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7월11일 경향신문 광주폭동!
페이지 정보
작성자 금강인 작성일11-01-14 22:33 조회2,049회 댓글4건관련링크
본문
일본 산께이 신문 기자 '시바따 미노루'씨가 1980년7월11일 경향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시바따 미노루씨는 광주를 직접 방문하여 자신이 시도한 '광주사태'의 분석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광주를 방문한 뒤에 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전략 .......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어 내려 목하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단계이지만,
여기서는 강한 인상을 받은 몇 가지를 들기로 한다.
첫째 동경(일본)에 전하여진 소요 절정(絶頂) 때의 참가자 30만이라는 숫자이다.
70만 시민의 절반가까운 숫자가 참가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었다.
여기에 대해 어떤 언론인은 20만은 된다고 말했지만 많은 사람의 의견은 수만이었다.
현장을 보고, 도청앞 광장, 여기로부터 뻗은 메인스트리트의 금남로를 군중이 꽉메웠다해도 수만정도가 아니겠는가라고 추정할 수 있고, 실수(實數)보다 과장보도된 것이 아닌가하는 인상이었다.
당시는 유언비어가 난무했기 때문에 과대선전 되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렇게 되면 대다수 시민참가라는 광주 데모의 성격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둘째, '광주사태'의 조직적계획성이다.
나는 동경에서도 이것을 산께이 신문과 중앙공론에 쓰고 주간문춘의 대담에서도 얘기를 했다.
그리고 후지TV의 '비전토론회'는 자연발생적이라는 신곡불이경응대학교수의 의견에 반론했다.
현지에서 중무장, 장갑차를 탈취, 교도소를 습격하고,
도청에 시민군지휘소를 설치하고 많은 참혹한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지하출판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조직적계획성이라는 견해가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세째 지역적 감정의 역할이다. 많은 사람은 이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대학생은 명백하게 이것을 시인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유언비어로 잠재적인 지역감정을 불지르고 사태가 격화되도록 이용한 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네째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金大中) 이미지가 크게 저하됐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상이 '광주사태'의 주된 인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두번 다시 이러한 비극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새롭게 하고 있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다.
그리고 대학생의 교육에 대해서 교과서의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를 메우려고 하지 않은 교육의 자세를 반성하고 있다는 교육당국자의 말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태의 와중에도 약탈이나 도난 물가고 시민의 사재기가 없었던 것을 자랑으로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 중략 ........
광주체재 중인 7월4일 계엄사령부의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사건'에 관한 수사결과가 발표됐다.
광주사태의 직후인만큼 광주시민은 4일의 석간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나는 이 발표문을 읽고 역시 그랬구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에 오기전에 산께이 신문과 중앙공론칠월호에 '광주소란(소동과 난동)'의 분석을 시도.
'광주폭동'은 무기, 장갑차를 탈취했다고 하는 전례가 없는 게릴라 전술이 취해진 것으로 봐서
'김대중 지지조직' 만이 아니고 '외부세력' 잠복 스파이의 활동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했기 때문이다.
.... 중략 .....
내가 입수한 정보는 이번의 계엄사령부의 최종차목과 거의 비슷하고 나의 추정도 잘못은 없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중앙공론의 논문일부가 한국지에 소개된 직후 산께이 신문 서울지국에 '시바따 미노루'를 죽인다는 전화가 몇 통 있었다고 한다. 나의 추정에 잘못이 있다고 입증이 되면 나는 언제든지 자설을 정정할 용의가 있다.
이런 종류의 비위 건드리는 전화에 나는 어느정도 만성이 되어있다.
.... 중략 .....
남북대화가 시작된 1972년 산께이 신문 서울특파원의 남북대화에 관한 비관적인 전망이 타전되었다. 그 기사에 대해서 일본 전국으로부터 항의의 전화 편지 엽서가 몇 백통이나 산께이 본사에 쇄도한 일이 있다.
조총련의 조직적인 항의전술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 외신부는 수일간 항의 전화의 응답으로 일을 못할 정도였다.
전화의 상대와 얘기하고 있는 사이에 개중에는 그 기사의 전연(全然)을 읽지 않고
조직으로부터의 지령으로 전화하고 있다고 자기도 모르게 고백하는 사람도 있어 실소(失笑)한 일도 기억에 남아있다.
아마도 이번의 '김대중음모사건'에 대해서 일본에서도 크게 화제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일부에 남아있는 김대중의 이미지는 한국에 있어서의 그것과는 큰 빗나감이 있고 과대평가가 있었다. 그것이 또 한국의 김대중지지자를 격려해왔다는 상관관계가 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인식의 빗나감(그 많은 책임은 일본의 매스콤에 있는 것이지만)을 시정하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해 나갈 작정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상의 내용을 읽어보고 나서 내가 느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산께이 신문의 기자 시바따 미노루씨가
첫째, 518을 광주폭동으로 말하고 있음
둘째, 조직적 계획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세력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음
셋째, 일본의 조총련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서 대한민국의 반국가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음.
넷째, 김대중을 일본인들이 과대포장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김대중이야 말로 정말 친일파라는 생각.
댓글목록
지만원님의 댓글
지만원 작성일금강인님 매우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입니다.
피안님의 댓글
피안 작성일
산께이 신문 기자 시바따 미노루씨는 5.18사태를 정확히 분석했고
한국 기자들 보다 한수 위인 기자 인것같습니다.
한가람님의 댓글
한가람
일본 기자가 한 수 위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된 기자이지요.
지금 한국에는 진정한 기자가 몇명이나 있나... 의심스러운 지경입니다.
육하원칙에 의거 기사를 작성하고,
기자의 소견은 분석 후에 첨가해야 하는데,
지금 대부분의 기자들은 국민학생 작문쓰듯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좌빨청소기님의 댓글
좌빨청소기 작성일
좋은 외부 자료고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내용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 같습니다.
광주폭동은 절대 민주화가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두번째 조직적 계획적 폭력행위가 빈번히 일어났다는 점: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하고 교도소를 습격하고 다량의 폭탄을 시청에 준비했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시민 주축의 민주화 운동으로 볼 수 없는 이유지요.
혹 좌빨들은 반론하겠지요: 계엄군의 잔학성 대응이유로 무장대응이 필요했다고. 하지만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점은 과거 625당시 서울점령 북괴군이 서대문교도소를 급습했던 것과 흡사하지요. 도저히 시민주도의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한 명백한 무장폭동임에도 자기의 정치적 과오를 숨기기위해 우매한 짓을 저지른 가증스럽고 파렴치한 김영삼의 과오로 대한민국 현대사와 광주시민 모두에게 지우기 힘든 불명예의 오점이 생기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