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란? > (구)자유게시판(2012이전)

본문 바로가기

System Club 시스템클럽

(구)자유게시판(2012이전) 목록

5.18이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1-10 09:24 조회2,242회 댓글2건

본문

                                                   
                                         5.18이란? 

             

1980년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 1026으로 인해 발령되었던 '제주도만을 제외한 지역계엄이 전국계엄으로 확돼됐다. 이는 계엄사령관이 시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장관과 총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속도전을 위한 계엄이었다. 5월 15일 서울역 앞 10만 시위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 22일 전국 봉기를 일으키겠다며 선전포고를 했고, 이에 다급한 정부가 김대중 등 내란음모자 24명을 밤중에 체포했다. 5.17조치였던 것이다. 

5월 18일(일요일) 새벽에는 이미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이 휴교령은 헌법기관이 내린 정당한 명령이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가 1개 대대씩 들어가 있었던 것은 평소에 계획돼 있었던 부대배치 계획에 의해 자동적으로 배치된 것이며, 2개 대대 규모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상징적인 규모에 불과했다. 2개 대대를 내보낸 것은 순전히 계엄사 작전계통과 계엄사령관 사이에서 취해진 조치였고, 여기에 전두환이나 정호용 등이 개입한 증거는 없으며 그렇게 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계엄군의 배치는 합법적인 것이었으며 배치된 계엄군의 지위야말로 헌법기관이었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 9시경, 광주의 대학생 들은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을 위반했다. 200여명의 대학생들이 전남대 도서관에 간다는 이유를 내걸고 학교에 진압하려 했지만 정문에 이미 배치돼 있던 공수 7여단 병력 20여명이 이들에게 귀가를 종용했고, 귀가의 종용은 정당한 임무수행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고 가방에 숨겨온 돌멩이를 꺼내 계엄군에 던져 부상을 입혔다. 도서관에 가겠다는 학생들이 가방에 돌을 숨겨 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5.18측은 계엄군이 먼저 학생들을 공격했다고 하지만 수사기록에는 분명히 학생시위대가 먼저 계엄군을 공격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계엄군이 쫓아가자 학생시위대는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몰려가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수많은 시민을 결집시켜 파출소를 파괴 방화하고 경찰관들을 폭행했다. 이는 각본이 있는 행동으로 보인다.  


공수부대가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화려한 휴가’라는 암호명으로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를 비롯하여 경상도 군인들이 대검을 가지고 전라도 여인의 가슴을 도려내고 머리 껍질을 벗겨 매달아 놓았다는 식의 유언비어들이 사람에서 사람의 입으로 전달되는 동안 확대되어 나돌았고, 이에 관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경상도 사람들을 집단으로 구타하여 살해했고, 경상도 차량들을 보면 불태워 버렸고, 경상도 사람이 운영하는 상점을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7여단이었고, 7여단의 주둔지는 전북 금마, 여단 병력의 40%는 호남출신이었다. 유언비어는 모두가 거짓이었고,  광주시민들에 내재해있는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증폭시키려고 제작된 고도의 심리전 전술로 작성-유포된 것들이었다.

유언비어에 자극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여기에 더해 평소에 사회를 뒤집어보고 싶었던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으로 대표되는 소외계층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삽시간에 배수 단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파출소들이 수도 없이 파괴-방화되고 경찰들이 매 맞고 인질로 잡히는 등 경찰력은 단 두 시간 만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에 다급해진 전남경찰과 전남도지사는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은 시내로 나가 길목을 지키면서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을 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공수부대를 상대로 화염병을 던지고 옥상에 올라가 역기와 화분을 머리위로 던진 존재는 시위대였고, 시위대의 지나친 폭력이 계엄군의 반적용을 유도한 것이다.


시위대의 요구는 김대중 석방,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 계엄령 해제 등이었다. 이러 요구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의 요구였고, 이 요구는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내각을 일거에 전복하려는 요구들이었다. 광주는 폭력, 방화, 살인이 난무하는 광란의 도시였다. 거리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방화되어 광주시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는 시위대가 계엄군을 상대로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인 살육전을 벌였고, 수십 개의 파출소, 도청의 6개 부속건물, 세무서, MBC, KBS 등 공공건물에 대한 무차별한 파괴와 방화 작전이 수행됐다.

계엄군이 교외로 나간 5월22일부터는 시위대가 점령한 광주시와 시위대가 점령한 17개 시군을 연결하기 위한 공격과 6회에 걸친 교도소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해방”을 시키라는 지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28명으로 집계됐다. 


광주시위의 폭력과 과열성은 5월 19일 밤부터 5월 21일 오후 5시까지에 절정을 이루었다. 광범위하게 널려진 파출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하고 계엄군을 조롱하면서 감정을 유발하고,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정렬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장갑차, 군용차, 대형 화물차, 버스를 기발한 방법들로 계엄군을 향해 돌진시켰다. 돌진차량 운전수를 잡아보니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나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다 한다. 이러한 공격들은 총알보다 더 공포스러운 살인공격이었고,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지휘한 지도부가 기록에는 없다. 이러한 공격들이 과연 지도부 없이 시민들이 알아서 한 행동일까? 광주시에는 5월 22일에야 비로소 광주유지들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등장하여 무기 회수를 주도했고, 이에 병행하여 김창길(22세 대학생)이라는 온건파가 주도하는 ‘학생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 졌으나 이후 3일간 이들 간에는 무기반납을 놓고 벌이는 강온파 간의 대립이 연속됐다. 5월 25일부터는 강경파인 김종배(26세 대학생)가 김창길 위원장을 제치고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됐고, 학생수습대책위는 시민군 지휘부가 됐다. 이때 화려한 휴가에서 시민군 대장으로 등극한 박남선(26세, 골재운반 화물차 운전수)은 시민군 지휘부의 상황실장 자리를 맡았고, 5.18 최고의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겨우 대변인 자리를 맡았다. 상황 기록들을 보면 5월 25일 이전, 윤상원과 박남선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는다. 


비록 겉으로는 나타나있지는 않았지만 광주에는 숨어 있는 지도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강력한 심증을 갖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 중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38개 무기고 동시 탈취다. 시위대가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사실에는 ‘불법’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고, 이제까지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고가 탈취된 과정을 보면 여기에는 분명히 지휘부가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일반 시민들은 무기고 옆길로 걸어 다니면서도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5월21일 아침 9시. 아시아 자동차 업체에 모인 600명은 300여 대의 차량에 시민군을 태워가지고 17개 시군에 널려있는 44개의 무기고를 향해 38개조로 나뉘어 달려갔다. 광주시로부터 100 여 키로 떨어진 곳들도 많이 있었다.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38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것은 위치를 미리 파악한 군사작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38개 무기고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종합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는 간첩 말고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무기고 탈취과정은 5.18에 간첩이 개입했다는 심증을 갖게 하는 데 가장 설득력 있는 대목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5월 21일 08:00시, 광주 톨게이트에서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무전기와 공용무기가 탑재된 위엄 있어 보이는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하자마자 이 지프차들을 모두 몰고 방위산업 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직행했다는 점, 그리고 아시아 자동차에서 군용트럭을 탈취해 그 군용트럭을 몰고 무기고로 갔다는 점이다. 14대의 지휘용 지프차는 어마어마한 수량이다. 이를 본 아시아자동차 직원들은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 없이 차량들의 열쇠를 내주었을 것이며, 44개 무기고에서는 지휘용 지프차와 군용트럭을 보고는 역시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고 생각하여 무기고 문을 순순히 열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러는 위압감에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20사단 지휘부가 몇 시쯤 톨게이트를 지날 것이라는 군 내부의 극비 정보를 알아내 가지고 위와 같은 연속작전을 편 것이다. 이런 작전은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작전은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광주작전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국민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경찰과 정부군을 향해 발포한 것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이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5.18측은 5월 21일, 13:30분경에 도청 앞에서 군에 의한 집단발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당방위로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향해 발포했다고 항변한다. 과연 무엇이 사실인가? 수사기록을 보면 도청 앞 발포는 9번째 발생했던 자위용 발포였다. 그 이전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지휘관들이 6차례에 거쳐 발포를 했고, 시민군도 1회의 발포를 했다. 5월 21일 이전에 이미 시위대에는 26정의 카빈과 7정 이상의 M-16이 있었다. 계엄군이 없는 지역에서 수없이 발생한 사격과 시체들은 아마도 이들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다.

가장 치열했다는 5월 21일,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사망한 민간인에 대한 통계는 33명, 3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자상, 자동차 전복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계엄군은 오직 M-16소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 총상은 계엄군에 의한 총상이 아니라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꺼내온 총들일 가능성이 높다.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70% 이상이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쏘는 불순분자들이 시민군 속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사람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경에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첫 발포를 했고, 거기에는 발포 명령자가 있을 것이지만 단지 규명이 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논리와 군대상식에 기초하지 않은 질 낮은 주장일 뿐이다. 5월 21일 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면으로 나오더니 그들 중 한 대의 장갑차가 도청 앞을 지키고 있던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여 병사 1명을 깔아 죽였고, 1명에 중상을 입었다. 이러한 차량공격이 그 후 세 차례나 더 계속됐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은 그야말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돌진차량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도청 앞 발포였다. 이 이외에도 5월 21일 아침부터 오후 5시 3공수가 전남대를 철수할 때까지에는 6.25 고자쟁탈전을 방불할 만큼의 밀리고 미는 식의 교전과 쌍방 발포들이 있었다.

특전사 10개 대대가 광주시를 철수할 때 철수로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무장 시위대가 사격을 가함으로써 광주시에서는 정규군과 정규군 사이에 벌어지는 정도의 교전들이 이어졌다. 누구를 위와 같은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발포를 놓고 5.18측은 발포명령자가 전두환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공수부대 대신 정규군인 20사단을 투입시켰더라면 처음부터 위협사격을 했을 것이다. 공수부대는 과도하리만큼 민심을 다치지 않도록 억제되고 통제되어 왔기 때문에 발포에 대한 자제력이 군으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강했고, 바로 지나친 자제력이 광주 전투를 필요 이상으로 키웠다고 생각한다.

공수대원들은 미국 헤리티지 연구소의 분석가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듯이 끝까지 시민군을 조준하지 않고 위협사격 차원에서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5월 21일 탈취한 무기는 2개 연대 규모의 것이었다. 카빈, M-1, 기관총 등 5,403 대,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이 탈취됐고, 이들 779대는 군용으로부터 탈취한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로 구성됐다.  

                        

광주로 상품을 나르는 상인들이 없어지자, 식료품과 생필품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간들이 지속되면 광주시민들의 고통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거기에 일부 무장 시위대들은 시민들을 협박하여 금품을 뜯고 가족 단위로 살해하고 돈을 뜯어가고 방을 빼앗는 등 광주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기록을 보면 계엄군은 이러한 광주시민들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덜어주기 위해 노심초사했으며 그 결과 5월27일 새벽 극비의 특공대식 작전을 폈고, 이로써 무법천지 광주에는 다시 치안질서가 확립된 것이다. 이런 극비 정보마저 새어나가는 바람에 탈환작전 시 불필요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TNT 제거작업 과정에 웅변돼 있다. 시민군은 8톤 트럭 분량의 TNT를 도청 지하실에 저장하고 거기에 뇌관까지 연결해놓았다. 폭발하면 광주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그런 분량이었다. 시민군은 이를 폭파하여 목적을 달성하게다고 협박했지만 계엄군은 목숨을 내놓고 잠입하여 10여 시간에 걸쳐 뇌관을 제거해주었다. 시민군과 계엄군 중, 누가 광주시민을 더 사랑하였는가?


광주시위대는 헌법기관인 경찰과 계엄군에 폭력을 먼저 행사했고,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에 불복했으며,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바로 이런 것이 내란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의 재판부는 5.18을 김대중에 의한 내란음모였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광주시위대를 헌법기관에 준하는 존재라 판결했고, 헌법기관으로서 이를 진압한 계엄군을 국가폭력집단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광주시민에 하루라도 빨리 질서를 찾아주려고 세웠던 조기진압 계획을 놓고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경우 내란목적에 불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저지른 신군부의 행위이므로 재진입작전은 내란을 목적으로 하는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5.18을 신군부가 일으킨 것이라 판결했지만 수사기록을 보아도 신군부와 5.18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수사기록을 보아도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주체는 신군부가 아니라 계엄사-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 통수체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신군부가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것은 대통령과 내각에 공포심을 갖게 한 행위이기 때문에 헌법기관을 협박한 행위가 됨으로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무장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광주시는 진압하지 말았어야 했고,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차단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의 판결인 것이다. 이러한 억지의 인민재판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 헤리티지 재단은 '광주사태재조명'(Kwangju incident revisited) 이라는 제하에 광주사태를 폭동, 반란, 봉기(Riot, Uprising)으로 규정했고, 과가가위 위원장인 이영조는 광주사태를 '민중반란'으로 규정했다.



                                             5.17이란?


10.26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맞이하여 국민은 북한의 남침을 가장 걱정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11월 3호 청사에서 남한에 전민봉기를 유도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이어서 12월20일에는 남조선에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재하지도 않던 ‘신군부’라는 말은 이때 김일성이 최초로 사용한 단어였다. 4월 21일, 사북탄광 노동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노동자를 포함한 전 계급이 들고 일어나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했다.

1980년 3월부터 5.18직전까지 색출한 간첩사건만 7건, 남침징후 첩보 5건에 이어 5월 10일에는 일본내각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정보까지 입수되어 정부와 군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반면 안보에는 관심조차 없는 3김시대의 정치권과 재야세력으로 불리는 불순세력들은 때가 왔다며 최규하 주도의 과도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몰아치면서 즉시 퇴진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이에 최규하 정부는 연내에 헌법개정을 마치는 대로 정권을 이양할 것을 수차 약속하면서 재야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학원자유화를 허락했고, 2월 29일에는 윤보선, 김대중, 지학순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7명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하는 등 유화조치들을 취했다. 재야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서울의 봄’, 신나는 계절이었던 것이다.

김종필은 공화당,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뛰쳐나와 학생세력과 노동자세력을 이끌어온 재야세력을 결집시켜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 규모로 확산됐고 이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7일, 제1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전국내각구성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며 정부를 압박했고, 학생 등을 향해서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김재규도 김주열이나 김상진 못지않은 애국충신”이라며 과격시위를 선동했다.


이어서 김대중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했다. 5월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고, 당시 내무장관은 소요진압이 경찰의 범위를 넘는다며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 22일을 기하여 군인,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무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정부가 전복되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 남침조건을 마련하도록 해줄 것인가, 아니면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과 이들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 조직을 분쇄할 것인가! 최규하 정부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정부의 선택이 바로 5.17 조치였던 것이다.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 이후 선포됐던 지역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을 배치하는 한편, 5.17 자정을 기해 이른바 김대중 내각을 구상했던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음모자들을 체포하고 학생 주동자들을 구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규하 정부와 계엄당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국은 무법천지가 됐을 것이고, 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은 제2의 6.25남침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관들은 당시 북한의 위협은 별로 없었으며,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민에 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폭동이고,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관심법)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내란을 위한 폭동이 되는 것이라는 우격다짐의 판결문을 작성했다. 아울러 폭력으로 국무위원들을 협박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으로써 국방장관과 국무총리의 계엄지휘권을 배제하고, 바지 같은 대통령을 간접정범으로 이용하여  내란을 했다고 판결했다. 참으로 이해조차 되지 않는 인민재판이요 관심법 재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마디로 김대중이 이끄는 세력은 민주화세력이기 때문에 그들이 5월22일 전국소요를 일으킬 수 있도록 가만 두었어야 했다는 판결인 것이다

댓글목록

민사회님의 댓글

민사회 작성일

비밀글 댓글내용 확인

예장미님의 댓글

예장미 작성일

지만원 박사님  성경 시편의 34;19 에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는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위하여  고난  당하시는  지박사님을  하나님께서는 꼭 도우실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거짓이란 단어가 222건나오는데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거짓이며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21: 8 에서는  예수님을 믿는자 일지라도  거짖말 하는 자는 유황과 불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유황과 불은 지옥입니다 
하나님역사와 세상역사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데 역사를  거짓되게 한자들에게  어찌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없겠습니까  ?
아비의 죄를 찾되 삼사대 까지라도 찾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언젠가는 이루어져  백성들이  김대중 노무현  거짓됨을  반듯이  깨달을때가 올것입니다
지박사님  힘내세요

(구)자유게시판(2012이전) 목록

Total 18,634건 339 페이지
(구)자유게시판(2012이전)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8494 최근글 「이것이 호남인들의 자존심!!」은 3년半 묵은 … 댓글(7) 한글말 2011-01-10 1991 21
8493 이런 감사원장을 보고 싶다. 댓글(4) 東素河 2011-01-10 1952 22
8492 참으로 한심한 박사모 조속들! 댓글(3) 장학포 2011-01-10 1996 28
8491 湖民聯 결성(퍼온글) 댓글(4) stallon 2011-01-10 1984 22
8490 좌빨시민단체 맥아더동상철거하겠다 시위할때 인터넷에 올라… 댓글(2) 홍팍퇴치 2011-01-10 1879 13
8489 구제역으로 살처분되는 소와 돼지에 군침 흘리는 김정일 … 댓글(3) 발해의꿈 2011-01-10 2066 30
8488 보기드믄 꼴불견 달마 2011-01-10 1922 23
8487 전학생은 홍어녀 시리즈(가입기념) 댓글(1) 메콩 2011-01-10 2526 33
8486 대한민국에서 박지원으로부터 여유로울 정치인은 한사람도 … 댓글(2) 김찬수 2011-01-10 2012 38
8485 김영삼의 간교한 거미집 재산환원법 댓글(5) 東素河 2011-01-10 2564 54
8484 법무부에 전화했습니다. 댓글(5) 우주 2011-01-10 2309 48
8483 金大中 親北 개드립 댓글(1) 대마왕 2011-01-10 1801 12
8482 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 (6부) 댓글(4) 정재학 2011-01-10 1975 22
8481 노무현이 저지른 만행을 다시 보니 피가 거꾸로 솟네요.… 댓글(2) 우주 2011-01-10 1964 27
8480 좌파/종북 세력에 대항할 구국청년단의 창설을 제안한다 댓글(3) 검은바다 2011-01-10 1841 26
8479 그냥 항복해 개자식들아. 깡패조직은 "쩐" 없으… 오뚜기 2011-01-10 2065 42
8478 우파들의 좌파/종북 세력에 대항하는 홍보 전략에 대한 … 댓글(2) 검은바다 2011-01-10 1698 18
8477 위키백과에 실린 "광주민주화운동"을 민중반란으로 고쳐줍… 댓글(6) 검은바다 2011-01-10 2949 31
열람중 5.18이란? 댓글(2) 지만원 2011-01-10 2243 36
8475 문화재청에 정식 민원 신청한 내용 육군예비역병장 2011-01-10 1812 6
8474 박사님! 예비역2 2011-01-10 1830 18
8473 [re]정동기의 절제 없는 욕심 댓글(4) 달마 2011-01-10 1822 19
8472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의 '북폭' 댓글(5) 비바람 2011-01-10 2090 34
8471 연천땅굴을 절개하고 종북반역자들을 처단하라!!! 댓글(1) 비전원 2011-01-09 1907 23
8470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댓글(2) 민사회 2011-01-09 1795 28
8469 전교조의 끊임없는 공산사회주의 빨치산 교육 댓글(2) 김찬수 2011-01-09 1783 16
8468 연북갤 공지사항 김군 2011-01-09 1820 20
8467 우리민족끼리 폐쇄 댓글(1) 김군 2011-01-09 1889 18
8466 믿을 수 없는 박근혜와 멍청한 정치개들 댓글(1) 헬랠래 2011-01-09 1877 27
8465 김대중 군복무 조작 사기설 댓글(2) systemgood 2011-01-09 2574 9
게시물 검색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 대표자 : 지만원 | Tel : 02-595-2563 | Fax : 02-595-2594
E-mail : j-m-y8282@hanmail.net / jmw327@gmail.com
Copyright ©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All rights reserved.  [ 관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