 점거 농성때, 대학신문 기자로서 저는 그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처장(차순종/경평 축구단 평양팀 선수)은 나에게 "김종오, 너 고대생 데모하는데 가서 우리대학놈들 있으면 데리고 와!"라 하셨고, 이 말을 곁에서 들은 학생과장(한성균/뒤에 부총장 역임)은 "처장님, 김종오를 내 보내면 저 놈이 데모대에 합세할 놈이지 우리 애들을 데리고 올 놈입니까?" 라던 51년전의 옛 생각이 어젯일만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다시쓰게 된 1960년 4월 19일, 이날도 저는 우리대학생들과 함께 종로로 물려 나갔다가 대학신문 기자로서 여러곳을 보기위해 을지로 입구의 중앙대가 내무부(당시 을지로입구 명동쪽)의 경찰대 조준 사격(그날 현장에서 중대생 여러명 사상자 남)에 막혀 머뭇거리자 시청쪽에서 내려오던 연세대 데모대와 엉켜져서 '비켜라, 경찰대 사격으로 못나간다' 하던 모습들을 잘 봣으며, 이어 광화문 중안청 청와대로 밀어붙인 여러 대학생들 틈에 끼어 '이승만 물러가라'는 함성속에 돌아나오다 보니 서울신문사(국회의사당 건너편)가 불길에 휩쌓이는 것을 본바도 있었지요.
장학포님의 댓글
장학포 작성일
김종오 선생님! 그러셨군요! 그 당시 대학신문 기자라면 그날의 상황들이 생생하겠군요! 대한민국 역사가 휘몰아친 모습이였죠!
이승만 대통령이 불행하게도 3.15 부정선거와 부패라는 오명은 벗을수 없으나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 그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착근시키고 부작용을 감수하고 반공을 굳건이 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수있다고 감히 말씀 드릴수있습니다. 이제 이승만대통령을 정당한 평가를 받을수 있도록 국민합의가 필요하겠습니다.
기린아님의 댓글
기린아 작성일어디가서 돈 주고도 못 들을 당시 서울에 계셨던 분들의 체험담! 감개무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