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적달성을 위해 자살 권유하는 빨갱이의 실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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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태양qwer 작성일11-03-07 14:17 조회1,988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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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감옥 있을때 20대 청년들 찾아와서
정부전복 가능하다며 자살 권유했다"<단독인터뷰>
한때 ´미네르바´로만 불렸던 인터넷 논객 박대성 씨
"우파는 ´빨갱이´ 좌파는 ´열사돼라´ 비난과 회유 견딜수 없었다"신동규 기자 (2011.03.07 10:25:07)
◇ 미네르바라는 닉네임에서 자연인으로 돌아온 박대성 씨는 인터뷰 내내 최진실 씨의 죽음 등을 언급하며 자신의 힘든 상황을 토로했다. ⓒ데일리안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한 때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이 인물은 비쩍 마른 얼굴, 핏발이 선 눈으로 연신 기자를 응시하며 한 마디 한 마디를 힘들게 이어갔다. 2일 <데일리안>이 마주한 이는 다름 아닌, 한때 ‘미네르바’로만 불렸던 박대성 씨다.
지난 2008년 말 검찰에 긴급 체포되며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면서 그를 추종하던 네티즌들에 의해 ‘인터넷 경제 대통령’로 추앙받았던 박 씨는 자유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작년 12월 헌법재판소가 박씨에 대한 검찰 기소 이유였던 전기통신기본법 제 47조 1항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판 ‘노스트라다무스’로 추앙받던 지난 2008년 당시, 그의 글이 웹에 등장할 때마다 한국 사회는 이리저리 들썩거렸다. 특히 2008년 7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을 정확히 예측한 이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가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올리는 글에 쏠렸고, 그는 절필 선언과 재등장을 반복하며 수많은 궁금증과 억측을 낳았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숨바꼭질에 언론과 정부당국 등도 이리저리 춤을 췄고 대한민국 모든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미네르바의 정체를 놓고 한 두 번씩은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2008년 12월 29일 “정부가 주요 7대 금융기관과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 달러 매수를 금지할 것을 긴급 공문으로 전송했다”는 내용의 글이 문제가 돼 검찰에 전격 체포됐고, 한국 사회 ‘저항’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한국사회의 하나의 ‘아이콘’ 되버린 박대성 씨와의 인터뷰는 그가 현재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됐다.
박 씨가 인터뷰를 통해 밝힌 내용은 시작부터 충격적이었다. 지난 2009년 검찰 수사로 감옥에 수감된 당시 '좌파단체 관련 젊은이'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면회를 통해 찾아와 “이명박 정부의 전복”을 거론하며 “열사가 돼 달라”며 자살을 종용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같은 사실이 진실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검찰에 의해 구속되기 전 175cm, 105kg의 거구였던 그는 현재 63kg로 무려 40kg 이상 체중이 줄어 ‘피골이 상접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박 씨는 정상적인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두 시간 반이 넘게 진행된 인터뷰 도중 목이 타는지 차를 여러 차례 마셨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수감 당시 심정부터 시작됐다.
-검찰에 체포돼 수감될 당시 심정이 어땠나.
“(고개를 숙이고 괴로운 표정을 몇 초 이어가다가 겨우 고개를 들고) 이런 이야기 털어놓은 적 없다. 처음으로 (내 당시 심정을) 밝히는 것이다. 솔직히 체포됐을 당시에는 두렵지 않았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두렵지 않았다’니, 무슨 말을 하려는걸까. 갑자기 그의 눈빛이 살아났다. 눈빛이 분노에서 다른 무엇으로 바뀌자 당당한 그의 표정이 읽혔다. 일종의 ‘영웅심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미네르바의 당시 심리적 상태가 상상됐다.
“(목청을 한껏 높여) 내 옆에는 인터넷이 있고 나를 지지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있는데(인터넷 상의 지지자들을 지칭) 무슨 걱정이 있겠나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대범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인내의 한 굴곡일 뿐이다’, ‘네티즌들이 진실을 밝혀줄 것이니 다 극복할 수 있다’, ‘별 일 없이 풀려나면 다시 인터넷을 통해서 계속 글을 써야겠다’는 담담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 의지를 벗어난 상태로 진행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다 망가졌다.”
박 씨는 이어 ‘이명박 정부 전복’을 거론하며 박 씨에게 자살을 우회적으로 종용한 사람들이 당시 교도소로 찾아왔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수감돼 있던 어느 날 한 20대가 면회를 신청했다. 그는 내게 다짜고짜 ‘당신이 여기서 자살하면 이명박 정권 붕괴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며 자살을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청년이 찾아와 “당신이 십자가를 져달라”, “열사가 돼 달라”는 말로 내 죽음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런 말을 건네는 그들에게 뭐라고 답해줬나
“당신 같으면 뭐라고 답하겠나. 하도 황당해서 이들을 멍하게 응시하다 모두 아무 말 없이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바꿔가며 여러 차례 나를 찾아왔다. 같은 조직에 속한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네르바의 자살’을 고리로 이미 어떤 시나리오를 그려 놓은 사람들 같았다.”
박 씨는 그러나 이들이 소속된 단체나 이름을 들은 적은 없다고 거듭 밝혔다. 물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다만 그는 당시 정황상 '좌파단체 소속 청년들'이 아니겠느냐고 추정할 뿐이었다.
그는 “당시 감옥에 수감된 상황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면회랍시고 나를 불러내 면전에서 ‘당신이 자살해줘야겠다’고 우회적으로 압박을 넣는데 내가 무슨 경황이 있겠느냐”는 말로 당시 심경을 전했다.
◇ 미네르바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박대성 씨. ⓒ데일리안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후 갑자기 박 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무것도 아닌 그냥 한 시민일 뿐이다. 스스로 경제가 좋아 공부하고 그와 관련된 이런 저런 글을 올린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든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주변에서는 나를 ‘괴물’로 만들어 갔다”며 “우파에서는 나를 ‘빨갱이’라고 하고, 좌파에서는 찾아와 자살하라고 하고 당신 같으면 제 정신으로 살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내게 ‘왜 이제 반 정부-반 MB 글을 쓰지 않느냐”고 묻는다. 내가 왜 그런 글을 올렸었는지 회의가 든다. 분노가 회의가 되고 비참함이 뒤섞여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다“고 감정을 토해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연신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침묵하다가도 고개를 들고 한번 말을 잇기 시작하면 속사포같이 말을 이었다. 특히 같은 말을 여러번 반복했다. 자신은 자살한 배우 고(故) 최진실 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며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긴 갓난아기와 같다.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도 연신 내뱉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생활이 궁금하다. 당신의 생활은, 그리고 가족들은 어떤가.
“최악이다. 오히려 감옥에 있을 때는 마음이 편하고 살도 쪘다. 이렇게 비쩍 마른 것은 그 이후 심적 고통이 커서다. 아직도 나를 ‘가짜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이런 저런 소송에 얽혀있다. 여기 내가 이렇게 있는데 도대체 누가 미네르바란 말인가.”
실제로 그는 그가 미네르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소송중이다. 아직도 박 씨가 글을 올렸던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미네르바가 박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내용의 글이 계속 오르고 있고 조회수도 높은 상황이다. 모 방송사는 그 글을 올린 네티즌들의 주장을 담은 시사기획 프로그램을 방영할 예정이어서 미네르바 진위 논란이 다시 불거질 조짐이다.
말문이 트인 박 씨는 속사포같이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내게 평온한 삶과 정상적인 삶이란 없다. 우파에서는 2009년 당시부터 내가 빨갱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끊임없이 내가 ‘순교자’가 되길 바라는 세력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아니냐”며 “나는 가족들이 파괴됐고 인간관계, 경제활동, 은행잔고 등 모든 것이 파괴됐다. 나는 파괴된 인간이고 난도질 당할대로 난도질 당한 인생”이라고 자조했다. 그는 거듭 자살했던 여러 연예인들의 이름을 되뇌며 “그 심정 이해한다. 십분 이해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강연이나 저서 등을 통해 돈을 많이 벌지 않았느냐는 세간의 시선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박 씨는 “항간에서는 미네르바가 경제대통령이고 책도 쓰고 강연도 한다는데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는 것으로 아는데 나는 한푼도 없고 빈털터리다. 제발 나를 내버려두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박 씨는 이어 가족들이 겪은 심적 고통을 털어놓았다. 부모님의 심리적인 충격에 이어 그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겪는 괴로움을 말하려다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이내 눈물을 흘렸다.
유치원 선생인 동생과 단 둘이 살고 있다는 박 씨는 “어느 날 동생이 퇴근해 와서 내게 ‘학부모들이 내가 미네르바의 동생인 것을 알고 학생들을 맡기지 않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느냐”며 안경을 벗고 참았던 눈물을 한참 쏟았다.
그는 “내가 사람을 죽였나, 사기를 쳐서 사람들 돈을 빼앗았느냐. 단지 인터넷에 글 쓴 이유 하나로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다. 천만다행인 점은 당시 결혼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결혼해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었다면 이런 일을 어떻게 버텨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시사저널 경제칼럼 기고는 겨우 겨우 나를 추스르고 시작한 활동”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기자는 박 씨에게 "인터넷은 얼마나 들어가 보느냐"고 물었다. 그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바로 “안 한다. 책으로 공부하며 겨우겨우 마음을 추스른다. 이제 인터넷은 보기도 싫다”고 말했다.
“인터넷은 쳐다보기도 싫다”는 '인터넷경제대통령'. 참 아이러니했다.[데일리안 = 신동규 기자]
댓글목록
소강절님의 댓글
소강절 작성일부디 강건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빕니다...
싸울아비님의 댓글
싸울아비 작성일
지만원 박사님께서 OBS경인 T.V에 출연하셔서,< 노조 운동하다가 분신 해 죽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해서 자살한 게 아니라..."너는 자살하는 척만 해라"라고 해 놓고 돌다가 누군가
성냥불을 그어서 불이 붙게 해 타살한 것이다!> 라고 하시어 사회를 보던 정한용씨가
못 믿어하고,굉장히 당황 해 하던 적이 있었지요! 미네르바 박대성씨의 오늘 인터뷰를 읽으니,
박사님이 방송에서 오해 받을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말씀하셨다는 결론에 충분히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 국민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주적과 60 여 년째 대치 중이며,거기다가 좌파 정권 10 년 동안
주적에 대한 사상적 추종과 현 정부에 대한 전복과 폭동을 전개하는 무시무시한 종북주의자들이
암세포처럼 존재하므로,대북 풍선 날리기를 돕고,전교조를 항상 주시하며 나무라고,투표 시 절대
민자 들어가는 정당과 운동권 출신은 찍어 주지 맙시다!...
하늘보우님의 댓글
하늘보우 작성일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경리의 딸·김지하의 아내…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
조선일보 2011.02.28
"남편 정신병원 12번 입원, 그리고 완치… 밖에선 김지하를 잘 몰라"
옥중의 김지하를 순교자 만들려는 계획거절하자 운동권서 따돌림출감 후 이혼할 결심도 운동권측과의 갈등으로 남편, 정신발작 일으켜
어느 날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지금까지 내가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이젠 완전히 나았어요. 잠을 자도 꿈에 안 시달려요. 병원·한의원 어디서도 못 고친 걸 장병두 할아버지가 낫게 해줬소. 내 처와 자식들도 그렇게 나았소. 그런 분을 의사 면허증이 없다고 환자를 못 보게 막습니다. 법과 제도가 사람 살리는 걸 막고 있는 격이오. 그분 연세가 105세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소. 전통 춤·노래·공예 부문에 ‘인간문화재’가 있듯이, 그분을 전통의술 부문 ‘인간문화재’로 만들 순 없겠소. 그분 비방이 합법적으로 전수될 수 있게 말이오.”
장병두옹은 사회적 논란이 됐던 인물이다. 한쪽에서는 그를 ‘현대판 화타’로 떠받든다. 암·당뇨·간질·백혈병·중풍 등 난치병을 그가 고쳐왔다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는 한낱 ‘무면허’ 한의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그는 2006년 의료법 위반 혐의로 고발됐다. 이는 제도의학과 민간의술의 충돌이기도 했다. 그는 1·2심에서 똑같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고령(高齡)의 나이를 감안해 판결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그에 대한 검증은 사실 불가능하다. 설령 그의 치료 효과를 봤다 한들 또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지하가 그동안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모처럼 그 가족이 ‘건강’해졌다는 스토리는 들을 만하다고 판단했다.나는 강원도 원주로 가서 김지하 대신 부인 김영주(65)씨를 만났다. 김지하보다는 좀 더 객관적으로 얘기할 것 같았다. 토지문화관 관장인 그녀는 어머니 박경리(朴景利)를 쏙 빼닮았다. 말에는 경상도 억양이 남아있었다.“외부에서는 김 시인(김지하)이 어떠했는지 몰라요. 출감(1980년)한 뒤로 늘 술에 절어 살았죠. 5년쯤 지나니 도저히 못 참겠더라. 제가 이혼하려고 했어요. 김 시인이 ‘이혼은 못 한다. 대신 당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해서, 환경을 바꾸면 좋아질 것 같아 전남 해남으로 이사갔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김 시인의 속을 뒤집어 놓았어요. 그들이 떠나간 뒤 헛소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소위 운동권 동지·후배들의 집단따돌림, 이에 대한 분노·배신감·피해의식 등이 복잡하게 작용했겠지요. 그때부터 정신병원에 12번이나 입원했어요. 발광해 들어가면 약을 한 주먹씩 먹였어요. 몸이 고릴라처럼 부어 멍하게 앉아있어요. 조금씩 약을 줄여가고 그렇게 1년쯤 지나면 사회 활동을 합니다. 세상 일에 대해 못 견뎌했어요. 그러다가 다시 발작하고. 1991년 시위 때 분신자살이 유행하자, 운동권 세력을 향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조선일보에 쓴 것도 그러했던 거죠.”당시 나는 현장을 취재했다. 아침에 눈뜰 때면 ‘지금 어디서 누군가 또 자살할지 모른다’고 괴로워했다. 열댓명이 ‘민주화’라는 명목으로 유행처럼 자살했다. 그때 김지하가 작심하고 쓴 ‘죽음의 굿판’ 칼럼은 세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운동권 동지·후배들로부터 욕설과 비난, 협박 전화가 끊이질 않았어요. 우리 집에 경찰을 보내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스트레스를 못 견뎌 정신병원에 또 들어가고. 지나고 보면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이 저 사람의 소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 사건 이후 운동권에서는 김지하를 ‘변절자’ ‘생명사상 교주’로 욕했지요. 어린 후배조차 소위 인연을 끊었습니다.“조직적으로 매도하고 따돌렸어요. 그 모욕감에 김 시인이 술 마시고 들어오면 대성통곡을 했어요.”
―그쪽에서 보면 ‘배신’과 ‘변절’일 수도 있지요. 김지하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김 시인은 ‘나는 달라진 게 없다. 나는 어떤 조직에 들어간 적도 없고, 모든 운동조직은 나 스스로 만들었다. 나 자신은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면 저네들이 변절자다. 내가 변절한 적은 없다’고 했어요.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동지’라는 사람들이 김 시인을 죽이려 했고, 그게 안 되자 그를 따돌렸어요.”
―납득이 안 되는군요. 동지들이 수감 중인 그를 왜 죽이려고 하며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김 시인은 형무소에 들어갔지만 ‘투사’가 돼 죽으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게 7년이나 오래 독방 수감 생활을 할 줄은 자신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세력은 김 시인을 소위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요. 박정희 체제에 더 극렬하게 저항하는 문건을 옥중에서 계속 쓰도록 요구했어요. 박정희로 하여금 김 시인을 죽이도록 해 김 시인을 ‘투사’나 ‘영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그 동력으로 박정희 체제를 엎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박경리)가 ‘동지들이 김지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했어요. 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어요. 그러니 우리 모녀도 죽이려고 했어요. 누가 동지고 적인지 모르겠더라고요.”―정말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증거도 없고. 어떤 피해의식에 근거한 망상 아닙니까?“세상에서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것이 있어요. 당시 첫 번째 오는 택시는 안 탔어요. 그렇게 납치될 뻔한 경험을 했거든요. 이런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지나간 일은 덮고 가려고 했어요. 선과 악 모두가 당시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김 시인을 매도하고 건드려요. 그것에 쇼크를 받고 정신병원에 갑니다. 폐인에 가까운 상태였어요. 사람 사는 게 아니었어요. 발작을 일으켜 집을 나가면 제가 찾아서 병원에 데려가요. 그러면 퇴원시켜달라고 전화로 난리칩니다.”
▲ 김영주씨는“김지하가 정치적으로 그렇게 휘말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원주 토지문화관=최보식 기자
―김지하는 어떤 사람입니까?
“억세고 무서운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면이 있긴 하나, 순한 사람이에요. 결혼 전에 이 사람에게서 세 가지를 봤어요. 굉장히 여성적인 모습과 속이 텅텅 빈 허(虛)한 느낌, 그리고 골짜기가 많은 큰 산 같다는 인상이었어요. 앞의 둘은 부정적인 느낌이었는데 들어맞았어요. 마지막은 모르겠어요. 골짜기에 가만히 있으면 편할 것 같았는데 살아가면서 아직 그런 맛을 못 봤어요.”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동료 문인들과 함께 정릉의 우리 집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왔어요. 제가 대학원을 졸업했을 때였어요. 그가 ‘오적(五賊)’을 발표한 시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때는 시를 읽어보진 않았어요. 그다음 왔을 때는 ‘수배받고 있으니 숨겨달라’고 했어요.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엄마로서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를 보내면서 마음이 안됐어요. 어릴 때 외할머니가 제게 ‘너는 복(福)이 많아 잘 살 것’이라고 했는데, 내 복의 절반을 저 사람에게 떼줬으면 했어요. 결혼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이었어요. 수배가 풀리자 그가 다시 나타났어요. 엄마가 결혼을 허락했어요. 하지만 내가 그런 인생을 살게 될 줄은 몰랐죠. 정치적으로 그렇게 휘말릴 줄은 몰랐던 거죠. 딸을 보면서 평생 속상해한 거지.”
―1973년 결혼하자마자 바로 이듬해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감됐는데(당초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돼 1980년 석방됐다).“자기가 붙잡혀 들어갈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 준비를 다 해놓은 뒤였어요. 그러고는 저와 결혼을 한 거죠. 그때 결혼 안 했으면 결혼 못 했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이었지요. 감옥에 들어가면서 생후 몇 달 안 된 아들까지 남겨놓았으니….”
―그런 남편과 같이 살았다는 점만으로도 김 관장께서는 충분히 대단합니다.“그런 상황에서 버리겠습니까. 김 시인이 멀쩡하면서 애를 먹였다면 같이 안 살죠. 병이 나서 그러니 누가 데려갈 사람도 없지, 할 수 없는 일이죠. 저는 상황에 매달려 질질 끌려왔어요. 그 상황을 책임질 수밖에 없었어요. 김 시인은 외부 강연에서는 ‘마누라 덕분에 어쩌고저쩌고’ 해놓고, 막상 조금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삐쳐요. 어떨 때는 집을 나가버려요(웃음). 하지만 매일 한 주먹씩 정신병 약을 먹고 지금껏 살아있다는 게 대단해요. 장병두 할아버지 치료를 받을 때 그 약을 끊으라고 하니 겁을 냈어요. 약 안 먹으면 잠을 못 드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떻게 장병두옹의 치료를 받게 됐습니까?
“발작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이들은 상처받고 무서워했어요. 둘 다 대학을 못 갔어요. 이제 서른살이 넘었지만 결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처럼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무의식에 있는 것 같아요. 김 시인에게 ‘당신이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서 있어줘야 한다’고 말해왔어요. 어느 날 큰아이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그때는 제가 죽고 싶었어요. 병원에 데려가도 소용없고. 한 지인의 소개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장병두 할아버지를 찾아간 겁니다.”
―김 관장 본인도 치료를 받았다면서요.“
저도 만날 아팠어요. 하체에 감각이 없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의 약을 먹고 어느 날 앙가슴에서 울화로 맺힌 불덩어리가 확 빠져나가는 걸을 느꼈습니다. 그분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생명의 은인이지요.”장병두옹의 구술(口述)로 엮은 ‘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란 책에서 김지하가 서문을 썼다.‘큰아들은 나의 발광을 보고 극도의 우울증에 사로잡혔다. 작은아들도 내 발광에 놀라 뇌신경의 반이 마비돼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있다…. 두 아이가 선생에 의해 완전히 치료됐다. 우리 식구 중 끝까지 잘 치료가 안 되고 끝없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아내도 어느 날 몇 시간 몸부림치다 기적처럼 치유의 경험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렸는데도 김지하 마음속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와의 통화에서 “과거에 내가 어려울 때 이명박씨는 3000만원이나 도와줬다. 지난 정권 때 정신병원에 세 번이나 입원했지만 그쪽에선 아무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운동권 사람들이 많이 들어간 지난 정권에서 비리가 터져나왔을 때는 참지 못했어요. ‘도둑질이나 해먹고 너희가 인간이냐’며.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욕을 해대요. 그래서 아예 휴대폰을 빼앗아 버렸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도 자살 행위를 비판해 더욱 적을 만들었지요.”
―이제 본인을 위해서라도 분노를 비우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습니다.
“김 시인도 그걸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도 처음 ‘서푼짜리 노여움을 풀어라’는 말부터 했어요.”
―그런데 박경리와 김지하 중 누가 더 문학적 천품을 타고난 것 같습니까?“모두 대단한 사람이지요. 엄마는 친구도 없이 딸 달랑 하나와 살았어요. 글을 그렇게 많이 고쳐요. 파지가 산더미 같았어요. 원고를 쓰면 제게 읽어보라고 했고, 제가 고쳐주곤 했어요. 어떤 때는 제가 읽기 싫다고 하면 화를 냈지요. 너무 가까이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몰랐어요. 김 시인은 천상 시인이에요. 모든 시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탁월한 시들이 많아요. 하지만 산문 쓰는 것, 어려운 글 쓰는 것은 못마땅해요. 내가 ‘누구 읽으라고 그런 글을 쓰나’고 타박하면 화를 벌컥 내요. 참견한다고.”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장병두옹은 올라오는 길에 잠깐 만났다.
105세의 나이란 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