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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공산화 통해본 한국의 적화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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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正道 작성일11-01-08 11:55 조회1,99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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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전선 군대의 해체와 남측 정치세력의 소멸

1975년 베트남은 마침내 공산화되고 통일은 달성되었다. 제1차인도차이나 전쟁으로부터 29년, 제네바협정으로부터 21년간의 전화가 꺼졌다. 과연 남베트남 사회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탄씨는 戰勝 축하대회에 참석하였다. 노란별의 붉은 깃발로 장식한 북베트남군대가 행진해 들어왔다. 탄씨는 옆 좌석의 반 티엔 쥰 총참모장에게 물어보았다. “우리의 유명한 제1. 제5, 제7, 제9사단은 어디로 갔소?” 이 해방전선의 사단들은 캄보디아에서 론놀 군대와 싸워 승리한 역전의 군대였었다. “군은 이미 통합되었소.” 탄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제부터 탄씨는 하노이에 대한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옛 사이공 정부의 관료들과 군 장병들의 재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들은 정치재교육을 위해 수용소로 수감되었다. 탄씨의 두 형들도 탄씨의 설득에 의해 재교육사무소로 안치되었다. 그러나 6월에 집을 나간 그들은 8월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사이공 임시혁명정부는 하노이에서 파견된 차관급 인사들에 의해 하나 둘 부처들이 장악되기 시작했다. 탄씨가 일하는 법무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탄씨가 사용하던 두 대의 차량 중 한 대는 해방군에 의해 차압당했다. 탄씨는 76년 7월에 남북통일에 의한 중앙정부의 수립이후, 법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특권과 각료대우의 수당은 계속 받아왔다. 민중의 생활은 어려웠다. 배급은 불규칙적이었고, 대부분의 필수품은 암시장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II. 일방적으로 해체된 남베트남 정치세력들

탄씨가 북베트남에 대해 결정적 불신감을 가지게 된 계기는 1975년 11월에 개최된 통일에 관한 남북회의에서였다. 7월에 사이공에서는 임시혁명정부, 해방전선, 평화세력연맹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남베트남정부의 합법적 승인을 하노이와 유엔에 요구했으나, 8월에 탈랏트에서 제24차 중앙위원회 총회를 열었던 하노이 당국은 조기 통일과 사회주의를 촉진시킨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남측은 연방제 실시를 통한 신중한 통일논의를 원했고, 북측은 남측의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속한 통일을 촉구하면서 사회주의식 흡수통합을 결의한 것이다. 11월 15일, 사이공에서 열린 남북대표단 회의에서 사전의 각본에 의해 진행되었다. 회의에서 해방전선이나 임시혁명정부를 통일 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탄씨는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저들은 우리들을 어둠에서 어둠으로 장사지내려 하고 있다. 장송 나팔도 불지 않고 북소 리도 울리지 않은 채 장례식도 없이 조사(弔詞)도 읽지 않은 채 ...”

남북회의로부터 1주일후 “최후의 만찬회”가 나이트클럽 렉스호텔에서 열렸다. 해방전선, 임시혁명정부, 평화세력연맹의 지도자급 30여명이 참석하였고, 하노이에서 파견 온 기관장들은 모두 불참하였다. 이곳이 한군데 모여 얼굴을 마주 보는 마지막 밤이었다. 모두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석한 모두는 해방전선과 임시혁명정부가 이렇게 일찍 사망신고를 내어야할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식사가 끝난 후, 모두들 입을 다문 채, 흩어졌다.

76년 4월 25일, 남북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국회에서 국명을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하며 수도를 하노이로 했으며, 사이공을 호치민시로 바꾸었다. 남쪽의 임시혁명정부는 여기에서 물리적 수명이 완전히 끝났다. 중앙정부 다음으로 대중조직인 조국전선이 결성되었다. 조국전선은 북쪽에 있었으나, 이제 전국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하여 해방전선을 흡수하자는 복안이었다. 본회의가 사이공의 독립궁전(옛 대통령궁전)에서 열려 조국전선의 중앙위원회가 선출되었다. 해방전선은 조국전선에 흡수 당했다. 남쪽을 지배하려고 날뛰는 북쪽의 태도에 대해서 탄씨와 해방전선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당해 버렸다.

그런데 해방전선이나 임시혁명정부, 평화세력연맹 사람들은 그후 어떻게 되었나? 탄씨는 “소리도 없이 소멸 당해 버렸다”고 증언한다. 이들은 정치적 생명이 말살당했고, 이들의 존재마저 잊어버리도록 하라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여러 집회, 결의, 신문발표에서 가능한한 임시혁명정부, 해방전선, 평화세력연맹은 긴 투쟁에서 전혀 공헌이 없었던 것처럼 하고, 이들의 이름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말살하고 승리는 오직 공산당만의 힘에 의해 달성된 것처럼 하려고 하였다(p.284). 왜 그렇게 되었나? 그것은 북쪽 공산당 지도자들의 남쪽 3대 정치세력이 부르조아 출신이었기에 대한 이들에 철저한 불신감 때문이었다. 남쪽의 3대 정치세력 중 어느 누구도 정부와 당의 중요 요직에서 완전히 배체되었다.

III. 통일노선에 대한 해방전선과 하노이의 견해 차이

탄씨의 증언에 의하면, 73년 평화협상 때와 75년 사이공 함락이후의 상황이 전혀 달랐다고 한다. 파리협정에서 미군의 철수와 남베트남 인민의 자결권을 국제적으로 인지시키는데, 의견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의견 차이는 사이공이 함락되면서였다는 것이다. 기본적 차이는 임시혁명정부와 해방전선의 역할, 국민화해와 협력 정책, 특히 기본적으로 남쪽 주민의 자결권에 대한 자세에서 하노이와 견해 차이가 커졌다. 남쪽의 자결권이란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북쪽의 간섭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쪽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는 점이다. 탄씨와 해방전선은 남베트남을 5개의 자치지역으로 구성된 하나의 연방을 수립하는 달콤한 꿈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하노이 공산당 지도자들은 베트남 전 지역에 권력을 배치하고자 하였고, 권력을 당의 손 안에 집중시켰다. 탄씨는 이런 권력에 대한 욕심은 호치만의 遺言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공산당은 북쪽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1954년 제네바협정후 북쪽은 독립국가가 되어 공산당 조직도 크게 확대되었다. 제네바협정 당시 수천명이던 공산당원들이 20년이 지난 74년에는 약 100만명이 되었다. 당원은 대부분 북쪽 사람들이었다. 북쪽은 공산당 정부를 수립하고 이 20년간 모든 분야에서 청년을 양성하고, 행정 간부, 당 간부, 경제분야에서 간부를 양성해 왔다. 남쪽이 제네바협정이후 75년까지 겨우 1만명 정도였다. 그 이유는 끝없는 전쟁의 와중에서 공산당 간부나 전문가를 양성할 여유가 없었다.

하노이가 조속한 통일을 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탄씨의 증언에 의하면, 납북이 조건이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남쪽에 시간을 주게 되면 남쪽이 결속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북쪽에게 권력의 분할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해방전선의 강령에 명시된 민족민주혁명의 단계를 뛰어 넘어 한꺼번에 사회주의 건설의 단계로 이행한 것이 되고 말았다. 권력 장악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남쪽이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북베트남 정규군이 대부분 사이공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미줄 처럼 쳐진 공안당국의 감시만도 모두 북쪽 출신자로 채워졌다. 그리고 해방전선이나 임시혁명정부 또는 평화세력연맹 등 남쪽 자체의 조직은 하나 하나 차례로 해체되었다.

탄씨가 법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76년 개인의 자유에 관한 3개의 법률안을 입안하여 혁명정부로 하여금 채택하도록 한 것이 그의 인권에 대한 공헌이라고 술회한다. 3개의 법률이란 ①주민의 체포와 구금에 관한 것, ②재판의 조직에 관한 것, ③적용할 형에 관한 법률이었다.

IV. 공산화이후 고통에 빠진 베트남 민중들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일반 민중의 생활은 어떻게 변했으며 공안 당국의 억압 실태는 어떠했을까? 일반 주민들은 공포속에 살았으며 언제 체포 당할 지 알 수 없는 삶을 이어갔다. 최초의 공포감은 재교육수용소로 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미개척지를 개간하기 위해 “新 경제구”로의 주민 강제이동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은 기업이나 상점 주인을 대상으로 하는 재교육이 실시되었다. 월급이 적었고 물가는 계속 치솟았고, 무엇이든 돈이 되면 팔아서 먹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지역 당국자들의 착취와 압박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여러 가지 정치 집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정치집회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주민의 관리와 감시에 있었다. 또 주민들을 이데올로기로 세뇌하려고 했다. 연설과 고육을 담당하는 정치간부들은 대부분 북쪽 출신자들이었는데, 그들의 수준은 낮고 무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식할수록 더 떠들고 연설은 길어졌다.

신 경제구의 개발은 도시주민을 강제적으로 이주시키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재산을 가지고 이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신 경제구는 사람이 거주할 환경이 되지 못했던 곳으로 주로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산악지방이나 미개간지인 델타지방이다. 단지 곡괭이과 삽을 가지고 나무를 베고 빈터에 개간을 하도록 강요 당했다. 상업의 국유화로 자리를 잃은 상인들, 부르조아, 그리고 옛 사이공 정부 공무원과 군인가족으로 남편이나 아들과 같은 일손을 재교육수용소에 뺏겨 직업도 없는 채 내 팽개처진 사람들이었다.

남베트남에서 일자를 찾기는 아주 힘들었다. 모든 직장은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기에, 기업이나 관공서의 책임자 또는 공안간부 등에게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 신 경제구에 가기 싫은 자는 돈을 써야 했으며, 특히 남편을 재교육수용소에 빼앗긴 마누라는 지구 간부에게 울면서 몸을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p.247)

신 경제구에 보내진 자는 남베트남에서 수백만명에 이르고 호치민시(옛 사이공시)에서만 100만명에 이른다. 정부는 최초 3개월정도의 식량을 지급해주며 판자집 같은 형편없는 집을 지어준다. 개간한 토지에서 생기는 수익을 자기의 소득으로 가져가게 되었으나, 곡괭이와 삽만 든 상인출신자들이 어떻게 적응할 수 있겠는가? 결국 많은 도망자들이 생기게 되는데, 자기 집에 돌아가 보니 북쪽 출신자들이 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자기는 옛날 자기집 앞 길가에서 잠을 잔다. 그들은 입은 옷 한 벌 밖에 없다. 아이들은 식당앞에 떼를 지어서 손님이 먹고 남긴 음식을 다투어가며 얻어먹고 남은 것은 부모에게 가져간다. 이렇게 신 경제구는 부르조아아 푸치 부르조아의 유배의 땅이 되고 말았다. 시민들은 하루종일 강제이주와 추방의 공포 속에서 살아갔다.

남쪽 주민들이 불만이 고조되자, 신 정부는 옛 사이공 정권의 고급관료나 장군들 또는 고급장교를 북쪽에 있는 수용소로 옮겼다. 중국 국경지대에 가까운 산악지대로 이동시켰다. 수용소에서의 식사는 하루 쌀밥 한 그릇에 불과했다. 6개월에 단 한번 외부로부터 소포의 유입을 허락받았다. 외부로 편지를 허용하는 것도 6개월에 단 한 통이었다. 최초 4년간 가족과의 면회도 일체 금지되었다. 북쪽 수용소로 가려면 특별허가증이 필요한데, 총비용이 2,000돈 정도로서 평균 월급이 50-60돈이라고 하는데 불가능했다. 재교육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실제로는 정치범 취급을 받았다. 매일 반복되는 굴욕적인 취급과 학대가 반복되었다. 도안반토아이씨가 쓴 <베트남수용소열도>(1979)에는 1978년에 수감된 인원이 80만명이 넘는다고 썼다.

V. 착취와 억압 그리고 부패상

학교에서도 극심한 차별이 존재했다. 현 정부에 협력적인 가정과 옛 정부 공무원, 옛 군인의 자제 명단이 있다. 이것은 초중고학교 입학에 조작되고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다. 반장선거도 간부의 자제가 당선된다. 선생들도 간부자제들에게 잘하라고 위로부터 지령을 받는다. 옛 정부의 자제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초등학교부터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가르치고 있었다. 고급간부의 자제들을 위하여 특별한 학교가 만들어졌다. 공산당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공산당간부 집에 태어나서 당 간부가 손수 훈련하고 교육시킨 세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탄씨의 증언에 의하면, 북쪽에서 온 사람들은 남쪽 주민을 압박하는 행위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汚職에 빠져들었다고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북쪽 사람들이 남쪽에 와 보니 전혀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미국의 원조 덕분에 물자는 풍부했고 사람들은 생활의 편리함을 즐겨왔다. 남쪽에는 편리한 것들이 모두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가지려고 했다. 트란지스타, 라디오, 자전거, 다음은 냉장고, 다음은 TV, 혼다 오토바이였다. 그들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자연히 주민으로부터 약탈하든가, 국가의 재산을 강탈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부패가 생겨났다. 부패의 실상은 사이공 정권 때보다 훨씬 심했다. “사이공 정권때의 사람들은 부패했다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일정한 방법과 규칙이 있었고 노골적이지 아닌 방법인 배려가 있었다. 그런데 신 정권의 사람들의 오직과 부패는 야만스럽고 체면 불구하고 채갔다.”(p.261).

VI. 정계 은퇴와 탈출

탄씨는 통일베트남 신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목도하고 과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깊은 실망감과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1976년 탄씨는 모든 정치와 인연을 끊고 신 정부와 접촉을 끊기 위해 호치민시(옛 사이공시) 교외로 어머니가 사는 곳으로 은퇴했다. 은퇴생활도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탄씨에게 견디기 힘든 것은 집에 있어도, 거리를 거닐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비난과 원한의 말뿐이었다. 어머니도 그를 심히 꾸짖었다.
 
“네가 돌아오고 후부터 이 나라는 수용소가 되었다. 남쪽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 자는 바로 너야. 가족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남쪽 사람들이 이렇게 괴롭게 된 것은 모두 네 책임이야!” 옛날 친구들, 지식인들이나, 상인, 실업가였던 사람들도 탄씨를 백안시했다. 이런 생활은 탄씨로 하여금 견디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1977년 탈출을 결심한 탄씨는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고무회사 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메콩 델타의 처갓집에 강을 오가는 배를 구입하여 목재와 목탄의 운반업을 시작하였다. 2년의 준비후에 결국 2년뒤 1979년 조국을 탈출하게 된다. 탄씨가 보트 피풀이 되어 인도네시아 가란섬으로 탈출하여 드디어 프랑스에 다달았던 것은 1980년 3월이었다. 그는 미국 CIA요원으로부터 미국 망명을 권고 받았지만, 그 청을 거절하고 파리로 망명하였다.

VII. 종합적 결론

하노이 공산당이 주도한 무력통일에 의한 베트남전쟁의 비극적 종결과 베트남 공산화과정은 공산당의 정체와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준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대 역사적 사건이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가치관을 가진 세력에게 서방세력이 패배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노이와 북측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 민족해방전선, 통일과 독립이란 미사여구의 용어로 남베트남 대중들을 유혹하고 매료시켜 이들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마침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게 된다. 베트남 대중들은 1945년 종전이후 근 30년동안 독립과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싸웠는데, 그 싸움의 최전선에 소위 해방전선(베트콩)에 참가한 남베트남 사람들의 인간으로서 견딜수 없는 막대한 희생과 엄청난 봉사가 있었다는 것이 탄씨가 증언한 <배반당한 베트남전쟁>에서 생생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된 남베트남에서 하노이 공산당이 한 첫 과업은 민족해방전선이 이제까지 이룩한 모든 功勞의 말살과 공로자의 거세(去勢)였다. 탄씨는 “하노이 공산당이 호치민의 유언을 배신한 것”이라고 통탄하지만 그것은 공산주의 이념과 공산당의 정체를 제대로 몰라서 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마치 이것은 레닌이 살아있었다면, 스탈린식 독재는 없었을 것이라고 변명하는 것과 같다. 물론 표면적으로, 하노이 공산당과 해방전선과의 관계는 전쟁중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러나 해방전선과 하노이와는 궁극적 목표에서 달랐던 점에 있다. 해방전선이 외세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쟁취하여 어느 정도 자치와 자립을 조건으로 한 남북연방제를 통한 느슨한 통일노선을 추구한 반면에, 하노이 공산당은 외세로부터 인민들을 해방시켜 남북연방제로 가는 것은 과도기적 단계로서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그 시기를 연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단축시킬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런 공산당의 핵심 전략을 탄씨와 해방전선의 수뇌부들은 순진하게도 전혀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하노이가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적 과업에 우선적으로 동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탄씨와 같은 프랑스에 유학할 수 있었던 인텔리 해방전선 지도급 인사들은 공산주의에 철저하게 세뇌되기가 어려웠을지 모른다.

어쨋든 베트남전쟁에서 공산당이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은 하노이가 民族主義의 外皮와 슬로건을 내걸고 내용이야 어찌되었건 형식상 그 길을 집요하게 꾸준히 걸어왔기 때문이다. 베트남 공산주의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산주의를 믿는 농민들이다. 서구에서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발생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약간 다르다. 유럽의 공산주의는 산업문명 속에서 발생하였다. 베트남, 북한, 중국 등의 아시아의 대중은 농민이다. 그리고 그 사회는 반식민지 아니면 식민지 또는 봉건적인 상태에 있었다. 아시아의 공산주의는 이런 사회의 역사적 모순속에서 발생하였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은 무슨 신바람이 났는지 서둘러 동유럽을 방문하여 동구권 지도자들과 은밀하게 협의하였다. 베트남에서 적용된 무력통일에 의한 공산화 과정의 秘法은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父子에게 속속 전달되었다. 한국에서 흔히 공산화 전단계로 언급되는 ‘민주민족전선’이라는 것도 실은 베트남전쟁의 해방전선측에서 사용한 전략과 별로 틀리지 않는다. 오늘날 북한 관변 매체와 한국사회의 친북좌파들의 주장과 그들의 문건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민족공조’, ‘우리끼리’ 등의 현란한 구호와 용어도 실은 베트남전쟁에서 하노이 공산당과 해방전선측에서 교묘하게 사용하여 민중들을 선동하여 톡톡히 재미를 본 복사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혹에 약하고 감성에 쉽게 넘어가는 일반 민중들을 설레게 하는 그 마술적 위력은 대단하다.

베트남전쟁 당시의 해방전선(베트콩)과 하노이 공산당의 관계를 잘 살펴보면, 오늘날 평양의 김정일과 남한의 친북좌파와의 관계와 그 미래의 향방을 예측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김일성의 主體사상과 김정일의 先軍사상에 동조하는 남한의 골수운동권과 친북좌파들이 베트남전쟁이후 해방전선이 부르조아 출신이라는 점을 핑계로 해서 철저하게 숙청당했던 비극을 귀감(龜鑑)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탄씨와 해방전선 지도부들은 남북연방제가 실시될 것으로 낙관했었지만, 하노이 공산당의 조속한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집착과 권력독점욕에 의해 항의도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허망하게 무너졌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남한사회에서도 연방제가 가능한 것처럼 외쳐대는 좌편향 인물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은 가치관, 체제, 이념이 다르기에 연방제는 불가능하다. 만약 남북연방제를 실시해도 상당한 고통과 엄청난 혼란이 수반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6.15정신을 계승하여 국가경축일로 삼자고 10.4공동선언에서 합의하고 남북연방제로 가자고 주장하는 김정일과 북한 통전부의 책략에 춤을 추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베트남전쟁의 共産化 비극은 김일성-김정일의 대남공작으로 인해 赤化危機에 처한 한국의 현실에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교훈인 것이다. 베트남전쟁은 동화속의 이야기도 아니고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만도 아닌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전쟁은 결코 끝난 것도 아니고, 우리들의 反面敎師가 되어 가슴속에 깊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자료출처;베트남전쟁과 한국군

댓글목록

야매인생님의 댓글

야매인생 작성일

미국의 베트남전과 베트남전 미군철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좀 좋은 정보나 의견을 피력해 주시면 감사드려요...바쁘시면 담에라도...

새역사창조님의 댓글

새역사창조 작성일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주 중요한 자료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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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4 우파를 자처하며 차기대선을 준비하는 자들에게 묻는다 댓글(5) 케리 2011-01-08 1673 17
8443 더늦기전에.... 케리 2011-01-08 1948 12
8442 나도 한수 - 김정일개새끼 김정은개새끼 댓글(5) systemgood 2011-01-08 1914 14
8441 무상급식할 돈으로 교과서를 황금으로 만들자 댓글(7) 조동수 2011-01-08 1877 17
8440 ◆ 김대중 역적질 유튜브에 ~! 댓글(3) 백수건달 2011-01-08 1959 14
8439 DJ정권의 IT산업 진단...과연 최대 치적인가? 댓글(1) 야매인생 2011-01-08 1877 10
8438 빨갱이 돈줄역활 하는 개성공단 을 이렇게 끊어버리자 댓글(10) 오뚜기 2011-01-08 2079 45
열람중 베트남공산화 통해본 한국의 적화위기 댓글(2) 正道 2011-01-08 2000 26
8436 게시글에대한 메너! 댓글(5) 장학포 2011-01-08 1801 27
8435 미국의 핵우산 대한민국 그 명분과 실리는? 댓글(2) 야매인생 2011-01-08 225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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